‘풍성한 삶으로의 초대 – 인도자반’을 지난주부터 시작했습니다. 인도자반 과정 중 1~7과의 내용을 다루는 부분은 아직 풍삶초를 안 하신 분들이 직접 경험하시라고 공유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것을 통해 무엇을 꿈꾸는지를 나눈 서론 영상은 볼 수 있도록 공개해두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왜 하는지 큰 그림과 계획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우리 교회의 발걸음과 목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화요일에 성결대학교 신학부
3학년 수업에 특강을 하러 갑니다. 설교나 목회자 대상 특강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아직 신학교 3학년에 있는 20대 초반의 후배들에게는 무엇을 나눠야 할지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저의 20대를 생각하며 우선 방향을 고민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이번에 그들과 ‘교회론’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교회론이란 쉽게 말해서 이런 것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일까? 어떤 교회를 꿈꿀 것인가? 이 시대에 어떤 교회가 필요할까? 나는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하면, 그것이 ‘교회론’과 ‘목회철학’입니다. 그럼 저에게도 교회론이 있었겠죠? 사귐의교회 교회론은 무엇일까요? 먼저 ‘교회’를 이야기해봅시다. ‘교회’라는 단어에 사용하는 한자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가르칠 교, 모일 회’입니다.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죠. 복음을 가르치는 모임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셨을 때 ‘부르심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나와 이루어진
신자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공동체성’에 좀 더 무게를 둔 표현이죠. 그래서 몇몇 분들은 성경적 의미에 더욱 가깝게 번역한다면 ‘가르칠 교’(敎) 보다는 ‘사귈 교’(交)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교회가 가르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귐의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희가 꿈꾸는 교회론의 본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새 교회를 문화센터처럼 다닙니다. 좋은 강의 하나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배가 오로지
설교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찬양 시작하고도 버젓이 교회에 아무렇지 않게 오고, 설교 끝나고 급한 일 있으면 나가 버립니다. 성도의 교제는 원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각각의 사연이 있는 경우는 이해도 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교회론’이 잘못 정리되어 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교회론이 교회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론은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가나안 성도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설교만 듣거나, 가르침만 듣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교회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충만해지고, 그 사귐을 함께 누리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진정한 영적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특별해서 세상이 흠모할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교회론이고,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사귐의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특강 제목을 <교회는 엄청난 곳이다!>로 잡았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목표를 갖고 나아가면
정말 엄청난 곳이 됩니다. 믿으십니까? 저는 진짜로 믿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문화센터처럼 그저 관리되고 운영되면, 규모는 엄청 큰데 아무런 힘이 없는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우리는 꿈꾸고 그것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첫 걸음, 우리 공동체의 신앙의 첫걸음도 우선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것에 있습니다. 사귐의교회도, 그리고 저부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열정이
가득한 채 개척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부교역자의 시간들을 보내며 완전히 고갈되었고, 교회의 상처 속에 절망하며 몸부림치는 마음으로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광고를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엄마, 저 학교 가기 싫어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그래도 네가 선생인데 가야지.” 어쩌면 저도 주일이 오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던 시간들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직장이 되고, 예배는 업무가 되고, 관계는 형식이 되어버린 모습들을 저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두렵지만
제가 진짜 꿈꾸는 교회를 위한 에너지를 마지막으로 써보자는 마음으로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을 다해서 그 일에 도전해보고 그래도 교회가 여전히 그런 곳임을 경험한다면,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성경에만 있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단념하려는 마음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처음에 함께 했던 몇 명 안 되는 성도들의 모습도, 어떤 면에서는 모두 저와 같이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채워져야 할 마음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회복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며, ‘SLOW CHURCH’라는 계획을 갖고 어떻게 하면 차근차근 교회를 세워갈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건물 없이, 사례비 없이 시작함을 통하여, 어떻게든 일단 흩어지지 않고 생존해보고자 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개척 3개월에 썼던 ‘슬로 처치’라는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일부분만 나누겠습니다. 사귐의교회는 달리지 않습니다. 저도 질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복음을 들고 달려야 할 때가 있을 것이고, 무언가 해야 하는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뭔가 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며 주님을 배우고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슬로푸드가 건강하듯이, 슬로처치가 될 것입니다. 뛰면 앞만 봐야 합니다. 그러나 느리게 걸을 때 주변도 바라보고 뒤도 바라보고 하늘도 볼 수 있습니다.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을 준비합니다. 목적이 아닌 관계를 지향합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 해내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알고 주님 앞에 머물고 싶습니다. 결과가 주는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과정 안에서 진짜 교회의 모습을 찾고 싶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데, 하나님 나라를 어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우리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아닌데, 하나님 나라를 어찌 세상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방황이 아닌, 동행. 주님과 함께 오래 걷고 싶은 마음. 개척 3개월의 풋내기 목사가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저는 지금봐도 이때의 꿈과 지금의 꿈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이때 꿈꾸던 일들이 하나씩 이뤄져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개척하고 처음 경험한 낯선 환경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척 3년 차인 2019년 가을이 되어서야 <구약의 파노라마 1기>를 처음 시작하며, 참여했던 분들에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하고 싶은 특강이 있어도, 과연 누가 얼마나 참여할지 자신이 없어서 못 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 10명이 보여서 이것을 시작합니다.” 담임목사로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과연 내가
이것을 하자고 했을 때, 몇 명이 반응해줄까? 고민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작았기에 그것을 해나갈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하죠. 저희가 그랬습니다. 기쁨으로 참여해줄 10명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까지 인내하며 회복하고 성장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첫걸음은, 뭔가 하려는 마음보다, 먼저 주님을 배우고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을 해나가고자 힘썼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 하나님을 누림의 기쁨을 회복하여, 우리의 내면이 회복되고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나, 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상태의 분들은, 다른 무엇보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교제를 나누며 함께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예배와 공동체 안에 먼저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고, 사랑을 느끼고, 회복이 되다 보면, 하나님이 꿈꾸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하지만, 서서히 부모가 하는 일을 돕고 함께 해나가는 것처럼, 나에게 머물렀던 초점이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헌신을 하는 것도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회복되고, 이제 영적으로 숨 쉴 만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죠. 그래서 저는 보통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에게 되도록 사역을 바로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고백 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나가도 고갈되지 않고, 은혜에 대한 감사로 그 일을 해나가며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 보면, 교인 30명이 되지 않았을 때는 예배에만 집중하는 단계에서 하나님과의 사귐만을 꿈꿨습니다. 그 이후 예배를 다양화하여 세워가고 다른 사역들과 교육들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교회의 규모가 더 커졌고, 이제 목회자 한 사람이 돌볼 수 없는 공동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세대도
다 각자의 모임과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센터와 같이 설교 중심의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모임이라면 100명이든 200명이든 ‘강사’와 최소한의 강연을 준비하는 사람만 있으면 되겠지만... 진짜 교회의 모습으로 끝까지 가려면,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이 있으려면 그것을 위해 함께 헌신할 사람들을 세워야합니다. 목회자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돌볼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많지만, 서로가 함께
예배하는 사람끼리도 잘 알지 못하는, 성경에는 없는 교회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이 맡긴 시대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옥정동으로 이전해 온 이후로 더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개척하면서 생각했던 그 계획에 따라 다음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언젠가 복음을 들고 달려야 할 때가 있을 것이고, 무언가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음을 느낀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승천 이후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 감격을 누리는 것에는 집중하지만, 그 사명을 다하는 것에는 힘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중심으로 예루살렘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8장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를 향한 박해를 활용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흩으십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이 주신 때에 맞춰서 나아가기 위해서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부흥하고 확장되어 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발맞추어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안에서 교회 안에서 장기적인 계획도 세우게 되고, 설교와 예배 중심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되, 한 사람씩을 양육하여 세워가는 일도 하나씩 세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회복된 이들이
그 사랑을 충만히 누리며 사역하여,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세워가는 일들을 계속해나가도록 돕는 교회를 꿈꾸게 된 것입니다. WITH GOD, WITH NEIGHBOR. 하나님와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 저는 여러분이, 개인의 구원과 개인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향해 섬기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성경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함께
마음을 모아 동참하는 여러분들을 저는 끝까지 사랑하고 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함께 꿈을 꾸길 원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나눈 이 이야기들이, 저희교회의 영적 성장 계획에 다 담겨있습니다. 회심한 이후, 예배 안에서의 회복부터 시작하여, 점점 섬기는 자로 나아가는 과정 말입니다. 이 과정을 저희는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개척하여 영적 아이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자립하여 영적 청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교회를 통해서 또 다른 교회를 낳고 섬기는 일까지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부모가 된 교회겠죠. 또한 그 일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가 점진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기 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웃과의 사귐까지 이어져 충만한 관계가 되는 여정입니다. 이 중에 가장 첫 번째 부분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장 기초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다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설교를 통해 우리가 살펴보았던 ‘중심’의 문제가 바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원래 하나님과 우리가 깊은 사귐의 관계에 있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며 이 관계가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나의 태도의 문제, 중심의 문제,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마치 나무가
가지에게 생명을 공급하듯,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나 죄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아담의 죄가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그분의 영생이 끊어지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죽음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인간에게 가장 먼저 경험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치심입니다. 그전까지는 서로가 벗은 가운데도 거리낌이 없었지만, 죄가 사람 안에 들어오자 서로에게 보여지는 자신에 대해 수치를 느끼고, 하나님의 낯에서도 피하여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죄가 깨뜨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나의 마음도 왜곡시킵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였기에 그런 사랑 안에서는 내 모습과 상대방을 모습을 볼 때도 사랑의 마음으로 봅니다. 그러나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고갈되면, 하나님 없는 나의 실체를 죄악 된 마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존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아존중감입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하는 이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갖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사랑을 충분히 받아도 자존감이 올라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 날마다 내 중심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음성을 듣는다면 당연히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우리를 바라보되,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마음으로 나도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던 마음은 무엇입니까? (창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여러분이 아기를
낳았는데, 여러분을 닮아서 화가 나셨던 분 있으십니까? 그것이 객관적으로야 잘생겼든 못생겼든, 어쨌든 나를 닮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 사랑스럽지 않으시던가요?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깨어진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어디로부터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깨어진 모습 안에서 공허하고 허무하며 아파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구원을 말씀해주십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 창조의 모습이 다시 새롭게 나타납니다.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골 3: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면, 구원하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새사람’에게는 ‘옛사람’, 즉 죄에 속하여 살아가던 때의 모습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날마다 새사람을 옷입으며, 끊임없이 새로워져 가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영적세계에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는 어떠했나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사랑으로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사랑의 원천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려지지 않으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없는 자신의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부패한 내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이제 내 외적인 모습 속에 본질을 감추고, 외적인 모습을 통해 나의 본질까지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는 자신의 외적인 어떠함, 소유, 업적, 타인의 평가 등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이런 것을 누리고 있으니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이것을 이뤘으니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이렇게 생겼으니 괜찮은 사람이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합니다. 행복도 거기에서 찾으려 합니다. 자아존중감도 거기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존재의 특성입니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옆 사람과 눈에 보이는 대로 비교합니다. 아담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에게 나타난 죄의 모습이 ‘비교의식’ 아닙니까? 옆 사람과 비교를 하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는 우월감을 누리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나타나는 모습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옆 사람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 우월감을 누리며 잠시 자기를 사랑하고 높게 보지만, 곧 다른 부분에서는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을 낮게 봅니다. 즉, 이것이 바로 자존감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누리던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며 생긴 허무함과 공허함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다른 무엇을 통해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확인하려는 현상입니다. 비교가 대표적이죠. 그러나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는 삶에서는 결코 평안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샬롬’인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공허함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의 어떠한 것이 내게 없어도, 자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만 인해서 만족하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요일 4:16)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오늘 ‘사울’과 ‘다윗’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제가 설명해 드린 것을 토대로 보면, 저는 육신의 때로는 사울이 더
어른이지만, 영적인 때로는 다윗이 더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원래 아까 설명드린 이 모든 영역의 충만함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사울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실패이며, 그 실패가 ‘자신’과의 관계, ‘타인(이웃)’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로 악순환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13-14를 보면 사울에게서 주님의 영이 떠나고,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빈 자리를 틈탄
것입니다. 반면, 다윗은 자라온 환경으로 보자면 낮은 자존감에 허덕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삶같이 여길 수도 있을 만큼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적 자존감은 이스라엘 중에 가장 높고 건강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랑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하나님 손 붙잡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도록 하는 힘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내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생겨난 모난 부분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능히 그것을 치유하고 더 온전케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친 채, 자신의 왕의 지위,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 사람들의 칭찬 등에 초점을 두고 거기에 자존감의 근원을 두고 살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모든
것이 회복된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앞에서는 우월감 속에 살았지만, 정작 골리앗 앞에서는 힘의 열등감을 느끼며 나아가지 못하고 두려워 떨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다윗은 그러했고, 사울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후 지속적인 두려움을 갖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며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이 됩니다. (삼상 18:6)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울 왕을 환영하였다. (삼상 18:7) 이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여러분. 사울이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은 잃어버리고 세상이 주는 사랑이 전부였는데, 그것마저 다윗에게 뺏기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은 그러면 못 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다윗에 대한 질투입니다. 우리도 이것은 언제든 직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더라도 한순간에 우리의 신앙이 확 자라지 않기에, 모두가 우월감/열등감의 문제를 점차 회복하며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사울과 같은 상황을 훈련받습니다. 나보다 더 사랑받는 사람, 나보다 더 인정받는 사람,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모든 비교의식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회복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반면, 하나님이 떠나버린 삶에는 그 공허함을 죄의 세력이 장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귀신들림이나, 악령 등이 그런 어둠의 세력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의 내면이 사탄의 놀이터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사울이 악한 영의 영향을 받게 되는 일이 잦아집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도 있고, 사탄이 자리 잡고 거짓으로 속삭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어둠으로 치닫습니다. 다윗을 바라보며 열등감을 느끼는 사울의 마음. 사탄은 그의 안에 있는 그것을 제일 좋아하죠. 더욱 분노와 광기로 물들입니다. (삼상 18:10a) 바로 그 다음날,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에게 내리덮치자, 사울은 궁궐에서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이라는 표현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욥기의 시작부에서도 사탄이 욥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하나님이 사탄의 공격을 허용하십니다. 악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고, 악은 언제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시죠. 그러나 때로는 어떤 일을 위해서 그런 악한 영의 활동을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악한 영이 사울을 공격하는 일도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크고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신적 통제 아래 있다.’ 악한 영이 사울을 덮치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안에 있으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분노와 열등감만 가득합니다. 그 안에서 악한 영이 이끄는 대로 그는 반응합니다. 악한 영의 거짓된 속삭임은 ‘다윗을 죽여라’입니다. (삼상 18:10b) 다윗은 여느날과 같이 수금을 탔다. 그 때에 사울은 창을
가지고 있었는데, (삼상 18:11) 그가 갑자기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다윗에게 창을 던졌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 두 번이나 몸을 피하였다. 골리앗 앞에서는 순해졌던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 일에는 과도하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내면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깊은 분노가 있는 사람은 내 내면세계 안에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주인됨 안에서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빈 마음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다른 무엇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물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인기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들은 관계에 집착합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중독현상에 빠져서 그것밖에 안 보게 됩니다. 사울의 내면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오작동 중입니다. 오직 다윗을 죽이고, 다시 자신이 가장 이스라엘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 하면서도 사울이 느끼는 것,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삼상 18:12)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안 사울은, 다윗이 두려워졌다. (삼상 18:13) 그리하여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임명하여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였다. 다윗은 부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삼상 18:14)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그는 항상 이겼다. (삼상 18:15) 다윗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니, 사울은 그것을 보고, 다윗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여러분. 자신은 지금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충만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다윗의 모습, 하나님이 지키시는 그의 삶을 보면서 사울은 두려워합니다. 본질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울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을 보면서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여, 자신도 하나님과 누렸던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고,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의 사울의 사명은 다윗에게 갔을지 모르지만, 아직 사울의 인생은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깨닫지 못합니다. 사울은 여전히 다윗 죽일 궁리만 합니다. 다윗을 전장에 내보내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고자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줄 테니, 전쟁에 나가서 싸우라고 명합니다. 이미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아내를 주겠다는 약속도 어긴 상태입니다. 이번 미션은 블레셋 남자의 포피 100개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신랑은 신부의 집에 돈을 가져다주고 신부를 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관례를 적용한 것입니다. 사울의 목적은 진짜 다윗을
사위 삼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다윗이 그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에 쳐들어가 적군 200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왕에게 바칩니다. 2배이죠. 그래서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사회적 배경은 왕의 사위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왕이 되기에는 더더욱 명분이 없죠. 그러나 사울의 이 계략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됩니다. 이것은 훗날 다윗의 왕위 계승에 합법성을 부여합니다. 아무 배경도 없던 그에게 이스라엘의 영웅이자 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세워준 것입니다. 즉, 사울의 악한 계획조차도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둠에 사로잡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삼상 18:28) 사울은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 딸 미갈마저도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삼상 18:29)
다윗을 더욱더 두려워하게 되어, 마침내 다윗과 평생 원수가 되었다. 사울은 보고 깨달으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 딸도 다윗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합니다. 사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점점 더 사랑해갑니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미워합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합니다. 그는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머물렀던 것입니다. 19장에서 사울은 이제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나 한번은 요나단이 다윗을
도와주고, 한번은 미갈이 다윗을 창문으로 탈출시켜 목숨을 구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은 사무엘의 도움으로 다윗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삶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본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합니다. 악한 영에게 조종당하듯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그에게만 나타나는 유별난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여도
죽일 수 없을 뿐, 우리가 만약 고대의 왕과 같은 권세를 가졌다면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악한 영에게 붙들린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신약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하는 싸움이 악한 영들에 대한 영적 싸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또한 너무 영적인 싸움이라고만, 여겨서 마치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여기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에베소서는 4장에서 이 말씀이 전환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엡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에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모습이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든 삶에 대한 것입니다. 죄악 된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그것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아내와 남편 사이, 자녀와 부모 사이, 종과 주인 사이에서 행해야 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가르칩니다. 바로 새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니 죄악된 행동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진섭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은 거룩한 새 백성 됨이기에 매우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윤리적 요청은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와 싸우는 싸움이다. 악한 영은 바울 당시에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잘못된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서신의 마지막 자리에서 그런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면이 밝혀진다. 자연히 승리의 방법도 분명히 제시된다. 영적인 싸움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이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영적인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즉, 신앙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살아가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새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빛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옆 사람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 자녀의 관계, 상사와의 관계까지도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누리기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하니 모든 것을 실패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만하게 하니,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이끄심을 경험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워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고, 다시 온전하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여 나아가길 계속 힘써서 그것이 내 습관이 되고, 내 인격이 되길 힘쓰십시오.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것부터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추구하십시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시간에 조금 더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길 힘쓰신다면,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들 안에 살아계심을 조금씩
조금씩 더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새 사람의 기쁨이 고백 되고, 성령 안에서 사랑이 가득한 삶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