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교팀이 선교를 떠나는 파송예배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여행을 시작했고, 이번 주간 걸어야 하는 여정은 누가복음 3~4장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세 권을 공관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공관’이란 한자로 ‘함께 본다’는 의미이죠. 세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비슷한 관점에서 기록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4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3:1~18 세례요한의 등장과 요단강 사역 3:21~22
예수님의 세례 3:23~38 예수님의 족보 4:1~13 광야의 예수님 시험 사건 4:14~30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 4:31~44 예수님의 치유 사역 최근에 금요기도회 시간에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살펴본 것이 ‘요단강 세례’와 ‘광야 시험’이었습니다. 잘된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는 그 외의 것을 다루면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과 광야의 시험 이야기는 매우 의미 있는 본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유튜브의 금요설교를 한 번씩 참고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3~4장을 관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야기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중점적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1. 요한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지난 설교에서 잘 살펴봤습니다. 제사장 스가랴의 집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기이죠. 예수님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먼저 세상에 등장합니다. (눅 3:3)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제가 금요설교를 통해 설명했지만, 세례는 요한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교에는 물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있었지만, 그것이 세례의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에 대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는 ‘회심
사건’을 기념하여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세례는 회심 없이 행할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세례가 무엇인지 모르고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 몇몇 분들이 복음과 회심을 이해한 후, 자신의 세례가 회심과 무관하게 받은 것이 아쉬워서 다시 받고 싶다고 했을 때, 제가 승낙한 것도 같은 의도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일생에 한 번 행합니다. 회심을 기념하여 세례를 주고,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을 결단합니다. 그래서
‘풍삶첫’에서는 세례를 ‘백일잔치’에 비유합니다. 회심이 영적으로 탄생한 것이라면, 회심의 결단을 점검하고 그 이후에 세례식을 하죠. 예전에 아기가 태어났다가 빨리 죽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100일을 기다렸다가 그 아이의 생존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의미로 100일 잔치를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회심한 영혼들이 이제 그 회심의 고백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도록 가족이 함께 모여 격려하고 축하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로 풀어보자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세례’는 그 국적취득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결혼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회심은 결혼을 하기로 결단한 날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사랑의 약속을 나눈 날입니다. 결혼식을 통해서 모두 앞에서 공개하는 것이죠. 공동체적 약속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식’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식은 시작이죠. 결혼한 후에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꿈꾸고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결혼은 예식이 아니라, 결국 결혼식 이후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이 시대에도 ‘세례’의 의미를 잘 이해한 사람은 ‘세례 예식’이 아니라, 회심하고 세례받은 자로 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궁금해하였습니다. 이제는 좀 정화가 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교회가 그러지 않아서 제가 못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한참 한국교회의 신앙이 ‘구O파 신앙’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①단회적 구원 개념 :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입장 강조. 구원의 순간을 특정 시점으로 확정 짓는 경향. 일부 한국교회도 구원의 과정보다는 ‘언제 구원받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김. 구원의 과정에 있다는 생각보다 구원받았다는 것만을 강조. ②행위 없는 구원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행위는 구원과 무관하다고 주장. 일부 한국교회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나 신앙적 태도를 가질 때가 있음. 이 또한 비성경적. ③회개
없는 확신 : 과거-현재-미래의 죄가 한 번에 용서되었기에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 없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을 신앙부족으로 치부. 일부 한국교회도 회개보다는 ‘구원의 확신’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지속적인 신앙의 성장과 변화보다는 ‘확신’ 그 자체를 구원의 증거로 보기도 함. ④신앙적 개인주의 : 공동체를 부정하고 개인의 신앙만을 강조. 일부 한국교회도 신앙생활은 개인의 신앙 성장이 중요한 것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늘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내용들을 보십시오. 철저하게 ‘세례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즉, 그 삶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혈통’(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요.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종교에 ‘기독교’라고 적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가 있는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양육’을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제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혼 구원이죠.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탄생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깨어진 삶을 수술하여 살리는 것도 영혼 구원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에서 이탈한 사람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도록 이끄는 일이죠. 저는 그런 마음으로 양육하고자 합니다. ‘전도’도
같은 의미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전도를 단순히 교회 데리고 오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아닙니다. 전도의 1순위는 교회 안에 있는 아직 ‘도’(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참된 도’(참된 진리)를 전하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10절 보면 사람들이 요한에게 그 구체적인 실천을 묻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통옷 두 벌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먹을 것 있는 사람도 그처럼 해야 합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묻습니다. 우리는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신들에게 걷으라고 한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걷지 마십시오.” 당시 세리는 공무원이죠. 이들에게 주 수입원은 월급이 아니었습니다. 중간에서 부정 이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와서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무한테서도 폭력으로 빼앗지도 말고, 을러대어 빼앗지도 마십시오.
당신들이 받는 보수에 만족하시오.” 마찬가지입니다. 군인들은 힘과 무기를 갖고 있었죠. 그래서 자신들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상인들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길을 막고 통행세를 강제로 징수하곤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 요한에게 간다면 그가 우리에게는 해줄 말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어느 직업이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의 99.9% 여러분에게 손해가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 위해, 정직과 성실을 추구하기 위하여 받아야 하는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물건을 팔면 정직하게 팔고, 원산지 속이지 말고, 품질 떨어지는 것 속이지 말고. 강한 자의 편에 서서 일하여 누군가에게 손해가 가는 일을 하지 말고. 불법적으로 경리 조작 하지 말고. 남들 다하는 편법이라고 그 길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전에는 그런 것을 했던 사람이, 이제 주께 회개하여 그런 삶을 살지 않는 것이 구원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5절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눅 3: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요한이 꿈꾸는 세상. 정말로 정의와 공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 착한 자들이 살만한 세상.
정직한 자들이 살만한 세상. 그런 세상에 대한 꿈을 사람들은 요한을 통해서 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 깨어진 세상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데 만약 정말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세상은 메시아의 나라가 아닐까?” 여러분, 세상에 우리가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이 모두가 원하지만, 그렇게 살면 망할 것 같아서 시도조차 못 하는 그것을 해나가는 사람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왜요?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으나, 본질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실패하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성공보다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칩니다. 그 발버둥 안에 속고 속이고, 경쟁하며 누르고, 착하게 살다가 바보가 될 바에야, 악하게 살아서 생존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왜 공동체적 메시지인지 아십니까? 혼자서는 우리도 별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우리도 견뎌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있습니다. 진짜 회심의 고백이 있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의 삶이 희망이 되어 그 불씨가 퍼져나가면 횃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겠다고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모여서도 대접받으려고 하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더 중요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성이 가득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보기에 이렇게 보여야 돼요. “아니, 왜 자기 시간을 저런 데 써. 아니 왜 저런데 돈을 써.” “지금 이거 안 하면 큰일 나요.” “교회는 이상한 거 가르치는 곳이야, 속지 마.” “저기는 함께 망해가기로 작정했구만.” 우리는 속여 헤매게 하는 사람 같지만 참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 같지만 잘 알려져 있으며, 죽어 가는 사람 같지만,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처벌을 심하게 받는 사람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아픔을 당하는 사람 같지만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새한글성경 고린도후서 6:8~10절). 2. 예수님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금요설교로 다 나눈 내용들입니다. 그 이후에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십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시험 순서가 다를 것입니다. 강조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왕’이 중요하기에 천하만국 이야기가 마지막에 나오고,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 중요하기에 성전 이야기가 마지막 시험으로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의 지상 대명령으로 끝이 난다면,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공부하면 재미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 다르고, 각자의 이유가 다 살아 숨 쉬는 놀라운 책입니다. 저도 거의
20년 동안 공부해도 매일 새로워요.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난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갑니다.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죠? ‘나사렛 예수’잖아요. 원래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 사람입니다. 호적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들레헴에 갔다가 예수님을 나은 것이죠. 유대 땅 베들레헴은 쉽게 말해서 ‘유대도 베들레헴시’입니다. 원래 그들이 살던 ‘갈릴리도 나사렛시’하고는
거리가 140km 떨어져 있어요. 당시 도보로 5~6일 걸립니다. 그들이 다시 원래 터전인 갈릴리 나사렛에 돌아와 살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른 살쯤 갑자기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고, 예루살렘에 다녀온 이후로는 아예 랍비와 같은 모습으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했다는 소문도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회당에 들어왔을 때, 일종의 설교권을 예수님에게 줍니다. 회당의 봉사자인
‘하잔’이라고 부르는 관리인이 이사야 두루마리를 줍니다. 회당에서는 저희처럼 성경 말씀을 순차적으로 가르치거든요. 예수님이 이사야 두루마리 중 하나의 예언을 찾아서 읽습니다. (눅 4: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눅 4: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러분, <아이언맨 1편> 영화 엔딩 기억하시나요?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맨이 아니라는 정부의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 기자들이 잔뜩 모였습니다. 그때 토니 스타크가 갑자기 자기 스타일 대로 즉흥적으로 말하죠. “I’m Iron Man.” 그러자 기자들은 충격과 환호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영화가 끝이 납니다. 지금 예수님이 찾아서 읽으신 이사야서의 이 부분은 ‘메시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 부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해 설교하겠군.” 이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행동이 무엇이죠? (눅 4: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눅 4: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눅 4: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다 뒤집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그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놀랄 필요는 없죠. 그런데 무엇을 알아야 해요? 그렇다면 메시아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그 나라는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그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새한글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시네.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도록 하심이네. 주님이 나를 보내셨네. 사로잡힌 자에게는 해방을,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도록 하심이네.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도록 하심이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프토코스’이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즉, 경제적 가난도 포함하지만, 영적 가난, 정서적 가난, 정신적 가난, 관계적 가난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요새는
몸이 아픈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아픈 것도 문제입니다. 정신적 괴로움도 크고, 관계적 어려움도 큽니다. 너무 놀라운 통계지만, 우리나라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우리는 30대까지는 몸이 아파서 죽는 것보다 마음이 아파서 죽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특별히 한국은 너무 아픔이 많습니다. 소망이 없어요. 절망, 바뀌지 않을 현실의 두려움에 아파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복음으로 오셨어요.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두 가지를 다 하셨어요.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사랑의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랑을 행하기만 하는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단순히 도와주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 그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이거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줘야 해요. ‘그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이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포로가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가 다시 보게 하고. 이런 표현들은 지금도 다 유효합니다. 현대사회의 포로가 얼마나 많습니까? 죄에 중독되어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의한 시스템 안에서 깨닫지 못하고 갇혀서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먼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가짜 뉴스, 왜곡된 정보, 잘못된 가치관 등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바꾸는 실제적인 변화가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또한 ‘종교생활’ 없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뜻과 맞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과 내 삶에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사귐의교회를 통해서 신앙을 다시 깨닫는 것 같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뀌는 것은 당연해요. 사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계속 내 생각이 바뀌고 내 잘못된 개념들이 바로 잡히는 것이 당연해요. 여러분. 다름 아닌, 제가 바로
가장 종교적인 종교인으로 살아갔던 한 사람이었거든요. 삶의 중요성은 다 잃어버린 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무것도 몰라서 가치 없이 시간과 인생을 바라봤던 한 사람이었거든요. 저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헤맸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복음과 진리를 만나게 되면 감사한 것이죠. 그런데 만난 이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주도권 싸움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복종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여러분, 교회의 가르침도 설교도 성경을 빗대어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이 말씀이 누가복음 3~4장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아무리 우리 마음에 반발이 들어도 따르셔야 합니다. 힘들어도 내 자리에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 좋은 것만, 나랑 생각이 같은 것만 따르는 사람들은 평생 교회에 있어도 자라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며, 치열하게 순종하십시오. 다른 길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성령님은 멋지게 일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중 일부는 선교지로 떠납니다. 사실 대단한 것을 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괜히 돈 쓰고 시간 쓰고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돌보지 않고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일을
내팽개치고 떠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합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도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단기선교를 왜 가는 것이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땅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들이 있고,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평생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미력하나마 해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866년, 고작 27세의 한 남자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는
3년 전 결혼을 했으나, 1년 만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는 그 슬픔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내어 기독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낯선 땅 한국에 옵니다. 비밀리에 한국을 탐방하고 돌아갔다가 그다음 해인 1866년 한국에 다시 온 것이죠. 그러나 그가 타고 온 제너럴셔먼호가 공격받고, 모두 죽게 됩니다. 그때 그는 죽기 직전까지 성경을 사람들에게 건네주며 전도하다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누군가 자기 삶이 구원받았다는
생각의 확신에 만족하지 않고, 삶을 드리는 모습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 땅에도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제일 편한 것이 인생이죠. 그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제 기억에 한 번도 두손놓고 가만히 계신 적이 없고 우리를 위해 일해오셨으며, 우리를 살리는 일에는 가장 귀한 것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그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라면, 끝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함께하고자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는 이번에 그 땅을 밟지만, 저는 이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분들이라면, 이 선교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 앞에도 함께 머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동참하는 분들이 계속 선교의 마음을 이어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한 주간, 모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단기선교 소개 및 기도제목 미얀마 단기선교팀 파송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