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교회가 되어, 교회로 살라" / 강정규 목사

2024-11-10 · 디모데전서 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디모데전서에 대한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디모데전서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설교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 지역’을 마음에 품고 개척한 소아시아의 중심교회였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 머물며 목회했던 곳으로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또한 ‘두란노서원’에서 2년간 성경을 중심으로 양육하여, 회심 후에도 진리 안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때가 되어 바울은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동안 갇히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로마로 이송되어서 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죠.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로 파송합니다. 에베소에 처음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생겨난 시점으로부터는 최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디모데가 파송된 것입니다. 당시의 에베소 교회는 다른 초대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고 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핵심을 빗겨나간 다른 논쟁을 즐기며, 성도들이 복음 안에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여러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를 통해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은, 우선 목회자인 디모데를 복음과 진리의 가르침으로 굳게 세우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디모데를 도와줄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을 디모데가 잘 가르치고 분별하여 바르게 세워갈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디모데가 우선 잘 서야 하죠. 그런데 디모데 혼자 열심히 한다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곧 성도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려면 목회자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실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목회의 동역자요, 교회의 리더들로 세워가는 것이 중요해요. 한번 몇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그런 사람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교회론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 저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의 변화가 참 컸습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저는 교회의 목회직이 세습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저는 외부인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 또한 그 부분에서 당사자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제게 밀접한 이야기였습니다. 대학교 대학원 시절부터 제 동기들은 틈만 나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도 결국 아버지 교회로 들어갈 거지?”, “넌 우리와 달라. 우린 흙수저야.” 사실 이런 이야기가 저에게는 굉장히 스트레스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이라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어요. 그들이 느끼는 불평등에 대해서 저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반면, 저와 같은 배경에 있는 사람 중에는 “우리가 목회자의 자녀로서 자라며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많았으니 혜택도 있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저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어릴 적 꿈은 교회 건물 밖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 있는 사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참여해야 하는 것들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냥 안 하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많았죠. 그래서 저는 교회의 일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에서 목회자의 가족은 목회자가 아님을 우리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회자의

자녀 가운데 그런 성장 환경에 상처가 쌓여서, 나중에 신앙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자녀들끼리 모이면, 오히려 세습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이 우리에게는 ‘역차별’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종종 나옵니다. 네. 역차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적어도 한 교회의 청빙 길은 막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특수한 한 교회의 후보지가 삭제되는 것, 그 ‘–1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목회라는 분야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간접적으로 훈련하고 준비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러하기에 대부분 세습 논쟁이 나오는 ‘안정적인 목회 자리’는 스스로 포기하고, 우리는 더 하나님이 필요하신 곳으로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세습도 반대했지만, 개척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개척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길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가

가장 원하지 않는 길 앞에 서서 저를 부르셨죠. 순종하며 따라간 여정 속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역시 하나님이 옳았다’라는 고백입니다. 막상 개척하고 보니, 아버지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웠던 목회의 기본기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늘 강조했던 것이 ‘목회자의 본’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그 이야기 안에는 언제나 ‘가족’도 포함되어 있어서 한편으로는 버겁기도 하고, 반항심으로 겉돌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돌아보니 교회와 목회의 기본기를 평생에 걸쳐 배웠던

시간인 것 같습니다. 모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공동체였고, 전통적인 교회였습니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세워진 공동체였고, 그 중심에서 아버지는 정말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개척 방법과 저의 목회 방식이 달랐고, 그 이후의 여정도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제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해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하는 목회자로 목회를 시작했고, 어쩌면 평생을 일하는 목회자로 살아갈 것을 각오하고 시작했습니다.

저는 만약 제가 지금도 열 명, 스무 명의 사람을 목양하고, 그를 위해 일하며 목회를 병행하고 있다면, 그 목회가 결코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진 영혼을 위해 최선으로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는 늘 저의 존경의 대상입니다. 우리 사귐의교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모임이었기에, 서로의 삶은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었고, 온 교회가 그렇게 한동안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차츰차츰 성도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30평의 공간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규모의 변화로 공간에 대한 다음 준비는 해나갈지언정, 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교회의 영적인 이끄미들을 길러내는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사귐의교회는 ‘양육’에 강점이 있는 교회라고 느끼겠지만, 사실 그때까지 저희교회는 ‘방치’에 강점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냥 저는 성경적 설교에 최선을 다하면, 성도는 듣고 ‘알아서 크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양육도 심도 있게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교회는 평일에는 거의 사역이 없고, 평일에 성도들이 저를 만나려면 일터로 찾아와야 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물론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틈틈이 시간이 나면 성도님들과 만나서 교제도 나누고 놀기는 했지만, 양육은 해야 할 이유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개척 후 4년 정도가 되자 50명 정도의 성도가 모이게 되었고, 우리는 감사하게도 예배당을 넓혀서 고읍에서 옥정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는 50명을 넘기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소위 자립을 결정하는 선이기 때문이고, 방문자들의 부담감이 달라지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선을 넘어서면 새로운 사람들의 유입이 더 빨라지곤 합니다. 저희도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직면하게 된 몇 가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새가족이 오면 저는 그 사람들을 챙겨야 하죠. 그러다 보면 사람이 늘어갈수록 기존에 제가 쏟던 시간은 분산되고, 자연스럽게 목양이 약해지게 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기존 성도들 중에는 우리가 누리던 기존의 소소한 행복이 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곤 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제가 성도들에게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위한 공동체로써 우리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비전을 잘 제시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즐겁게 지내는 모임이었으니까요. 저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은 당장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였고요. 그런 여러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이슈들이 많아졌고,

그 안에서 저의 목회적 고민은 점차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회에는 새가족이 계속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은 열심히 공부했는데, ‘교회’는 신학교에서 다 배울 수 없는 것이었죠. 그리고 저는 모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목회자 중심으로 세워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만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뭔가 저에게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교회를 꿈꾸며 새로운 공동체를 누리기도 했지만,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 3년 전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 제가 열심히 해서 전체 공동체를 돌보는 사역을 해봤을 뿐입니다. 청소년부, 청년부 목회처럼 말입니다. 제가 다 만나고, 제가 다 먹이고.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최대치가 50명일 것입니다. 그 이상의 영혼이 맡겨졌을 때, 저의 열심으로만 다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 당면한 현실적 고민 속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도 너무 교만해서 귀를 막고

살았는데, 귀를 열고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복 네트워크’도 그 과정에서 만난 것이고, 그 외에도 여러 선배 목회자, 책, 강의 등을 통하여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를 배워가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세워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보통은 30명, 최대 50명까지는 목회자 외의 리더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 중심으로 옆에서 조금만 도와서 하면 목양도 목회도 됩니다. 이 시기까지는 교회 안에 ‘시스템’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과합니다. 사람이 적을 때는 사역을 맡길 때도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길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각 사람의 장단점, 성향,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부터 양육을 통해 사람을 성장시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죠. 영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한순간에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귐의교회는 제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성장했고, 그에 따른 어려움이 직면한 상황에서, 사실 ‘코로나’가 저에게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유입도 조금 주춤하고,

사람들의 대면 모임이 줄었기에 그 에너지를 분산하여 목양을 할 수도 있었고, 틈틈이 교회에 관한 부족했던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교회의 궁극적인 꿈과 방향성을 묻는다면, 개척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거의 동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실적으로 그것을 적용하고 실행해 나가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아빠가 처음이라서 헤매는 것처럼, 저도 담임목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공부를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되었습니다. “진짜 성경이 우리의 교과서구나.” 사실

제가 꿈꾸는 교회, 제가 꿈꾸는 목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최대한 잘 담아내고자 힘쓰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비전’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전략’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제가 그것을 잘 발견하지도, 적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일종의 선입견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개신교회는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성경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1000년이 넘는 로마교회의 전통과 유산이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영향이 큰 부분은 ‘만인제사장’에 대한 생각입니다. 만인제사장을 말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성직과 속직을 구분하고, 성직자가 영적으로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사제처럼 말입니다. 또한 개신교회의 목회자 중에도 스스로를 그렇게 구분 지음으로 자신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는 그 비전 아래, 성경이 강조하는 목회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가 제사장답게 세워져 가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목회자만 제사장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제사장입니다. 목회자가 그 역할을 독식하고 있거나, 성직자의 특권을 강조하여 영적인 구분을 만들려는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신학과 목회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으므로 그 전문성으로 섬겨야 할 부분을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비전을

가장 잘 전수받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베드로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세워져 가고,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 가는 것. 그것이 베드로가 바라본 비전입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여 주를 따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그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살고, 누군가에게 나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므로, 그곳에 영적인 동생들이 있다면 끌어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시는 영적 자녀와 같은 영혼들이 있다면 잘 세워가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것. 저는 그것은 성도의 삶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전통적인 교회, 목회자 중심의 교회 모습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너무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다 보니 이제는 그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목회자들이 고민하는 것이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면 돕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꿈꾸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이 주역이고 제가 조력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꿈을 나누시고 함께하며 가장 큰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하셨다고 믿습니다. 목회자로서 저에게 솔직하게 묻는다면, 목회자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하고 편한 부분도 많습니다. 50명까지 담임목사 중심으로 하다가, 50명이 넘으면 다른 목회자를 초빙해서 세우고 또 필요하면 계속 교역자를 세우고, 목회자와 성도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우리가 많이 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그런 방식으로 조직을 갖춰서 성도들을 관리하고 교회가 성도들에게 일종의 종교 서비스를 해주는 모델로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평생 목회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커져요. 조직은 방대해져요. 그런데 성도들이 자라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계속 제사장의 역할을 해올 사람을 구해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도는 계속 영적으로 수동적인 모습에 머물기 쉽습니다. 성경이 꿈꾸는 것처럼 자라지 않아요. 어찌 보면, 이것은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조직이 커가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적 교회의 모습이 이 시대에 잘 맞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역행합니다. 저는 이 시대의 인기 있는 교회가 되는 법을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단순히 교회의 크기를 키우는 것에 집중한다면 저는 지금처럼 목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 맞는 방식은 교회를 복잡하게 하지 않고, 심플하고 세련되게 세팅하고, 성도에게 헌신을 요구하기보다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한 교회, 특별히 공동체성은 최대한 느슨하게 해서 그로 인한 관계적 문제도 생기지 않도록 하고,

서로가 교회에서까지 피곤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목회자도 편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고, 목회자는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을 써서 먼 거리에 있으면, 저의 허물도 드러나지 않고 보호받고 편할지도 모릅니다. 굳이 매주 가정교회 한다고 저희 집도 개방해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양육한다고 매주 평일 저녁마다 사람들을 만나서 3시간씩 씨름할 필요도 없이, 멀리서 설교만 전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는 불편한 일에 도전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가득한 이 시대가 원하지 않는 그런 것들을 도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합니까? 그냥 그런 교회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교회의 모습대로,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교회에 성도들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가 에베소서이죠. 거기에는 이러한 교회를 향한

비전이 담겨 있어요.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 충만함이 되어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역에 함께하는 것이 성경이 꿈꾸는 교회의 비전입니다. 이 세상은 충만함을 잃어버렸어요. 망가지고 깨어진 세상에서 느끼는 허무함과 결핍이 있어요. 교회는 그것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복음은 성도들의 허무를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무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충만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의 충만함이란 바로 성도들의 충만함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가며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라가서 그분의 충만함까지 나아가자.”

교회에 등록했네. 회심했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 자라가는 모습. 이것이 바울이 가진 꿈입니다. 지금 복음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 너무 중요한데, 자꾸 거짓 교사들이 다른 것에 주목하게 하고, 헛된 논쟁이나 하게 하니 바울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통해서도 디모데에게 목회가 무엇인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지금까지 그대는 믿음의 메시지로 양육 받았고 건전한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이 가르침을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예수의 귀한 종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는 나를 변화시킨 복음, 그 복음으로 성도를 양육하고 가르쳐서, 목회자와 어깨를 견주는 제사장으로 세워가는 것이 목표이고 사명이어야 합니다. 바울도 헤맸던 사람이고, 답을 찾은 사람이고, 성장해 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답을 찾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전에는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 안에서 답을 찾고 있었어요. 그는 유대교적 열심을 통해서 자기 삶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과할 정도로 그 일에 헌신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찾고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던 내 삶의 공허함을 채우는 그 무엇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구나.” 그래서 그는 새롭게 찾은 정답에 자신의 삶을 헌신합니다. 회심하자마자

그는 바로 돌아서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인생에 진정한 회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심을 경험하고 나니, 그가 가장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전의 자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헛된 것을 진리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완전 헛다리 짚고 복음으로 인한 진정한 변화는 전혀 누리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바울은 자신의 이전 모습과 닮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 안에서 마음에 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다 있어요. 하나님이라는

퍼즐이 채워야 하는 공간이 있어서,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참된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빠져버린 우리의 삶에서는 아무리 다른 것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삶이었고, 뭔가 인생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해봅니다. 가장 종교적인 모습으로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기도 합니다. 유대교 열광주의자가 되어 다른 종교를 탄압할 정도 군사처럼 살아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느낀 것은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러니 이제 이전의 자신처럼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참된 복음’을 전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그의 꿈이 된 것입니다. 그 사명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고, 그는 담대히 열방에 흩어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그 삶을 평생에 걸쳐서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 삶보다 더 귀한 삶은

없구나. 내가 찾던 삶이 이것이었어.” 여러분, 제가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이야기 지난주에 해드렸잖아요. 1차 전도여행에서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뻔합니다. 가까스로 살아서 다른 도시로 갔다가 놀랍게도 다시 루스드라로 돌아가요. 복음을 다 못 전했거든요. 조금만 더 가르치면 회심해서 잘 살아갈 사람들을 봤는데, 마무리를 못 했거든요. 바울은 죽더라도 이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만큼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세요? 그런데 이것은 바울만의 특이한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산상수훈의 핵심은 ‘팔복’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고 가장 보물 같은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하다가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아요. 그것을 여러분 ‘복’이라고 느낄 수 있으시겠어요?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겪으면 너무 싫죠. 그래서 이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 이것이 아기를 낳는 데 필요한 ‘산통’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산통은 싫죠. 그런데 산통을 참으면 생명이 날 찾아와요. 그래서 산통을 알지만, 아기를 낳아요. 고통이 있음을 체험해요. 그런데 또 낳아요. 왜요? 고통도 알지만, 행복도 알거든요. 고통을 피하면, 행복도 못 만나거든요.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득한 신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아기를 그렇게 고통 중에 낳아보고 나서도, 다른 사람을 꼬셔요. “너도 꼭 아기 낳아. 너무 좋아.” 산통은 얘기도 안 해요. 아기를 낳는 기쁨을 얘기해요. 그 행복이 너무 커서, 그거 견딜 수 있거든요. 저는 팔복을 정말로 믿어요. 현실로 믿어요. 저는 제가 복을 누리고 살고 있다고 고백해요. 그래서 저는 어쩌면 여러분을 고통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나와 함께 진짜 교회를

세우자.” 그런데 사실 그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디모데를 자기와 같은 삶으로 초청합니다. “너도 나처럼 살자.” 바울 틈만 나면 뭐라고 합니까? “내 말을 듣는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삶을 살자고 가르쳤고, 디모데도 그 삶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만이 아니라 계속 초청하길 꿈꿔요.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4: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수고하고 힘쓰는 것에 대한 메시지 성경의 표현이 저는 좋았는데요. “우리가 이 모험에 우리 자신의 전부를 내던졌다.” 여러분. 지금 바울은 “교회 세우는 일에 헌신해라. 그 일에 일꾼이 돼라. 도구가 돼라. 너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복음이 하는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도가 참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교회지요. 복음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들이 모여서 함께 공동체로 더 큰 시너지를 내는 것이죠. 한 사람이 한 사람이 교회가 되고 함께 연합하여 그 영광을 맛보는 것이 저는 진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봐요. 여러분은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필요한 부품들이 아니에요. 여러분 한 사람이 진짜 교회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내가 먼저 교회가 되고 누군가도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들에게. 내 주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주님께 돌아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저는 디모데전서가 마치 이렇게 느껴져요. “디모데야. 복음을 누리고 전하고 누군가를 또 초대하고 그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이만큼 좋은

삶이 없어. 에베소 성도들, 그렇게 우리가 목숨 걸고 우리 전부를 내던져서 그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장해가도록 했는데, 그들이 지금 거짓된 복음에 흔들려서 쓰러지면 안 되잖아. 그들 도와줘야 해. 지켜내야 해.” 바울은 교회가 유기체로 봤어요. 그래서 바울의 그림은 이런 것이었죠. (딤후 2: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풍삶기에서

이 구절을 다루는데, 여기에는 복음이 어떻게 전수되는지 잘 나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입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가 복음을 들었어요. 디모데가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교회에 먼저 세워가고자 하는 동역자들입니다. 믿음직한 동역자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린 유기체처럼 다 연결되어 있어요. 아직 이 공동체 안에 연약한 지체들이

있어요. 다른 것에서 연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더 힘이 있을 수도, 능력과 재력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직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하고 따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우리 몸의 연약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나도 진짜 교회가 되어가고, 나보다 먼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따라가고. 나도 누군가의 옆에서 변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고, 나의 사랑을 받고, 나와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성경이 꿈꾸는 교회입니다. 이 마지막 그룹은 바울과 직접적인 교제는 못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서신을 통해 멀리서나마 그들에게 계속 복음을 가르치고, 디모데가 공동체의 리더로서 가르치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그들 바로 곁에서 도와주고. 이 마지막 그룹 사람들이 어느새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또 누군가를 도와주고. 마지막 그룹 사람들은 바울이 어떻게 사는지 실제로 모르죠. 그런데 바울의 삶을 보고 곁에 있는 디모데가 따라가고. 디모데의

삶을 보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따라가고. 바로 그들을 통해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배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교회입니다. 풍삶초-풍삶첫-풍삶기. 우리교회는 왜 자꾸 복잡한 과정을 만들고, 해야 한다고 하고 그럴까요? 여러분을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적어도 이 공동체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가르치고 싶고, 설교로 다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을 세밀하게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풍삶기를 2팀을 해요. 그 시간을 쓰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양육에 헌신하는 성도님들도 같은 마음이에요. 내가 누리는 기쁨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성장시켜서 교회 일 시키려고, 부려 먹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그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어요. 어쩌면 진짜 복음을 깨달으면, 제가 하지 말라 그래도 하나님 안에서 더 큰 일도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는 진짜 멋있는 말이 많습니다.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나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디모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디모데가 본이 되어 앞서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14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네가 받은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인데, 메시지 버전은 이렇습니다. “그 특별한 은사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오랜

저의 좌우명이 떠올랐습니다.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자.’ 하기 싫을 때가 왜 없겠어요. 편하고 싶을 때가 왜 없겠어요. 그래도 이 땅에 한 명이라도 더 복음으로 살게 하는 일에 내가 사용될 수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그리고 이 일에 헌신하면서 저도 계속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4:15) 이 일들을 명심하고 힘써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딤전 4:16)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나도 구원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하는 삶. 나도 발전해가고, 신앙으로 성숙해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다른 사람도 함께 따라가도록 하는 삶. 이것이 교회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복음이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되어, 교회로 살라.’로 압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삶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사명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나를 통해 누군가 또 복음을 전달받고 회심하고 함께 살아가게 되면 그것은 가히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참 유별난 열심으로 살아가서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때도 있고, 좀 쉬엄쉬엄하라고 얘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 아껴주시는 마음 잘 압니다. 그런데 저보고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냐고

묻는다면, ‘좋아서’입니다. 저는 복음을 보았고, 만났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없고, 내 삶으로 한 사람이라도 주께 돌아오고 교회가 되어 교회로 살아가게 할 수 있다면, 저는 이 삶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훈련이고 연단이고 고생이라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이 길로 초청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그냥 희생하면 되죠.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이보다 더 가치 있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사는 길이 있을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저의 답은 이 길에 있습니다. 누군가 최근에 저에게 ‘목사님 쫓아가기가 가끔 버겁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바울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마음 같기도 해요. 조금 천천히 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꼭 같이 이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늦지만 마세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내 에너지를 쓸 수 있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니까요. 오늘이 어쩌면 우린 가장 싱싱하니까요. 교회가

되어, 교회로 살라! 저는 우리 사랑하는 사귐의 성도 모든 분들이 이 복음의 길을 걸어서, 우리 인생이 고백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함께 노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