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복음에 정진(精進)" / 강정규 목사

2024-11-17 · 디모데후서 1~4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바울은 총 3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 인근 가이사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한 거짓된 선동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이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거짓된 선동을 해서 무리가 바울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하는 찰나, 예루살렘 성전 경비대가 출동하여 진압합니다. 그들이 바울을 조사하기 위해 데려갑니다. 그 덕에 바울이 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 사이에 바울에 대한 적대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로마의 공권력을 사용하셔서 이 무리로부터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재판이 미뤄져서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2년간 갇혀 지내게 됩니다. 바울도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시나 몰랐을 것입니다. 그 사이 유대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뀝니다.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그곳으로 가는

것은 바울의 신변에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으로 로마의 황제 재판에 상소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배경, 즉 로마의 시민권자인 그의 신분을 로마 선교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상소를 했기에 백부장과 병사들이 바울을 비롯한 다른 죄수들의 로마 호송을 담당합니다. 이 여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중간에 광풍을 만나서 배가 완전히 부서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몰타섬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배에 탔던 276명의 무리를 돌봅니다. 죄수인 바울을 오히려 백부장과 모든 사람이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렇게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재판받을 때까지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감옥생활입니다. 자유는 없었지만,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만날 수는 있었기에, 바울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가 모두 이 시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이 찾아가서

만날 수 없으니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로 복음을 전하여 목양을 했던 것입니다. 로마에서의 2년간의 투옥 후, 바울은 석방됩니다. 이때가 AD 62년 경입니다. 바울의 회심을 33년경으로 보니, 회심 이후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이때 바울의 나이는 50대 중후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바울은 약 5년 뒤에 62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그 마지막 시간은 이렇습니다. 석방 후 그는 네 번째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이때

그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기존에 복음을 전했던 곳을 찾아가 돌보기도 합니다. 이 무렵 디모데를 에베소로, 디도를 그레데로 파송하여 목회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과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하러 떠나죠. 그곳에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낸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바울은 이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다시 체포됩니다. 이번에는 가택연금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죄수의 신세로 투옥됩니다. 그는 이제 이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1. 인간 바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사명을 앞두고 깊은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십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제자 3명을 데리고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함께 깨어서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시죠.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과 달리 피곤함 속에

잠을 자고 있었죠. 세 번이나요. 결국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에 의해서 ‘흉악범’으로 규정되어 십자가라는 극형에 처하게 돕니다. 십자가는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체제위반자를 주로 처단하는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처벌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함께 달린 사람들을 ‘강도’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로마의 체제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저항 세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또한 로마의 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유대지도자들의 거짓된 고발로 로마의 재판부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이죠. 이것이 제자들이 두려움을 갖게 된 이유였습니다. 자칫 그 일에 함께한 반란세력으로 엮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로마사회에서 힘이 없던 여성 제자들은 오히려 함께했지만, 남성 제자들은 요한

외에는 모두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신이지만,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기에,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이고, 기도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 그대로 자신을 믿었지만, 근원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고난이 닥치고 희생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면, 우리의 힘으로 내 결단은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확신과 결단을 너무 믿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에 넘어지거나, 내 힘으로 하려고 하기에 교만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철저하게 주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듯, 제자들도 그랬고, 바울도 지금 그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당시의 기독교

박해를 로마 황제가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였습니다. 그 기폭점은 로마의 대화재였습니다. 엄청난 화제가 로마 시내에서 발생하였는데, 역사학자들은 ‘네로 황제’가 방화범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에도 몇 가지 정황들로 군중들에게 네로 방화설이 퍼져나가자, 네로 황제와 집권 세력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방화의 모든 책임을 당시 로마에 퍼져나가고 있는 신흥종교 세력인 ‘기독교인’에게 뒤집어씌웁니다. 그로 인해, 열두 사도를 비롯한 기독교도들이

대학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좋지 않게 보던 여러 사람들이 이 기회에 앞다투어 기독교 박해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러니 이 시기에 로마 세계에 복음을 가장 활발히 전하고 있는 바울 또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죠. 기독교는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 세력으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만 붙이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이잖아요.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로마 황제에게만 썼던 표현입니다. 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복음이다” 외쳤던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이 상황에서 바울의 곁에 있던 많은 사람이 바울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딤후 1:15) 그대도 알다시피, 아시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과 손절하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손절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복음과 손절한 것이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을 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고백하면 피해를 볼 것 같거든요. 여러분은 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으시죠?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가지불이 있는 삶이거든요. 달리 말하면, 대가지불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종교 사기꾼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고민할 요소가 있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그레스게와 디도는 다른 사역 때문에 곁에 없는 것이지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데마는 ‘더메드리오’의 줄임말인데, 이 사람은 바울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쓸 때, 바울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 나옵니다. 로마에 함께 있던 동역자였던 것이죠. 그는 바울이 아끼는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고난이 오자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깊은 고독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딤후 4: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바울이 잡힐 때, 바울 편에 서서 그를 위해 함께 변론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도 용서의 기도를 하셨던 것처럼,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했던 것처럼,

바울 또한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그들을 용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 죽음이 임박한 상황, 이 깊은 고독의 상황 속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딤후 1:4)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대를 만나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어쩌면 디모데는 바울이 요청하면 위협을 무릅쓰고 달려와 줄 바울의 참된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 마지막 부분에도 다시 한번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딤후 4:9)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딤후 4:21a) 그대는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 바울은 디모데를 로마로 부르면서 몇 가지 개인적인 부탁과 권면을 함께 적어 보냅니다. (딤후 4:11b)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우선 마가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아시겠지만 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선교팀이

둘로 갈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훈련되지 못한 마가가 사역에서 중도 이탈을 하게 되었고, 2차 선교여행 때 그를 다시 합류시키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이 나뉘었던 것입니다. 마가와 친족이었던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했고, 바울은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바울이 보기에 마가는 조금 더 훈련된 후 팀에 합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에 마가가 바울의 좋은 동역자로 이곳저곳에

기록된 것을 볼 때,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마가는 이 갈등을 잘 풀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결된 갈등을 성경이 기록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다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딤후 4:13) 그대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고, 또 책들은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가져오십시오. (딤후 4:14) 구리 세공 알렉산더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딤후 4:15) 그대도 경계하십시오. 그가 우리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바울이 2차 투옥이 되었던 곳이 ‘드로아’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바울의 외투와 기록하고 있었던 글이 있었겠죠. 당시 외투는 이불의 기능까지 하는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에 가져와 달라고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알렉산더’를 조심하라는 권면은 그가 바울과 교회를

심하게 대적하고 어렵게 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서 바울이 투옥이 되는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디모데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기에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듯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고독을 포함한 여러 마음, 디모데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부탁과 당부가 들어있는 편지입니다. 2. 복음에 정진하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수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지난 설교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이 복음이 자신을 살게 했다고 고백하며,

이전의 자신처럼 복음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드립니다. 복음은 모두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것을 정말 ‘복음’,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복음은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는 복음을 들으면 오히려 떠나버립니다. 좋은 소식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목숨을 걸만한 것이고, 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삶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복음의 핵심이죠.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바울처럼

나를 바꾸고 회복시킨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주위에서는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로마의 모든 비기독교인은 그 모습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복음을 거리낄 것이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복음을, 우리가 추구하는 삶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서 힘쓰는 모습을 볼 때, 내 주변에서 누군가 “왜 그렇게 살아요?”, “난 이해가 안 돼요.”, “그거 너무 어리석은 삶이 아닌가요?”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적어도 복음을 품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에 위축되어 내 방향을 바꾸지 마십시오. 복음을 발견했으면 복음을 향해 정진하십시오. ‘정진(精進) : 힘써 나아가다.’ 반대로 “너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 너나 나나 뭐 똑같네.” 세상 사람들과

나의 모습이 추구하는 것이나, 애쓰는 것이나, 행동하는 방식이나, 모두 같다면, 이 말씀은 역으로 우리에게 내 삶을 말씀의 저울로 달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 다닌다고 밝히니까 주변 사람들이 막 놀라요. “당신도 교회 다녔다고?!” 물론 이 이야기가 도무지 안 믿을 것 같았던 내가 믿게 되니, 그것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교회를 꽤 다녔는데도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누군가 놀랄 정도로 그들과

내가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한 번쯤 내 모습을 객관화해서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일에 교회 가고, 술 담배 안하고, 이런 외적인 표지에 의한 구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구분된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해요. 어쩌면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은 내 삶의 모습이나 대화 안에서 느껴지는 구별 됨. 일상적인 영역까지 나는 복음으로 인해서 회복되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변화를 나는 기뻐하고 있는가? 혹시 여전히 내가 오히려 세상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는 복음으로 인한 궁극적 변화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달라짐에 있다고 봐요. 그전에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다른 부분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래요. 그래서 나에게 만족이 되는 무엇이 내게 없고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부럽고 질투가 납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내 삶의 가장 필요했던 분임을 고백하게 된다면, 그것이 나의 참 만족이 됩니다.

바울은 자족을 고백하죠. 도리어 나에게 없는 다른 것이 있어서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를 보니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다는 것에서 긍휼함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가 가진 것이 전과 달리 부럽지 않다면, 내가 진짜 복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속히 복음을 전해줘서 그가 참된 행복과 진짜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여러분 안에 생겨나고

있다면, 복음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변화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변해가고 있는 과정에서 넘어지는 사람도 많고, 완전히 변한 듯하다가도 다시 어떤 위협 앞에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깨어진 삶’에서 복음을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바뀌었지만, 내 깨어진 부분, 텅 빈 부분은 수술 되고 회복되고 채워지고 충만케 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구원이 필요했던 내 영혼과 인생이 구원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이라는 부분은 영어로 ‘to us being saved’인데,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라는 의미로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모두 복음으로 구원이 시작되었고, 점점 더 치유되고 회복되고 더 온전한 것을 추구해가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의 지속성.

그것이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후, 30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왔어요. 바울은 회심 직후보다 지금은 훨씬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온전함을 경험하며 많은 부분에서 깨어짐이 회복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 왔습니다. (딤후 2:9) 나는 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며, 죄수처럼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그의 육신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메신저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사라지거나 소멸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복음이 지금도 행하고 있는 그 일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맡겨진 시간 동안 맡겨진 사명 앞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진리의 능력을 고백합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사실 너무나 단순합니다. 성경이 원하는 삶을 진짜 살면 됩니다. 무엇이 우리의 정답인가

묻고 싶거든, 성경을 정말 그대로 읽고 그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아무리 읽고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피하고 핑계하는 우리의 못난 마음입니다. 노력하기도 전에 연약하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진리는 단순한데, 우리가 복잡하게 만들어서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순종이 어려우니 그냥 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죠. 진리는 단순하지만 심오합니다. 진리는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깊습니다. 정말 말씀이 나에게 가르치는 것이 내 얕은 생각으로는 무모해 보이고, 내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느끼더라도, 내 실존과 말씀 사이의 ‘간극’을 주님께 의지함으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한 걸음을 걸으면, 거기서부터 내 힘으로 살지 못했던 불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말씀을 나보다 위의 권위로 두고 사는 삶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이것 자르고 저것 자르고 할 것이라면 그것은 말씀보다

내가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말씀을 끼고 살아도, 성경이 내게 와서 하시는 역사는 모르고 살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 이것이 말씀이 하는 약속입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도 말씀에서 나온다고 말씀이 약속합니다. 여러분. 저도 목사지만 매번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력하고, 지치고, 못할 것 같은 마음이 찾아옵니다. 아니, 하기 싫고, 피하고 싶고, 거부하려는 마음이 제게 있습니다. 그때 내 감정의 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정말 못 합니다. 그런데 그때 말씀을 붙들고 읽고 기도하면, 나에게 없는 격려와 소망이 날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내 마음에 나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힘이 생겨납니다. 저는 그를 통해 말씀이 살아있다고 정말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면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믿음을 통해 경험을 하고, 경험을 통해 믿음이 더 성장합니다. 믿음의 순종이 없이는 경험이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디모데후서를

잘 읽어보시면, 바울은 얼마나 많은 유혹과 위협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 표현대로 ‘산통’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생명을 마주하는 포기 못 할 그 기쁨이 있는데 말입니다. 복음에 정진하지 못하는 것이죠. 바울은 그 행복을 알잖아요. 그런데 바울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이렇게 교회에서 함께 예배했던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데, “내가 복음을 들어봤는데, 별거 없더라”, “나도 이런저런 훈련받아 봤는데, 그렇게 세상에서 못 살더라.” 이런 이야기가 바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박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복음이어도 내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며 버려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는 복음을 자랑하지요. 그러나 누군가는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같이 복음을 들어도 그것이 진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것으로 정말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내 삶의 보조용품 정도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좋긴 하지만, 세상을 이길 힘은 없다고 말합니다. 혹시 이 시간, 이 설교를 듣는 사람 가운데서도 아직은 복음이 정말 내 삶의 해답이고, 가장 큰 행복이고,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가 되지 않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눈이 밝아지고 깨닫게 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해요. 저도 교회를 다니자마자 복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고, 알아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귐’은 순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사귐은 알아가고 가까워져 가는 시간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성경적 표현을 볼 때, 우리가 알아가고 깨달아가고 신뢰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해요. 알아야 믿죠. 신뢰해야 인생을 걸죠.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서 조금씩 성장하듯,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계속 변해갑니다. 찾는 이에서 탐구자로,

탐구자에서 회심자로, 회심한 후에도 조금씩 자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잃어버렸다가 다시 용기 내어 시작한 분들은 “나는 왜 이렇게 잘 못 느끼지? 모르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 걸음씩 하나씩 잘 배워가고 담아가고 들은 것을 잘 새기며 고민해보시면 됩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부모와 소통도 하고, 나중에는 더 커서 부모와 함께 일하는 것처럼 신앙도 그렇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곁을 먼저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아이라서 아직 이해하는 것이 한계가 있고, 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너무나 다르기에 아직 믿고 따르기에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먼저 회복시킨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복음의 진리를 때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복음이 변화시킨 사람들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나도 복음을 향해 정진하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과 같은 그 고백과 그 삶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롬 10: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나의 삶의 참된 답을 찾는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누구나 이 복음의 자기의 이야기로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3. 복음으로 낳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권면 부분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제가 말씀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로 회심 이후 온전하게 삶을 드렸던 바울의 권면을,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잘 들어주십시오. 내가 몹시 사랑하는 아들, 그대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그대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대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가 받은 특별한 사역의 은사도 떠오릅니다. 그 은사를 계속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대는 내가 주를 위하여 갇힌 사실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나는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내게 들은 것들을 잘 기억하여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주께서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잘 지키십시오. 그대의 가는 길이 험할지라도,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용감하게 참고 견디십시오. 젊음의 방종을 피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사람들이 신앙을 빙자한 ‘트집 잡기’를 못하게 하십시오. 그것은 믿음을 조금씩 갉아먹어, 모든 이들을 지치게 할 뿐입니다. 그대는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진리를 쉽게 풀어 분명하게 전하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신앙을 내세운 잡담도 잡담일 뿐이니 멀리하십시오. 경건한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독약처럼 영혼에 쌓이게 마련입니다. 공허한 논쟁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그런 논쟁은 언제나 다툼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단호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바로잡아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일깨워 진리로 돌아서게 하실지, 마귀에게 사로잡혀 마귀의 심부름을 하던 그들을 언제 어떻게 마귀의 덫에서 벗어나게 하실지, 그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기만 알고, 돈을 사랑하고, 으스대고 거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를 무시하고, 버릇없이 굴고, 상스럽게 행동하고,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고집을 부리고, 남을 헐뜯고, 난폭하고, 잔혹하고, 남을 비꼬고, 배반하고, 무자비하고, 허풍을 떨고, 정욕에 빠지고, 하나님을 몹시 싫어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그들은 참된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대는

나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삶에 함께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고난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파렴치한 사기꾼은 계속해서 믿음을 이기적으로 이용해 먹을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도 거짓에 속으며 사람들을 속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우고 확신하는 그 진리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펼치려고 하시니, 그대는 복음을 힘차게 선포하십시오. 그대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자극하고 훈계하고 설득하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그 일을 단순하게 지속하십시오. 좋은 시기든 힘든 시기든 복음을 살아있게 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그대의 일을 빈틈없이 하십시오.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환호 소리, 곧 하나님의 박수갈채 뿐입니다. 이제 그대가 내 사명을 이어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하시기를, 은혜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바울로부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참 사랑했습니다.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너도 위험하니 어서 피하라”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이미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 바울이었기에, 그래서 디모데에게 꼭 해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도 나처럼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삶에 아무리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바울이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따랐던 것처럼, 디모데도 그 길을 따라서 끝까지 걸어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촉구합니다. “너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부터 복음을 잘 간직하고 누리며,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도 복음을 잘 전해주면 그 복음의 능력이 너에게도 그들에게도

역사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가 꼭 전해주고 싶은 마지막 권면이고, 설교였습니다. 저는 디모데후서를 묵상하며, 제가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해봤습니다. 물론 때로는 “괜찮아, 힘내”라고 말해주는 것도 필요하죠.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말 제가 사랑한다면 해야 하는 이야기는 “나와 함께 복음으로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저 또한 여러분을 세상 앞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서로를 잘 붙잡고 함께 복음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사귐 가족 여러분. 우리 함께 복음으로 삽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고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버려도 그분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니, 그분은

자신에게 불성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너희 모든 사람들아, 악을 물리쳐라. - 디모데후서 2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