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에 유대인의 정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자리사 받은 사람들이 어 움직이니이는 천사가 가끔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서 그은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고자 하느냐 주여 우리 움직일 때에 나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함께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이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아멘. 어, 우리가 방금 읽은 이 본문 말씀은 그래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이야기 중 하나인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서 일어난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입니다. 어, 베데스단은 어, 사실 벳이라는 단어와 헤세드가 합쳐진 단어인데요. 아마도 이 두 단어 중에서 어, 여러분들의 헤세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익숙하실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뜻이죠? 네. 익숙하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의 자비 또는 사랑, 은혜 등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붙은이 베이라고 하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두 단어가 합쳐지면 베데스다의 이름 뜻은 자비의 집 또는 은혜와 사랑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이 연못은 양문 곁에 있었다고 성경이 기록하는데요. 어이 사진을 보시면 어 너무 작네요. 저기 어 제가 별표로 표시해 놓은
감남산 바로 옆에 있는 곳이 바로 어 양문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데려온 양들이 지나다녔던 문이라고 해서 양문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 문 곁에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어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곳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재물인 양을 깨끗이 씻기 위한 장소였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저 문을 통해서 양을 데리고 들어온 다음에 곧바로 베데스다 연못에서 양을 씻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가지고 성전으로가 제사를 드렸던
것이죠. 이러한 베데스다 연못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어 세번역 성경에는이 행각을 주랑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기둥과 지붕이 있는 통로를 의미해요. 마치 이 사진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런 통로가 다섯 개나 있었다라고 하는 것은 이 베데스다 연못이 꽤나 규모가 큰 곳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아마도 이 주랑들,이 행각들마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던 거 같아요. 특별히 중증의 환자들 말입니다.이어서
성경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안에는 많은 자들 곧한 자들과다는 자들과 중자들이 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움직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전사가 제대로에 불을는데 우리 움직인 뒤에 먼저 들어가는 무슨 면이 열렸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 베데스나는이 연못은 양을 씻기는 장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왜인지 양들뿐만 아니라 사람들 특별히 환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대요. 메시지 성경은 이 3절을 몸이 아픈 사람들이 수백명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체
왜 그 많은 아픈 사람들이 병원도 아니고 이 베데스다이 행각이 주락마다 사리를 잡고 모여 있었을까요?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희망 때문이었어요. 내 병이 낳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희망 말이죠. 사실 베데스다에는 한 가지 신화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져 놓는데 그 뒤에 그 연못에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상관없이 다 낳는다는 거예요. 환자들에게 이야기는 아주 희망적인 메시지였겠죠. 그래서 그 희망 때문에 그곳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나도 어쩌면 나을지도 몰라. 내 병이 고침받을지도 몰라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요. 자비의 집, 은혜와 사랑의 집이라고 하는 이 베데스다의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신화 같아 보이고 또 그런 풍경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희망에는 전제 조건이 있었어요. 바로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병이 낳는다는 거예요. 베데스다에 들어간 모두가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들어간 1등만 치료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의 조건이었습니다.
자비의 집을 찾아온 그 모두가 자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이긴 단 한 사람만이 그 집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앞서 성경을 쭉 읽었지만 이곳에 모인 환자들이 그저 보통 일반적인 수준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죠.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은 시각 장애인들. 다리를 절기 때문에 뛰기는 커녕 걷기조차 어려운 사람들. 게다가 그중에는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중풍병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연못에
물이 움직이는 것을 애초에 볼 수 없거나 보았어도 그곳까지 달려갈 힘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의 아픔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것이죠. 이름은 자비의 집인데 그곳에 자비가 없습니다. 무자비한 경쟁의 전쟁 속에서 단 한 명 1등만 추리겠대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죠. 이게 얼마나 가슴 아프고 아프고 또 잔혹한 상황인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낳기 위해서는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앞을 못 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내가 물이 움직이는 걸 가장 1등으로 봐야 하니까. 내 뒤에 저 따라오고 있는 저 사람이 나보다 다리를 더 저는 사람인 걸 안도해야 해요. 마비 때문에 움직일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럼 오히려 좋죠. 왜죠?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하니까.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 놓은 경쟁이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남의 약함이 나의 유리함이 되는 것. 남의 실패가 나의 성공이 되고 남의 미끄러짐이 나의 디딤돌이 되는 것. 그래서 그가 겪는 그 고통을 내가
알지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짓밟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아마도 이 잔혹한 자비의 집에서 자비를 맛본 사람은 그들 중에 그나마 조금 더 나은 형편인 사람, 그나마 조금 더 덜 아픈 사람 단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자비의 집은이 한 사람에게만 자비와 은혜가 가득한 집이었겠죠.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같은 희망을 바라고 모여 있지만 실패의 자리에 여전히 누워서 남의 성공과 치유와 회복을 바라만 봐야 하는 희망 고문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어 그런데 여러분 저는 어쩌면 이러한 세상의 잔혹한 경쟁과 희망 고문에 우리도 지쳐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만 행복 소망 뭐 희망 꿈 이런 거 이야기하지 않죠. 교회 박 세상도 똑같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마치 이 자비의 집 베데스타처럼 겉은 번지르를 하고 정말 그 가운데 자비와 은혜가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그 속에는 고통과 절망이 더 가득한 듯 보입니다. 어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희망고문이란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하니까 이렇게 정의하더라고요.
거짓된 희망으로 오히려 괴로움을 주는 행위. 세상이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해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가 누리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모두가 누릴 수 없는 것이 더 당연해 보이는 그런 거짓된 희망과 거짓된 행복입니다. 마치 베데스타 연모처럼 조건이 붙거든요. 너도 행복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러려면 돈이 더 있어야 해. 너의 지금의 현실 얼마든 바꿀 수 있어. 그런데 그러려면 공부 더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가야 돼.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가져야 해. 더 예쁜 미모를 가져야 해.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이 조건을 성립시키려고 잔혹한 경쟁 사회로 뛰어듭니다. 죄를 제쳐야 내가 더 벌 수 있으니까. 얘를 밟고 일어나야 내가 더 좋은 성적과 스펙을 만들 수 있으니까. 어 하다하다 이제는 관계까지 경쟁하는 사회가 현대 사회인 거 같아요. 부모님이 가진 재산이 얼마인가? 그래서 내가 얼마나 더 유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는가를 어린아이들이 비교해요. 서울에 집에 있는 부모가 자녀의
스펙이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에 더 많은 재산을 부모는 자녀에 더 잘 나가는 출제를 바라죠. 어디 이쁜일까요? 어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것까지도 할 수 있어. 내가 이만큼 손해 보는 것도 아깝지 않아라는 그런 사랑보다이 사람이 과연 나를 어디까지 높여 줄 수 있을까? 얼마만큼 나를 유리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따지며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나와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요. 속된 말로 찌질하다라고 여겨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쉽게 친절해요. 왜냐면 걔는 내 상대가 아니니까. 그런데 조금이라도 내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조금이라도 나랑 동등해 보이는 비등비등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린 한없이 매몰 차고 무정합니다. 걔가 내 자리를 뺏을 것 같거든요. 모두가 세상에 말하는 희망과 행복의 전제 조건을 성립하기 위해서 모두가 애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것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평생을 애쓰며 살아요. 그런데 여러분
주의를 들러보면 정작 희망을 노래하고 정작 행복을 맛보는 사람은 모두가 아니라 매우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아니 어쩌면 거의 없는 것 같아 보이죠. 애초에 세상이 만들어 놓은이 피라미드 시스템 자체가 모두가 누릴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희망은 모두에게 주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는 그래서 우리에게 오히려 더 괴로움을 주는 거짓 희망 고문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세상을이 병자가 38년을 마주하고 있었죠. 여러분, 지금도
38년은 아주 긴 세월이잖아요. 제가 38살이 되려면 앞으로 11년을 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어 38년된 병자래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세월에 결코 짧지 않아요. 고통이 가음도 안 되는 긴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굉장히 짧았거든요. 고대 그리스균 수명은 어 35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30대를 넘겨서 40대로 가기가 굉장히 힘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당시에 38년은 어느 한 사람의 일생보다 더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어쩌면 누군가의 평생이었을지 모르는 그 긴 시간을이 병자는이 거짓된 희망속 희망에 속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오늘날에 우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죠. 누군가는 오랜 세월을 그리고 누군가는 평생을 거짓과 고통 속에 헤매는 모습이요. 그런데 어느 날이 희망 고문의 집에 진짜 희망이 등장합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누 있는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보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제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다 먼저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셨어요. 그리고 주님은 이미 그의 상황을 알고 계셨대요.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시죠. 낳고 싶으냐? 어이 본문에서 병자를 어 헬라어로 아스테네이아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장애를 가진 표 어 장애를 가진 것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는데요. 어 동시에 극도로 쇠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어요. 그는
이 38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장애와 질병 때문에 쇠악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쇠악해진 것이 비단 몸뿐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는 지난 38년 동안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극도로 쇠악해져 있었습니다. 자신은 움직일 수 없어 누워했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연못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고통과 그 한계를 여실히 느꼈겠죠. 아, 도저히 내 힘만으론 저 연못에 들어갈 수 없어.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곳에 있는 모두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급해요. 그래서 이 병자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경쟁 사회 속에서 이 환자는 외로움에 지쳐갔겠죠. 그리고 이런 그의 마음은 낫고 싶으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낳고 싶니라고 물으셨을 때 그가 예라고 대답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낳을 수 없었던 이유를 나열합니다. 나를 연못에 넣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낫지 못했어요.
제가 나보다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내가 아직도 낫지 못했어요. 여러분, 저는 이 대답에 보이지 않는 한 문장이 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낳고 싶으냐? 예, 주님, 제가 낳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이이 세상이 다 제맘 같지는 않네요. 자비를 말하지만 자비가 없는 이 뻔뻔한 경쟁 사회에서 아무도 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들도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전히 저는 몸도 마음도 아픕니다. 그의 지친이 38년의 시간이 저는 이 대답 속에 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는요이 병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지친 오랜 세월을 이미 다 아시고 계셨대요. 그리고 나서 그를 찾아가시고 그에게 물으셨던 거죠.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도 내 맘 같지 않은 그런 인생들이 있으시죠. 그 인생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세요.이 병제의 고통과 서음과 외로움이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겹겹이 쌓였겠어요. 설명한다고 해서 다 설명되지도 않고 하수연한다고 해서 쉽게 풀어지지도 않을 그런 삶이
그는 너무 오랜 세월을 그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그 오랜 세월을 다 알고 가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이날 처음 봤을 가능성이 더 많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를 알고 계셨죠? 어떻게 이 병자가 다 말하지 않았는데 다 설명하지도 않고 먼저 찾아와서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주님이 먼저 알고 그를 찾아가셨냐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작정하고 찾아오신
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거짓과 속임수에 속아서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뺑뺑이 같은 삶이 허덕이며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들은 깨지고 상처받고 지쳐서 쇠악해졌습니다. 해도 안 되나 봐. 그냥 다 이렇게 사는 건가 봐. 그런데 그렇게 지쳐 있는 우리의 삶을 주님이 다 아시고 우리를 만나시려고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세상에 던져주는 답이 희망 고문이라는 걸 우리가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그나마
알고 있는 답이 이것뿐이라 계속 거짓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진짜 답을 들고 진짜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인 복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그러셨고 아무도 찾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러셨고 모두가 꺼려하고 모두가 조롱했던 창녀들과 세리들 죄인들에게 그러셨습니다. 대체 왜 그런 사람들을 만나시느냐고 대체 왜 그들과 어울리느냐고 비안냥거리는 무리에게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세요. 왜냐고? 나는 이들을 만나려고 왔으니까. 그게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이니까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바리새인들과의 성관들이 제자를 하였고 하시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인사가 쓸데없고는 자에게 쓸 때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불러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느라 온 우주의 만물에 창조주이신 분이 피조물의 쓸모가 되시려고 기꺼에 하늘보자를 버리고 찾아오셨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이것을 제가 이 설교에 어울리게 조금 바꿔 보자면 너희가 만약 이 경쟁 사회 속에서 이 희망고문의
사회 속에서 정말 1등할 자신이 있다면 너희에게 내가 쓸데 없지. 그러나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들, 그 희망 고문에 지친 사람들에게야 내가 쓸모가 있단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나의 쓸모가 필요로 하다고 주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그들을 만나려고 왔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베데스타 본문에서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병자가 병고침을 받을 만한 그 어떤 믿음과 조건도 없었다는 거예요. 적어도 이 본문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에선 말이죠. 그냥 예수님이 그를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그를 고치시죠.이 이 과정에서이 병자가 한 것이라곤 자신이 마주한 그 한계와 현실에 대한 하소연 어쩌면 불평 불만뿐이었습니다. 쟤 때문에 제가 못 나왔습니다. 얘가 먼저 들어가서 내가 아직도 이 모양입니다. 어찌 보면 이 병자는 주님을 만날 준비가 덜된 것처럼 보여요. 어쩌면 주님께서 일으키신 그 회복에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준비되지 않은 이 연약함이이
병자에게만 있었을까요? 성경에 등장해 주님을 만났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아니, 그들을 논하기 전에 오늘 우리는 준비가 되었나요? 주님을 만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정결함, 떳떳한 거룩함이 오늘 우리에겐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준비가 완벽히 되어야 조건이 다 갖춰져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여기 있는 우리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과
부정함, 불결함을 이미 다시고 그저 찾아오시죠. 네가 병들었기 때문에 네가 부정한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왔단다.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우리 속에서 강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람을 확하셨느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었을 때에 이미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누가 가장 매력적인가, 누가 가장 사랑받을 만한가를 따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경쟁시키죠. 네가 이만큼 달성하면, 네가 이런 것을 이루면 너를 매력적으로 봐 줄게. 인정해 줄게. 사랑해 줄게.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매력적이지 않을 때, 사랑스럽지 않을 때, 도저히 인정받을 수 없을 때 그는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정하시고 품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랑의 집에 사랑이 찾아온 것이죠.
너는 나를 위해서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데 이런 깨어진 물음을 던지는이 땅에 내가 너를 위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다는 사랑의 확증으로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짜 희망과 진짜 답을 알려 주시죠. 아마 이 본문에 등정하는이 병자도 예수님에게서 그런 희망을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베데스타 신화에 대한 희망이었던 거 같아요. 1등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 나는 저 연못에 당신이 나를 1등으로 넣어 준다면
내가 나을지도 모르죠. 여러분, 저는 이 병자의 이런 삐뚤어진 희망이 그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에게는이 경쟁에서의 승리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 유일한 답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이 베데스다 신화를 듣게 되나요?이 이 밑도 끝도 없는 경쟁의 신화를 우리는 너무 많이 듣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인냥 속으며 살아가죠. 그리고
이젠이 거짓 해결책이 교회 안으로도 스며들어서 마치 예수님이 나를 경쟁해서 이기게 해 줄 어떤 보너스 카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돈 돈 많이 벌고 예수 잘 믿으면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죠. 예수 잘 믿어서 성공하는 1등하는 그런 삶을 말입니다.이 38년 된 병자도 어쩌면 예수님께 그런 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네가 낫고 싶으냐라는 그 물음에 아 그동안은 내 고통에
아무도 관심 같지 않았을 뿐더러 내 고통을 안다고 해도 아무도 날 저 연못에 넣어 주지 않았지만 나에게 관심을 갖는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나를 저 연못에 1등으로 넣어 준다면 내가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의 마음이 그 대답 속에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가 알고 있는 해결책이 예수님이 아니라 그 베데스다 신하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답하는 그에게 그가 생각하던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를 고치세요. 진짜 자비와 사랑, 은혜의
원천이 되신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진짜 회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몸소 보여 주시죠.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그의 자리를 어시고 돌아오더라. 그 사람은 나아서 자기를 어서고 돌아왔다. 그날은 안식일었다. 베데스다를 통해서만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온전히 예수님만을 통해서 병이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아무리 놓여 있어도 그 수많은 안식일을 지났어도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던 그가 주님이 그의
삶에 오시자 그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자는 알게 되었겠죠. 아, 진짜 베데스는 저 연못이 아니라 내 앞에 계신 이분이구나. 진짜 자유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진짜 베데스다를 만난 그는 38년을 누아했던 고통과 외로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갑니다. 그가 걸어간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성경이 자세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나 새로운 삶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때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서 말씀하셨다. 내가 갈끔이 나왔다. 다시는지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아픈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주님께서 그에게 당부하는 한 가지는 이것이죠. 다시 고통에 빠지지 않게 죄를 짓지 말아라. 이건 우리의 깨어짐과 우리의 고통이 죄로부터 온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을 때 죄의 고통이 비록서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삶의 해결책, 내 삶의
회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게 되었다면 거짓말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진짜 복된 소식,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를 네가 알게 되었다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주님이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메시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어요. 얼마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너는 건강해졌다. 죄짓는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 만일 되돌아가면 더 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만난 그 한 번의 만남으로 만족하길 원하지 않으세요. 아, 주님을 만났더니 내가 이렇게 고침받았어. 내 38년의 병이 끊어졌어 이것으로 만족하고 그가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깨어짐과 고통, 연약함과 부정함을 모두 아시고 주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보여 주셨죠. 우리를 살게 하는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 무자비한 경쟁의 희망 고문 속에서 진짜 자유할 수 있는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부하세요. 우리에게도 똑같이요. 이제
너희도 다 알았잖아. 그러니 돌아가지 마렴. 복음을 안 사람들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를 만난 사람들께 살아야 한단다라고 우리에게도 당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진짜 회개하고 회심한 사람은 그의 삶의 변화로 변화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 나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그의 삶에서 그분의 나라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어, 저는 어릴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뭐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별한 체험, 어떤 표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아니면 뭐 따뜻한 무언가를 느끼거나 뭐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꽤 오랜 시간 부러웠고요. 저에게도 그런 일들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아주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게 인격적인 만남을 증명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것이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그 믿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는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그런 체험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이제 알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좁은 길, 그 고난의 십자가 십자가의 길을 보고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을 주님이 더 원하신다는 것을 전 이제 압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남들이 듣지 않으려고 하는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 애쓰는 삶이 주님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저는 이제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베데스다 희망 고문의 집이라고 잡았는데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도 이와 같죠. 희망고문의 대한민국, 희망고문의 현대 사회. 행복을 말하지만 행복이 없고 꿈을 말하지만 꿈꿀 수 없고 평범한 삶도 이제 우리에게 사치가 되어가는 현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셨대요. 괴로움만은 우리 삶에 주님이 먼저 오셔서 개입하십니다. 어 풍삶초에 청소년 버전인 푸른바람이 너를 기다려 보면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실패해도 괜찮은 나라. 여러분이 병자는 나고자 실패자에 더 가깝죠. 38년을 고통 속에 살던 그는 세상의 기준에서는 나고자예요. 그래서 그 병 좀 한번 고쳐 보겠다고 나고된 자신의 현실 한번 바꿔 보겠다고 베데스다 연못과에서 살다시피 머물고 있지만 그곳에서 그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찾아 떠난 그는 그곳에서조차 자비의 집, 은혜와 사랑의 집에서조차 실패자였습니다. 나고와 실패로 얼룩진
그가 예수님을 만나죠. 더 정확히 말하면 괴로움과 실패가 가득한 그의 삶에 주님이 찾아가셔서 개입하세요. 주님을 만난 그는 이제 1등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왜냐면 주님이 그를 직접 고치시고 주님이 그를 안식하게 하시고 주님이 그에게 진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죠. 실패해도 괜찮은 나라가 베데스타 신화의 1등 공식과 룰을 깨고 그의 삶에 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병자와 같은 깨어짐, 죄로 인한 고통이 있죠. 그렇다면 이 죄만 해결하면
우리도 깨어짐과 고통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공식 룰일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이 공식을 성리시킬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을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것을 세상에서 아무리 답을 찾아도 그 답은 희망 고문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원래 룰대로 하면 우리도 모두 다 탈락자, 실패자, 나고자일지 몰라요. 우리도 다 그렇게 끝났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식을 깨고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내가
아직 매력적이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을 때 인정받을 수 없을 때 주님이 먼저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답이 없다는 걸 아시고 그분이 직접 답이 되어 우리 곁에 찾아오세요. 가능하지 않은 것을 그가 오셔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절대 받을 수 없던 것을 그가 오셔서 갑없이 주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실패와 나고자로 끝나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삶을 그가 다시 일으키시고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부하시죠. 다시 이 거짓된 삶으로 돌아오지 마. 희망고문의 삶으로
돌아오지 마. 넌 이제 진짜를 알잖아. 너에겐 이제 내가 있잖아. 그리고 이걸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거짓과 무자비한 희망 고문에 지치셨다면 여러분을 찾아오신 주님을 진짜 희망과 진짜 자비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자비가 없는 땅에 풍성한 자비가 되어 오시고 사랑이 없는 땅에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으로 오시고 은혜가 없는 땅에 흡족한 은혜로 오신 주님이 여러분도 그 병자에게 그러셨듯이 실패해도 괜찮은 진짜 자비의 집으로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