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다루는 4번째 설교입니다. 이 설교의 큰 개요는 <하나님 나라의 도전>이라는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제가 소화한 방식대로 다시 설교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지난 3편의 설교를 띄엄띄엄 진행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압축해서 나누며 오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스스로 기억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정보는 탄생의 순간에 그것을 지켜봤던 사람에 의해서 내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만약 우리의 탄생 때 어떤 일로 우리에게 흉터가 생겼다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그 흉터를 안고 살아가면서 그것의 결과는 보지만,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원인은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결과 이후의 모습대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죄가 있기 전에 대한 정보가 없고 스스로 그것을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마치 죄악 이후의 모습이 원래
창조하셨던 모습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적어도 그분은 우리의 첫 모습을 알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서, 왜 지금 죄의 흉터가 남아 있는 것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성경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장 처음 말해주는 이야기가 그런 것들이죠. ‘창조 본연의 아름다움’과 ‘죄가 망가뜨린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바꿀 수 없는 것, 인생이란 다 이런
것이야 쉽게 말하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이 아닌 죄로 깨어진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으로 인해서 충만하게 채워졌어야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그분이 채우고 계셨던 부분에 있어서 결핍이 있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정서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의 사이가 안 좋고, 부모와 자녀 간의 사이가 안 좋은 상태라면 참 그 공기와 분위기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뭔가 마음의 평안함이
없죠.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근원적 관계가 깨어져 있다면,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안정감을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 결핍이 결핍인 줄 모르기에, 그것마저도 인간에게 있는 당연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채워주시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성경을 몰라도 자신의 삶이나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질문하고 고민하고 뭔가 더 나은 답을 찾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느끼는 우리 삶의 결핍과 공허가 어쩌면 우리에게 답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질문하고 답을 찾게 되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에는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가 있었으니, 성경은 그 존재를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온전한 연합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 깨어진 세상의 주관자는 ‘사탄’이죠. 사탄은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통해 답을 찾는 것을 방해합니다. 가장 잘 먹히는 수법은 그 결핍의 근거가 다른 것에 있다고 거짓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지금 ‘만족’이 없는 것은 남들에게 있는 ‘이것’이 없기 때문이야.” 사탄의 가장 전통적인 유혹 방식입니다. 특별히 SNS
문화가 삶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사탄의 전략은 더욱 잘 먹힙니다. GDP로 따지면 189개국 중에 127위에 해당하는 가난한 나라인 ‘부탄’은 행복지수를 조사하면 1위가 나오는 나라였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삶에 대해서 만족하며 살아갔어요. 그런데 이 나라가 지금은 행복지수가 높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도 휴대폰이 보급되고 SNS가 시작되면서 자신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은 그 비교 속에 더 이상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교에 빠진 사람들은 행복하지도 않고,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끝이 없는 경주를 하게 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 또한 우리를 점점 더 힘들고 비참하게 합니다. 한국은 결코 이런 부분에서 안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OECD 국가 중에 한국은 경제력으로는 상위권임에도 행복지수는 57위로 최하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경제력이 좋은 나라인데,
개인이 느끼는 행복은 최하위에 해당하는 행복하지 않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치열하게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며 살아가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결혼이 늦어지는 이유, 출산율이 낮은 이유도 다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한국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 국민의 기본적인 ‘성실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나라를 성공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이미 과거에 우리가 동경했던 옆 나라 일본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고개를 젓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원래 없을 때는 소망으로 버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괜찮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무엇이 주어진다고 그것이 나를 허무와 공허로부터 구원하지 못함을 조금씩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있던 소망마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먹거리와 건강 케어 기술은 나아졌는데, 우리의 정서적, 정신적 건강은 나날이 위기 속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럼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답인가? 정말 세상이 말하는 그 소리들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도 괜찮겠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우리 삶이 너무 힘겨워서, 그런 고달픔을 달래줄 기대로 종교를 찾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치고 바쁜 삶을 위로받으려고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고, 그 삶을 위로해주고
응원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와 응원이 진짜 답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해야 하는 것은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해답’, 아니 그 해답에 다가서기 위해 먼저 살펴야 할 깨어짐의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깨어짐의 이유를 알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깨어짐의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흔히 신학적 표현으로 ‘죄’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죠. 그러나 죄라는 단어가 자칫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혼재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도 이제 모두 이해하다시피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저지르는 세상의 불법들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죠. 바로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중심성’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태도를 세상적 가치관에서는 죄라고 여기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너의 삶의 주인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세상적 가치관과 성경적 가치관이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중심성이 한쪽에서는 우리를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이 가장 추구해야 하는 옳음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결코 ‘나를 따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세상에 살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 삼는 것’만 선택하지 않도록
하면 성공입니다. 이것은 에덴에서부터 사탄의 전략이죠. “아담, 너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아. 네가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어. 네가 너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 그 말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자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태도를 나의 삶의 가치관으로 삼는 순간, 원래 우리의 삶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반대로 역산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중심성으로
인생을 살아봤잖아요. 그럼, 거기에 우리가 원하는 그 삶이 있었는가? 행복이 있었는가? 각자가 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그 세상, 그 관계가 아름다운가? 거기에 해답이 없었다면 이제 다른 선택을 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이 없는 삶을 선택한 이후,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에는 에덴에서 벗어난 후, 곧바로 형제가 형제를 무력으로 죽이는 ‘약육강식’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원래 인간은 서로 연대하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은 나를 위협하거나 내 것을 빼앗아 갈 잠재적인 나의 경쟁상대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살다 보면, 사람은 ‘세상의 법, 힘의 논리, 경쟁에서 이기는 비법’을 자연스럽게 배워갑니다. 생존을 위해 더욱 터득하고 열심히 전수하고 실천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망가지죠. 인간의 내면이 강퍅해지고, 세상은 힘겨운 곳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누가 멈출 수 있을까요? 나 혼자
멈추면 나만 죽어 나갈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 안에 모두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용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선택을 책임져주실 존재가 나에게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에 개입하십니다. 깨어진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개인과 공동체의 모습으로 보여줘야만, 세상이 새로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보여주고자 했던
삶의 모습이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기에 하나님은 가장 약한 족속, 주변에 비하여 너무나 약하여 자신의 생존도 지켜낼 수 없는 민족을 택하십니다. 만약 힘 있는 민족이 생존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힘 때문으로 자신들도 주변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가장 낮은 계층에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이 세상에 새로운 삶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늘
그렇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거꾸로 행하십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에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보여주셨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유능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갈릴리의 촌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시고, 본인 스스로도 무명의 랍비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로마 정부를 뒤에 업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외치는 모습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헛소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균열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가장 근원적으로 원했던 그 모습을 일깨우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고, 그분의 가르침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터무니없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마음에 받아 되새길수록 함께 그 세상을 꿈꾸며 살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원적으로 깨어지기 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복음의 DNA가 있어요. 답이 없다고 생각하니 꿈꾸지도 못했지만, 성경을 통해 우리는
‘회복의 길’을 배우고 나니, 우리도 꿈꾸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매우 특별한 부분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모든 창조 세계와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성을 본받아 문명을 만들고 이루어갈 능력도 받은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특권인데, 동시에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잘못된 자신감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창조 질서대로 살아요. 타락도 인간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세상을 구현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고,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헛된 꿈을 꾸는 것도 인간입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 이룩한 세상이 ‘깨어진 세상’인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똑똑해요.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면서 뭔가 이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의 한계와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진짜 대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근원적으로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인류의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의료 기술과 약으로 말입니다. 다만 그것이 더 나은 삶을 만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최근의 뉴스에도 많이 나오지만, 최근에 스위스의 존엄사 이슈가 있지 않습니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고, 죽을 권리를 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정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이 정도 임상을 해봤으면, 이제 성경이 주는 답을 붙들고 살아봐야죠. 그냥 머리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을 걸고
살아봐야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깨어짐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결과이므로,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회복의 길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그 회복의 길을 주십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붙잡을 수 있는 생명의 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어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했다면, 신약 이후로는 약속의 성취이신 메시아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오셨더라도 우리의 현재 삶은 그냥 깨어진 세상의 원리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쪽 복음이 됩니다. 우리의 현재 삶은 회복되고 치유될
수 없는 여전한 허무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한국에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은 것은 예수를 믿어도 현재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현재의 삶에서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깨어진 세상에, 깨어진 삶에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구원의 현재적 경험은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죠. 현재의 삶에서 내가 갖고 있던 여러 깨어짐이 회복되어 갈 때, 우리는 온전한
구원의 완성을 진짜로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현재성이 구원의 미래적 완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실제적으로 소망하게 합니다. 물론 우리의 현재적 삶은 ‘깨어진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공존 속에 살아갑니다. 내 마음이 늘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현재적 삶은 종종 내 마음을 깨어진 세상에 집중하게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죠. 주님을 바라볼 때는 평안함과 소망으로 걷지만, 자기의 발밑을 바라볼 땐 두려움으로 빠집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도 가르치십니다. 좋은 씨앗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결국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라지는 궁극적인 종말을 맞을 것이고, 선한 사람들에게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함께 가르치신 것은 ‘회개’의 중요성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회개 없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의 삶의 정체성을 바꾸는 회개를 ‘회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을 필요 없다고 외면한 우리의 교만이 얼마나 무지했던 것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삶에 구원이 시작됩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의 원리대로 살고, 자기중심성으로 살면서 그로 인해 지치고 상한 내 마음을 위로받기만 원한다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회심은 내 삶의 자리를 바꾸고, 내 소속과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내가 주인 되어 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눈물을 많이 흘리냐 아니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어떤 동요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내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여전히 나에게 하나님이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없고, 나는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후회할 것은 있어도 회개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을 저 자신을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제 성격상 저는 정말 열심히 세상의 추구를 따라 경쟁하며 그 방식대로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서 이기적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그냥 조금이나마 나은 한 조각의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제 내면도 황폐해졌겠죠. 그 세상이 나에게 던져주는 작은 결실, 영원히 목마른 그것을 작은 위안으로 누리며,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내달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허무함과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 그 치열한 경주 속에 남은 외로움을 안고 삶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르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복음을 알고,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저의 삶을 주님께로 돌이켰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저와 같이 모태신앙으로 늘 교회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진짜 방향 전환을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같은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더욱 복음을 선명히 이해하고, 나의 삶의
원리가 정말 세상과 달라졌는지, 내 안의 주도권이 정말 하나님께 넘어간 것인지 잘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면서도 내 삶이 교회 안에 있으므로 회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가 하나님 없다면 어떠했을까? 그리고 내 삶이 하나님께 속한 후 내 삶의 어떤 부분이 변화되고 회복되고 채워지고 있는가? 점검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감탄하고 그분
앞에 감읍하게 됩니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은 내가 함부로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아무 때나 돌이킨다고 받아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용납하여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돌아오는데 필요한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삯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분은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값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그분이 가진 아들의 지위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삶에서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다시 그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단지
죽으면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가장 먼저 깨어진 세상의 원인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진단하시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 세상과 함께 뒹굴면서 자신과 주변 사람과 세상을 망가뜨리며 살 것이냐고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은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의 죄는 스스로 감당하시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이상 그렇게 삶을 허비하며 살지 말고 넘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껏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았던 삶을 경험했는데, 남은 인생도 그 방향으로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려고 왔는데, 혹시 우리는 여전히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달짝지근한 이야기를 믿으며, 지금 현재의 삶은 어쩔 수 없다며 여전히 세상에 속한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살아갈 것입니까?
회심했다고 고백하면서도 넘어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내 삶을 방치할 것입니까? 우리가 받아들이든지 아니든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내가 그 나라에 속한 삶을 늦게 살아갈수록 우리의 삶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더 깊이 병들어 갈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빨리 선택하고 그 나라에 속한 삶으로 더욱 결단하며 나아갈수록, 우리 안에 있는 깨어짐과 공허함들은 더 빨리 회복되고, 우리는 그 변화된 삶으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아직도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고백을 주저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어떤 길에 둘지 진지하게 고민해주십시오. 반대로 회심의 고백을 하고도 여전히 내 마음과 눈은 세상에 있어서, 깨어진 세상에 살던 옛 모습에 자꾸 휩쓸리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데 실패하는 분이 있다면,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금 깊이 되새기며, 무너지고 있는 나의 모습에 믿음의 방어막을 치십시오. 이미
내 삶에 주인이 되어계신 그분의 다스림을 구하며 나아가십시오. 내 삶은 악의 공격에 내어줄 수 없는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고귀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우리가 그 믿음과 소망 안에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