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에베소에 있는 아들에게" / 강정규 목사

2024-11-03 · 디모데전서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부터 우리는 2주에 걸쳐서 디모데전서를, 1주에 걸쳐서 디모데후서를 설교할 예정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서신서’라고 불리는 책들이 있습니다. 본래 ‘편지’로 쓰인 것이 성경으로 전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중 우리는 보편적으로 13권을 바울의 서신으로 분류합니다. 그중에는 바울이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 같은 책들이 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당연히 공동체를 향한

설교와 권면 같은 형태를 지닙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는 몇백 명이 모이는 곳이 없었습니다. 예배당 자체가 없었고,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 형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라고 하면 에베소교회라는 단일 공동체가 아니라 에베소에 있는 여러 가정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은 후 돌려가며 전달하여 읽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사도 등장했겠죠. 그 외에 바울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 그리고 빌레몬에게 쓴 편지가 이에 해당합니다. 빌레몬에게 쓴 편지는

오네시모의 관계를 가르치기 위한 더 개인적인 목적이라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목회를 위한 조언입니다. 바울이 사역했던 교회에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이고 제자이고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를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목회적 권면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13개의 팸이 있습니다. 제가 모두 목양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구성하고 저를 대신하여 목양자들을 그곳에 세운 것이죠. 저도 매주 우리 팸 리더들에게 짧은 편지를 남깁니다. 목양적

권면과 또한 동역을 위한 것이죠. 제가 예전에 <디도서> 설교를 먼저 했는데, 제목을 ‘크레타섬에 있는 아들에게’로 잡았습니다. 동일하게 표현해서 오늘 설교 제목을 ‘에베소에 있는 아들에게’로 잡았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을 잠시 살펴보면, 이럴 때 <신약의 파노라마>가 도움이 되는데, 1차 선교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습니다. 2차 선교는 마게도니야, 아가야, 헬라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습니다. 이때 핵심 사역지는 ‘고린도’였습니다.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는데, 이때 핵심 사역지는 ‘에베소’였습니다. 3차 선교여행 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죠. 투옥을 각오하고 그곳으로 갑니다. 바울이 예측했던 방식은 아니었으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예언대로 그는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설교 시리즈 후반부를 보시면 됩니다. 로마로 가서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죠.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바울이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이 가택연금 상태로 있을 때, 디모데도 그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 모두 기록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석방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꿈꿨던 비전대로 그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지중해 연안으로 와서 크레타섬 선교를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바울의 지시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로, 디도는 크레타섬의 목회사역을 맡게 됩니다. 그 후 바울은 다시 투옥됩니다. 로마 대화재를 일으킨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희생양 삼아 박해하는 상황에서 바울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 2차 투옥 상태에서 바울은 순교를 당합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2차 투옥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고, 디모데후서는 2차 투옥

상태에서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도 사도행전 설교 때 다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적대 세력들의 충동질에 휩쓸린 무리들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맞고 성 밖에 버려집니다. 그리고 거의 반죽음 상태로 ‘더베’로 향하죠.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하며 몸을 회복하고, 다시 루스드라로 돌아갑니다. 대단한 일이죠. 죽음의 위기가 있는 그곳으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이 루스드라

사역을 통해 그곳에 살던 디모데의 가족이 회심을 합니다. 바울이 다시 2차 선교여행으로 이 지역에 왔을 때, 디모데는 스무 살 전후였을 텐데, 지역 신자들에게 칭찬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로 삼고 함께 선교여정을 이어갑니다. 그 후 약 20여년을 바울과 함께 사역한 것이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믿을만한 동역자이고, 가장 사랑하는 동역자였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바울의 선교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에서도 가장 공을 들여서 복음을 전한 곳이죠.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매일 5시간씩 2년을 꼬박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소아시아에 사는 자가 모두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만큼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지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믿을만한 목회자였던 디모데를 이곳에 파송하여 에베소와 주변 지역 교회들을 돌보도록 합니다. 디모데는 계속해서 목회의

상황들을 바울에게 공유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바울이 목회적이고 목양적인 권면을 담아서 보낸 서신이 디모데전서입니다. 1. 논란의 말씀 성경은 2000년전 팔레스타인과 근동지방을 배경으로 한 권면입니다. 그래서 이 중에 오늘 우리가 보기에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체로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자기 삶에 적용하고자 힘씁니다. 이것은 좋습니다. 다만 ‘성경의 글자’가

아니라 ‘의도’를 잘 읽어내고 삶으로 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의도보다 ‘글귀 그대로’ 적용할 때 종종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려볼까요? 하나님은 노예 제도를 지지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성경의 어떤 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노예 제도를 유지하길 원했던 사람은 ‘이것 봐라, 성경에서도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느냐?’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 읽기가 우리를 망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조금 더 관점을 넓혀서 봐야 합니다. 우선 인간들이 공동체로 모여서 살아가고 땅을 중심으로 농경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다 보면, 여러 이유로 삶의 어려움을 만납니다. 금전적인 이유도 있고, 전쟁과 정복도 있죠. 이래서 종과 주인이 생겨났습니다. 긍정적으로는 갈 곳 없는 사람을 거둬 생계라도 책임을 져주면서 종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가? 이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주셔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노예를 해방하고 땅조차도 원래 처음 분배받았던 지분대로 돌려주도록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죠.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되었다면, 이스라엘은 당대 어떤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심판의 한 이유가 됩니다. 왕정이라는 제도도 그렇죠. 하나님은 왕정 사회를 원하셨는가?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주변 나라를 보고 자신들도 인간 왕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조건적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왕들의 감시자가 되십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의 맥락과 흐름, 또한 동시대의 문화와 성경의 추구점의 차이 등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세상과

공동체를 원하신 것인지 바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한 부분에 어떤 모습이 성경에 허용되었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틀린 이야기가 됩니다. 바로 이와 유사한 논쟁이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 교회 안에서 ‘여자의 지위’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까지도 굉장히 치열한 이슈입니다. (딤전 2: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딤전 2: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실제로 한국의 교단 안에는 여성의 목사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과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 나뉘어 있습니다.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제시하는 구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기준인데 여기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여성 목사, 여성 장로를 임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전서 외에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을 볼 때, 이것이 바울의 기본적인 생각이라면 바울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미 바울은 여성 사역자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세웠고, 특별히 사도행전 18장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가르치는 장면도 있죠. 그런데 바로 그들이 아볼로를 가르쳤던 곳이 디모데전서의 배경인 에베소교회입니다. 또한 바울이 당시 남성 우월적인 로마 사회의 질서와 완전히 부딪히면서까지 외쳤던 것이 남성과 여성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종과 주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울이 외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이 시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떤 가르침을 주었다면, 거기에는 그에 해당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도 이는 에베소라는 지역의 당시 상황성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여성에 대해 영적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질만한 곳이었습니다. 에베소의 유명한 아데미 신 또한 여신이죠. 그러다 보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성들이 다른 곳보다 더욱 특별한 위치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과 진리에 기반한 가르침이 아닌 다른 주장이나 이야기들로 인해, 디모데전서를 쓰는 시점에 에베소는 몇몇 여성 지도자들에 의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조용히 배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는 남자 리더들을 세우는 기준들도 나오는데, 거기에도 중요한 것은 절제와 신중함이 있고 잘 가르칠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공동체의 리더를 세우기 위해 바울이 중요시하는

부분인데, 특별히 에베소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몇 가지 부정적 사례들로 인하여, 디모데전서를 쓸 당시 바울은 여성 리더십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만류하는 메시지를 나타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딤전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가장으로 가정을 잘 통솔하는 것을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고, 여자는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것이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역할에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설명해도 마음이 어려우시면, 그냥 이건 ‘바울이 잘못했다’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성 동역자를 귀하게 여겼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과 같이 이런 실제적인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인 목회적, 목양적 상황에 대해 선배 목회자인 바울이 아낌없이 조언하고 있는 셈이죠. 디모데에게 쓴 편지이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성도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는 위의 문제처럼 특수한 상황에 따른 특수한 적용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보편적인 가르침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어떤 것이 특수한 것이고, 어떤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분류해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바울 서신 전체에

나타나는 바울의 일관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문제의 사람들 당시 대부분의 초대교회들은 모두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혼탁하게 하는 사람들로 인한 거짓 가르침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선교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하여 회심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모든 지역에 흩어진 교회를 직접 목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막 세워져 가는 시기에

초대교회는 리더십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이 흩어져서 목회와 목양을 감당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곳을 그렇게 감당하기에는 아직 복음을 잘 이해하고 가르칠만한 믿을만한 사람들이 충분히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교회들에 다른 복음,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이 침투한 것입니다. 소위 ‘내가 더 신앙생활 경험이 많아’라는 자들이었죠.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과 바울이 세워가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형식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가짜이다.’ 우리가 바울의 선교여정을 보면서도 수없이 봤지만, 사람들에게 제일 잘 통하는 방식이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야, 그 목사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래’라고 말하여 메신저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만들면, 그 목사의 모든 가르침이 다 힘을 잃어버리도록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부분에서 바울은 누구보다 ‘리스크’가 큰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가 있는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악명 높은 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운 곳마다 쫓아다니며, 그런 그의 과거를 들추어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별이 중요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왔고 또 여전히 배우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떤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두고 따를지, 지금까지도 많은 교수님이나 선배 목사님들을 보며 고민을 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히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얼마나 성경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꼭 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치는 진리와 복음이 그들에게 먼저 작동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잘 가르치는 자를 넘어서, 그렇게 본인이 먼저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 그 복음이 그의 삶을 계속 이끌어가고 있는지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 거짓 교사들이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영혼을 사랑하여 실제적으로

헌신하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여 그로 인해 회심이 일어나고 있는가?” 말로만 비판하는 사람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혼란케 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이러한 약점들에 대해서 주목하여 가르칩니다. (딤전 1:3) 내가 마케도니아로 떠날 때에, 그대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명령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의 본질은 사람의 삶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것에 있는데, 비본질적인 어떤 것에 대하여 초점을 두고 사람들을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다 표현하고 그분 안에서 채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이 있고,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이 힘써야 하는 부분이 있기에 그런 것들은 충실히 잘 해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예를 들어, ‘여기는 왜 이걸 하냐, 이걸 안 하냐?’ 이런 부분들로 논쟁을 하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예배가 망하잖아요. 우리가 진짜로 중요시해야 할 것이 있고, 조금은 힘을 빼도 될 부분이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은 그런 분들이 없는데, 예전에는 교회에

와서 왜 여기는 ‘사도신경’을 안 해요, 왜 여기는 ‘성시교독’이 없어요, 여기는 ‘교단’이 뭐예요? 그럼, 바울은 교단이 뭐였을까요? 오히려 고린도교회가 자꾸 그런 비본질적인 것들(은사, 세례자)에 신경을 쓰죠. ‘이 은사가 중요하다, 저 은사가 중요하다’, 혹은 ‘나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다, 바울이다, 아볼로다. 이런 것들이 다 무익한 것들이잖아요.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아니라, 세례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에 관한 바울의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서 보시죠. (딤전 1:5)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딤전 1:6)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딤전 1:7)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고민하고 힘써야 하는 것은,

내가 정말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인해 내 삶이 회복되어가고 있고,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따라가고, 사랑하고 섬기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관심이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그것을 통해서 깨끗한 마음을 품고, 선한 양심을 갖고, 진짜 사랑을 해나가는 것인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 다른 것만 바라보며 헛된 관심과 쓸데없는 토론에 빠져 있는 것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꾸 주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딤전

4:3) 이런 자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딤전 4:5)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뭘 주목했는지 나오죠. 혼인을 문제 삼았어요. 자기가 혼인을 안 하면

그냥 그것은 자기의 선택이지, ‘왜 혼인하느냐?’ 이런 이야기나 하고, 먹는 문제, 즉 음식법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건 먹어도 되고, 이것은 먹으면 안 되고. 사실 음식법은 이미 예수님이 결론을 냈습니다. 우리의 입에 무엇이 들어가느냐가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어떤 말, 어떤 모습, 어떤 행실이 나오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를 통해, 유대인의 음식법을 모든

이방교회에 적용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냈습니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계속 그것을 가지고 “봐라, 여기 구약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너희는 왜 먹느냐, 잘못됐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다 틀린 것이다.” 이러고 있었던 것이죠. 꼭 이럴 때만 성경을 들먹이면서요. 물론 여러분 중에도, 오늘 이 말씀에 갑자기 힘을 입어서 오늘 저녁에 집에 가셔서 소주와 맥주에게 안수를 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이러고 있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바울은

늘 자신은 철저했습니다. 실제로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리더를 세울 때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당시의 그 공동체 안에서도 모범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더 따라가고,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애써 멀리하고. 그분을 알면 알수록 그분이 정말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따르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3. 선한 양심과 착한 행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일종의 간증을 섞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딤전 1:14)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자신도 잘못된 것을 잘못된 일인 줄도 모르고 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믿지 않을 때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주의자 시절의 자신을 ‘믿지 않을 때’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열심히 믿고 있던 때였죠. 그런데 그가 참된 복음 안에 회심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갑니다. 회심은 내 삶에 BC와 AD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는 마음의 결단으로 내 삶에 전환점, 이정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심을 통해 우리 안에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양심’입니다. 왜 선한 양심이 생깁니까? 회심 이전에는 내 몸이 교회에 있는 것이지, 내 마음에 아직 그리스도를 주로 삼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회심 이전에 교회에서 배워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나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심을 고백할 때, “주님, 이제 저의 삶의 주인이 당신임을 제가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저의 삶에 오셔서 제 삶을 다스려주옵소서.”라고 우리가 주권을 그분께 맡길 때,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마음에서 말씀하세요. 바울은 그것을 ‘선한 양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전 1:18) 아들 된 디모데여, 이전에 그대에 관하여 내린 예언을 따라 내가 이 명령을 그대에게 내립니다. 그대는 그 예언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딤전 1: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양심’의 사전적 어원이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의식’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주님이 계시니까요.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회심한 이후 한 부분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느냐?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덕적 양심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양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결국 삶이 더 도덕적 실천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

선한 양심이 우리 안에 있고 그분을 내가 더 따르고자 열망할 때, 그로 인해 나의 삶이 하나씩 하나씩 주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를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내 환경도 있고, 내 죄 된 본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선한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예언이란, 그가 안수받을 때 받은 소명, 그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주를 따르는 자로써 살아감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디모데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을 받고도 다시 회심한 삶에서 완전하게 떠난 사람이 있었어요. 회심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은 아예 주님의 주인 됨을 벗어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리어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거짓 교사들이나, 그들의 편에 서서 교회를 혼란케 하고, 회개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권징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마치 배가 난파하여 조난 당한 선원처럼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한번 회심했다고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회심의 결단과 각오를 지켜나가야 해요. 그것이 선한 양심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있는 자들이 변화되어 갑니다. 저는 복음의 가장 큰 역사는 사람의 변화라고 믿습니다. 교회가 세워져 간다는 것은 사람이 변화되고 성장해 가는 일입니다. 선한 양심을 품고 그것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 그들에게는 이전과 다른 모습들이 생겨납니다. (딤전 2: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화를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이 없이, 모든 곳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딤전 2:9) 이와 같이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몸을 꾸미기 바랍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꾸미거나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딤전 2:10)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회심하기 전에는 내 기분대로 화를 내고 말다툼을 즐기는 사람이, 회심한 이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변화시켜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자들도 외적인 치장에 힘쓰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더 열심을 내서 치장하는 것이 생겼는데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착한 행실로 자신을 꾸미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가 오늘의 말씀을 주 안에서 받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지금 내 관심이

사변적인 것들에 빠져 있고, 비본질적인 것에 자꾸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기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면, 이 시간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마치며 오랜만에 다시 묻습니다. ‘사람이 변하는가?’ 사람, 잘 안 변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힘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 복음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 바꾸지 못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 기적이 자신에게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기적을 내가 먼저 맛보며, 내 안에 일어나는 그 놀라운 일에 내가 먼저 감탄하며, 그리고 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이 삶을 전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길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교사는 지금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말로

진리가 혼탁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자신의 말이 맞다고 외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살고 있어요. 무엇을 따라 살아갈 것입니까? 무엇에 정말 여러분의 삶을 의탁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복음. 어쩌면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셔서 우리에게 나타내는 선한 양심. 그로 말미암아 내가 드리는 삶의 예배, 착한 행실. 오늘 우리의 이 예배가 우리의 삶에서 그런 회심의

결단과 선한 삶으로 열매 맺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