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금요기도회 설교

2025-07-04 · 마태복음 5장 21~30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도 우리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배워보려고 합니다. 우선 마태복음 4장까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시고,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들을 보여주었다면, 5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특별히 5-7장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들이 모아져 있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에 오르셔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와 그 안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들이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과도 같은 내용들이 담겨 있죠. 산상수훈의 시작이 ‘팔복’이라는 말씀입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내용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적 모습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에 있기에 그들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이죠.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러분, 한 주간 이런 경험을 갖고 계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때로는 핍박도 받고,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은 일들이 있습니까? 혹은 갈등과 깨어짐 속에 들어가 평화를 만드는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감을 통해 어떤 공로를 쌓아서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할수록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바르게 알면, 죄와 싸우기 위해, 죄가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웁니다. 그런데 이것이 팔복인 이유는, 주님은 바로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얻었음을 확인하는 ‘최고의 삶’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잘 설명해 줍니다. 여기까지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 정체성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5:17~7:12까지 나오는 긴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이 부분의 주제는 ‘참된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참된 의’에 대한 시작 부분을 다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의’가 토라와 선지자,

즉 구약이 꿈꾸던 것을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약을 폐하거나 부정한다고 오해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구약, 즉 첫 번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신 삶의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바로잡으러 왔고,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의 목표이고 임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자신의 방식대로

왜곡하여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예수님, 진리가 사람이 되어 왔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진리와 대항하여 싸우고, 진리를 핍박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번지수가

틀렸어요. 신앙은 세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세게 믿으면 더 문제입니다. 옳은 것을 바르게 믿으면 됩니다. 이상한 것에 열심을 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랬던 사람이잖아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그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있다.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구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구약이 예언하던 것의 성취이다. 내가 그 완성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르치시는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자의적으로 지키다가 율법이 예언하는 주인공인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된 모습이 문제이지,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버려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야, 예수만 믿으면 돼. 행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냥 믿는다는 고백이 중요한 거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끔 예수님이 기준선을 그어 버린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다만 예수님과 관계없는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참된 제자의 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목숨걸고 살아내려는 그 태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구하고 따라야 할 참된 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던 것을 더욱 그 참된 뜻까지 가지고 나아간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율법과 계명들이 이제 그것을 더욱 온전케 하신 예수님의 성취의 빛 안에서

새롭게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 : 깨어진 관계를 전제 새계명 : 회복된 관계를 전제 구약의 율법은 깨어진 관계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최소의 것’을 요구합니다. 새계명을 받는 사람들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십니다. 구약이 최소의 기준을 가르쳤다면, 신약은 절대적 기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는 것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율법이죠. 실제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으로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은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형식이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구에서 강조 어구는 ‘나는’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전문가가 ‘서기관’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율법보다 아래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은 율법보다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최종적 권위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하나님 뜻의 최종 버전이죠. 그래서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러므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과 율법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초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예수님의 율법 해석, 새계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참된 의’를 배울 수 있고, 이제 그것을 삶으로 가져가기 위한 순종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한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을 그냥 이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떤 의도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지킬 수 없다. 인간이 모두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이 또한 예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나는 이 새로운 기준을 얼마나 내가 붙잡아야 할 기준으로 받아들이는가, 이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에

나의 삶을 두기 위한 순종의 치열함이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비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내 힘으로 안 되는 것도 많이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새로운 차원의 한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을 경험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제자의 의가 더

높은 차원의 의입니다. 바로 이 의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참된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새롭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십계명에 나오는 ‘살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마 5:21)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마 5: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는 ‘살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이 없습니다. ‘살인’은 적어도 내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죄라고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로 보자면 십계명의 살인에 관한 내용은 우리가 얼마든지 쉽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접근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풍삶초에서 ‘죄’를 나무에 빗대어 3단계로

설명하는데, 그중 나무의 열매는 ‘행동’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살인’을 일으키는 행동, 욕설을 내뱉는 행동. 이런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도 강도로 보면 큰 차이가 있죠. 그래도 행동만 다룰 때는 우리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이 부분을 피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제에게 ‘노하는 것’, 즉 마음속 분노의 문제까지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죄의 줄기에 해당하는 마음의 문제이죠. 구약의 관점에서 이 마음의 문제는 ‘무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도 ‘죄’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풍삶초를 통해 죄를 정리하기 전까지 오해가 있다고요. “내가 왜 죄인이야?” 회개기도하라고 하면 내가 뭘 회개해야 할지도 잘 못 찾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내면의 문제로 그 기준을 바꾸어 가르치십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신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살인의 행동 근원이 되는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 ‘화’도 내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시죠. 물론 이것은 가르침의 강조를 위한 ‘과장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골빈 놈”(얼간이), “바보”라고 한마디 했다고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규정짓긴 어렵습니다.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예수님도 더 심한 욕을 사용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그래서 모든 분노가 잘못되었거나, 모든 심한 말에 대한 문자적 적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위한 분노는 하나님도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우리 내면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는 매우 엄숙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욕을 하고 싶을 때, 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내 마음속에 분노하는 것을 당연하다고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 분노의 근원을 살피고 어떻게 다룰지를 주께 의지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 5: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마

5: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문제는 ‘형제와 자매’에 대한 것입니다. 즉, 회심하여 주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의 어긋난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갈등’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갈등을 방치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갈등을 방치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영적 형제들과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지를 이 말씀 이후 재판 상황과 연관 지어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를 통해, 만일 제자가 갈등을 넘어서고 화해하는 일을 게을리 할 경우, 그의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는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얼마나 지키기 쉬운 율법이었는지 느껴지시죠?

그 앞에서는 떳떳했던 우리가 예수님의 새계명 앞에서는 나를 돌아보면서 숙연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은 예수님의 새 계명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말씀 앞에 ‘정죄’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탄이 여러분에게 하는 속임수에 여러분이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성령과 함께 도전하고 그 새로운 영역을 맛보는

것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롬 8: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롬 8:3)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롬 8: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 받고 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졌고, 하나님 없이 살던 나의 깨어진 삶은 이제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회심한 자로서 성령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성령과 함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갑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을 함께 이해해야 성경의 가르침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새계명이 모두 그렇습니다. (마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줄기로 그 기준을 옮기십니다. 마음에 있는 정욕에 대해서 다루십니다. 정욕에 대해서 인간 세계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합당치 않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는 이 말씀에 대한 매우 이상한 해석을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이 문제일 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어떤 목사님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원어상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문제에서 ‘성욕’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기까지 교제할 때,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성적 호감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영역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 자꾸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한번 실수했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오히려 사탄이 주는 정죄이고 절망의 늪입니다. 오히려 더욱 성적인 죄에 대해서 철저한 회개와 함께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돌이킴이 중요합니다. 철저한 회개로

인해서 다시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순결한 삶입니다. 결혼 전이든, 결혼 후이든, 이것은 평생에 걸쳐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가르침을 덧붙입니다.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실제로 신학자 중 ‘오리겐’은 정욕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킨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킨다면 하나님 나라에는 온전한 몸을 가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성경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고, 이 구절은 그런 자들에게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켜서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지켜야 한다고 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실제로 상정되었고, 그를 통해 교회법으로 이 말씀에 대한 문자적 적용을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사람들은 교회법에 근거해서 이 말씀을 무시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어쩌면 다소 과장을 통해서라도 강조하고 싶은 그 주님의 뜻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한 다리의 썩어짐으로 인해 온몸이 죽게 되면 그것을 잘라냅니다. 축구선수라도 말입니다. 살려면 잘라내야 합니다. 육체적인 몸이 살기 위해서라도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잘라내야 한다면,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를 들어,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악이 깃들어 있는 습관과 관계들을 잘라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영화가 나에게 음욕을 일으킨다면, 마치 발이 없는 것처럼 가지 않는다. 눈이 없는 것처럼 보지 않는다.” 영적 생명이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철저한 수술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또 이 설교에 함께하는 예배자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산에서 설교하시는 예수님의 그 눈동자를 보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아마도 그 눈동자에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의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것도 아닌 기준으로 버려지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각 사람의 고집과 뜻에 밀려 하찮게 여겨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단호하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잘라내라.” 말씀이 우습게 여김을 당하는 것,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권리만 부르짖고 책임은 다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은 참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는 그런 의분,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것을 참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진리 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눈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진리를 선명하게 가르쳐줘야 사람들이 깨어진 세상,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는 살리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고 싶으신 분입니다. 애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이죠. 진리가 그들 앞에 와 있고, 선포되는 와중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각자의 고집과 생각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이 갖고 계신 긍휼한 마음이 이 말씀에서 느껴집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정의가 무너진 사랑은 불가능하고, 사랑이 무너진 정의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이미’와 ‘아직’이 있습니다. 이미 왔고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정체성도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제자로서 하나님의 의를 위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단계에 있기에, 아직 하나님의 의에 온전히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회심 이후 길을 찾고, 그 길 위에서 점진적으로 우리는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수록, 내가 가야 할 길은 선명한데, 내 힘으로 그것을 이룰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라는 무기를 주셨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모든 영역은 ‘기도’로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기도만 하는 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내 행동은 내 신앙의 진실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기도로 주를 의지하여 주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 나라는 통치입니다. 그분의 통치와 주권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왕국과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새계명이 나의 삶에 드러나기를. 그 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 시대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