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알려진 외국 속담 가운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가 세부사항 속에 숨어 있다는 의미의 속담입니다. 현실적인 예시를 들면, 어떤 계약이 겉으로는 내게 유리해 보이지만 그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오히려 내게 불리한 사항들이 숨어 있는 경우들이 있다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표현을 하기도 하죠. 결정적인 것은 세부사항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사실 이 표현은 세부사항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표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선한 표현을 따라 ‘신’이 숨어있다고 보든지, 혹은 ‘악마’가 숨어있다고 보든지... 결국 이 표현의 핵심 메시지는 ‘디테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하는 사람과 뛰어난 사람 간에 가장 큰 차이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봉준호 감독의 별명이 ‘봉테일’입니다. 기생충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살인의 추억’이 그를 알린 영화가 되었는데요. 그 영화에 얽힌 디테일 일화로는 1980년대의 시대 정서를 살리기 위해 송강호가 들고 다니는 형사 수첩까지도 신경을 써서 ‘농협’ 마크가 달린 수첩을 일부러 찾았다고 합니다. 또한 영화 ‘괴물’을 찍을 때는 한강 공원에서 찍었는데, 실제 촬영 장소에 전국에서 가장 큰 자전거 대여소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공간감과 리얼리티를 살린 배경을 잡기 위해 매번 촬영
때마다 400대의 자전거를 스텝들이 옮겨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느끼기에는 참 피곤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로 보자면 작은 것 하나까지 얼마나 깊이 신경을 쓰며 최선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가 결국 ‘디테일’을 다루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디테일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드리고 있는데... 제가 성경을 읽으며 가장 재미있게 느끼는 것은 ‘디테일’한 기록들을 발견해 나갈 때입니다. 성경이 아마추어 같지 않고, 프로페셔널하구나, 아니
그것을 넘어서 ‘신의 말씀이구나’ 느끼게 된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디테일이 매우 놀랍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디테일이 살아있고,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가르침과 섭리에 디테일이 살아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래서 ‘디테일’이라는 제목을 갖고 여러분과 출애굽기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설교를 17-18장을 다뤘습니다. 그 이후의 행보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3개월이 되던 날 ‘시내 광야’에 이릅니다.
성경이 날짜와 장소를 언급하는 것은 이 말씀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의 단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디테일도 매우 좋습니다. 시내 광야란 시내산 앞에 넓은 평지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의 첫 목적지인 시내산에 도달한 것입니다. “어? 출애굽한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가야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처음부터 시내산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12에 이미 언급된 내용입니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를 만나셨고 부르셨던 그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나시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부터 가나안 땅이 아닌 시내산을 향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받은 후 가나안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시내산으로
여정을 향했기 때문에 이들이 ‘홍해’를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었죠. 애굽에서 시내산으로 오는 길목에 홍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번 홍해 사건을 다루면서도 홍해 사건 속에서의 디테일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앞에 홍해가 있고 뒤에 애굽의 군대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홍해를 단번에 가르신 것이 아니고 밤새 가르셨습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애굽의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셨냐면, 늘 앞에 있던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의 뒤로 가서 애굽의 진출을
막습니다. 그리고 밤새 동풍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십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의문을 품을 수 있거든요. 아니 아무리 바닷물을 갈랐다고 할지라도, 그 수많은 사람이 물속 길을 빨리 건너갈 수 있었을까? 제가 추석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를 다녀왔어요. 잠시 동막 해수욕장을 갔는데 처음 갔을 때는 갯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물이 차서 바다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우리가 보는 자연 현상이지만, 물이 빠졌다고 그곳을 건너가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수레도 있었고 짐승도 있었는데...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15장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얼마전에 살펴봤던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속에도 하나님의 디테일이 살아있죠. 만나의 법칙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훈련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냥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세밀하게 계획된 훈련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내산까지 이스라엘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식을 위한
준비를 시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디테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구약에서 너무나 큰 은혜이면서 동시에 재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품고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거룩의 빛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출 19: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이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살벌하게 말씀하시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헛된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출 19: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거듭거듭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역이 있고 사람의 영역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으로 강림하시는 것은 그 순간 시내산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정결함의 과정을 거친 후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세만 하더라도 하나님을 마주한 장면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어 거룩한 땅에 대한 정결함을 갖추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은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구약에 나타난 율법의 조항을 학자들을 613가지라고 분류합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해석하면 더 복잡해지고, 이 율법의 핵심을 추린 것이 십계명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하나님이 어떻게 주셨을까요? 돌판으로요? 말씀을 한번 봅시다. (신 5: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에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돌판으로도 주셨지만 사실 모든 백성들의 귀에 신적인 음성으로 직접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즉 다른 모든 율법들은 모세에게 주어서 모세가 전달한 것이지만, 십계명만큼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십계명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출 20: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출 20: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 말을 듣고 모세가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 이후의 일들을 가르치십니다. 가장 먼저 가르치시는 것은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신 것이 ‘예배’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첫 번째는 예배의 대상입니다.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시죠. 우상숭배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열광적인 예배라도 예배의 대상이 다른 어떤 것이거나, 나에게 초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열정과 헌신 이전에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게 공동체적 예배를 제대로 교육하는 첫 훈련이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주 세세하게 가르치십니다. 정말로 디테일하게요. 그를 통해서 하나하나를 순종하며 배워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예배는 정성이 있고 절차가 있었어요. 또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준비하는 과정부터가 예배인 것이죠. 여러분, 제가 최근에 예배에 늦지 말 것을 강조한 바 있죠.
제가 좀 강하게 강조를 한 것은 목사로서의 마음도 있었지만, 가끔씩 우리의 예배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좀 속상한 마음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잘 모르실 수 있지만, 주일 예배팀에게 제가 허락한 시간이 20분입니다. 그 20분을 위해서 예배인도자는 한주 이상의 시간을 준비합니다. 저는 그럴 거라고 믿어요. 저는 우리 예배인도자들이 자신의 삶을 정결케 하고 준비된 모습으로 이 예배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콘티를 짜고, 그걸 예배팀에게
공유하면 그때부터 연주자들은 바빠집니다. 각자 자신의 악기로 어떻게 연주할까 고민하고 연습하죠. 그리고 토요일에 만납니다. 최근에 토요 연습은 거의 2시간을 넘게 연습하곤 합니다. 각자 연습하고 준비하고 와서 맞추는 시간만 그렇게 준비를 해요. 그리고 주일에는 오전 11시 예배인데, 9시 20분에 옵니다. 우리 예배팀원들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 또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저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예배는 소중하니까요. 예배팀은
여러분 앞에 공연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최대한 집중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준비를 하는 것이 예배팀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오전 11시 예배면 10시 40분, 혹은 10시 50분부터 찬양을 합니다. 그러면서 ‘준비 찬양’이라고 불러요. 저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먼저 고쳐져야 할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찬양이 준비 찬양입니까?
뭘 준비하는 것입니까? 찬양 시간에는 서서히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예배를 준비하고 담임목사가 앞에 서면 그게 시작입니까? 여러분 목사 얼굴 보고 가는 것이 예배 아닙니다. 설교 전까지 할 것 하다가, 설교 듣고, 다시 설교 끝나면 마치 모든 예배가 끝난 것처럼 움직이고 마음을 놓아버린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개척 때부터 항상 정시에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한
시각이고, 찬양이 준비가 아니라 예배의 중요한 시작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늦지 마십시오. 습관입니다. 찬양 시작된 후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부득이하게 그것이 최선이라면 어쩔 수 없죠. 직장 끝나고 식사도 못하고 달려왔는데 조금 늦었다면 하나님이 그 소중한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각자의 최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의 최선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바꾸십시오. 구약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경외함을 묵상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너무 가벼우면 안 됩니다. 특별히 저를 비롯한 예배의 인도자들과 설교자분들도... 우리가 이 예배를 준비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힘써 주십시오. 우리는 생명을 건 소중한 시간을 맡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첫 번째가 ‘예배’임을 기억하십시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이어서 두 번째로 가르치는 항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구성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1-4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지켜야 할 항목이라면, 5-10계명은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지켜야 할 항목입니다. 이 두가지가 완성되어야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즉 율법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과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요약해서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귐의교회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with God, with Neighbor.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 저희 로고도 두 개의 원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담아낸 것이죠. 100평을 인테리어 할 때도 절반을 나눠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위한 공간. 그리고 절반은 이웃과의 교제를 위한 공간으로 꾸몄어요. ‘위드엔 : 위드 네이버’를 의미합니다. 저희도 디테일하게 인테리어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희의 예배당에 무대가 모두 동일합니다. 인테리어 회의를 할 때, 설교단이 더 높고
악기팀 자리는 내려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동일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무대에 서는 모두가 동일한 예배자로서, 설교자와 같이 예배를 인도해가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다시 높고 낮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이곳에 서는 모든 분들은 그러한 마음으로 섬겨주십시오. 자, 그럼 하나님께서 인간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신 내용들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인간관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은 ‘종의
규례’입니다. 당시에는 ‘종’의 신분이 존재했습니다. 대다수 민족이 그러했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자유민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규례는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종살이 6년 후에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노예로 살지 않도록 규정하신 것입니다. 홀로 왔으면 홀로 나가고, 부부가 함께 종이 되었으면 함께 나갑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제도입니다. 그런데 나갈 권리도 있고, 또 나가지 않을 권리도 종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귀 뚫린 종’의 규례입니다. 자유인이 되기보다 주인의 종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를 원하면 귀를 뚫어서 맹세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의 권한이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서 귀 뚫린 종과 같다고 스스로를 여깁니다. 언제든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자유가 제게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없이 자유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여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나를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묶어 놓고자 다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신앙고백도 다 그런 것이 아닐까요? 비록 종이 되었더라도, 종의 인권과 결정권을 더 중요시하는 이러한 규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줍니다. 21장 12절부터는 여러 가지 형사와 민사적 사항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흔히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법리적 원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나옵니다.
이것을 ‘동해동형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율법은 고대 근동의 그 원칙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측면을 보입니다. 동해동형법을 적용하면, 살인은 살인으로 갚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사형이죠. 그런데 홧김에 죽이거나 원한 가운데 죽인 것은 사형이지만, 우발적인 경우는 예외 조항을 두십니다. 흔히 이것을 과실치사라고 하죠. 이러면서 함께 주신 규례가 후에 ‘도피성 제도’입니다. 도피성의 성문 입구에는 그 성읍의 장로들이 판결했는데, 만약 고의 살인으로 도망자가 올
경우는 거기서 체포하여 피의 보복자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과실치사일 경우에는 그를 도피성 안으로 받아들여서 거처를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고향 땅의 성읍에 되돌아가 사망 사건에 대해 피의자와 보복자가 함께 회중 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도 과실치사, 즉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것으로 판단이 된다면, 그는 다시 도피성으로 와서 지내게 됩니다. 그에게 완전한 자유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주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완전히 사면되어 자신의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도피성 여섯 개는 지역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어디서든 이곳으로 피신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이 도피성의 혜택은 이스라엘인 뿐 아니라, 그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해 다루시는 하나님의 디테일이 나타나는 부분이죠. 또한, 여러분. 고대 사회에서 종은 주인의 소유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처벌권까지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종이 죽을 정도의
처벌을 가하게 되면 주인이라도 처벌을 받습니다. 여기는 처벌이 나와 있지 않으나, 레위기 24장 말씀을 보면 주인에게 사형 집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런 엄격한 아무리 주인이라도 종을 함부로 학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때렸을 때 눈이 상하거나, 이가 빠지면 즉각 종이 자유를 얻는 규정도 있습니다. 만약 임신한 여인을 때렸는데, 태아가 그래도 정상적으로 출생한다면 벌금을 내지만, 낙태가 생기면 때린 사람은 사형을 당합니다. 태아도 생명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디테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동차 사고가 많지만... 아마도 당시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 대인사고 외의 사건은 ‘소가 사람을 받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소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받아서 사람이 죽게 되면 소는 당연히 죽이고 소 주인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소가 최근에 들이받는 증세가 있어서 소 주인이 경고를 받았는데, 단속하지 않아서 사고가 발생했다면 주인도 사형에 처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예외 조항이 붙습니다.
만약 속죄금을 생명의 대가로 지불하면 사형은 면해줍니다. 일종의 합의금이죠. 소와 관련된 디테일이 하나 더 붙습니다. 소가 소를 받아서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서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만약 이 소가 원래 버릇이 나쁜데 단속을 안 해서, 남의 소를 죽인 것이라면, 살아있는 소를 넘기고, 죽은 소를 본인이 갖게 됩니다. 관리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를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그것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는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연을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도둑질에 관한 규정도 한가지 소개하면, 만약 담이나 벽을 뚫고 도둑이 침입했습니다. 그런데 야간 침임과 주간 침입이 구분됩니다. 야간에 침입한 도둑을 때려서 죽이면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간 침임 때 도둑을 때려죽이면 살인자가 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도둑이라도
생명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소유권보다 생명권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살펴볼 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 명령입니다. (출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이자를 받지 말라. 여러분 당시 고대 근동에 존재하던 법전의 조항을 살펴보면, 꾸운 돈의 이자율은
20%에 이릅니다. 곡식의 이자율은 1/3, 즉 33.3%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되지 않는 유토피아를 시스템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는 자들의 자발적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이 명령을 받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삐딱하다고 하면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내가 돈 빌려준 이 사람은 가난하지 않아.” 우리는 가난의 기준을 높이고
최대한 내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성이 이기적으로 발동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그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위법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내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을 먹습니다. (출 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출 22: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것은 담보의 규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은 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불이 되기도 했습니다. 잘 때 필요한 물건이었죠.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을 수는 있으나,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때로는 ‘이런 것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런 것까지?’
말씀하셨어도 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까지 출애굽기에 나타난 율법의 내용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삶에 디테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눴습니다만, 디테일에는 하나님 말고 누가 또 있냐면 악마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은 죄를 짓는 일에는 아주 섬세하고 영리해서 율법에서 규정한 디테일을 앞지릅니다. 늘 그래 왔습니다.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을 법리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해서, 죄악된 것을 행하면서도 의롭다고 외칩니다. 출애굽기를 통해 가르친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서도, 이 규정들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그런 꼼수들이 여럿 등장하게 됩니다. 위법하기는 싫지만 내 이득은 취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지막에 보았던 의복에 대한 담보 규정입니다.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에는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용의 교수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당시의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겉옷은 가지고 가봤자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하므로 담보의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겉옷이 아니라 속옷을 담보로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주어졌다면, 그것을 뛰어넘어 교묘하게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로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뭐라고 요구합니까? 그런 사람.
정말 교활하고, 얄밉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을 마주하거든... 그 속내를 다 알지만, 속옷을 요구하는 그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주라. 우리는 율법을 배우며,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연구하는 것은 법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저를 가르쳤던 교수님께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하셨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2층에 난간을 만들라는 것은 건축법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법학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위법하지 않은 채 내 이득을 챙길 생각을 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율법의 계명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과 의도를 읽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계명으로만 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성경에서 지금 시대의 수많은 우리의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의도를
이해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지금 내 삶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뭘 요구하시는지를 깨달아요.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 만약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이 적용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집주인이라면 월세를 올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낮춰주고, 나보다 조금이라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의 태도에서 살피고, 배려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여러분, 악마도 디테일에 있고, 하나님도 디테일에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정의는 내가 위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금주와 금연을 하면 신앙 좋다고 인정받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저 3가지를 철저하게 다 하면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 뜻과 멀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이 우리를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율법을 배우고 성막을 배울 때에도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지를 묻고 찾지 않으면... 이 말씀들은 다 흘러가 버린 죽은 말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안에도, 섬세한 하나님의 마음들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에서처럼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태도를 갖지요. 그것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피해를 주지 않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봤던 책에서 저를 가장 긴장하게 했던 표현이 이것이었습니다. <풍성한 삶의 기초> 525페이지입니다. 그대로 읽겠습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 걷고 있는 영적 이끄미들을 본받으며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는 반드시 이렇게 영적으로
더욱 진보한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 중에 “교회는 사람 보고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 보고 오는 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교회는 사람 보고 오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해도 부분적으로는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절반 이상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 때문에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하며, 품어주고,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유튜브로 설교만 찾아 들으며 신앙생활 하는 것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수업 듣는 것처럼 말씀을 배우는 것에만 머물러 있으면 절반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교제하고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힘써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약자들을 보호하고, 종을 위하는 마음을 가르칠 때마다 붙는 표현이 있습니다. “너희도 그러하지 않았느냐? 너희도 종살이를 해봤지 않느냐?” 바로 그들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경험된 것처럼, 이제 하나님도 그들에게
은혜 받은 자의 삶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 시대 이후의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과 참 다르죠. 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거쳤던 수많은 정결 예식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결 예식을 거치지 않고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로 나아올 수 있는 이유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가 우리를 덮었기에 우리의 부정함이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가 받았고, 우리가 그 은혜에
감격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납하고 받아들이셨기에...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셨기에... 우리가 오늘도 주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동해동형법을 뛰어넘어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내 사랑을 아는 자라면 내가 베푼 사랑을 너희도 베풀며 살아라. 내가 그러했듯이...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백성보다 더 큰 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한 걸음만 더 주님께 나아가 봅시다. 삶의 한절이라도,
주님을 닮을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 함께 나아가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