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2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금요기도회를 통해 새신자반을 다루고 있기에, 이 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성경이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아주 기초적으로만 설명을 드린다면 성경의 총 권수는 66권이고,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화번호가 이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하며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지난주에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글들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글이라고도 아주 단순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성경이 가진 특징과 성경말씀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 성경 속에서 그것을 찾아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 성경 말씀의 특징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그의 모든 말은 대통령의 말이 됩니다. 연설이든
농담이든, 사무실에서의 말이든 집에서의 말이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대통령의 말입니다. 이유는 그가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영생의 말씀’인 것은 말씀하신 분이 ‘영생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말씀하신 분이 살아계시며 그 말씀의 약속과 역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영생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말씀하신 분과 말씀의
효력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계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23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죠.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항상 존재하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나와 무관하다면, 내가 말씀에 가까이할 수 없다면 내게 아무 소용이 없는 말씀이
됩니다. 남의 집 금고 안에 있는 돈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항상 계신 것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내 곁에 계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신 30: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신 30: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신 30: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신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얼마나 내게 가까이 계시는지 아예 내 입속에, 내 마음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반응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우리
속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능력을 발휘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행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내 속에 계시는 말씀은 언제나 힘이 있고, 흥왕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고, 말씀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어야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께서
1970년대에 알게 된 독일인이 있었는데, 그는 독일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독일군 중 대부분의 젊은이가 히틀러에 비판적이었지만, 일단 히틀러의 연설을 한 번이라도 직접 듣기만 하면 모두 히틀러에게 열광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만났던 그 독일인도 징병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지만,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들은 뒤에는 목숨을 걸고 히틀러를 위해 싸웠다고 합니다. 입 하나로 사람들을 열광시켜 온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정도라면, 히틀러의
말은 확실히 힘 있고 능력 있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리가 아니므로 결과적으로 그의 말에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삼하 7: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성경 말씀이 참된 진리이기에, 그 말씀은 우리를 비추고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합니다. 만물의 실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성경 말씀이 우리를 비추어 주는 온전한 거울이기에, 우리는 말씀 속에서 우리의 추악한 실상을 발견하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꾸므로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특징은 우리에게
주셨고, 능력이 있으며, 진리로서 우리 안에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 성경 말씀의 능력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의 능력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말씀의 권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말씀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중에 3가지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첫째, 부르시는 능력입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이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돈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약속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을 좇아 나섰습니다. 그럼 그들이 대단한 결단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부르시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부르는 힘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투옥하던 박해자였습니다. 얼마나 자기의
신념과 자아가 강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 주님을 따라갑니다. 말씀이 그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시는 능력’이 여기 모인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워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시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깊은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 어부 베드로를 부르셨던 주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베드로를 사도 베드로로 다시 부르셨고, 부르시는 능력 가운데 주님의 대적 옛사람 바울을 부르셨던 주님께서는 바로 그 능력으로 바울을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사도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둘째, 치유하시는 능력입니다. (막 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한센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순간, 썩어 문드러지던 그의 육체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인함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러한 치유는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연약해진 부분들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고백할 한
걸음 더 깊은 고백은, 주님께서 치유하시는 능력을 지니셨기에 치유의 방법도 주님의 소관이고, 나아가 주님의 더 깊으신 뜻을 위하여 치유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K장로님의 예화가 있습니다. 이분은 당뇨에 중풍이 겹쳐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되었고, 오른쪽 눈마저 의안을 넣게 되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장로님을 찾아갔을 때 장로님은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해 얼마나 불편한지 물었을
때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불편하다니요! 오히려 감사합니다. 발을 하나 못 쓰니 죄지으러 다니지 않아서 좋고, 손이 하나밖에 없으니 술 담배 안 해서 좋고, 눈이 하나뿐이니 세상 보지 않고 성경만 보게 되니 감사합니다.” 그분은 건강할 때는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 그분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당신의 날개로 날으리라>의 주인공인 인도의 ‘마리 버기스’라는 여인은
젊은 시절 어느 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게 됩니다. 젊은 처녀에게 그보다 더한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세월을 뛰어넘어 불쌍한 한센 병자를 위한 의사가 되었고, 수많은 인도인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나는 두 다리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날개를 주셨습니다.” 그녀는 인도 최상류 가정의 딸이었고, 두 다리가 있었다면 건강한 두 다리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다리를 잃고
그녀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서 주신 두 날개를 얻었습니다.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수많은 질병 가운데서 병약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녀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불치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교만치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을 때까지 병자였지만, 그 병이 결코 바울을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는 자기 병이 낫기를 바라는 단 한 번의 기도도 드리지 않고 그냥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갖는 주님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병이 낫지 않고 있다면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병 속에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할 때만 더이상 병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님의 ‘치유하시는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의
세 번째 능력은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삭개오 이야기는 이러한 변화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삭개오란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장은 오직 돈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 가는 자리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매국노와 같이 취급을 받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절반을 나눠주고, 불의한 재물에 대한 값을 치르고 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 앞에서 그의 삶이 변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 능력을 마주하지 못했다면, 불의한 재물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다가 영영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포기케 하시는 말씀의 능력 속에서 포기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함으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향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즉석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것은 오직 지혜로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포기할 것을 주저 없이 포기하는 것은, 이왕 믿을 바에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한 조각가가 예수상을 완성했습니다. 마치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예수상을 조각하려다가 번번이 실패했던 그가 이번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예수상을 조각하려다가 늘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대리석을 갖다 놓고 그 대리석이 예수님의 상이 되는데 불필요한 부분을 계속 뜯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예수상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많은 것들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포기케 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의 삶에서 뜯어내야 할 것을 날마다 뜯어낸다면, 언젠가 사람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의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존재하는 영생의 말씀이며, 내가 경험할 수 있도록 가까이 주셨다는 것과, 그 말씀에 힘이 있으며 진리로서 우리를 비추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더불어 말씀의 능력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부르시는 능력, 치유하시는 능력, 변화시키는 능력.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찾아가며 말씀을 중심에 두고 예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 안에 말씀이 들어올 때 성령도 그 안에서 역사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예배할 수 있는 것과 말씀을 통해 주를 만나는 은혜는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 앞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한 부분은 치유되고, 더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생각과 관점과 태도까지도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님을 목표로 우리는 날마다 변화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번주까지 13주 동안 선배 목사님과 함께 배움과 나눔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과제를 하는 마지막 챕터의 질문은 ‘인생목적’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써보십시오."
솔직하게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내가 정말 바라는 나의 인생 목적을...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따라가며, 주님이 허락하신 순간까지 사랑으로 주님을 드러내다가, 주께 기쁨으로 가는 것.” 저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분 안에서 치유되었으며, 이제 그분의 모습을 따라 변화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기를 순종하고 싶습니다. 혹시 오늘 그런 마음으로 이 예배에 함께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가 한 소망을 갖고 주님을 향하여 기도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