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3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살펴본 후 ‘성경’을 가장 먼저 배우는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이 ‘진리’이며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 말씀이 가는 만큼 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서 서라. 이러한 기독교 안의 가르침은 결국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2주간 성경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우선은 성경을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지 나눴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완전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두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는 성경 말씀의 특징도 살펴봤습니다. 이 말씀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 말씀은 참된 진리이기에 우리를 비추고 우리
안에 진리로 역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 나눴습니다. 총 6가지로 정리할 것인데, 지난주는 3가지를 나눴습니다. 첫째, 부르시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 속에서 우리 또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오늘도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둘째, 치유하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이 오늘도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온전한 주권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셋째,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삭개오는 평생을 바라보고 살아가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그 앞에 순종하며 우리도 변화합니다. 그럼 성경은 또한 말씀과 말씀이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넷째, 격려하시는 능력입니다. (막 12: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렙돈이란 당시에 사용되던 화폐 단위 중에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즉, 두 렙돈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돈으로 여기지 않는 금액입니다. 요즘에 10원짜리 굴러다녀도 잘 줍지도 않죠. 아마도 그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두 렙돈을 헌금했는데,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네가 최고’라고 격려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은
여인은 아마도 큰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격려하심 가운데 참된 신앙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마음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저는 늘 이 시선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사울’과 ‘다윗’을 떠올립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잘못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다윗의
죄가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보다,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신경을 썼습니다. 시선이 철저하게 사람 앞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그는 그 와중에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시선’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는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돋보이는 왕이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종의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어쩌면 두 렙돈을
드린 여인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더라면, 차라리 헌금을 안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동전 2개를 넣고 주목을 받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자기의 상황과 방법 안에 최선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진실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받으신 것입니다. 최근에 예배팀의 한 분이 예배에 너무 심취해서 연습한 대로 연주를 하지 못하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했다고 저에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는 ‘잘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악기팀 주자가 갑자기 악기 연주하다가 손들고 찬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우리의 합주에는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예배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찬양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죠? “세상이 당신을 모른다 하여도, 주님은 그 이름 마음에 새겼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다가도, 문뜩 사람들의 박수를 더 받고 싶고, 목회자의 인정을 받고 싶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고 관심 밖에 있는 듯 여겨져 속상한 경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더 수고했는데, 다른 이가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어느 누구도 나의 헌신은 알아주지 않는... 아니 오히려 오해를 받는 경우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께 귀를 열면, 격려하시는 말씀이 분명히 여러분을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 귀가 주님보다 자꾸 사람들의
입에 주파수를 맞추다 보면 듣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의 격려하심이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힘쓰는 여러분들에게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들을 때, 우리는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속이 진리로 꽉 찬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훈련하십시오. 사람의 갈채가 없는 곳에 주님의 격려가 임하고, 주님의 격려만이 우리의 속을 진리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 속이 진리로 채워진 사람의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다섯째, 사탄을
물리치시는 능력입니다. 사탄이라는 존재는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또한 악한 사탄이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유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가위눌림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누구나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인데, 대략 60‐70% 사람들이 경험한다고 합니다. 즉, 가위눌림을 경험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힘이 약한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단순한 가위눌림 현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패배감 같은 것을
같게 되면, 이것이 정신적인 질병이 될 수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항상성’이라고 부르는데, ‘몸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가위눌림 현상은 몸이 피로할 때, 이 ‘항상성’ 때문에 급격히 몸이 이완되며 나타납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이완 상태에 들어갔고 정신은 아직 깨어있기 때문에 가위눌림 현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씀드리면, 가위눌림 현상으로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가위눌림 현상을 극복하는 것은 마음을 편안히 하며 쉬면
나아집니다. 당황하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이겨내는 방법을 찾으면 괜찮아집니다. 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사탄’과 ‘귀신’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기독교인들은, 자칫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습니다. 나쁜 것은 모두 귀신의 역사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것은 오히려 귀신의 능력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귀신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심해지면 정신분열증(조현병)인데, 바로 가위눌림에 대한 공포감이나
귀신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극도의 두려움이 정신분열증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을 우리가 알려면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설프게 알면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탄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 앞에서
사탄은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말씀의 능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생깁니다. 내게 그 능력이 없고 두려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는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린 시절
수련회 때, 잘못된 가르침을 주곤 했던 강사들이 좀 원망스럽습니다. 때로는 너무 자극적으로 사탄의 능력을 부풀려서 이야기했던 기억들이 제게도 있습니다. 비록 선의의 목적이라도 어린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을 더 크게 부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욥을 시험한 것도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는 욥을 끝내 이기지 못했습니다. 욥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사탄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탄을 쫓아내려고 소리친 적도 없었고, 금식 기도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이 이겼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육체의 질병을 불치병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이 질병은 성경 여기저기의 증언을 모아볼 때 하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에 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울이 사람들 앞에 수치스러움을 느낄만한 질병으로 설명되기도 하기에 간질이나
정신질환으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부르고 ‘사탄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사탄이 준 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그 병을 감사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음에도 사탄이 시험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사탄을 도구 삼아 더 큰 은혜를 주기 위함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위에 자신을 더욱 굳게 세웁니다. <바울의 가시 : 나는 조현병 환자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이관형 작가는 ‘조현병 환자’입니다. 지금도 그는 종종 갖은 망상에 시달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조현병이 축복이며, 장벽을 넘게 해준 디딤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조현병이 있었기에 성공, 돈, 명예 대한 안전과 매일 스스로 잠들기만을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우리를 삼키려 두루 다니는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은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 사탄을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사탄을 물리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의 능력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만물이 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란 있던 것의 변형이 아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져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작은 땅덩어리입니다. 그중에서도 쓸 만한 땅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주위에는 비옥한 땅이 많았고, 당대 최강대국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집트 제국, 아시리아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등 세계 역사에 빛나는 제국들이 모두 이스라엘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국들도 모두 지나가 버렸습니다. 영원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의 ‘창조의 능력’이 붙들고 있으면, 아무리 작고 볼품없어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사람이 만들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제국을 상징합니다. 로마 시대에도 로마를 바벨론에 빗대었습니다. 지금도 인간들이 꿈꾸는 헛된 목표의 결합체가 ‘바벨론’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의 바벨론’을 꿈꾸고, 어떤 사람은 ‘성공의 바벨론’을 꿈꿉니다. 때로는 바벨론을 이룰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자신들이 꿈꾸는 바벨론을 세우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바벨론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에, 그 능력 속에서 영원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바벨론은 영원할 수 없고 일시적이며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란 올해를 뛰어넘는 것이고, 내 생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올해 안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반드시 열매를 거두겠다면, 그 열매는 영원한 열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사람들입니다. 영원 속에서 열매를 거두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진리와 동행할 수 있고, 그때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 주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영원한 이스라엘로 세우십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은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계획 앞에 한순간, 먼지 하나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여 제게 주어진 사명을 힘써 감당할 뿐이고, 제가 땅에 묻힐 때까지 그 나라가 임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저는 주어진 삶 동안 영원한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았기에, 죽음 이후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지어진 대로 살아갔고, 하나님 창조의 완성을 향해 우리는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 가지 않고 넘어질 것입니다. 창조의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시간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께 그 능력을 구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며 힘을 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이번 주제는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됩니까?
그것을 여섯 가지로 살펴봤습니다. 첫째, 부르시는 능력입니다. 둘째, 치유하시는 능력입니다. 셋째,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넷째, 격려하시는 능력입니다. 다섯째, 사탄을 물리치시는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의 능력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사귐을 누리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여러분이 말씀과 멀리 있다면 이것들은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진리에서
멀어졌는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던 이유는 교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예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목회자가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이 소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나니, 진리에서 벗어나 있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잘못된 열정으로 잘못된 것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정말로 사귐의교회를 사랑하고... 또 성도 여러분이 많은 사랑을 주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담임목사라도 말씀과
멀어져 있으면 버리셔야 하고, 우리 교회도 말씀의 진리에서 멀어진다면 교회로서의 생명이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성경을 1독 해본 적이 없는 분도 많으시겠죠. 여러분, 보통 사람이 책을 읽는 속도로 성경 한 권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약 80시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서 80시간을 쓰는 것은 우습죠. TV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하는 것에는 우리가 그토록 열심인데, 혹시 말씀은 교회에 와서 떠먹여 주는
것만을 먹으며 만족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저는 지적인 충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으며 성령과의 친밀한 사귐 안에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고, 점점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새신자반 5과의 마지막 한 줄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중단 없는 훈련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 훈련은 말씀의 훈련에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