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아-요아웃요" / 강정규 목사

2024-10-06 · 열왕기하 11-1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2주 만에 열왕기하 본문을 다시 설교합니다. 매일성경으로 묵상하고 계시는 분들은 어제까지 열왕기하 18장을 보게 되셨을 것입니다. 지난 설교가 10장까지 다뤘으니 묵상 흐름에 맞춰서 설교하려면 무려 8장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엔 무리가 있어서 15장까지 내용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매일성경 흐름에 따라서 설교한다는 것은 좋은 도전이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다루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하기에, 그래서

저희교회의 설교는 긴 편입니다. 내용에 비해서는 부족한 시간으로 본문 중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만 뽑아서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왕기하는 남북 왕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왕의 이야기를 생략하면 흐름 자체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남왕국의 왕들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매일성경으로 설교하는 이유는, 저는 무엇보다 여러분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한 번씩은 마주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떤 본문이든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시리즈 영화가 가진 강점이 있으나, 속편이 나오면 보러 갈 때 꼭 질문이 있죠? “그거 전편 안 보고 가도 이해가 돼?”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오신 분들이나 기존의 설교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도 계실 텐데, 이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함께한다면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우리의 최선을 다합시다. 열왕기서는 왕들의

역사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사울-다윗-솔로몬까지 3명의 왕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왕국을 다스렸고, 그 이후에 나라가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12지파가 분열된 것이기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이 계속 다스린 남유다가 언약의 계승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북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애쓰셨단 말이죠. 어쩌면 열왕기서는 남유다보다 북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돌보고 계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도록 힘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엘리사가 북이스라엘에서 주로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보통 남유다의 왕은 20명, 북이스라엘의 왕은 19명이라고 보는데, 열왕기상 16장의 ‘디브니’라는 사람을 왕의 숫자에 넣어서 북이스라엘도 20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0이라는 성경에서 조금 의미 있는 숫자가 형성되죠. 그리고

정확히 20명씩 남북을 다스린 왕의 숫자가 됩니다. 열왕기서의 긴 역사 서술에서 결국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북왕국의 왕 20명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었으나, 결국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한 왕이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것이 결국 그들 안에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왕국의 20명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었어요. 어쩌면 남유다는 20명의 왕이 모두 하나의 가문이었기에, 무능한 왕이 통치할 확률도

꽤 높거든요. 왕권세습제의 가장 큰 문제는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에 오를 명분을 갖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제로 꽤 이상한 왕들도 유다에 있었어요. 다만, 이들과 북왕국의 차이점은 남유다에는 8명 정도가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8명도 급이 좀 나뉩니다. TOP2가 있어요.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나머지는 ‘그나마 괜찮았어.’ 정도라면, 이 둘은 ‘이만한 왕이 없었어.’ 같은 느낌입니다. 그럼,

이 두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남유다는 1개의 왕조가 344년을 통치합니다. 평균 17년씩 다스립니다. 꽤 안정적으로 왕권 통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어떠한가? 무려 9개의 왕조가 208년을 통치합니다. 9개의 왕조라는 것은 계속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20명의 왕 중에 7명이 암살당해 죽습니다. 말 그대로 혼란과 혼돈, 왕권 쟁탈전으로 가득 찬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유다보다 훨씬 빠르게 망합니다. 남유다 12대 왕인 아하스

시절에 북이스라엘은 사라지죠. 저는 열왕기서가 두 왕국의 이야기를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두 가지 인생의 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북왕국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을 알고 예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인 되어 통치하죠. 그 결과 혼돈과 혼란, 내적으로 심한 갈등과 상처를 안습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보지 않고 끝내 멸망하고

맙니다. 남왕국이라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애쓰는 마음들이 있어서,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이 ‘남왕국’도 결국 실패로 귀결되죠. 그러나 적어도 이들의 모습 안에서 어떤 삶을 추구해야 했었는지 답이 되는 소중한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는 사람들만큼은 실패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며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요. 결국 남북의

왕 모두를 평가하는 기준은 같았어요. ‘두 가지 왕의 길’에 대해서 계속 반복합니다. 하나는 ‘다윗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여로보암의 길’이죠. 다윗은 사실 분열왕국 시대의 사람도 아니지만, 모든 왕이 보고 따라가야 할 모델로 등장하죠. 앞서 말한 선한 왕 8명도 모두 다윗의 길을 따랐다고 나오지는 않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라는 평가가 8명, 다윗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받은 왕이 그중 3명입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외에 ‘아사’ 왕이 이런 평가를

받았죠.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통치 때, 쿠데타로 북왕국을 시작한 분열왕국의 시작점에 있는 인물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지적하는 것은 ‘쿠데타’가 아닙니다. 쿠데타는 이미 하나님도 일어날 일로 말씀하셨어요. 그보다 열왕기서에서 주목하고 있는 여로보암의 죄는 우상숭배에 대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뜻과 법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나라 북이스라엘 안에 금송아지를 제작합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외의 다른 곳에서 마음대로 제사합니다. 자기가 임의로 절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간 사람이며,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과 다른 것을 함께 섬기도록 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판을 깔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지도자가 왜 더 책임이 무겁습니까? 지도자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가 가진 영향력이 있기에 자칫 잘못된 길로 다른 사람도 인도해가거나 잘못된 기준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제가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안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한 사람이 다른 것들도 함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분열왕국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혼합종교’ 형태로 함께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 +a’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다른 것도 함께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면 여전히 내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결정권자로

살아가요. 당시에도 예언자들이 “너희가 하나님을 배신했다”라고 말했을 때도, “저건 내 얘기는 아니지. 나는 하나님 섬기잖아.” “안식일에 예배했잖아.” 그러면서 자신들의 신앙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안 믿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안 믿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을 내가 따르고 싶은 경우에만 따르고 어떤 부분은 내 기준대로 살아가고 있는 문제입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남북 40명의 왕 중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칭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타협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다른 왕들과 달랐던 것은 이들만 유이하게 ‘산당’을 제거한 것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 이전에는 산당에서 예배하는 문화였어요. 다윗과 솔로몬도 산당에서 예배하기도 했어요. 이것이 필요해서 허용되었던 시기가 있었죠. 그런데 산당 제사는 다른 것들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어요. 토속 신앙 같은 것이요. 그래서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는 산당 제사는 금지됩니다.

그런데 사실 산당에서 예배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편했어요. 꼭 예루살렘 성전 가지 않고, 자기가 편한 방식대로 산당에서 예배하면 나름의 종교성도 충족할 수 있죠. 어찌 보면, 우리가 코로나로 모일 수 없을 때는 온라인으로라도 예배하는 것이 필요했고, 누군가는 도저히 올 수 없어서 그렇게 예배하죠. 그러나 지금 그것이 최선이 아닌 사람들이 많잖아요. 단순히 편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최선이 아닐 수 있는 것이죠. 산당 제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백성들의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이런 것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쉽지 않았고, 그들 사후에는 다시 산당 제사가 행해지곤 했어요. 왜냐하면 이 종교생활 방식에 대해 백성들의 만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왕들은 정말 하나님만을 믿었는가? 적어도 성경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외의 왕들에 대해서 그렇게 보지 않아요.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따른

왕들도 있었으나, 그들에게 늘 이 부분에 대해서까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기록해요. 만약 왕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들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해봐야 할 내 삶과 신앙에서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제가 자주 합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FIA’라는 찬양팀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다. FAITH IN ACTION의

줄임말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동사라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 없는 명사로서의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신앙은 ‘~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알고, 내 존재가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내가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변화된 존재라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뀌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것이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존재로서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새로운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진 나의 행동의 출처가 ‘나’인 듯하지만 ‘내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설교하며 전하는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나요?’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이런 이야기를 저는 제법 많이 듣습니다.

그래도 도전해야 경험하는 것이 있어요. 저는 설교자로서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먼저 누군가의 죽은 신앙을 일깨워야 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깨고, 흐트러진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삶에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제가 성경에서 추구하는 삶을 이야기해도 정말 달걀로 바위 치기 같이 하나도 스며들지 않는 듯 느껴져요. 그래도 제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성령님은 가끔 달걀로 바위도 깨더라’는 신비를 맛보기 때문이죠. 그 기적을 바라보며 저는 늘 외치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생동하는 자, 생동하려고 애쓰는 자가 있습니다. 말씀의 요구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깨달으면,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라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으니까요. 성경적 삶, 믿음의 삶에 대한 진실한 접근, 도전이 시작된 것이죠. 저는 그런 분들이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도전을 해나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써보면, 그게 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어쩌면 더 많은 경우는 어떤가요? 말씀이 내 안에 요구하는 삶이 명확한데, 그것을 내 삶에서 담아내고 순종하며 따라가기에는 아무리 진심을 다해봐도 역부족이라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나의 약함을 본다고요. 바로 그런 사람이 그 진실함 속에서 느껴지는 격차, 한계, 고민을 안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연약함, 내가 처한 환경의 어려움이 있죠. 그래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 앞에 서면 설수록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무력감 또한 생동하는 신앙을 가진 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무력감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어내며 주를 끝까지 의지할 때, 비로소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력감 속에서 정말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했을 때, 나로서는 불가능한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를 통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나도 놀라고, 주변도 놀랍니다. 그것이 저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놀라운 역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변화는 ‘내 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왕들도 우리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무력함 속에서 그는 그다음 단계로 신앙이 나아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왕들은 안 그랬어요. 많은 왕이 생동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평생 예배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봤던 왕들은 북왕국 오므리 왕조였어요. 오므리-아합-아하시야-여호람까지 4명의 왕이 있었죠. 여호람 때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에 의해서 오므리 가문은 진멸을 당합니다. 아합 시대부터 북왕국은 바알숭배가 판치는데, 바알 숭배자의 딸인 이세벨이 북왕국으로 시집을 오면서 영향을 받죠.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 부부는 자신들의 딸 ‘아달랴’를 남왕국의 ‘여호람’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당시 남왕국의

왕은 여호사밧이었는데, 그는 남왕국의 칭찬받은 8명의 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유리한 판단을 내리고자 혼인동맹을 잘못 맺어서 남왕국을 바알 숭배에 빠뜨린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물론 여호사밧 때는 괜찮았죠. 그러나 아달랴의 남편인 여호람 때부터 우상숭배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악한 길을 걷게 됩니다. 여호람 왕은 동생들도 모두 죽이죠.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여호람의 악행에 대해 경고하셔서 그를 ‘stop’ 시키려고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시는 ‘stop sign’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해. 이 이상은 안 돼. 이제 돌이켜야 해.’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이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람은 무시합니다. 결국 그는 창자에 중병이 들어서 대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고, 32세에 죽게 됩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바알 숭배자인 어머니 아달랴를 따릅니다. 자기 외삼촌인 북왕국 요람과 함께 손을 잡고 아람과 전쟁을 벌이죠.

이 전쟁 속에서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하시야도 죽게 됩니다. 아합의 딸인 ‘아달랴’ 왕비로서는 북왕국에 있는 자기 가문이 다 죽었고, 남왕국에 있는 자기 아들 아하시야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때 아달랴가 어떤 생각을 하냐면, 어차피 지금 왕이 죽어버린 혼란한 시기에 남은 ‘다윗 왕족’들도 모두 죽이고 유다를 직접 통치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결국 남은 시댁의 식구들을 아달랴가 다 죽입니다. (왕하 11:1)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아들이 죽는 것을

보자,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짜 유다의 왕에 오릅니다. 분열왕국의 유일한 여왕이자, 남왕국에서 다윗의 혈통이 아닌 유일한 왕입니다. 엄밀한 의미로 왕권을 찬탈하고 통치했던 기간이죠. 남) 7대 왕. 아달랴 이렇게 악이 판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과 하신 약속을 지켜가고 계셨는데, 이 혼동 속에서 다윗의 핏줄을 지켜주십니다. (왕하 11:2) 그러나 왕자들이 살해되는 가운데서도,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겼다. 이 때에 사람들이, 아달랴가 모르도록 그를 숨겼으므로,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아하시야의 아들 중 ‘요아스’를 그의 고모가 아달랴의 위협으로부터 몰래 빼내어 숨긴 것입니다. 이 고모의 이름이 ‘여호세바’(여호사브앗) 공주인데, 다른 왕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몰래 요아스와 유모를 침실에 숨긴 후, 그 후에도 6년간 성전에 숨기고 보살핍니다. 아달랴는 이제 다윗 왕조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남유다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기 시작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는 예후에 의해서 끝이 났지만, 남유다는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통치하고 있었으니, 바알 숭배가 만연합니다. 어쩌면 다윗 언약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유다를 아달랴는 바알의 나라로 바꿔가고 있었던 것이죠. 아달랴 통치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무력했겠습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죠.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다시 왕권을 되찾아

오기 위한 거사가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 꿈에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철저하게 준비하며 때를 기다린 것이죠. 이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 아닙니까? 이 거사에 백부장과 같은 군사 지도자들, 레위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여호야다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성전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겨서 길러왔던 ‘요아스’ 왕자를 소개합니다. 아달랴 통치 7년이 되던 해, 준비해오던 거사를 실행합니다. 거사 일은 안식일이었고, 그들은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레위인이 임무 교대를 위해 모두 성전에 모이는 그 시각에 거사가 일어났고, 그들은 요아스를 유다의 새 왕이자 진짜 왕으로 등극시킵니다. (왕하 11:12)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갑자기 성전에서 나팔과 환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달랴가 급히 성전으로 달려옵니다. 그곳에서 요아스가 왕으로 옹립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달랴는 그제야

6년 전 왕자 요아스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녀는 분을 못 이겨서 ‘반역이다’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죠. 사실 다윗 후손을 다 죽이며 왕위를 찬탈한 것은 아달랴였기 때문입니다. (왕하 11:15) 그 때에 여호야다 제사장이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리고 저 여자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칼로 쳐죽이시오." 여호야다가, 주님의 성전에서는 그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왕하 11:16) 그들은 그 여자를 끌어내어, 군마가 드나드는 길을 통해 왕궁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그 여자를 처형하였다. (왕하 11:17) 여호야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주님과 왕과 백성 사이에 맺게 하고, 동시에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맺게 하였다. 이들은 왕권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유다의 영적 질서를 바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을 통해서 자신들이 꿈꾸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공포하게 됩니다. 이들은 바알 신당을 허물고, 제단과 우상들을 부수고, 제사장들을 처단합니다. 그렇게 요아스가 남유다의 왕이 됩니다. 남) 8대왕. 요아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있는 동안에는 정직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죠. 여호야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요아스도 그와 함께하는 기간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갑니다. 그래서 칭찬도 받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신앙은 언젠가 ‘홀로서기’를 해내야 합니다. 열왕기서도 그것을 종종 보여줍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여호야다의 아들들이 나서서 요아스에게 직언을 합니다. 그러니 그 아들들을 죽여버립니다. 자신을 목숨 걸고 보호했던 사람이 여호야다인데, 이는 선을 넘은 것이죠. 하나님이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아람이 하나님의 몽둥이가 되어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요아스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합니다. 가까스로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함으로 아람이 물러갑니다. 요아스는 근처 궁에서 치료를 받는데, 바로 그곳에서 신하에게 암살당하여 죽게 됩니다. 이 신하들이 요아스를 죽인 것은 왕권 찬탈의 목적이 아니라, 여호야다의 아들들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권은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물려받게 됩니다. 남) 9대왕. 아마샤 (왕하 14:3) 아마샤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만큼은 하지 못하였고, 아버지 요아스가 한 것만큼 하였다. 아마샤에

대한 평가가 좀 애매하죠. 그래도 아버지의 밑에서 좋은 점도 닮았어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잘한 왕, 그러나 부족함도 있었던 왕입니다. 원래 에돔은 유다의 속국이었는데, 여호람 때 유다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아마샤는 에돔을 다시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남유다 병사 30만 명과 북이스라엘 용병 10만 명을 고용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북왕국과 함께하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경고해요. 그러니까 아마샤가 그 말을 듣고 순종해서 북왕국 용병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남유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 후 에돔의 우상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오고 그것을 신으로 함께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분노하여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맛본 아마샤는 교만한 마음으로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무력감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하나님을 배제한 자신감은 언제나 패망의 지름길이죠. 이후 아마샤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욕심을 냅니다. 아마샤는 북왕국에도 선전포고를

하며 먼저 도발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남북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이 이기죠. 그리고 아마샤는 포로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마샤는 이때 전쟁 포로로 끌려가서 북 왕국의 여호아스가 죽은 후에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왕이 포로로 잡혀가는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남유다는 아마샤를 대신하여 어린 그의 아들 웃시야(아사랴)를 16세에 왕으로 세웁니다. 아마샤가 완전 왕위를 넘긴 것은 아니고 살아 있었기에 공동통치 기간이지만, 실제적으로 웃시야가

통치하죠. 남) 10대왕. 웃시야 웃시야도 3대째 꽤 괜찮은 왕으로 살아갑니다. 16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5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좋은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옆에 ‘좋은 멘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스가랴서 쓴 인물이 아님)가 사는 동안에는 웃시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하 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런데 또 이놈의 ‘형통’이 역효과를 냅니다. 이 시기에 남유다는 정치, 군사, 건축,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융성함을 경험했고, 영토도 확장합니다. 이런 좋은 시간들이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기보다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그에게도 무력함이 아닌 ‘교만함’이 찾아왔죠. 우리가 모델로 말하는 다윗의 삶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힘겨웠거든요. 죽음의 위기도 많았고, 배신도 당하고, 여러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종의 신앙적 긴장감을 만듭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력한 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웃시야 왕도 좋은 왕이었으나, 그의 말년은 좋지 않았습니다. 통치 말기에 교만해져서 그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종교적 영역을 침범하여 스스로 분향하려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은 것이죠. 이에 용맹한 제사장 81명이 왕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왕은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선을 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병에 걸려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에 따라, 마지막 10년은 나병환자로 성전에 출입할 수 없고, 별궁에 살게 되죠. 욕심이 죄를 나은 것입니다. 그의 아들 요담이 섭정하게 됩니다. 남) 11대왕. 요담 (왕하 15:34)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왕하 15:35) 그러나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분향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성전의 윗 대문을 세웠다. 요담까지 무려 4대째 하나님께 칭찬받습니다. 이 4대에 걸친 왕들은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려고 힘쓰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요담은 특히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여호와의 성소와 성전 직무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걷고자 힘씁니다. 역대하에 기록된 요담에 관한 기록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요담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하고 한결같은 삶에서 나왔다.” 다만, 요담이

히스기야/요시야 레벨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그가 ‘산당’은 여전히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름 하나님 앞에서 좋은 삶을 살았지만,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죠. 일종의 신앙적 타협 속에 살았던 부분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마도 그의 자녀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4대째 칭찬받는 왕으로 신앙이 전수되어 오다가, 요담의 뒤를 이은 아하스는 최악의 왕으로 기록됩니다. 다시 우상숭배가 만연한 모습으로 유다는 위기에 빠집니다. 이

위기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설교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앙의 3~4대. 서로 영향을 미치고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앙은 홀로서기에 성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으로 바르게 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며 여러분은 스스로의 모습을 어떻게 진단하셨습니까? 내게 주님은 어떤 분이고, 나의 삶은 그분 앞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저는 이곳에 있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분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 이 시간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정말 더 좋을까? 저는 여러분이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오늘도 질문하며 답을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의심의 영역을 다 지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이제 그런 분들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순종의 영역’을 훈련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오늘 설교에서 만난 인물들처럼 다사다난한 일들이 펼쳐지곤 합니다. 때로는 악한 것임에도 내게 유익하다고 느껴지면 타협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고, 내 기준으로 판단하여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가슴을 두드리며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내 삶에 담아낼 수 없는 연약함과 무력함 속에 머물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대적은 그 무력함 속에서 우리를 좌절시키고자

힘쓸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는 할 수 없어’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력함 가운데 우리가 더 의존하며 더욱 찾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 두 손 들고 무력하게 나아갔다가, 그분의 함께하심을 힘입어 나의 모든 문제 앞에서 두 손 들고 주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역사에 그런 신앙의 흔적들을 새겨 넣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