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 강정규 목사

2024-09-22 · 열왕기하 8~10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열왕기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은 열왕기하 8-10장의 3가지 에피소드 대해서 3가지 질문과 함께 살펴보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이 강력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은 ‘왕 위에 계신 하나님’ 왕들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Chapter.1 _ 아람(시리아) 먼저 북이스라엘 위에 있는 ‘아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좌우하시는 곳은 유다와 이스라엘만이 아니죠. 아람 왕인 벤하닷 2세가 중병에 들게 됩니다.

마침 그때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방문하게 된 것이죠. 왕이 엘리사의 방문 소식을 듣고, 자기 부하 ‘하사엘’에게 예물을 들고 엘리사를 찾아가 앞날에 관해서 묻게 합니다. 그렇게 하사엘이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자신을 찾아온 하사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8:10)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가서, 왕에게는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내게 계시해 주셨소." 즉, 엘리사는 왕이 죽을 것을

알지만, 하사엘로 하여금 왕 앞에서는 거짓된 보고를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엘리사가 갑자기 통곡하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뜬금이 없죠. 그래서 당황해서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예언자님, 왜 우십니까?” 그때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대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떤 악한 일을 할지를 알기 때문이오. 그대는 이스라엘 자손의 요새에 불을 지를 것이고, 젊은이들을 칼로 살해하며, 어린아이와 임산부도 죽일 것이오.” 하사엘은 뜻밖의 말에 “개와

같이 비루한 제가 무슨 지위가 있어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이미 열왕기상 19장에는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되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임이 엘리야를 통해 예고되었습니다. (왕상 19: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왕상 19:16)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왕상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오늘 말씀과 이 예언 전체가 굉장히 긴밀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에게 주신 예언인데, 그의 사명을 이어받은 엘리사를 통해서 이뤄지죠. 먼저 아람의 왕이 바뀌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그 대상이 오늘 엘리사를 찾아온

하사엘이죠. 하사엘은 엘리사의 이 예언을 듣고 나서, 아람 왕 벤하닷에게는 거짓 보고를 합니다. “왕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첫 번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Q. 반역은 예언 때문인가, 하나엘의 의지인가? 하사엘은 반역을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엘리사의 말을 하사엘이 굳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의 말을 따르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정도를 가졌겠죠. 그렇다고 하여 그의 선택권이

부정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하사엘이 엘리사를 만난 이후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말할 수 없이 되어서, 자신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예언은 초월적인 차원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과 결과를 초월적으로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적 관점에서는 하사엘이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만약

하사엘이 쿠데타로 왕이 될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굳이 거짓을 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사엘이 왕에게 거짓을 고한 것을 볼 때, 그가 아람 왕에 대한 반역의 마음을 품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선포되었다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렇게 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의 이야기도 나오고, 말씀을 듣고 돌이키거나 다른 선택을 하여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왕상 21장을 보면 아합에게도

심판 예언이 선포되었을 때, 아합이 회개를 하니 하나님이 뜻을 바꾸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확정하여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인간의 선택이 배제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희가 예언서 설교를 시작할 때 나눴지만, 성경에서 ‘예언’은 미래의 것을 예측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존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고 우리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말씀하시는 것은 미래도 현재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제 죽음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미래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볼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죠.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빛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림자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어찌 보면 모호한 표현이죠. 그런데 그 표현이 어쩌면 인간의 언어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인식한 것을 최선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빛보다 크고, 이 세계보다 크고, 시간보다 커서 영원하다고 말하고,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어디나 계신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이 인식도 하나님의 전부를 다 보고 하는 것이 아니죠. 일부분이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초월성을 우리는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조금씩 경험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아닙니다. 우리와 그분의 존재적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존재적 차이가 하나님과 우리에게 있는 격차이고, 예언은 그 격차를 뛰어넘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와 개미로 예를 들어볼게요. 개미보다 조금 더 큰 제가 여기서 저기로 멀리 뛰기를 하면 개미 입장에서는 제가 순간이동을 하는 것일 테지요. 만약 개미가 길을 가는데 저쪽에서

단체로 행군하는 무리가 있어요. 저는 예측이 가능하죠. 곧 개미가 깔려 죽게 될 미래를 저는 알아요. 다만, 개미는 모르겠지요. 이것이 완벽한 예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차원에 있는 우리도 존재가 더 크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격차를 갖습니다. 우리는 작은 존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행하며, 개미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을 만나면, 그냥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다 짜고 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성경의 이런 부분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존재적 차이를 고백하고, 제가 삶을 그분께 의지하는 것의 안정감과 필요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가 이야기하듯 인간이 계발하고 만들어낸 신, 그 정도의 차원에 계신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본래 피조물은 존재적 한계 안에 모두 갇혀 있습니다. 하루살이가 봄-여름-가을-겨울을 받아들일 수 없겠죠. 그의 존재보다 크니까요. 개미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들면, 개미는 제가 자기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 존재적 위치에서 다 이해할 수 없으니 그 이상의 것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인식합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되니까 저 신은 없는 것이라고. 이것이 저것이 말이 안 되니까 신에 대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오히려 많은 신학자들이 고백하듯이, 신이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 아닙니다. 예언은

우리를 그 안에 묶어 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자유로움에 의한 선택보다 더 크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뜻을 돌이키지 않으면 예언은 성취가 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될 것을 그분의 특별한 존재성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 성취를 통해서 우리를 우리와 차원이 다른 그분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Chapter.2 _ 남유다 성경은 남유다 이야기로 다시 렌즈를 맞춥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을 기억하시죠? 그때 당시에 남북이 친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혼인으로 동맹을 맺은 관계였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사돈이 됩니다. 그들이 함께 아람과의 전쟁에 나서죠. 아합은 꼼수로 왕의 복장을 하지 않고 나가죠. 그 전쟁에서 여호사밧은 기적적으로 살고 아합은 죽게 되었죠. 언제나 그렇듯 우연과 기적에 대한 판단은 한 끗 차이입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여호람’입니다. 바로 이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혼인을 한 왕자입니다. 그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서 유다의 왕이 됩니다. 여호사밧은 일곱 아들 중에 장자 여호람을 후계자로 정하고, 나머지 여섯 형제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살게 하였습니다. 왕권 다툼을 피하고자 했던 지혜이죠. 그러나 여호람이 왕이 된 후에 모든 아우를 다 죽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을 우상숭배로 이끌게 됩니다. 유다에 여러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세우는데, 이것은 왕후 아달랴의 영향 때문입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강력한 우상숭배자였던

것처럼, 그의 딸 아달랴도 만만치 않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시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시절이었는데, 여호람의 시기는 강력한 우상숭배의 시간이 됩니다. 그의 통치 시기에 유다는 주변 나라인 에돔과 립나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됩니다. 또한 역대기를 보면 여호람 시기에 이방의 침략으로 아내와 자녀를 다 잃고, 막내 ‘아하시야’만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우연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다윗의 후손을 하나님이 보존하신 것이죠. 악행을

행했던 여호람 또한 창자에 불치병이 들어 심하게 앓다가 죽게 됩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하시야가 자연스럽게 남유다의 여섯 번째 왕이 됩니다. 그런데 아하시야 역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왕이 되는데,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이 유다에는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을 던져봅시다. Q. 왜 다윗의 후손들인 유다 왕조는 바알 숭배에 굴복하는가? 제가 북이스라엘의 가장 타락한 시기가 가장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성공했던 시기라고 했습니다. 그 시기에 북이스라엘에서

유행했던 것이 ‘바알 신앙’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앙을 빼고 보면 “바알 믿으니 잘 풀린다”라고 생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유다 왕조가 북이스라엘과 혼인으로 묶여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돈지간인 유다 왕들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아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도 ‘바알 신앙’을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겠죠. “저게 해답이네.” 유다나 북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흩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로 보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먼저 바알을 섬겼죠. 그들은 바알을 섬기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본이고 그냥 추가로 바알을 같이 섬겨서 하나님의 도움도 받고 바알의 도움도 받고 이런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게 뭐가 문젠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 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고민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더 헌신하고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일이 안 풀려요. 그런데 적당히 교회생활 하면서 세상과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승승장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현실의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가만히 있어도 고민이 있는데, 옆에서 아달랴는 타협된 신앙을 전도하는 사람인 것이죠.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수험생이 있는데, 누구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섬겨요. 그런데 누구는 주일에 필요하면 학원도 가고 적당히 필요에 맞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배도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히 한 애는 대학을 다 떨어졌어요. 오히려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던 애는 대학을 잘 갑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부모도 흔들리고 애도 흔들릴 수 있어요. 만약 얘가

첫째에요, 그러면 둘째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왜 우상숭배를 하지? 그들이 우상숭배에 쉽게 빠지는 것은 당연했어요. 주변 나라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더 잘나가는 것 같아요.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더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때때로 신앙의 배수의 진을 쳐야 해요. 왜냐면 우리는 쉽게 유혹당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투와 전쟁으로 가끔 나눠서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내가 잠깐 신앙의 양심을 조금 내려놓고 타협해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죠. 그래서 소위

전투에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굉장히 나쁜 학습효과입니다. 한번 그렇게 뭔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다음에는 더 고민하지 않고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요. 그런데 반대도 똑같아요.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고수해요. 그래서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삶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로 인해 내가 금전적으로 손해 볼 수도 있고, 육체적으로 더 피곤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냥 이것이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내 예배를 지키는 것이고,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니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해와 피곤함도 맛봐요. 힘들죠. 믿음대로 살아서 마주하는 역풍을 맞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때 뭘 경험하냐면, “살만하네.” “살아지네.”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삶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고, “이건 되고, 이건 안 되고” “나는 여기까진 가능하고, 여기부터는 난 못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 세상은 우리를 더 유혹하고, 반대 선택을 두렵게 합니다. 그런데 저의 안타까움은 무엇이냐면, 믿음을 발휘하지 않으니 경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ath Finder’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찾아서 나아가는 사람이죠. 뒤따라올 수 있도록요. 저는 이 세대를 살아가면서 그래도 지금 우리 세대는 아직 부흥의 불씨가 있는 세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다음 세대는 정말 열악할 것이라고요. 그 이야기는 저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자녀 세대에게 여러분이 각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 패스파인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주겠습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으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습니까? 무엇이 정말 여러분의 삶을 지키고 있습니까? 저는 제가 진짜 믿음으로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그 삶을 보여주고, 그 삶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을 제 자녀에게 남기는 것이라고 믿어요.

먼저 우리가 싸우고, 먼저 우리가 길을 내야 합니다. 유다의 왕들도 고민했겠죠. 바알 신앙을 우리도 도입할까? 옆에서 왕후는 계속 유혹하죠. 아하시야 때는 엄마가 계속 “바알 바알” 거리죠.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도 주목하고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누가 진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보겠냐고요. 우리의 삶도 그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서로를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자. 우리가 너 어려움 당하면

도울 거야. 우리 서로 힘내자!” Chapter.3 _ 북이스라엘 마지막 에피소드는 북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다른 나라 왕들이 다 바뀌었는데, 아람은 지금 누가 왕이 됐지요? ‘하사엘’이 됐습니다. 북이스라엘 왕은 아합의 아들 ‘요람’이었고, 유다는 아합의 사위였던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입니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외숙부와 조카입니다. 이때 아람과 유다/이스라엘 연합군이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서 북이스라엘 요람이 아람의 군대에 의해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빠져나와 ‘이스르엘’이라는 지역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아하시야’가 문병을 갑니다. 여기서 다시 엘리사가 등장을 하는데요. 엘리사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제자 한 명을 길르앗 라못이라는 전쟁터로 보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군대 장관 ‘예후’를 만나도록 합니다. 그를 만나 기름을 붓도록 하죠. 아시다시피 이것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후는 다른 장군들과 군사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사가 보낸 예언자가 오니, 그와 함께 잠시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왕하 9:6) 예후가 일어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예언자의 시종인 그 젊은이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말하였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북이스라엘 군대 장관에게 왕이 되는 의식을 행하고, 지금 왕으로 있는 아합의 가문을 치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현 왕조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들을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예후가

다시 다른 신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까, 다른 군대 장관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처음에는 예후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둘러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계속 추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후가 사실대로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이, 주님께서 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다고 말씀하시었다고 하였소.” 그러니까 다른 군대 장관들이 황급히 일어나서, 각자의 옷을 예후의 발아래 깔고,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후께서 왕이 되셨다”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기가 또 절묘한데, 요람이 부상으로 전장을 이탈해 있는 시기잖아요. 그러니까 군대 지휘권이 예후 쪽에 있어요. 지금 요람 왕은 여기서 72km 떨어진 이스르엘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예후는 자신의 반역이 새 나가지 않도록 통제합니다. 아람과의 대치 국면이었으므로, 군대는 계속 그곳에 두고, 한 무리를 이끌고 왕이 있는 ‘이스르엘’로 출발합니다. 요람 왕은 예후를 만날 때까지 그의 반역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의

파수꾼이 보니까 멀리서 어떤 무리가 오는 것입니다. 누군지 잘 모르니까 파수병을 보내서 묻습니다. 예후가 그 파수병에게 말하죠. 내 편으로 서라. 몇 차례를 확인하러 간 파수병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아요. 모두 예후의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가까이 이르렀을 때 왕도 예후의 무리가 온 것을 압니다. 크게 의심이 없이 요람 왕과, 문병을 왔던 유다 아하시야 왕이 함께 예후를 맞으러 나갑니다. 그리고 요람이 예후를 만나자 “예후 장군, 평화의 소식이오?”하고

묻습니다. 그때 예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이세벨이 저지른 음행과 마술 행위가 극에 달하였는데, 무슨 평화가 있겠소?” 이 정도면 요람이 바보가 아닌 이상, 쿠데타를 눈치챘겠죠. 그래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그 도망치는 요람의 등을 향해 예후가 힘껏 활을 당겨 날립니다. 화살이 그의 가슴을 뚫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바로 요람과 예후가 만난 그곳이 ‘나봇의 포도원’이 있던 곳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는데, 나봇이 율법에 근거하여 팔지

않으니까, 이세벨이 나봇을 죽여버리고 강제로 빼앗은 땅이죠. 주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셨는데, 바로 예후에 의해서 그곳에서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던 유다 왕 아히시야는 도망하였으나, 추격부대에 의해서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남북 왕이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아합 가문의 왕은 모두 죽었지만, 사실 더 강력한 끝판왕이 아직 남아있죠. 이세벨입니다. 이제 예후는 마지막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인 이세벨에게 향합니다. 어차피 쿠데타는 이제

성공입니다. 이세벨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멘탈이 세죠. 이 상황에서 예후가 온다는 것을 듣자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예후를 저주하며 소리칩니다. 예후가 창문을 쳐다보며 응수합니다. “거기 내 편이 될 사람이 누구냐?” 2~3명의 내관이 빼꼼 내려다봅니다. 예후가 명령합니다. “저 여자를 아래로 내던져라.” 그랬더니 그 신하들이 이세벨을 아래로 내던집니다. 그 떨어져 죽은 시체를 예후가 밟고

지나갑니다. 그날 밤쯤, 예후가 그래도 이세벨이 왕의 딸이니 장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하여 신하들이 찾으러 나왔는데, 해골과 손발 밖에는 아무것도 시체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이미 이세벨의 최후에 대해 예언했죠. “이스르엘의 밭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주검을 뜯어 먹을 것이다.” 이렇게 예언이 성취됩니다. 예후는 아합의 가문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합니다. 또 이세벨의 문안을 오던 유다 왕 아하시야의 친족들도 처단합니다. 이렇게 바알 신앙에 빠져 살았던

왕족들을 모두 예후가 심판합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살던 왕족들이 죽었지만, 아직 우상숭배자들은 남아있죠. 그래서 예후가 꾀를 냅니다. (왕하 10:18) 예후는 백성을 다 모아 놓고 말하였다. “아합은 바알을 조금밖에 섬기지 않았지만, 이 예후는 그보다 더 열심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위한 집회를 엽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바알의 모든 선지자를 신전으로 초대합니다. 신전이 가득 차서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예후가 바알 신전에 들어가서 말합니다. “아-

아-, 혹시 여기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은 다 내보내십시오. 여기는 신성한 바알의 종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알 숭배자들을 모아 놓고, 군인들이 들어가서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바알 신전과 우상들을 불태웁니다. 바알 신전을 헐어서 변소로 만듭니다. 예후가 그렇게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에서 제거합니다. 몇 대에 걸쳐서 북이스라엘의 신앙을 망쳤던 바알숭배를 드디어 예후가 끝내버린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등장한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바로 다음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명확한데요. (왕하 10:29) 그러나 예후는, 베델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섬겨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예후는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했습니다. 예후가 엄청난 일을 했죠. 칭찬도 받습니다. 그런데 온전하지는 못했습니다. 31절도 말합니다. (왕하 10:31) 그러나 예후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지는 못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의 죄로부터 돌아서지는 못하였다. Q. 왜 예후는 철저하게 우상을 처단하는 것처럼 행하면서도 완전하게 행하지는 않았을까? 바알 숭배는 ‘아합’의 유산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제거는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죠. 바알 관련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합 왕조와 관련된 세력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열심히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 일을 한 것이죠. 그런데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시작점입니다. 그가 만든 금송아지 숭배는 자기가 지지율을 생각하면 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자칫 백성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예후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의 여러 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다른 불순한 동기가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날마다 살피고 걸러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묵상과 설교>는 이렇게 코멘트를 달고

있습니다. “바알 숭배 청산에는 열정적이었던 예후가 금송아지 숭배는 방치한다.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다. 정말 내가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일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다시 점검하게 한다. 진정 하나님을 위한 일이 맞는가?” 설교를 마무리하며 메시지를 정리해봅시다. 오늘 우리는 세 나라의 왕이 모두 바뀌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람의 왕이 벤하닷에서 하사엘로 바뀌었고, 유다의 왕은 여호람에서 아하시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요람에서 예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미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흔한 쿠데타이고, 흔한 역사의 흐름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언젠가 역사의 일부분이 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죠. 그 안에는 우상숭배의 역사도 반복되고, 신앙의 투쟁도 반복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선한 싸움도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 안에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누군가는 긴긴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그 존재를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늘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그분은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삶에도 두 부류의 모습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실존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병풍처럼 옆에 하나님을 세워두고만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결정과 선택을 합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하나님이 주도하는 인생을 경험하며 살고, 누군가는 병풍처럼 딱히 작동하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래도 보험으로 곁에 두려고 합니다. 열왕기서에서 모든 왕은 두 인물의 길에 빗대어 평가를 받습니다. 다윗의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었고,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그냥 옆에 세워두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믿음과 경험은

보통 선순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어차피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그래도 알고 받아들인 것이 어렴풋하더라도, 그 깨달음만큼 믿음대로 행하면 하나님을 조금씩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에 더 어렴풋한 순간이나 어려운 순간에도 믿음을 발휘해서 행합니다. 그럼 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믿음은 경험을 먹고 자라갑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자기 자신인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견고한 틀 가운데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거야.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해.” 하나님이 자신을 그 삶에 계시하여 드러내고 싶어도 틈이 없습니다. 틈이 없으니 믿음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 더 자신의 견고한 틀 안에서 살아갑니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자기의 계획과 판단과 능력 속에 지켜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아니라 내 기준, 내 판단으로 살아간다면, 사실 내 삶의 문제도 그냥 내가 짊어지고

싸워야 하는 문제로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평생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아요. 성경도 예배도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확장이 일어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의 판단과 나의 경계를 조금 허물어야 합니다. 내가 다 옳거나 내 판단이 다 안전하거나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예배 안에서 나를 좀 맡겨야 합니다. 누군가는 성경 시대의 수많은 기적 속에서도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한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금의 시대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이 성경이라는 역사 속에 박제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