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의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남유다의 다섯명의 왕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다만, 같은 시기에 통치한 북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합 가문이 다스리며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최고조에 달했던 북왕국. 하나님은 그것을 끝내기 위해 엘리사를 통해 ‘예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웁니다. 그는 아합 가문을 심판하고 바알숭배를 북이스라엘에서 몰아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후에게 그의 후손 4대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그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왕이 나온다면 예후 왕조는 더 오랜 기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 11대왕. 여호아하스 예후의 뒤를 이어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람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왕하 13: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왕하
13: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왕하 13: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하나님을 떠나면 고통을 받고,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하나님을 찾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전형적인 사사기 패턴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사사’가
구원자라면, 여기서는 문맥상 ‘엘리사’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악한 왕이었으나, 그가 여호와께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문제는 사사기 시대처럼 곤경에서 벗어나자 다시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반복합니다. 악순환이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고 믿어요.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그 변화의 기회, 깨달음의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안타깝게도 여호아하스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북) 12대 왕. 여호아스(요아스)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여호아스가 왕이 됩니다. 그도 자기 부친을 닮아서 여로보암의 길을 갑니다. 이들 부자는 제법 오랜 시간을 안정적으로 통치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엘리사도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아하스나, 여호아스나 이들에게는 돌이킬 시간이 없거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삶을 마감합니다. (왕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시여!"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했던 말로써,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어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엘리사가 엘리야를 존경했던 것처럼, 왕이 엘리사에게 이런 존경과 경의를 표할 정도로 그 시대의 엘리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여호아스가 회심하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왔지만,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섬기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기 전까지도 마지막 예언 사역을 합니다. 그는 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말한 후, 활을 쏘고 화살로 땅을 치라고 말합니다. 왕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세 번 정도 땅을 치고는 이내 멈춥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며 말합니다. 왕이 겨우 세 번만 쳤기에 세 번만 전투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여호아스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이후 아람과의 전쟁에서
세 번 승리합니다. 북) 13대 왕. 여로보암 2세 (왕하 14:23) 유다의 요아스 왕의 아들 아마샤 제 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왕하 14:24)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예후 왕조는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통치를 해나가죠. 여로보암2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정치·군사적으로
강력함을 갖습니다. 무려 41년을 통치하면서 솔로몬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아람을 일시적으로나마 정복하기도 합니다. 여로보암2세는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북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당연하죠. 세상의 기준에서 그는 업적을 남겼으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입니다. 여로보암2세는 24절을 보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께서 보시기에,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표현을 오늘 제가 많이 사용할 것입니다. 이 표현은 열왕기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열왕기서에 무려 39번이나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죠. 열왕기서는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우리 가운데 깨우치고 있습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회심은 기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전까지 모두 세상의 기준에 영향을 받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에 따라서 나와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이것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 세상의 성취나 업적이 그 기준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혹은 외적인 어떤 모습의 차이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인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것에 자꾸 집착하고 마음을 뺏기는 나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성장을 방해할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히려 관심을 갖고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새롭게 주어진 기준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의 성장,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부모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가 아름답게 성장해가면서 자신의 몫을 해나갈 때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십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그의 인생을 종합해서 평가를 내립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런’ 사람이었다. 삶에 대한 궁극적 평가를 성경은 담아내고 있어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 인생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주변 신앙인들에게 어떤 도전을 남겼던 어떤 영향을 남겼던 사람으로 삶을 사용하고 사라지실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기억하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말은 뱉으면 흘러가고, 우리의 시간은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눈앞에서만큼은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입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의 애씀을 주께서 아신다고 말하면 그것은 위로이고, 아무도 모르지만, 나의 추악함을 주께서는 아신다고 말하면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 마음 중 하나만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로보암2세는 세상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그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간 실패한
왕입니다. 북) 14~18대왕. 스가랴-살룸-므나헴-브가히야-베가 (왕하 15:8) 유다의 아사랴 왕 제 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다스렸다. (왕하 15: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스가랴의 통치는 매우 짧습니다. 스가랴가 왕이 되는 것까지는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하신 예언의 성취입니다. 안타깝게도
예후의 후손들은 모두 여로보암의 길을 갑니다. 그사이 누적된 악함은 다시 한번 북왕국에 쿠데타로 나타납니다. 살룸의 쿠데타로 스가랴는 통치 6개월 만에 삶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짧은 것이 아닙니다. 쿠데타로 왕이 된 살룸[15대]은 단 한 달 동안 왕의 자리에 있다가, 므나헴의 쿠데타로 죽게 됩니다. 다시 북왕국은 피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므나헴[16대]은 10년 정도의 통치를 이어 나갑니다. 다만 그도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변의 깨어짐과 가속화되는 악함을 혼자 힘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외부에서 더 악하고 욕심 많은 군주가 그들을 괴롭힙니다. (왕하 15:19) 앗시리아의 불 왕(디글랏빌레셀)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왕하 15:20)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 약육강식의 세계에 던져진 북왕국은 강력한 제국인 앗수르의 침공을 받습니다. 싸워서 무찌르거나 아니면 항복해야 합니다. 므나헴은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됩니다. 왕의 이러한 결정은 이제 자기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신세는 그의 아들인 브가히야[17대]까지 이어집니다. 그 또한 주께서 보시기에 악한 길을 좇아갑니다. 결국 브가히야 통치
2년 만에 북왕국에서는 다시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냐면,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잡아서 왕권을 찬탈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성취와 업적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곳에는 더 악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늘 존재합니다. 베가[18대]는 길르앗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북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의
통치 기간을 20년이라고 하는데, 그중 12년은 므나헴/브가히야 시절에 길르앗을 다스린 것이고, 북이스라엘 전체는 8년 정도를 다스립니다. 이 시기에 국제정세를 뒤흔드는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이것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모두 관련된 중요한 일입니다. 바로 ‘시리아 에브라임 전쟁’입니다. 우선 이 사건은 남유다와도 관련이 있기에 남유다 이야기로 잠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아달랴 이후 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까지 4대에 걸쳐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부분이 있는
‘그나마 괜찮은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자기 조상들과 달리,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길을 가게 됩니다. 남) 12대왕. 아하스 (왕하 16:2) 아하스가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이 한 대로 하지 않았다. (왕하 16:3)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다. 그는 다윗의 길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그 잘못된 길을 걸어갑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잘못된 길은 ‘세상의 기준’에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모두가 원하는 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역사 이래 어느 왕도 하지 않았던
독보적인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는 다시 바알 숭배를 시작합니다. 또한 당대 가나안의 흉측한 관습을 좇습니다. 자녀를 불에 태우는 인신제사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하스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나안 지역의 오랜 악습이었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서를 비롯한 구약 선지서에도 강력하게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그만큼 아하스는 하나님과 멀었습니다. 당시 세계는 앗수르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주변 나라들도 ‘친 앗수르’
국가와 ‘반 앗수르’ 국가로 나뉘게 됩니다. 이 반 앗수르 동맹의 핵심이 다시 세력을 회복한 ‘아람’이었는데, 아람이 중심이 되어서 세력을 모으는 것입니다.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느라 힘들었던 ‘북이스라엘’이 이 동맹에 함께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남유다도 함께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동맹에 가담하느냐, 가담하지 않느냐? 이것은 무엇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일 앞에서 누가 최종 결정권자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묻고 듣고 답을 찾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자신의 정치적 감각대로 판단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이 그의 삶에 영향력이 없다는 증거겠죠. 아하스의 선택은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은 앗수르와의 전쟁 때,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유다가 앗수르 편에 설까 봐 우선 힘이 약한 유다부터 정벌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두 나라가 남유다를 침공한 것이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아하스가 하나님께 답을 찾지 않자, 하나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먼저 말씀하세요. 하나님의 응답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 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런데 아하스는 이 말을 깊이 듣지 않습니다. 그의 해답은 눈에 보이는 힘, ‘앗수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리기보다는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하스는 자신이 앗수르 왕의 신하이자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었어요.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어주실 만큼 자존심이 없어요. 사랑하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정말 싫어하는 것이 있으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 열두 정탐꾼 사건이 그랬죠. 열 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죠. 아하스는 세상의 힘 앞에는 비굴하고 하나님은 무시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집착하는 영역이 있어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열정은 누구나 대단합니다. 저도 삶에서 여러 관심 분야가 있었는데, 관심을 갖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깊이 알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유럽 축구에 빠져서 살던 때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기사부터 봅니다. 누가 어느 팀으로 옮겼는지에 대한 것으로 아침 묵상을 해요. 새벽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내 관심의 영역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예배가 소중해져요.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토요일부터 자신의 삶을 관리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알고 싶은 사람은 말씀을 잘 새겨 듣습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습관적으로 종교생활을 하기 쉽고, 예배도 최소한의 양심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유독 소극적인 경우가 있어요. ‘나는 원래 이런 성향이야.’ 자칫 이것이 또 하나의 ‘자기방어’이고 복음에 대한 ‘불신’일 수 있어요. 나는 무엇에 관심을 쏟고 있는가? 과연 하나님이 내 삶의 몇 번째 순위에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보셔야 해요.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이길 바라는 것만큼, 하나님도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일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짜 소중하게 여기면 얼른 다가오셔서 함께 하고 싶은 분이세요.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 4:8a)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과 멀었던 아하스. 그가 의지한 것은 앗수르였고, 이는 안 그래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출하고 싶었던 앗수르에게 너무나 좋은 명분과 구실을 만들어줍니다. 그들은 유다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아람을 정복하고 북이스라엘을 칩니다. 아하스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막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아하스는 자신이 매우 지혜롭고 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아하스의 이 선택은 남유다에게도 후에 엄청나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종종 그렇습니다. 단기적으로는 하나님보다 내 선택이 더 옳고 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보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를 그분에게 의지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앗수르의 개입과 동시에 앗수르는 반앗수르 동맹의 수장인 아람을
점령해서 멸망시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도 침공하여 엄청난 백성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것이 베가 왕의 통치 시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람은 완전히 망했고, 북이스라엘은 호흡기만 붙어 있는 수준이 됩니다. (왕하 15:29) 이스라엘의 베가 왕 시대에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갔다. 문제는 아하스가 이때부터 더 강력한
‘앗수르 신봉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요청을 들어준 앗수르 왕을 만나러,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갑니다. 앗수르는 그곳을 정복한 후,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죠. 아하스가 앗수르의 제단을 보더니 완전히 매료된 것입니다. “역시 앗수르는 달라. 우리도 이런 것이 필요했어.” 그래서 그 제단의 모양과 제작 방식을 제사장에게 보내어 그대로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강대국의 우상 제단을 본떠서 자신의 나라에도 만들면 자신들도 강해지리라고 여겼던 것이겠죠.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밥을 먹고 같이 놀기만 해도 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심에 있지 않은 사람을 따라가면 같이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하스에게는 앗수르가 성공의 모델, 따라갈 모델이었습니다. 앗수르를 따라간 아하스의 결말은 뻔하죠. 앗수르와 함께 망한 인생입니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성공인가? 내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살아갈까?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북) 19대 왕. 호세아 이런 멸망 직전의 북이스라엘에 다시 한번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호세아가 베가 왕을 암살하고 왕에 오릅니다. 이미 털어먹을 것도 없는 나라인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죠. 거기서도 또 정권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왕하 17:1) 유다의 아하스 왕 제 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왕하 17:2)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는 나았다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그가 다른 왕들처럼 우상숭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악한 왕입니다. 그는 종교적 우상숭배보다는 정치적 우상숭배를 더 열심히 합니다. 통치 초기에는 앗수르를 의존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집트를 의존하였습니다. 마치 남왕국의 아하스처럼 다른 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북왕국이 앗수르를 배신하고
애굽으로 붙자, 앗수르가 보복에 나섭니다. 결국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가 주변 다른 나라들로 흩어버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잡아 와서 살게 합니다. 여러 민족을 섞어버려서 정체성을 손상하고, 반역을 꾀하지 못하게 한 것이죠. 역사는 북왕국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인 문제였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바라보는 북이스라엘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왕국이 하나님 앞에서 단 한 번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9명의 통치자가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은 앗수르의 손에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앗수르를 통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해석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남왕국 유다뿐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뒤를 이어 남유다에서 가장 중요한 왕이 등장합니다.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남) 13대왕.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남왕국의 TOP2에 해당하는 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자신의 왕권을 걸었어요. 용기를 냈습니다. 그가 이전에 단 한 명도 행하지 못한 종교개혁을 실행합니다. (왕하 18: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왕하 18: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성경이 이런 히스기야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여호와를 의지하였다. 여호와께 연합하였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회심했는데 안 변하지?” 걸음을 내디뎌야 새로운 삶으로 내 삶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여러분. 당시에 앗수르를 대항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앗수르에 바짝 엎드리고 그것을 마음껏 추구해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했어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을 백성 앞에서 용기 있게 하고, 당대의 모든 사람이 따르고 있는 앗수르를
따르지 않습니다. 18:7b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믿음은 말씀대로 살면 안 된다고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한 결단을 하고 힘써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깨어진 세상의 강력한 요구와 삶의 방식을 벗어나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히스기야가 이런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앗수르가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것을 막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무력합니다. 방법이 없어요.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를 환상 속의 인물로 그리지 않아요. 그도 앗수르가 침공했을 때, 두려웠고 그래서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무마하려 합니다. 믿음의 결단을 하고 앗수르를 섬기지 않기로 했는데, 위기가 오니까 굴욕적인 모습,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히스기야가 조공을 바치며 무마하려고 했으나 안 통합니다.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오며, 유다 백성들에게 계속 외칩니다. (왕하 18:29) 앗수르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아라.
그는 너희를 내 손에서 구원해 낼 수 없다. (왕하 18:30) 히스기야가 너희를 속여서, 너희의 주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며,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 절대로 넘겨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너희로 주님을 의지하게 하려 하여도, 너희는 그 말을 믿지 말아라.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대로 삽시다’라고 말하는 오늘 저의 설교에 대해서도 우리의 대적이 똑같이 여러분의 마음에 외치지 않을까 싶어요. “저
이야기를 믿지 말라. 저렇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것은 허상이다.” 히스기야도 분했어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절망적 상황, 그 앞에서 너무 무력한 자기 모습에 화가 나죠. 그런데 그에게 있는 위대함이 이 순간 드러납니다. (왕하 19:1) 히스기야 왕도 이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찢고, 베옷을 두르고,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무력할 때가 있죠. 하나님 뜻대로 했는데, 내가 기대한 더 나은 상황들이 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 더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내 선택을 존중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나를 비방하고, 조롱하고, 헛된 모습을 꿈꾼다고 현실적인 시선에서 비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경험은 바로 그곳에서 물러나지 않고 주를 더욱 굳게 붙드는 버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울분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말씀 앞으로. 예배 앞으로. 히스기야가 베옷을
두르고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전적인 인정입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이고 자기 죽음입니다.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쳐서 문제를 해결하려던 히스기야는 이제 죽은 것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죽은 자와 같이 무력합니다.” 그리고 그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신하들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합니다. 히스기야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유다의 진정한 왕으로,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으로, 온 세상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적은 물러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조롱하며 다가와서 이제는 마지막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항복 권고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그 서신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간구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여호와 앞에 내려놓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앗수르 군대를 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분이 아니라,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왕하 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호와의 열심. 우리는 살아계신 그분을 믿기에, 때로는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도 잠잠히 기다리며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죠. 결국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성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들의 진영에서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서 전멸합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이날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은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로 앗수르 군대가 궤멸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또 다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하룻밤에 수많은 쥐 떼가 나타나, 앗수르 군의 활과 그 밖의 무기를 갈기갈기 쪼아 놓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은 참패 끝에 고국으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이죠. 악은 더 큰 악으로 망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이제 오늘의 모든 설교를 정리하며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북왕국의 마지막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나라는 기울어가지만, 악은 창궐합니다. 권력투쟁은 끝이 없고, 결국 그렇게 죽이고 죽이며 왕좌를 차지하다가 나라는 더 큰 악의 세력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차지할 수는 있지만, 지켜낼 수 있는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남유다의 왕인 아하스와 히스기야는 너무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와 히스기야를 성경의 시각을 빼고 본다면, 정치력이나 처세술이나 모두 아하스가 한 수 위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판단이 결국 앗수르 앞에 남왕국의 위기를 만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이 열심히 일구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자녀에게 더 좋은 삶을 주기 위해서 애쓰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앞날을 열어가기 위해서 애쓰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가?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삶인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중심에 두지 않으면, 내가 뭔가를 이룬 것 같지만, 그것이 이룬 것이 아니라 망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애쓰지만, 사실은 더 나쁜 것을 주고 있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정말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하고 때로는 몸을 쳐서 순종해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버텨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가 앞에 어떤 사람으로 남으시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써 내려가는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기록되어가기를 기도하고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