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공부해서 쉽게 전해달라.” 사귐의교회를 개척할 때, 한 분이 저에게 부탁했던 말입니다. 저에게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을 6년 만에 다시 설교하는 이 과정은 우선 저에게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풍삶초-첫-기 이끄미를 해봐도 한번 처음 이끄미를 할 때보다 그다음에 하면 본인에게 더 선명하게 정리가 된다고 한 것처럼, 2019년에 비해서 이번 요한계시록 설교를 전하며 제 안에 많은 부분이 정리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요한계시록이
이제는 조금 재미있게 느껴지고 있는데,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이것을 잘 전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고, 이 설교 시간의 진정한 주인이자 설교자이신 성령께서 말씀 앞에 전심을 다 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지난 두 편의 설교를 통해 다뤘던 것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어떤 배경 가운데 있는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직접 받은 첫 번째 독자인 일곱교회에 대한 직접 권면의 부분을 다뤘습니다. 핵심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피해를 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은 유혹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이 있었지만, 일부는 타협과 합리화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록 말씀을 통해 결국 그들에게 ‘충성’, 즉 신실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미래적 완성을 가지고 현재와 만나기 위해 오고 있고,
현실 세계에 속한 우리가 하나님께 보이는 신실함이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그 이기는 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창조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다루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하나님이 알려주고 싶은 묵시적 환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묵시는 우리의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결말을 통해 현재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많은 예언들을 완성하는 절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정말 성경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최대한 잘 설명하는 것에 집중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잘 집중해서 따라와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의 참 의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계 4:1)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내가 들은 그 음성, 곧 나팔 소리와 같이 나에게 들린 그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계 4:2)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초월적 세계에 계신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여하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옵니다. 욥기 초반부, 이사야의 소명 장면, 그리고 스가랴나 다니엘 등에서도 이런 부분들이 나옵니다. 물론 저는 이 시대의 천국에 다녀왔다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을 믿지는 않습니다. 현시대
우리의 개인적 영적인 신비체험을 진리의 일부분으로 사용하기는 어렵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거짓 환상도 존재함을 성경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환상으로 검증된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기록자인 요한도 지금 하나님의 천상회의를 성령에 사로잡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요한도 설명하기 어려운 피조물들도 있었고, 스물네 명으로 구성된 장로들도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하니, 이것은
직분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존재들을 의미합니다. 피조물과 사람 모두가 “거룩, 거룩, 거룩.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면서 찬양과 경배를 보좌에 앉으신 분께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에는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과,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로 표현되는 성령님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나와야 할까요? 예수님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잠깐 기다리시면 됩니다. (계 5:1)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계 5:2)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계 5:3)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없고 땅 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계 5:4)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개의 인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거룩한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역사에 대한 주권, 심판과 구원의 청사진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간이나 피조물이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한계를 보며 슬피 울고 있는 요한에게
장로 중 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감당할 존재가 딱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겠습니까? 네. 예수님입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듣습니다. 그는 ‘유다의 사자’이며 ‘다윗의 뿌리’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자가 맞습니다. 성경에는 호랑이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의 독자들에게
호랑이는 알려지지 않은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 사는 동물이죠. 저쪽에서는 누가 짱입니까? 동물세계의 왕은 사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자는 왕권, 힘,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창세기에서 야곱이 유다에게 했던 예언을 가져온 것입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말대로 다윗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죠. 그래서 이 봉인을 뜯고 하나님의 계시를 감당할 유일한 존재는 메시아 예수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를 갖고 요한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그런데 거기 사자는 없고, 뜻밖의 동물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계 5:6a)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계 5:7)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제가 오늘 몇 가지 그림을 보여드릴 것인데, AI를
활용해서 최대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그림일 뿐, 너무 그림에 얽매이지는 마십시오. 요한이 본 환상을 표현해보자면, 죽임당한 어린 양을 본 것입니다. 양도 약한데,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도 약한데, 죽임당했던 어린 양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되십니까? 요한에게도 엄청난 반전이자,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그가 우리의 왕이신 이유는 강력한 사자여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어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우리의 왕인 이유는 세상의 왕들처럼 무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희생으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 것입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은 출애굽기에서 유월절에 하나님께서 죽음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어린 양의 피를 사용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살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죽임당한 희생양이 두루마리를 열 준비를 하고 서 있는 것을 요한이 본 것입니다. (계 5:8)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계 5: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계 5:10)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계 5:11)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는 어린 양이 하신 일에 대한 증언자이죠.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대표합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송축하며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회심하여,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참된 교회, 참된 성도들이죠. 그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모든 성도와 모든 천사가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역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그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어둠에 빛을, 죽음에 생명을, 깨어진 세상에 다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계 6:1a)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두루마리의 계시가 요한 앞에 펼쳐집니다. 두루마리에 있었던 인을 하나씩 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일곱 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세 차례의 ‘일곱과 관련된 심판’을 보게 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가 초월세계인 하늘에서와 같이 이제 땅에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순차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곱 인이 끝나고 일곱 나팔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환상인 일곱 인의 마지막 부분을 열었더니, 그 안에 일곱 나팔이 있고, 일곱 나팔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봤더니 일곱 대접이 있는 양파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3가지 모드의 환상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에 대해 묵시적 환상 언어로 그것을 보여주는 묘사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상과 악에 대한 정의와
심판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요한계시록은 그 심판과 구원을 함께 다룹니다. 인, 나팔, 대접 시리즈 안에는 중간에 ‘구원에 대한 장면’이 삽입됩니다.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영화를 보듯이 일곱 인이 하나씩 봉인이 해제되며 악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인을 뗀 순간부터 네 번째 인을 뗀 순간까지 말탄 자들 네 명이 나오는데, 각각 ‘정복, 전쟁, 기근,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 1장과 6장에 예언된 내용을
기반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반복되는 비극으로 세상 질서가 붕괴되는 상징들입니다. 다섯 번째 인은 순교 당한 성도들이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절규를 하나님이 듣는 장면입니다. 여섯 번째 인은 바로 그들의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환상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은 ‘재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그날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소망하던 날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당하는 날입니다.
이 배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측면에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무너짐과 절규의 절정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그 절망 한가운데, ‘구원의 환상’이 삽입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장면이 바로 7장입니다. (계 7:1) 그 뒤에 나는,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서, 땅이나 바다나 모든 나무에 바람이 불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 7:2) 그리고 나는, 다른 천사 하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땅과 바다를 해하는 권세를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계 7: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계 7:4) 내가 들은 바로는 도장이 찍힌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마에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파괴적 요소들과, 그 안에서 신음하는 성도들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마무리하는 심판의 장면까지 요한이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와 정반대 분위기의 구원적 환상이 요한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네 천사가 등장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합니다. 이번에 도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표시인데, 요한이 귀로 듣기에는 구원받는 성도의 숫자가 14만 4천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목록을 보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000명씩, 마치 민수기의 인구조사를
하듯 계수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겠지만, 신천지가 수가 적었을 때는, 이 본문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습니다. 구원받는 숫자가 14만 4천 명이니까 얼른 그 수가 차기 전에 신천지에 들어와서 번호를 받으라고 했던 것이죠. 그렇게 교인들에게 자신의 순번을 부여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명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14만 4천 명을 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교리시험이나 포교실적에 따라,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협박으로 교리를 바꿉니다. 계시록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석할 수 없는 책입니다. 24 장로에서도 그렇듯, 구약과 신약의 대표 숫자가 각각 12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로 시작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죠. 거기에 숫자 1000은 ‘충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12 x 12 x 1000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충만케 된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14만 4천의 의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것이 상징 수이며
실제 구원받은 무리는 그보다 많음이 나타납니다. 앞서 ‘사자와 어린 양’ 이야기처럼, 요한이 들은 것은 사자이고, 본 것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었죠? 14만 4천 명은 요한이 들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눈을 들어 실제 죽임당한 어린 양에 의해 구속받은 그의 백성을 보게 됩니다. (계 7:9)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계 7:10)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다민족, 다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그 안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결정적 차이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고 한 민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인이 보여주는 여호와의 날이 임한 환상에서, 깨어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날에 대하여 ‘이것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바로 이 구원받은 백성이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호와의 날,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은 이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계 7: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계 7: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이고, 외로움이고,
눈물짓는 삶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깨어진 기준이 대세니까요.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반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온전한 기준이 세워진 그날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큰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지난 사경회의 말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면 세상이 다 회복될까요? 일부분은 회복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대적하는 ‘악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세상이 박수쳐주지
않습니다. 내 주변에 10명이 있으면 그중 여덟아홉은 나를 한심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세상의 무너진 정의에 아파하고 답을 찾고 있는 그 한두 명이 우리를 주목해 볼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바보처럼 살지? 저렇게 이 세상을 살면 살아지나?” 그렇게 궁금함을 갖는 이들에게 우리의 삶은 호기심이자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가 되는 것이고, 기독교는 그렇게 전파되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을 잘 아셔야 합니다. 좁은 길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지 않습니다. 동물원에서 멋지게 포효하는 사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죠. 그러나 어린 양, 그것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그 어린 양을 누가 주목하겠습니까? “사자로 살래, 죽어가는 어린 양으로 살래?” 세상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죠. 여러분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주님은 사자와 같은 왕이고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진짜 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자꾸 변질됩니다. 왜냐하면 ‘사자’로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자로 살면, 그것은 주님의 삶과 반대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적 성공주의, 물질적 축복주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성도들의 삶으로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왜곡시킨 것에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에서 사자와 같은 삶이 되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신약에서 바로 그 사자의 삶이 ‘황제’였습니다. 황제숭배는 그 힘을 추구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못되어도 주변의 다른
이보다 한계단이라도 높아지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왕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섬기는 것, 즉 죽임당한 어린 양의 삶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린 양을 따르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재정강의를 할 때도 늘 말씀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목표도 아닙니다. 청부(淸富)나 청빈(淸貧), 그 자체가 우리의 관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기준들이 바로 세상이 정해놓은 세상적 가치의 프레임 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 안에 갇혀서 경쟁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가난해지기 위해’ 가난한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를 따르다 보니, 깨어진 세상 속에서는 신실하게 살려 할수록, 정직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나누며 살수록, 가난을 마주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더 중요한 가치를 따르기 위해 기꺼이 가난도 감당하고자 힘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데도 부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마냥 기뻐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부가 내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왜 이 물질을 내게 맡기셨는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주님의 청지기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입니다. 부도 무섭고 가난도 무섭지만, 진짜 두려운 것은, 세상의 기준에 매몰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부르심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결국 물질을 대표하여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삶의 모든 요소들은 ‘예수 따름’이라는 큰 목적 안에서 주어진 도구이며 부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다룰지, 어떻게 순종할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계시록 이야기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계 8:1) 그 어린 양이 일곱째 봉인을 뗄 때에, 하늘은 약 반 시간 동안 고요하였습니다. (계
8:2)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팔을 하나씩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까 제가 설명드린 것처럼, 일곱 재앙 시리즈 중 첫 번째로 나오는 ‘일곱 인’ 시리즈의 마지막 인, 즉 일곱째 인이 열릴 때, 그 안에서 또 다른 시리즈인 ‘일곱 나팔’ 환상이 이어지듯 등장합니다. 이 구조는 요한계시록의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방식으로, 한 계시가 끝나기 직전에 더 깊은 계시로 확장되는 ‘내포 구조’ 혹은 ‘확대 반복 구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일곱 인 시리즈는 마지막 인을 통해 다음 환상인 나팔 시리즈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이며, 이로 인해 인 시리즈가 단절되지 않고 확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곱 나팔 환상’이 전개됩니다. 인 시리즈와 유사하게 전개됩니다. 1~5번째 나팔까지는 출애굽기의 열 재앙이 떠오른 재앙이 재연됩니다. 우박, 물이 피가 됨, 물이 변함, 흑암, 메뚜기 등의 재앙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인 재앙을 경험하면서도 더
완악해졌던 것처럼, 나팔 시리즈에서도 사람들은 깨닫거나 돌이키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 나팔과 함께 벌어진 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랬습니다. (계 9:20)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 다니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 9:21) 그들은 또한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망가져 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면서도, 어쩌면 외면하고 계속 그 세상의 잘못된 방식을 더 고수하고 더 그 안에서 따라가고 있는 것과 같이, 세상은 돌이키지 못합니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계시록의 심판의 날이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나님이 열 번째 재앙까지 가셨던 것은 돌이킬 기회를 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돌이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모든 경고는 멸망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회복을 향한 애끓는 호소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돌이키지 않으며 애굽은 더 고통을 받습니다. 바로는 오히려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겠죠. 지금 우리의 세상도 그 깨어짐의 현실에 대해 신의 탓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섯 번째 나팔 이후에도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삽입 메시지가 등장합니다. 앞서 인 시리즈와 비슷한 구조이죠. 6번째 환상 이후, 전혀 다른 분위기의 환상이 삽입됩니다. (계 10: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계 10:2)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계 10:3)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계 10:8)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계 10: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 천사가 어린 양이 인을 다 떼어버린 그 두루마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한에게 이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명령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두루마리가 모두 열리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은 2가지 환상이었습니다. 두루마리의 첫째 환상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옆의 예배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측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가랴 2장의 내용으로 ‘보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전 바깥뜰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지만, 환상 속 새 성전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루마리의 둘째 환상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두 증인의 증언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두 촛대’라고 부릅니다. 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두 증인은 예언하는 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을 향해 증언하며, 돌이킬 것을 외쳐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두 증인이 증언 사역을 마칠 때에, 무저갱(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 두 증인과 싸우고 그들을 죽입니다. 그들의 시체를 땅에 속한 사람들은 즐거워합니다. 두 증인이 그들을 괴롭고 불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계 11: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계 11:12) 그 두 예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로 "이리로 올라오너라"
하는 큰 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마치 신실하셨던 예수님이 세상에서 죽임당하며 조롱거리가 되었으나, 부활 승천하심으로 초월적 세계에 속한 존재라는 것이 확증되었듯, 교회 또한 초월 세계에 속한 존재로서 그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것이죠. 마침내, 그토록 감추어졌던 진실이 드러나며, 세상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회개의
물결이 일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철저히 예수의 길을 따르며 죽기까지 복음을 증언할 때, 마침내 그 희생은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교회 됨.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에 우리가 동참할 때, 세상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돌이키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삶이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바로 그분의 백성이자 영적 전쟁에서 그분의 군대인 교회와 성도들이 가야 할 길, 사명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교회가 어린 양을 따라서 사랑과 희생으로 나아갈 때, 그 모습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를 싸우고 힘으로 짓밟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수를 위해 죽음으로써 우리의 사명은 완수된다는 말입니다. 열방 안에서 일어나는 회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따르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행할 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메시지가, 계시록의 그 두루마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정중앙에서 고통과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매듭짓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환상은 때로 무겁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죽임당한 어린 양’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두려움 대신, 어린 양의 손에 붙들린 백성으로서의 확신과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묵시의 환상은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다시 새기게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시며,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둘째, 우리의 진짜 왕은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 교회는 그 어린 양을 따라 고난과 희생의 길을 감당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받아먹어라.” 말씀은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감동하고 흘려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먹는 것입니다. 곧 내 안에 받아들여, 나의 피와 살이 되게 하며,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먹는 사람, 말씀을 삶으로 삼는 교회, 그것이 이 시대에 어린 양을 따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소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자처럼 살라는 소리, 강해지고 성공하라는 소리, 자기를 지키고 자기만을 위해 살라는 소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 앞에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두루마리를 먹은
자입니다.” “나는 죽임당한 어린 양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오늘 내 자리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고백이 됩니다. 포효하는 사자의 시대에, 어린 양의 길을 따르는 것.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 부를지 모르지만, 하늘은 그것을 승리라 부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두루마리를 먹고, 그 말씀을 살아냅시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 우리의 왕이시라 고백하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오늘을
담대히 살아냅시다. 우리는 승리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