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요한계시록 설교 시리즈를 해나가며, 제가 가진 가장 큰 목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지난 세 편의 설교를 통해 ‘요한계시록이 이런 이야기였다고?’하며 놀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런 피드백을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 조금 어렵게 느껴지시거나,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1시간이 넘는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도 하고, 또 성경에 대한 기초지식이
아직 적은 분들에겐 많은 상징과 구조가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정리하기 벅찰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분들께 제가 꼭 권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다시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좋고, 제 블로그에 올려둔 설교 전문 원고를 천천히, 글로 한번 읽어보십시오. 귀로 듣는 설교는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 놓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글로 다시 보면, 자신의 속도에 맞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도움을 받아 가며 읽고 묵상하다
보면, 의외로 그 메시지가 깊고, 또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과 도전을 주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번 요한계시록 시리즈는 가급적 전체 흐름을 다 이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이 여러분에게 계속 “미지의 책”으로만 남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원래 4편으로 계획했던 설교를 부득이하게 5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다음 주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청년공동체 수련회와 함께하는 ‘홀씨예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설교는, 홀씨예배 이후 8/8에 금요특강으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부디 이번 기회에, 요한계시록을 꼭 한번 ‘씹어 드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계시록 12~18장의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깨달아갑니다. 어떤 부분은 요한에게도 충격과 반전이었습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랬죠. ‘일곱인-일곱나팔-일곱대접’으로
이어지는 환상 속 메시지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이 이 땅에 임하는 방식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망가진 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폐기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남, 거듭남, 회심이라고 부르는 구원사역이죠.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건이고, 구원은 그 새로운 정체성에 입각한 삶의 시작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
오늘날로 말하면 진짜 교회, 진짜 성도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깨닫고 알아가며,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공존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이며, 그날에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의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별될 것입니다. 우리교회 분들이라면 익숙한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 이미 임하여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으나, 아직 그 온전한 성취가 임한 것은 아니기에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이 삶을 요한계시록은 너무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중구조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현실적 고민과 마주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지만, 우리의 발은 여전히 깨어진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이 현실이 우리의 믿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말로만 그리스도인인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우리의 이 현실적 어려움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타협하기 쉽고, 세상에 속한 삶을 살아가기 쉽거든요. 계시록의 독자들도 그랬고, 지금 우리도 같은 상황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대적하는 세상의 진짜 얼굴, 곧 짐승과 바벨론, 그리고 그 가운데 신실한 성도의 싸움을 말씀 안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앞서 두 증인으로 표현되는 ‘교회’에 대하여 전쟁을 벌였던 끔찍한 짐승이 있었죠. 그들이 교회를
죽였으나, 교회를 하나님이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영적 전투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이 12장부터의 내용입니다. 이 환상에서는 한 임신한 여인이 나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 이야기와 관련이 깊습니다. 에덴에서 사탄은 뱀의 모습을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 공격은 거짓말이었죠. 이때 인간은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참된 말씀보다 더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에게도 오는 실패의 모습이죠. 그 결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게 됩니다. 신실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이 첫 번째 죄의 모습이 이후 성경에 계속 반복되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사탄의 거짓말 vs 하나님의 뜻.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지 못한 첫 언약의 대상자인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살리기 위해 애쓰셨고, 그들에게 심판도 하셨지만, 구원의 방법도 주셨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그들을 온전하게 다시 회복시켜 줄 존재,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도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데, 이것은 동정녀로 남편이 없는 상태의 마리아에게서 탄생할 예수 그리스도가 ‘뱀’의 진짜 모습인 사탄과 대적하여 승리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과 사탄은 원수가 되고,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할만한 해를 입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승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사람은, 사탄의 영향력을 벗어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의미입니다. 계시록은 이것을 다시 한번 12장의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사탄은 ‘뱀’이 아니라 ‘용’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계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계
12:2)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계 12: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계 12:4)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와의
연관성도 그렇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도 그렇고,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여자가 낳을 아기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던 예수님 이야기를 담아내죠. 여자와 아기를 노리는 것은 사탄의 세력이죠.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헤롯 왕을 부추겨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사탄이죠. 사탄이 늘 하는 것은 그렇게 거짓으로 부추기는 것입니다. 즉, 이 상징은 어느 시대에나 사탄은 하나님의 편에 선 존재들, 예수님조차도, 또 그분을 따르는 교회와 성도를 깨어진 세상의
깨어진 마음을 이용하여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를 통해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진짜 원수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당시 로마와 같은 박해 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그들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악의 세력입니다. 제가 거듭 강조하지만, 사탄의 세력에 지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조종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깨어서 분별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 영적 전쟁의 필승 요소가 거기에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악한 세력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여자의 아이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삶에 있었던 수많은 공격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거짓과 유혹, 박해 앞에서도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용의
공격은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납니다. (계 12:9) 그래서 그 큰 용, 곧 그 옛 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으로 이제 사탄에 대해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승리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온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시로 듭니다. 독일 나치군과 연합군이 전쟁을 했을 때, 연합군이 밀리죠. 영국을 빼고는 모두 나치가 차지합니다.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반격으로 준비한 작전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고, 이 작전의 암호명이 그 유명한 ‘D-day’입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었죠. 그리고 이 작전이 성공을 거둡니다.
D-day의 성공은 전쟁의 모든 운명을 바꾼 사건입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이로써 확실해졌습니다. 다만 남은 나치 잔당과의 국지전이 남아 있었죠. 그래서 모든 전쟁이 끝나는 날인 V-day까지 시일이 걸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D-day로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V-day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D-day는 다 이룬 날입니다. 승리를 확정지은 날입니다. 우리는 남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긴 싸움에 그분의 편으로 동참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도 하늘의 전쟁에서 사탄이 패배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공동체가 거하고 있는 땅에서의 승리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한 땅으로 쫓겨난 사탄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성경은 그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발악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계 12:12) 그러므로 하늘아,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자들아, 즐거워하여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 악마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몹시 성이 나서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계 12:17) 그래서 그 용은 그 여자에게 노해서, 그 여자의 남아 있는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백성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메시아 공동체는 사탄을 이깁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동안 사탄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공격을 계속 해나갑니다.
13장이 바로 그 공격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기에는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두 짐승이 나옵니다. 먼저 나온 것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계 13:1) 나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 열과 머리 일곱이 달려 있었는데, 그 뿔 하나하나에 왕관을 쓰고 있고, 그 머리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계 13:2)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한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용이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특징을 살펴보면 표범과 같은데, 곰의 발을 갖고 있고, 사자의 입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10개의 뿔과 왕관, 7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쉽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지만, 제가 이 모든 상징은 구약에 답이 있다고 했지요. 이 짐승의 모습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환상을 통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4개의 짐승이 나오는데, 각각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이 본 환상 속 짐승은 그 4개의 짐승을 하나로 합쳐놓은 모습입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앞선 모든 제국 중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이 짐승이 로마라는 흔적은 많습니다. 일곱 머리는 계시록 내에서도 일곱 산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는데, 로마는 고대부터 ‘일곱 언덕의 도시’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머리 짐승은 로마제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 13:4) 용이 그 짐승에게 권세를 주니, 사람들은 그
용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 하고 말하면서, 그 짐승에게 경배하였습니다. (계 13:7) 그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서 이길 것을 허락받고, 또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계 13:10)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놀랍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탄과 성도의 싸움에서 성도는 패배합니다. 짐승이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 깨어진 세상에서 교회가 짐승의 세력에 대항해서 세상적으로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짐승은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도 신사참배에 참여한 목사와 성도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인내와 믿음’의 결과가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죽기까지 인내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승리란 ‘믿음’을 지키는 일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제압하고 그 위에 우뚝서는 그런 승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그런 승리를 누리고자 예수를 믿고 있다면, 가룟 유다처럼 실망하고 떠나갈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사탄이
불러낸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합니다. 이번엔 ‘바다’가 아니라 ‘땅’에서 올라옵니다. (계 13:11) 나는 또 땅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처럼 뿔이 둘 있고, 용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이 짐승은 외모는 ‘어린 양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선해 보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용’처럼, 즉 사탄처럼 말합니다. 외면과 내면이 다릅니다. 이 짐승은 앞에서 본 바다의 짐승과는 다르게 직접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을 속입니다. 성경은 이 짐승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릅니다(계19:20). 왜냐하면 이 짐승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앞선 짐승을 ‘경배’하게 만듭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 조작과 종교적 선동을 통해, 악한 권세에 대한 충성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 땅의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홍보 책임자’입니다. “이게 진짜 힘이야, 이게 너희에게 유익을 줄 거야, 이 짐승을 따르는 게 너희에게 복이야”라고 설득하고 미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이 시대의 악은 단지 물리적 폭력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된 설득’, ‘종교적 왜곡’, ‘영적 혼합주의’로 미혹하여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에도 ‘어린 양처럼 보이지만 용처럼 말하는’ 메시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상은 예수를 수단으로 삼아 나의 성공과 안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복음 왜곡이 많습니다. 땅의 짐승은 바다의 짐승보다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체를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고 따르고 있는지, 내가 지금 귀 기울이는 목소리가 ‘어린 양의 음성’인지, 아니면 ‘양의 탈을 쓴 용의 소리’인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즉, 여기에는 악의 삼위일체가 등장합니다. 우선 악으로 부르는 존재가 있죠(용). 그리고 그 악을 구현하는 세상의 체제(바벨론/로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선동하여 미혹하는 사람들(니골라당/이세벨-거짓 선지자)이 있습니다.
이것이 악의 삼위일체입니다. 계시록의 현실에서 로마제국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세상 가치관의 끝판왕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짜 힘이 돼? 진짜 도움이 돼? 로마는 할 수 있어. 황제는 할 수 있어.”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이죠. 무력과 통치로 이룬 로마의 질서입니다. “로마법 아래 모두가 고요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 또한 이 로마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세벨과 같은 자들, 니골라당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땅의 짐승들이죠. 세상의 가치관이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자꾸 거기로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안타깝지만 양의 탈을 쓴 자들, 즉 초대교회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이런 깨어진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적 가치관이 너무 강력하니 모두가 그것에 순응하고 편승하고 그것이 맞다고 외치는 세상의 큰
물결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저항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왜요? 그 세상적 가치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망가뜨리고 죽이니까. 목사로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상담’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우리 교인들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죠. 그런데 제가 정말 요즘에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정말 많은 사람의 마음이 상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처 입게 된 것, 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상처가 상처를 낳게 된 경우들을 보면,
대부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거기에 충성하고, 혹은 발목이 잡혀서 살아가는 경우들입니다. 그것을 여전히 내 삶의 동아줄로 보고 있거나, 나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아래서 로마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라고 했지요. 계시록은 이것을 ‘쉐마 이스라엘’과 대비하여 설명합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그
말씀을 묵상하고 가르치며, 그것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매우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기준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두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을 비꼬듯 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이 이것이죠. (계 13:16)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계 13:18)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입니다. 이 로마의 가치관이 우리를 뒤덮어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어야 할 곳마다, 그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쉐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힘이 우리를 하나님께 듣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사경회 말씀을 통해 들었잖아요. 그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분은 애굽에 있지는 않아요. 대놓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직 광야의 삶,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고, 소유가 기쁨이 되고, 성령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내가 주인인 삶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의 가장 큰 근심은 바로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을까 봐.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요한계시록의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로마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끌어가는 배후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명한 666이 나오죠. 여기서
이 악한 세력을 대표하는 존재가 666으로 나옵니다. 이 666에는 두 가지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계시록에는 숫자 상징이 많은데, 7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의미하죠. 창조도 7일에 완성되고, 일곱교회, 일곱영, 일곱촛대, 일곱심판까지 모두 그것을 드러내죠. 3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성을 나타냅니다. 삼위 하나님. 3일째 부활. 거룩의 세 번 반복. 그래서 계시록에서 하나님을 숫자로 표현하자고 하면 777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최상으로 드러내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777이라는 숫자는 쓰지 않지만, 삼위일체적 충만함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6은 7에 이르지 못하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거짓된 충만함입니다. 사탄을 상징하는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의 거짓 선지자까지, 모두 거짓 삼위일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666은 하나님을 모방하지만, 진짜가 아닌 거짓 덩어리, 악의 존재를 지칭합니다. 또한 이는 기독교 박해를 가장 앞장섰던 로마의 황제
‘네로’를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글자 겸 숫자입니다. 네로 카이사르를 히브리어로 표기한 후 그 수를 모두 더하면 666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기독교를 가장 탄압하는 악의 역사적 모습과 신학적 모습을 666을 통해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666은 어떤 SF 영화의 암호가 아니라, 요한의 독자들에게 주는 매우 현실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언제나 심판의 환상 반대편에서, 이 시대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패턴입니다. 14장이 그렇습니다. (계 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계 14:4)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계 14: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계 14:6) 나는 또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이것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찬미 받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라는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서는 것입니다. 짐승의 편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편이 되어 살아가며, 세상의 가치관에서 나를 지켜내고,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몸, 주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감정입니다. 내 주변에
믿음의 사람들이 없고,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모두 홀랑 넘어가 버립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말씀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노래하며 더욱 멋지게 살아남는다.” 14장의 후반부는 최후 심판을 상징하는 두 가지 환상이 나옵니다. 하나는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편이 되어 살아간 자들을 하나님께서
추수하여 모으시는 장면입니다. 구원 환상이죠.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이 원하는 그 삶에 편승한 사람들을 추수하여 심판하시는 환상입니다. 이를 통해 요한은 모든 성도들 앞에 매우 단호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너는 바벨론과 로마와 지금 이 시대의 주인이라는 돈과 권력과 성공의 뒤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에 저항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죽임당한 어린 양을 따를 것인가?” 그리고 이제 15장부터는 ‘일곱인-일곱나팔’
환상에 이어지는 마지막 가장 강력한 최후 심판의 환상인 ‘일곱대접’ 환상이 펼쳐집니다. 구조는 일곱인/일곱나팔과 유사합니다. (계 15:1)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크고도 놀라운 또 다른 표징을 하나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재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계 15:7) 또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채운 금 대접 일곱 개를 그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계 16:1) 나는 또 성전에서 큰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는데, 그 음성이 일곱 천사들에게 이르기를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아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곱 대접 심판을 요한이 보게 됩니다. 1~5번째 심판 환상은 앞서 일곱 나팔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출애굽의 열 재앙 내용들입니다. 바로가 하나님께 저항했던 것처럼, 일곱 나팔 때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저항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심판은 미래적인 일들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이 세계 자체가 깨어지고 망가졌고, 그 안에 아우성이 가득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구원의 이중구조를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이중구조가 아니면 거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삶과 세계 자체가 생명을 잃어버린 죽음에 이르렀고, 오히려 그것에 생명의 씨앗을 뿌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구원을 누립니다.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누립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심판 가운데 구원을 받아서, 여러 심판이 남긴 상처와 아픔과 공허를 회복하며 충만하게 되어가지만, 완전한 회복과 완전한 치유는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완성의 날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의 초월세계가 맞닿고 충돌하며 실체를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진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중구조 안에서 심판도 이미 경험되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함께 아파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통증을 겪고 있습니다. 이 통증을 통해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야 하는데, 아프니까 서로 아픔만 쏟아놓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랑이 목마르고, 그러다 보니 더 이기적으로 되어갑니다. 이것이 성경이 진단하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대접심판은 이렇듯 우리의 삶을 하늘의 언어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도
언제나 반대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계 15:2)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짐승 우상과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를 이긴 사람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계 15:3)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 이 영적으로 첨예한
상황에서 유혹과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 그들은 고난의 시대 속에서도 어린 양을 찬양합니다. 모세의 노래는 홍해에서 구원을 맛본 직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렸던 찬양입니다. 그런 역전의 노래,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놀라운 증언이 어느 시대에나 울려퍼집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아마겟돈'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소, 이방 민족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장소를 모티브로 가져와서 하나님과 악의 세력의 전쟁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대접은 그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묘사입니다. (계 16: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 하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계 16:18) 또 번개가 치고, 음성들이 나고, 천둥이 울리고,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런 큰 지진은 사람이 땅 위에 생겨난 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계 16:19) 그리고 그 큰 도시가 세 조각이 나고, 민족들의 도시들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도시 바빌론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독한 포도주의 잔을 그 도시에 내리시니, (계 16:20)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실상 여기까지가 하나님을 대적했던 악의 세력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이자, 이중구조 세계의 종료 선언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인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마치 야구에서 어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그 테마곡이 울려 퍼지듯, 하나님의 테마곡이 요한계시록에는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4번이나
말입니다. 바로 ‘번개, 음성, 우레+지진+우박’이 그렇습니다. 이는 출애굽기의 시내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해 강림하셨을 때도 울려 퍼졌던 테마곡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일곱인을 마칠 때, 일곱나팔을 마칠 때, 그리고 일곱 대접을 마칠 때, 최후 심판의 장면으로 이 테마곡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네 번의 테마곡은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땅으로 가까이 임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심판의
강도와 구원의 성취가 점층적으로 발전하며 완성되어 가는 구조입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17~18장은 심판당하는 악에 대한 추가적인 서술입니다. 바벨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환상이죠. 붉은 짐승을 타고 앉은 화려한 여인을 ‘큰 음녀 바벨론’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지금껏 설명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문화와 경제, 종교와 권력의 총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바벨론에 기대어 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벨론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혹시 아직 거기에 발붙이고 있다면 떠나셔야 합니다. 이사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과 안정의 함정에서 나와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오십시오. 무너질 그곳에 우리의 소망은 없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전지대가 정말 안전지대인가, 내가 그것을
붙들고 정말 살아가는 삶이 괜찮겠는가? 성경은 변함없는 진리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질 성이다. 떠나라!” 계시록은 이 땅의 바벨론은 심판받아 사라질 것임을 보여주며, 이제 주님 앞에 신실했던 자들과 함께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말씀을 잘 새기며 따라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환상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야 계시록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에 공을 들였지만, 사실 오늘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짐승의 목소리에 속지 마십시오. 특별히 겉은 어린 양 같지만, 속은 용처럼 말하는 세상의 거짓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세상은 말합니다. “너는 이대로 살아야 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해. 그것이 너를 살릴 거야.”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신앙은 끝없는 선택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선택하는 그 순간 주목하고 계실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시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는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렇게 멀어져 가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하나님이 주시는 누군가를 향한 강력한 권면이자, 돌이킴을 위한 초대라고 저는 믿습니다. 분명히 이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를 구하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두려움과 싸울 용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길은 명확합니다. 어린 양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666이 새겨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벨론의 집에 머물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순례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타협하며 살고 싶지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부담스러워도 저에게는 이 말 외에는 다른 진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 같고 손해보는 것
같아도, 그 길의 끝에는 어린 양의 승리와, 그분과 함께 누리는 혼인잔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변함 없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을 지휘하시는 분의 약속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무너질 바벨론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세상의 성공과 안정을 위해 믿음을 타협하지 마십시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이 외침이 오늘 여러분의 영혼에 깊이 새겨지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