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최종적 승리를 가지고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교회라는 방식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묵시문학이란 절망의 현실에 제시되는 하나님의 청사진이라고 했습니다. 결론에 대한 ‘스포일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내용을 당시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전하였고, 성도들은 그것을 회중 예배 자리에서 함께 낭독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미래를 위해 견디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현재에 관한 권면도 매우 구체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2~3장을 통해, 그 이야기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교회.’
교회란 저에게 있어서 저를 가장 아프게 하기도 하고, 저를 가장 가슴 뛰게 하기도 하고, 제가 저의 인생을 걸어볼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비전’이 ‘내가 이거 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이 비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교회를 이 시대 안에서 누리고 전하는 그 일이 저에게는 비전입니다. 저는 여기에 감히 제 삶을 걸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저에게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매우
특별해졌습니다. 성경이 가장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고, 누리게 하고 싶은 것이 그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애쓰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깊은 공통점과 동질감을 느낍니다. 제게 많은 도전을 주었던 에스라성경대학원의 가르침들도 그러했고, 하나복을 만났을 때도 그러했고, 얼마 전에 방문했었던 문막의 기독공동체나, 이번에 사경회에 모시게 된 강사 목사님을 만난 순간도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도 느끼는 일입니다. 교파가 어디냐, 교단이 어디냐, 이런 것을 떠나서 성경 그대로를 따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성령 안에서의 깊은 사귐을 누립니다. 물론 그 안에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보다 더 큰 힘은 성령의 하나 됨이죠. 성경이라는 같은 교과서와 예수님이라는 같은 스승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서 깊은 연대와 위로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된 지 18년이 되었고, 담임목회만 8년을 했지만,
여전히 ‘교회’의 신비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실망한 적도 있고, 교회 때문에 근심한 적도 있지만,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이자 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날로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교회주의자나 가나안 성도, 그들의 지치고 상한 마음에는 공감하나, 교회와 무관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누군가 한다면, 그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정말 성경 그대로 보자면,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어떻게 일하셨고,
또 교회 위에서 지금도 어떻게 일하시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가끔 가나안 성도들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용기를 내어 공동체에 발을 디디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제가 알지 못하는 분들이 교회에 헌금을 보내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분들 가운데, 교회 밖에서 아직 방황 중인 분들이 계신다면 한가지는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이 시대의 교회가 우리를 실망스럽게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하기에 교회에
대해 절망하고 있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포기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도 포기하지 말고 그런 교회를 세우는 일에 나도 동참하는 꿈을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정중앙에 교회가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깊이 사랑하시고, 그래서 근심하신다. 교회는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 한 가운데 있다.” 주지하듯이 교회란 어떤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주 되심’, 즉 회심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의 추구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국가’ 이전에 교회의 원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서의 신실함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공동체다움을 잃어버렸고, 안타깝게도 세상의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세상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망한 실패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까?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체하는 새로운 언약공동체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를 기반으로 신약, 새로운 언약에 기반한 혈통을 뛰어넘는 믿음의 공동체, 교회를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체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 땅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지난주에 ‘소환’을 이야기했죠. 교회는 본질상 깨어진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의 깨어짐 안에 불어넣어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 하나님을 반영하고 반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통해 드러나듯, 기독교 복음은 근본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깨어진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개인주의적 습성입니다. 복음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정말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가 ‘공동체’라는 단어인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교회에서도 말합니다. “자기는
원래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공동체였다.” 그분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체제와 다른 세상의 체제는 점점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과 멀어집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싸움과 같습니다. “혼자서 살려니 외로워서 죽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니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이게 이 시대의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차라리 괴로움보단 외로움이 낫지.”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으로 점점 들어가 담을 쌓습니다.
그런데 정말 외로움이 낫습니까? 외로움을 계속 추구하면 점차 모든 관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괴로움이 있죠. 우린 모두 깨어져 있고, 온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외로움은 계속 추구하면 더 고립되어 가는 반면, 괴로움은 잘 풀어가면 바뀔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늘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내 주변이 아니라 ‘나’입니다. 나를 바꾸지 않고 주변을 바꾸려는 사람은 회복에 있어서 가장 오래 걸릴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2000년 전, 현실 속에서 여러 고민 앞에 좌충우돌 세워져 가고, 혹은 무너져가기도 했던 실제적인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항상 세워진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모임은 무너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성경의 본질상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무리는 ‘교회’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은 맞지만, 핵심은 ‘그곳이 정말 교회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에게 속한 존재들입니다.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몸이 움직일 때 교회입니다. 회심의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회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내가 따르겠다는 순종의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면 그게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막고자 하는 사탄으로 대표되는 악의 세력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교회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교회에 자꾸 세상의 가치 체제를 들여올 것이고, 교회의 회심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하나의 커뮤니티나 개인 욕구 실현의 장소로 변질시킬 것입니다. 교회가 진짜 교회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교회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교회가 아닐 것인가, 이 싸움이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지켜내고자 하시고, 무너진 부분들, 엇나간 부분들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이 땅의 교회는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시록의 전달자인 요한에게 명령을 내리십니다.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따르면 1:10에 나오는 ‘성령이 감동되어’는 굉장히 중요한 용법입니다. 주요 지점에 4회 등장하여 공간 변화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표) 첫 단락은 요한에게 계시 된 예수님의 뜻을 기록하고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계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 1: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계 1: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요한의 사명은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과 그것을
일곱 교회에 편지로 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란 요한이 살던 당시에 청중이 겪고 있었던 일들을 해설하고 곧 다가올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4장 이후에는 종말 환상 이야기가 현재 상황에 대한 상징 언어들과 함께 등장하므로, 구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3장에 있는 일곱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알기 쉬운 사실적 언어로 기록했기에, 우리도 그 이야기를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가 위치한 소아시아는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신약 시대에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곳입니다. 로마제국 안에 속한 소아시아 주, 그 안에 있는 일곱 도시에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도시는 ‘에베소’입니다. 에베소가 요한이 머물고 있는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는 에베소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곱 도시는 도보로 이틀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계
2:7a)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각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를 마무리할 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교회들(복수형)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각각의 메시지가 일곱 교회 모두를 위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가 첫 수신자였을 것이고, 이것을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보게 했을 것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회들은 사본을 제작하여 보관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유독 일곱교회일까? 소아시아에 교회가 일곱 개가 있었나?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완전 숫자 7을 선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 말씀은 단지 이름이 특정된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 모든 지역의 성도를 향한 것, 해석학적으로 확장하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포함하여 시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온 세상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역사에 존재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원형으로 이 일곱교회가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출석하는 현실의 교회는 일곱 교회 중 하나와 닮은 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의인이자 죄인인 자들의 모임이고, 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세계와 맞닿아 투쟁하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오염이 일어나고 자꾸 정화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상태가 아니라 추구점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힘들어도 거룩을 추구해야 하고, 아무리 아파도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잘하고 있어도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균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세상, 수많은 영적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회복이 필요한 깨어진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와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교회로 오는 일도 많습니다. 그 회복이 교회를 통해 일어날 때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교회는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이 오는 곳이래. 그래서 너도 여기에 있는 거야.”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사람들인데, 우리의 모습을 보세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의 완전한 그 모습을 닮아가고 따라가기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깨어진 사람들이 회복되고 바뀌는 것이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 내 어깨에 앉아서 귀에 속삭이며, 교회를 내가 원하는 모습, 혹은 세상의 모습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모두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일곱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칭찬 + 책망 + 권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7개 중 2개 교회는 책망이나 회개할 것에 관한 이야기가 없고 칭찬만 있습니다(서머나, 빌라델비아). 반면 2개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습니다(사데, 라오디게아). 그리고 3개
교회는 칭찬과 책망이 함께 나옵니다(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우리가 일곱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나에 대한 점검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곱교회에 주어진 권면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이들에게 있었던 공통된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구약의 상징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는데, 내용 중에 니골라당과 이세벨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에베소교회는 니골라당을 미워하고 있어서 칭찬받고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과 함께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계시록 2장을 보면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으로 나옵니다. (계 2: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계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함께하며 그들에 의해 바알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도록 배후에서 조정한 이가 ‘발람’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에 빗대어,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우상숭배에 가담하게 한 ‘발람’처럼 ‘니골라당’은 교회 내에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무리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그 행위가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정당화하여 사람들을 죄에 동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 2:20)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부분에는 ‘이세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죠. 그녀는 가나안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니골라당을 묘사한 어휘들이 이세벨을 묘사하는데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인도합니다. 그 결과 간음하게
합니다. 여기서는 간음하고 제물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과 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니골라당과 이세벨은 각각 다른 교회 안에서 유사한 행위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보다 다른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존재들입니다. 니골라당과 이세벨이 같은 부류일 수도 있고, 각기 다르지만 실상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하면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들이 어디 가서
다른 신을 섬겼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먹고 살기 위한 명분으로 세속의 우상숭배와 핍박에 타협하고 굴복하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생존하려면 세속의 문화와 타협하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그리 멀지 않은 삶을 살기 쉽습니다. 특별히 니골라당이 활동했던 곳으로 나오는 에베소와 버가모는 공식적인 황제숭배의
신전이 있는 도시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계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에 보낸 편지에서 ‘사탄의 권좌’는 니골라당과 황제숭배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안디바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황제숭배는 매우 실제적인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이
깊었습니다. 로마사회에는 종교, 사회, 경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조합들이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길드’이죠. 직물, 가죽 노동자, 염색공, 도공, 금속세공사, 어부, 도축업자, 은행업자, 상인, 노예상 등 다양한 직업인들의 길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길드에 들어가서 함께하다보면, 직업 관련된 것 외에도 수호신들에게 제사와 찬양을 바치며 음식을 먹는 일종의 우상숭배적 요소들이 동반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황제숭배도
포함됩니다. 황제숭배가 공식적으로 제정되어 있던 소아시아 도시들에서는 숭배 행위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살아가는데 ‘길드’가 엄청나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길드에 함께하면 황제숭배를 포함한 종교 활동의 참여를 거부하기 어려웠던 것이 계시록 독자들의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길드에 속하지 않아도 직업 활동을 할 수는 있었지만, 감내해야 하는 불이익이 상당히 컸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보면 해석이 됩니다.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매매할 수 없다(계 13:17)는 서술은 바로 이런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베리칩이나 바코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존의 위협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리를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합니다. 전도는 의지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은
우리보다 더 열심히 전도합니다. 죄는 죄를 더 빨리 퍼뜨립니다. 죄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괴롭힙니다. 죄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처럼 죄에 동참해주길 간절히 원합니다. 뒷담화에 동조해주길 바랍니다. 같이 거짓 뉴스를 퍼뜨리길 바랍니다. 자신의 불평, 불만, 비방에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신의 정당성은 확보되고 죄의식은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악은 끝없이 연대하고자 힘을 냅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 선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불편합니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내가 정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처럼 자신들의 행위를 ‘당연한 것’이라고 포장하며, 교회의 교회 됨을 비웃습니다. 성도의 성도 됨을 비웃습니다. 아마도 ‘길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시대의 흐름이라고,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는 어렵습니다. 계시록의 독자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단 한번도 그것이 쉽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다 하는 것에 나는 안 하는 것, 어렵습니다. 쉬운 길이 뻔히 있는데, 주님 때문에 좁고 험한 길을 택하는 것, 어렵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세상의 길도 괜찮다고 용납해주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참 어렵지만, 나 말고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이 지켜가심을 보는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저는 교회가 정말 싸워야 할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에서 회피하고 침소봉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때가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몇가지 이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WCC와 같은 교회일치운동이 대표적입니다. 요새는 정치 이슈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동성애는 죄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숨걸고 싸워야 할 가장 우선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몇몇 교회에서 자주 언급하는 WCC 등, 어떤 이슈들에 대해서도 저는 비슷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동성애와
WCC 같은 것으로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실제적으로 그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직접 관련자가 5%나 될까요? 조금 다른 분야이지만, 정치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정권이 보수와 진보를 오가는 문제로 교회가 세워지고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너무 선동가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자극하고 선동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들려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태도와 방식이 더 교회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동성애로 무너질까요? 아닙니다. 그 외에 더 만연한 성적인 죄가 문제가 아닐까요? 가정이 무너지고, 그래서 역기능 가정이 생겨서 아이들이 고통받고,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시급하고 큰 문제가 아닐까요? 교회일치운동인 WCC가 저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관심과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에도 그대로 들어와서 그 가치관대로 평가하고 경쟁하고 높아지려 하고, 교회에서조차 직업, 학벌, 부의 격차, 자녀의 스펙, 이런 것들이 성공과
실패처럼 평가되고 이야기되고, 나의 자존감과 비교의식을 부추기고 있다면 그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성애, WCC, 정치, 경제 등... 다양한 것에 대해 공부와 논의가 다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음을, 더 절박한 것이 있음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문제이고, 내가 다른 더 나와 밀접한 죄에서 벗어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나와 관련이 없는 죄와 싸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시급한 것들은 오히려 내 삶에 스며드는 더 만연한 죄의 요소들입니다. (갈 5: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갈 5: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갈 5: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숭배, 내 안에 있는 시기, 분열시키는 행동들, 말들, 질투, 술취함, 흥청망청한 모습. 우리는 이것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나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철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만 보고 계십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이런 것들이 주님의 아픔입니다. 일곱교회에 주어진 권면도 이런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에베소교회에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형식화 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회개하여 처음 그 마음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교회에는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의 가치관(성공, 명예, 탐욕)에서 돌이키고 분별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아디라교회에는 거짓된 가르침을 용납하고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떠나라고 말합니다. 사데교회는 가장 큰 책망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영적 생명력이 없는 교회, 형식적인 예배의 모습과 무감각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진단하며 정직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하고 자족하며 부족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는 교회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적당히, 봉사도 적당히, 경건생활도 적당히... 주님은 이 교회가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고 계시며,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이들이 돌이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혹시 이 설교가 여러분을 아프게 한다면, 이 설교를 전하는 저도 아프고, 주님도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하는 이유가 있다면, 함께 정말로 이 깨어진 세상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주님께 속한 삶의 그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칭찬도 아끼지 않습니다.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계 3:11)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이 교회에 대한 칭찬은 사실상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들이 칭찬받은 이유는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죽도록 충성하라’는 이야기를 오해합니다. 맥락을 보면 이는 ‘죽기까지 열심히 봉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그 상황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충성하라’는 표현은 원어에서 ‘신실, 진실, 성실, 충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단어를 모두 아울러 쓰는 표현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실하고 진실되게 충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두 교회 성도들이
어려운 박해의 시대에 믿음을 지고지순하게 지켜가는 이들의 모습을 알아주시며, 더 큰 어려움이 오더라도 지금의 모습처럼 변질되지 말고 ‘죽기까지 신실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곱교회의 메시지를 보면, 이들 교회의 크기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없고, 부유한 곳일수록 더욱 신앙에는 위기가 왔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박해와 유혹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간 교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은 ‘면류관’입니다. 이것은
왕의 왕관이 아니라,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월계관입니다. 즉, 이 면류관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낸 자,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 타협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약속입니다.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는 표현은 이미 이 면류관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회복,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이미 그런 자들에게 주어져 있고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실함은 한번의 결단이 아니라, 꾸준히 붙들고 지켜내야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준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여러분이 말씀 앞에 신실함에 성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계시록을 보는 요새, 부쩍 주님 앞에 선다는 것에 대해서 묵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자꾸 사람의 평가와 판단에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사람들이 바라보는가, 언제든지 휙휙 바뀌는 이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우리의 시선을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교회에 보낸 주님의 모든 메시지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육체의 귀가 아니겠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귀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진리는 단호하고 선명합니다. 우리의 삶도 일곱교회처럼 칭찬과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이 최고로 칭찬하는 ‘신실함’, 그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성 충(忠), 내 마음에 중심이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이 나를 이끄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중심이 2개 생기면 무엇이 됩니까? 근심 환(患), 내 마음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런 나를 보면서 근심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진리를 아는 자는 깊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승리.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이 중심되지 않도록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주님 편에 서서 싸워서 이기면, 그것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신실한 성도, 참된 공동체는 어떤 세상의 유혹과 타협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신실한 자들을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싸움, 믿음의 경주를 마친 후에 말입니다. 그때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세상의 방식으로 살 수 있었지만, 제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살고자 애썼습니다. 참 힘든 때도 있었지만, 주님 앞에 신실하려고 정말 애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마음, 이 고백으로 함께 우리의 삶을 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