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를 시작합니다. 매일성경으로 설교를 해나가는 여정에서 당연히 우리가 이 책을 처음 만났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6년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히브리서는 이미 우리가 매일성경의 여정을 시작한 후 만났던 책입니다. 2019년부터 우리가 매일성경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매일성경의 6년 주기가 나뉘는 지점이 2019년과 2020년 사이였습니다. 지난 6년 텀에서 히브리서가 6년 차인 2019년에 있었다면, 2020년부터
진행되는 6년 과정에서는 3년 차인 올해 히브리서가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만큼은 처음으로 두 번째 접하는 책입니다. [2019.06.02] 간곡한 권면 (히 2:1-4) [2019.06.09] 가장 완벽한 중보자 (히 3-7장) [2019.06.16] 신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히 9:11-14) [2019.06.23] 평안과 괴로움을 위한 설교 (히 11:1-2) [2019.07.03] 필라델피아 (히 13:1-17) 이 당시에 식구가 청년들
몇 명과 전명자 집사님, 박재용 집사님, 천경수 집사님, 이세훈 집사님, 김민정 집사님, 남인해 집사님, 정은진 집사님 가정 정도가 등록했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두 번째 만남이지만, 마치 처음 만난 것과 같은 상황으로 우리가 다시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4~5번 정도를 설교할 예정입니다. 긴 서신은 아니지만, 히브리서는 구약과 신약을 아우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책이 바뀌었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가 마음먹고 도전해볼 기회를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성경은 아는 만큼 사랑스럽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저의 목표는 여러분이 저를 통해 성경과 조금이나마 더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기대를 갖고 히브리서 설교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가 제일 먼저 나오고, 뒤이어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그 뒤로는 바울서신 13권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뒤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과거에는 바울의 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울서신으로 보지 않는 견해가 확정적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뒤로 이어지는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와 같이 공동서신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공동서신이란 흩어져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내었다는 의미인데, 발신자는 한사람이지만, 수신자가 특정 개인으로 하지 않는 공교회를 위한 말씀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확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바울 외에도 누가, 바나바, 아볼로
등이 주로 거론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자의 문제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에 여러 견해가 여전히 나뉘어 있을 뿐입니다. 다만 히브리서 2장을 보면 이 서신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리더 중 누군가가 복음에 기초하여 기록한 편지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는 ‘독자’입니다. 독자가 누군지, 독자의 상황을 알아야 왜 썼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의 서신서 부분을 보면, 서신서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왜 편지를 보내야 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당시에 서신을 쓴다는 것은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서신을 보내야 할 만큼 중요한 어떤 이슈가 있었기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우리가 알고자 할 때도 집중해야 할 질문이 그것입니다. 우선 히브리서에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구약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지 않고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대상, 그렇다면 유대인이겠죠.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독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라는 명칭 자체가 그래서 붙여졌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라는 표제가 성경에 기록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죠. (히 13:24)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표현이 독자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내적 정보입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 편지를 빌어서 독자들에게 문안했다는 것은 이 편지의 독자들 또한 로마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 혹은 그 근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 공동체에게 쓴 편지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에게 문안하여 달라’는 이야기를 본다면, 이 편지의 독자는 교회 전체가 아니라, 교회에 속한 작은 가정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로 말하자면, 한 팸에 이 편지를 보내었고, 그 편지를 교회 전체와 공유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히 13:19) 내가 여러분에게 좀더 속히 돌아가게 되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더욱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저자가 독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이죠. 저자는 독자들의 과거 신앙의 모습을 잘 알고 있고, 현재 상황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편지할 수 있었고, 함께 만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구성해보겠습니다. 누군가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잘 반응하여
회심했습니다. 영적 생명이 탄생한 것이죠. 제가 금요설교에도 영적 성장의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지만 가장 간단하게 우리의 영적 성장을 표현해본 것입니다. 영적 아이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막 자라갑니다. 이 시기는 좋은 양식을 먹고 보살핌을 받으면 잘 자랍니다. 영적 아이가 자라나면 어느덧 ‘영적 청년’과 같이 됩니다. 청년의 특징은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어린 동생도 돌볼 줄도 알고, 부모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상황에
비유해 본다면, 이제 스스로의 신앙은 혼자서도 지켜가면서 누군가의 영적 성장을 돕기도 하고, 교회의 여러 사역에서 함께 섬기기도 하는 단계입니다. 이 상황에서 더 자라면 영적 부모가 됩니다. 부모의 특징은 영적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누군가를 낳기도 하고, 돌보기도 하며, 영적인 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역할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부모가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과정은 100단계쯤 될 것입니다. 영적 부모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적 아이, 청년, 부모 모두가 구원을 받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퇴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주인 된 삶에서 다시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삶으로 말입니다. 자란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반드시 자랍니다. 그러나 영적생명이 없으면 영이 죽습니다. 더이상 내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회심한 자들에게 성령님이 거하신다면, 그 성령을
거스르고 외면하기 시작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근심하시고, 끝까지 무시한다면 소멸하기도 합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살전 5: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한번, 히브리서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 관점으로 각색해 보겠습니다. 사귐의교회를 통해서 회심하거나, 신앙을 회복하게 되어 잘 성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박회심’ 형제가
있었습니다(가상의 인물). 이 형제는 회심 후 달라진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삶이 완전히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옛사람의 모습을 뒤로하고 구별된 새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주변 다른 사람들도 잘 섬겼습니다. 박회심 형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며, 아름다운 변화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히 6:10)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박회심 형제를 주축으로 ‘박회심 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여러 봉사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영적 아이를 넘어서 영적 청년이 되어 섬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멋진 신앙의 성장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히 10:32)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히 10:33)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히 10:34)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빛을 받은 뒤(구원의 시작)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내어버리고, 온전한 신앙을 지키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를 당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신앙의 성숙함을 보이게 됩니다. 누가요? 박회심 형제와 그 팸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 모습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팸예배마다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잘 자라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담임목사인 저에게 큰 힘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성도가 변해간다는 것이 목회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죠. 사실 그 맛에 목회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변화의 모습이 있던 어느 날, 제가 안식년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1년쯤 비우고,
다른 나라에 가서 잠시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어요. 한 반년쯤이 지난 시점부터, 저하고 연락하는 성도들마다 박회심 형제 이야기를 합니다. “아~ 회심 형제가 예전 같지 않아요.” 박회심 형제뿐 아니라, 그 팸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 같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죠. 여전히 사역하기는 하는데, 예전같이 기쁘게 하지도 않는 것 같고. 설교 시간에도 멍하게 있는 것 같고. 뭔가 영적으로 다운된 그런 모습들이 감지되는 것입니다. 또한 회심하며 끊었던
술도 다시 조금씩 하기 시작하고, 이야기의 주제도 복음과 신앙에 대해서 늘 이야기하던 사람이 다시 세상의 관심들(부동산, 주식)로 주제와 초점이 바뀌고,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박회심 형제와 주변 사람들이.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즉, 현재 그들의 영적상태가 ‘귀가 둔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성경에 대해서 말하면 눈이 반짝반짝했는데,
이제는 귀가 둔하여 그런 이야기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있지 않으십니까? 설교를 하다 보면 참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면... 같은 예배 시간에 같은 설교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오늘 말씀이 너무 좋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늘 말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어요”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제게 주시는 말씀 같아서 너무 와닿았어요”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늘 저 들으라고 일부러 한 거죠?”라고 저격했다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설교가
참 어렵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어떤 분은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잘 듣고 계신가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한 달 뒤에는 그 둘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짝반짝했던 성도가 흐리멍텅하기도 하고, 잘 듣고 있나 했던 분이 귀를 쫑긋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 위기를 경험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잠시 슬럼프가 오는 것은 괜찮아요.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에도 사춘기도 오고 갱년기도 오거든요. 감기처럼 잠깐 침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장기화 되면 안 됩니다. 저는 히브리서에서 이 표현이 그래서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히 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설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역류 속에서 버티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의 신앙은 흘러 떠내려가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심의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변질이고, 더 심각하게 말하면 ‘배교’의 위험성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의 소멸 사건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주인 됨을 완전히 거부해서 성령이 거하실 수가 없는 상황이죠. 특별히 신앙이 확 자란 분들은 내가 확 꺾일 수도 있음을 스스로 잘 인식해야 합니다. 전문용어로 ‘주전자 신앙’이라고 하죠. 반대로 교회에 가끔 ‘가마솥’ 같은 분들이 있어요. 이분들은 신앙의 열정이 뜨거워지기가 너무 오래 걸립니다. 잘 안 타 올라요. 어지간한
불에는 뜨뜻미지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또 잘 식지도 않아요. 반대가 주전자 신앙이죠. 조금만 필(feel) 받으면 확 타올라서 김을 내뿜습니다. 뚜껑이 달그락거릴 정도로 열정적입니다. 그런데 불이 좀만 꺼지면 차가워집니다. “하나님 계신 것 맞습니까?” 장단점이 있죠. 가마솥 신앙의 약점은 최선에서 항상 10~20%가 빠져요. 올인(all in)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주전자 신앙은 100% 모습이 확 나오는데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양극단입니다.
보통 모태신앙이 가마솥이고, 중간에 확 변한 분들이 초기에 주전자 같기 쉽습니다. 내 강점은 잘 살리고, 내 약점은 보완해가야 하겠죠. 주전자 같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도 가마솥처럼 변치 않는 신앙! 그것이 멋지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합니다. 말씀을 새기고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박회심 형제와 그 팸원들이 지금 신앙이 잘 성장하다가 멈췄고, 이제 오히려 퇴보해가는 것 같은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아이에서 영적 청년으로 잘 자랐고, 이제는 충분한 성숙의 시간을 보냈기에 영적 부모가 될 때가 왔지만, 도리어 다시 영적 아이처럼 되어버려서 누군가가 챙겨주기만을 바라고, 서운해하고, 혼자서는 자꾸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섭섭이’입니다. 이게 가장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겉모습은 영적 청년이고 장년인데, 마음은 애 같으면 그것이 참 다루기 어렵습니다. (히 5: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그들의 상태입니다. 영적 아이에서 영적 청년이 되었다가, 이제 거기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영적 부모로서 자랄 것이 기대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영적 아이가 되어서 ‘젖’을 필요로 하는 상태, 복음의 기초부터 다시 세워가야 할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들의 신앙의 연수도 이제 충분한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서
더욱 속상한 것이죠. 누구나 다 영적 아이 때는 기다려줘야죠.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 성숙함이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가 생기죠. 그들이 교회의 리더들을 잘 따르지 않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히 13:17)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의 리더들이 권면합니다. 하지만 탄식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리더들이 힘들어하면서 저에게 연락을 한 것이죠. “목사님, 박회심 형제가 예전 같지 않아요. 우리가 권면하는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도 않아요.” 속상해서 제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팸이 점점 모이기를 등한시합니다. 모여도 대충 끝내거나, 잘 오지도 않고, 점점 예배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죠. (히
10: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이런 권면이 있다는 것은 ‘모이기를 폐하는 행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시간과 에너지의 헌신입니다. 그러나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듯, 멀리 있는 제가 박회심 형제를 비롯한 이 팸원들의 안타까운 소식과 상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입니다.
잘 자라가는 모습이 가장 큰 기쁨인 것처럼, 영적으로 약화되어가고, 더 나아가 신앙으로부터 이탈할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가장 큰 슬픔입니다. 우리 박회심 형제가 이름이 회심인데, 회심을 부인하는 수준에 가버린 것이죠. 실제로 목회를 하다 보면, 차라리 불신자나 초신자를 목양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시험에 들거나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은 더 어려워요. 한 번도 타올라 보지 못한 사람들은 뭔가 장애물과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어서 그것을 해결하면 타오르기 시작하는데...
타올랐다 꺼진 사람들은 권면을 해도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해봤는데….”라는 자기 합리화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만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친필로 권면의 편지를 진심 어리게 씁니다. 목사로서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목사라도 제게 이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는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확실히 느끼는 것은 제게 사람을 바꿀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회복시킬
유일한 가능성이 하나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것은 이들 안에 진리의 말씀이 다시 생명력 있게 역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들 안에 신앙의 마지막 가능성을 건드려서 역사해야 합니다. 물론 이들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전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신앙의 위기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복음의 진리를 사랑의 마음으로 풀어서 간곡히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가 이런 신앙의 위기를 가진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권면은 나로부터 나오는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계적으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매우 선명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가? 이것을 히브리서는 대조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보다 뛰어나시다.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모세와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시다. 대제사장보다
뛰어나시다. 언약보다 뛰어나시다. 성막과 제사보다 뛰어나시다.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단어가 ‘크레이톤’입니다. ‘더 뛰어난’이라는 형용사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 전체에 19회 사용되는데, 무려 히브리서에 13번 사용됩니다. 히브리서가 예수께서 더 뛰어나시다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의 대상이 유대인들이고, 이들이 다시 돌아가려는 옛 삶이 유대교 신앙이었기에 그것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죠. 이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유대교 신앙이라면, 우리에게는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렇게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하기 전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추구하던 것들과의 비교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즐거움’보다 좋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인기’보다 좋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위치’보다 좋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수많은 ‘돈’을 가진 것보다 좋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말로는 언제나 쉽습니다.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여러분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에 갈 수 있는 티켓에 당첨이 되었는데, 주일입니다. 그것을 즐겁게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 여러분의 베스트 프렌드들이 “너 없으면 재미없어, 너 꼭 와야 해”라고 여러분을 간절히 원합니다. 불금입니다. 친구들로부터
계속 돌아가며 연락이 옵니다. 그것 포기하고 예배 올 수 있는가? 어떤 자리에 가면 승진에 더 유리하고, 어떤 자리에 가면 내 성공에 좀 더 유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신앙과 충돌합니다. 그것 포기할 수 있는가? 월급이 300만 원인데, 주말 근무하면 500만 원 받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똑같이 주 5일 근무입니다. 나는 그것 포기하고 예수님 선택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을 교회 밖에서 하면, 그 상황에서 예배하러 가는 우리가 바보입니다. 광신도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에게 예수님이 별로 소중하지 않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게 될 위기가 반드시 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다른 이유로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 안에서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진정한 결단이 없으면, 다른 이유로 끝까지 신앙 안에 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을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시험과 고난을 통과하는 일이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는 독자들은 핍박과 박해의 상황에 처해있고, 기독교 신앙 버리면 그 모든 것이 편해집니다. 그래도 유대교는 믿는 것이니 종교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충족은 될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 사회에서 공인된 종교였습니다.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았기에, 황제 숭배도 면제되고, 세금도 면제되고, 군 징집도 면제되었습니다. (히 12:3)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은 평안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낙심하고 지치게 할만한 일들이 이들의 삶에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박회심 형제’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반대, 부딪힘, 넘어질 만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 설교를 통해 나눴듯 우리는 절망의 벽을 만나곤 합니다. 깨어진 세상이 주는 어려움이 우리 안에 늘 존재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더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절망 외에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우리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합니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불편해집니다. 때로는 무시당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지적 사고를 하지 않고, 주술적이며, 무언가 종교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를 심오하게 믿으려면 불교나 천주교가 더 고상해 보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저 놀 줄 모르고, 세상을 즐길
줄 모르고, 어리숙한 것처럼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 다니면 여러분 실제로 편할지도 몰라요. 늦잠 잘 수 있고요. 헌금 안 하면 그만큼 나를 위해 쓸 수도 있습니다. 친구도 실컷 만나고 여가생활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왜 그 삶을 안 선택하십니까? 편한 것이 뭔지 몰라서요? 돈에 대한 경제 관념이 없어서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참된 행복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수많은 불편함에도 이 한가지
이유로 인해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판단을 못할 정도로 세뇌 당하고 어리숙해져서 복음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 것은 그것을 교회 와서는 끄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더 지혜롭게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판단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나름 합리적인 선택, 객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의 습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수없이 고민해보고, 의심도 해보고, 제 삶의
경험을 통해 비교해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크레이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결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인을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욱해서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예수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포기한 내 삶을 주께서 붙드시고 동행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만 바라보는 어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삶을 지금도 바꾸시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세월이 더 흘러서 더욱 기독교에게 냉혹해지고 더욱 박해가 심해진 시기를 우리가 살아가게 된다고 해보십시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신앙을 떠나야 할 이유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여전히 한가지일 것입니다. 복음이 내게 더 강력한 진리가 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 그 한 가지가 확실할 때 100가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회심했던 사람들입니다. 충분히 좋은 신앙의 모습으로 자라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앙을 고민하게 할 만큼 직면한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순교의 각오까지도 필요한 기독교 박해의 시대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지요. 떠날 사람들은 떠날 것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지듯이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케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흔들리는 ‘박회심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 말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복음을 선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최후의 권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서론인 1:1-3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은 마지막 날에 아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 아들은 거울처럼 완벽하게 하나님을 비추시는 분이며, 그분께는 하나님의 본성이 도장처럼 찍혀 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말, 곧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조화롭게 유지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하나입니다. 유대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은 부인했습니다. 즉, 이들이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고, 그분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곧 예수님의 창조이며, 하나님
나라는 곧 아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울처럼 비추시는 분이고, 하나님이 도장이라면 예수님은 그 찍힌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는 이후의 서신 전체를 통해서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분이신가를 설명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도 그리스도를 놓지 말아야 하는지를 권면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앞으로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이 삶이 참 좋습니다. 말 그대로 행복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어떤 재벌보다 제 삶이 더 행복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부족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제가 무슨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능력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능력을 얻었습니다. 조금 부족한 나도, 조금 부족한 옆 사람도 사랑하며 살아갈 마음을 얻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덧없음으로 가득했던
제 삶에,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와 가치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쓴맛이 여전히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맛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나서부터 제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예수님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온전하게 붙들고 살지 못하는 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해답이 있다고 말입니다. 박회심과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박회심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시대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승리했듯이, 오늘도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다행히 히브리서 저자와 달리 저는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편지가 아니라 이렇게 이곳에 서서 여러분을 바라보며 설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기회이자 은혜입니까. 저는 박회심에게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겨내자고. 할 수 있다고. 주님이 살아계신다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침투하고 들어오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일하심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러 가지 이유로 막아두지 마시고 열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함께 히브리서가 전하는 복음을 새기며,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다리시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갑시다. 함께 가고 싶습니다.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