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튜브의 콘텐츠 중에 드라마를 요약 정리해서 그것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콘텐츠가 많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통해 유행하는 드라마를 대략 살펴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5주의 과정에 대해서 저도 몰아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풍삶첫을 처음 마주하는 분도 이 시간 잘 들으시면 충분히 1~5과의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풍삶첫 1~5화 몰아보기 신앙생활의 시작점을 말하고자 할 때, 그 안에는 2가지 시작점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 결론은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탄생하는 때입니다. ‘거듭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요한복음 3장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가르침, 진리의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즉각적으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정작 그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은 그의 삶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변화되어 갑니다. 그의 변화는 요한복음의 뒷부분에 나타나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설교를 들으며, 또 사람들과의 나눔 속에서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내면에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르며, 영적 탄생의 시작점이며, 구원의 시작점입니다. 그럼 내가 거듭났는가? 확인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죠. “내게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것을 믿는 것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냥 내 삶을 잘 되게 하는 분으로 믿으면서 ‘믿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요. 어떤 진리를 믿는지 그 선명한 내용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둘째는 ‘변화’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내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확확 변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전의 삶의 궤적과는 달라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며 나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속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내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나에게 형제자매가 생긴다는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자, 그렇다면 거듭났음이 확인되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거듭남은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것을 끝으로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진짜 영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직후의 삶을 ‘영적 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태어났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기는 죽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잘 돌봐줘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영적인 양식을 먹고, 영적인 돌봄을 받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보통 기초적인 것들만 잘 채워주면 잘 자랍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마주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말씀’의 양식을 먹으며 자라갈 수 있습니다.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가능할까요? 저는 그것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배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식습관이 건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하듯, 좋은 예배의 습관이 필요합니다. 주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하루 한 끼라도 밥을 챙겨 먹는 것입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 외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돌봄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우리의 여러 부분에 참된 회복이 일어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마치 사람과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귐의 관계를 맺으며 깊어지듯, 하나님과 우리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많지만, 그중에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과 인격적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헤매거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말씀만 하시지도 않습니다. 소통할 수 있고, 친밀해져 갑니다. 예를 들어, 저는 10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고 자주 느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음을 경험합니다. 또한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도 조금 더 잘해나갑니다. 10년 전에도 저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10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과 보낸 시간이 더해졌기에 더 깊어진 것입니다. 10년 후에는 더욱 그러할 것을 기대합니다. 나중에는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해요. 이것은 꼭 어떤 영적인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나, 합리적인 사람이나, 객관적인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또한 우리의 개인적/사회적/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혹시 세상의 절망 가운데 공허함과 허무함 속에 길을 헤매고 있다면, 깨어진 세상에 왜 우리가 살게 되었고, 이 속에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를 갈고 닦아 자신이 신이 되거나, 신과 합일하는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얻고, 그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며, 그 뜻을 이해하고 그를 따라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우리가 고행과 수련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이미지는 다른 종교가 가진 신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떻게도 그분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알고자 하면, 그래서 성경을 읽으며 그분을 알아가고, 예배를 통해 그분 앞에 서면, 누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갖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체험으로 누립니다. 주관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자칫 체험 위주의 신앙은 너무 내 감정과 기분과 기준대로 치우쳐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객관적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그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회심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써주신 편지도 읽지 않고 무시한 채,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초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묵상하는 것, 모두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양식을 깨닫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성경을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제 경험상,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으로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말씀을 대하는가를 보면 보입니다. 이것은 제 눈앞에 잘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 또한 제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부끄럽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특별히 우리가 지난 3주 동안, 성경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적 흐름과 지리에 대해서 함께 나눴습니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즐길 수는 없습니다. 즐길 정도가 되려면 우선 기초를 배우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 안에 자라갔던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고백하는 이야기처럼, ‘말씀이 꿀보다
달다’라는 경험이 성경을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2. 기도, 어떻게 누릴까? (1) 종교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종교별로 기도에 대한 이해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신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거나,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해가는 시간이라도 생각합니다. 이럴 때는 명상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명상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특징은 ‘대화’라고 말하죠. 사극에서
가끔 보지만, 왕을 만나면 감히 왕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합니다. 인간들 안에서도 주어진 위치로 인해 그러한데, 우리와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서 대화가 가능할까요? 존재론적으로는 불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근본적인 믿음에 근거한 고백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가 그분을 향하여 소통하기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외우는 주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그 품에 거하여 아버지께 내 마음을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간혹 잘못된 기도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주문과 같거나,
잘못된 동기와 태도,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들 말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바로잡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신학자나 선배 목사님들이 책을 쓰기도 하셨고, 저도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저를 점검하고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한 부작용도 다시 발생합니다. 아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와 비슷하냐면, 부부 사이에 잘못된 소통법으로 인해 대화가 깊어지지 못하고 겉돕니다. 그래서 좋은 소통을
위한 방식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이성 교제 세미나에서도 말했듯이 ‘나’를 주어로 이야기하는 방식과 같은 것 말입니다. “네가 이래야 해”가 아니라, “내가 이랬어”라고 말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방식 말입니다. 이렇듯 잘못된 소통법을 개선하고자 교육을 받고 나서, 오히려 “에이 복잡해, 나는 그냥 말을 안 할래”라고 하면 그것이 최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와 멀어진다면, 그것은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일단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라는 사실과, 그분 앞에서만큼은 진실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히 좋습니다만, 그것을 너무 의식해 가식적인 모습이나, 대화 단절로 이어지면 그것이 더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어린 자녀를 대할 때도, 처음에는 이 아이가 반말을 하든, 이상한 말을 하든 그 자체로 사랑스럽듯이, 하나님 안에서도 처음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 자체를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자라가며 언어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해나가며 자연스럽게 기도를 배워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진실한 소통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일까 궁금해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제자 선배님들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들이 무지한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가 정답을
쉽게 얻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도의 모델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주기도문을 잘 압니다. 어린이부도 예배 끝날 때마다 외우고, 저희는 성찬예배 때마다 고백합니다.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자칫 그냥 외우기만 하면 ‘주문’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주문처럼 외우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사람과의 대화할 때 아무
영혼 없이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가장 듣기 싫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주기도문을 그대로 외워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럼 이 기도를 한번 배워봅시다.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입니다. 가장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공중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땅’에 거하는데,
그 현실 세계 밖에 계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의 한계 밖에 나를 초월하여 계시지만, 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을까요?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기에 앞서, 우주를 지으시고 인간 역사를 주장하시며 우리 교회와 개개인의 주인 되신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를 받는 대상이 누군지를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름은 그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 그 완전하심을 표현하는 것이 ‘거룩’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인정하며 고백드리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이 왕 되신 것, 즉 하나님의 통치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그것이 완성되어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현재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를 기다리며,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날 수 있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내 뜻이 부모의 뜻이 되게 하려고 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조금씩 더 알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역자로 삼으셨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 우리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해야 알지.”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자주 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말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정보를 얻는 것 자체보다 친밀감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백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을 이어갈 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아이는 졸라댈 수 있습니다. 졸라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영적으로 고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졸라대셔도 괜찮습니다. 아버지잖아요. 힘든 거 다 털어놓고, 미운 사람 욕해도 괜찮습니다. 다
쏟아내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기도 후 그냥 가지는 마십시오. 아버지 의견도 들어보십시오. 기도는 소통입니다. 기도는 말하는 시간인 동시에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머물며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필요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내게 해주실 이야기는 무엇인지도 물어보시고 듣고자 하십시오. 예수님의 기도가 나의 필요를 구하는 것에 앞서, 하나님의 것에 대하여 기도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오늘 이곳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시간을 만들어보십시오. 10분이어도 괜찮습니다. 우선 조용한 장소로 가십시오.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되고, 세상의 요란함(휴대폰, 인터넷, TV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말한 ‘골방’입니다. 그 하나님을 조용한 소리로 불러보십시오. 사랑하는 대상의 이름을 부르듯. 하나님이 정말 내 앞에 계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집중하여서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집중이 잘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조용히 부르며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내 필요를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묵상하고 떠오르는 것을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며 특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평생을 기도를 누리십시오. 오늘 우리의 시간이 그런 소중한 시간으로 사용되길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