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구원에 관한 4가지 키워드" / 강정규 목사

2022-07-10 · 히브리서 3-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 구원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제가 블로그에 글을 종종 씁니다. 아주 가끔은 진지하게 어떤 이슈를 다루게 되는 때가 있는데, 지금껏 서너 차례 기독교 안에서 논쟁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서 정리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재정관을 다룬 책에 대해 다룬 글이 하나 있었고, 이혼과 재혼에 대해 다룬 글이 하나 있었고, 한 찬양에 대해 다룬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해당하는 책이나 영상이 영향력이 있고, 성도님들 중에는 그것을

보고 고민이 생길만한 부분이 있는 것들인데, 그것에 대한 정확한 반론이 잘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 다른 의견이 있는지를 말해줘야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미칠 수 있는 내용이면서 제가 동의하지 못하는 바가 분명히 있으면, 반론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설명했던 ‘찬양’에 대한 글은 위러브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2만

명 정도가 글과 영상을 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서 '공감하시네'에 대한 비판적 동영상을 보게 되면서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만든 영상이었는데,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략 비판 내용은 이렇습니다. - 하나님을 내가 이해하고자 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 찬양은 ‘하나님이 뭘 하셨는가’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저 아픔과 공감뿐이다. -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없고, 하나님이 나의 아픔, 위로에 공감을 하시는 분이라고 세뇌할 뿐이다. - 가사에 신학이 부재하였다. 안 불렀으면 좋겠다. 이것은 예배 때 쓸 수 없는 음악이다. 찬양 중에도 분명 가사에 문제가 있는 부분들도 더러 발견되기도 하기에,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비판, 그리고 예배곡으로 사용이 가능한지에 관한 토론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은 곡조보다는 가사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저 비판에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찬양의 가사에는

너무나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논란이 있기 전, 제가 처음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을 듣자마자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거든요.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란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선배 목사님께서 목회자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는데요. “설교 시간에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고, 심방 때는 성도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저는 굉장히 공감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돕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신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살아가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그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중부정이니 강한 긍정이죠.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직면하는 모든 시험을 그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제가 이중직을 하며 목회를 했습니다. 독서실도 창업해서 운영했었고, 스터디카페 사장도 했었습니다. 올해 전반기를 보내며 이제 목회만 하기로 결심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이중직을 하는 것이 역시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삶에 너무나 값진 시간이었다고 느낍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로만 살아가던 때 알지 못하던 어려움을 많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을

해보니, 예배 시간에 와서 조는 여러분도 이해가 가고... 밖에서 돈을 벌어보니 돈 버는 것이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음을 깨달으며, 헌금하는 신앙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깨닫기도 하고... 가끔은 술을 마시며 삶을 달래는 여러분의 그 고뇌에 대하여 정죄하기보다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졸지 않기를 바라고, 재정관이 뚜렷하여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원하고, 술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는 마음이 분명 저의 간절한 소망이고,

그래서 종종 그런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런 여러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해한다고 하여 저도 힘들면 술 마시면서 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을 만큼 힘겨운 삶의 여정을 세상에서 살아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교회 와서 조시더라도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사실 격려해드리고 싶기도 해요. 그런 모습조차도. 한편으로는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밀고

당겨야 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서 그렇게 하고 있지만, 제 속마음 안에는 격려의 마음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목사인 저조차도 그러한데, 주님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말씀으로 이기셨지만, 때로는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시고, 이겨나가길 원하시는 것이죠. “야, 그것도 못 해?” 이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공감하십니다. 동정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여기서 '동정하다'로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쉼파데오'입니다.

'동정하다/동일한 감정을 느끼다/공감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 'sympathize'(심퍼싸이즈)가 여기서 나온 단어입니다. 영어도 ‘동정하다’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것이죠. 성육신한 예수님의 삶이 특별한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셔서 누구보다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지만, 우리와는 다른 결론(죄를 짓지 않음)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공감하시네’의 내용을 ‘값싼 복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러브가 아닌 히브리서 기자를 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비판 영상에서 ‘하나님이 뭘 하셨는가?’ 이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너무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만 세상을 사는 것처럼,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입니다. 아픔에 대한 공감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고(성육신 신학), 주가 멀어 보이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시며, 그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것은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으로 찾아오셨고, 오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고, 허무와 공허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입니다. 저는 최고의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2. 구원의 시작과 완성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해서 잘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는데, 그 세계가 죄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망가진 세상에서 다시 원래의 계획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을 예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새창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새사람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굉장히 옳은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골 3:9b)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골 3: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죄와 벗하여 살아가는, 자기중심성을 갖고 살아가는 옛사람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중심된, 성령이 임재한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한번 결심한 것이 끝이 아니라, 거듭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 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을 히브리서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설명합니다. 히브리서는 ‘크레이톤’을 통해서 예수님을 구약과 대조하는데, 3장은 모세와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역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합니다. 제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불신앙’과 ‘불순종’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히브리서 또한 그렇게 그들의 잘못을 진단합니다. (히 3:17)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짓고, 시체가 되어서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히 3:18)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히 3:19) 결국, 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출애굽 세대의 실패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불신앙)’과, ‘순종하지 않은 것(불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어쩌면 별개로 떼어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 앞에 순종하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겠죠. 순종하지 않음은 곧 믿지 않음과 같을 것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이 땅에서 주고자 하는 약속의 땅에서의 안식을 누리는 것에도 실패한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실패합니다.

히브리서는 출애굽 세대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여정에서 완주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끝까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구원이 단회적 사건이 아님은 성경에서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이라는 표현처럼, 회심하여 영적 여정이

시작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는 것’입니다. 즉,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여정을 완주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박회심 형제의 예와 같이 다시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면 안 되는 것이죠. 여러분, 예전에 저희 모교회는 레크레이션으로 ‘기차 떼기’라는 놀이를 자주 진행했습니다. 공격과 수비가 있는데, 정해진 시간 동안 공격팀이 수비팀을 항명씩 떼어놓으면 이기는 것입니다. 수비팀은 끝까지 서로 꽉 붙어 있으면 이깁니다. 신앙은

쉽게 말해 이와 같습니다. 사탄이 나를 예수님으로부터 떼어 두려고 떼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때로는 강력한 시험으로 공격합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승리합니다. 그래서 시-이-고-견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받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좀 더 풀어 쓰면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또한 그렇죠.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하는 것.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사역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고치시는 일의 대부분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며 가르침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주인 됨을 받아들여 그 나라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구원받고 있고,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모두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우리가 구원을 너무 죽음 이후로 미뤄놓아서도 안 되고, 반대로 너무 지금 삶에서 다 완성되는 것처럼 여겨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누리는 현재적 구원의

요소,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과 회복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그 모든 것이 다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소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라나타! 구원의 여정에 대한 중요한 개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신학적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예화는 ‘야구’ 비유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9회 말 상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을 친 것과 같습니다. 공이 넘어갔고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다만 아직 우리는 1루-2루-3루를 돌고 있는 과정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그분이 홈을 밟는 그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함께 승리를 만끽할 것입니다. 승리의 그 세레모니를 고대하며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3. 구원 확신과 탈락 지난 주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히브리서를 다루며 이것은 피해 갈 수 없는 신학적 이슈입니다. 우선 말씀을 보시죠.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빛을 받고’라는 것은 개종 사건을 의미합니다. 2세기 이후에 이 표현은 ‘세례’의 경험을 뜻하는 구절로 해석되었습니다. 즉, 회심하고, 하늘의 은사를 맛봤다는 것은 구원의 실제적 경험에

참여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한 사람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예시는 회심하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자들의 경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봤던 것처럼, 이들은 자칫 흘러 떠내려갈 신앙의 위기, 즉 배교의 위험성 앞에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죠. 약함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주인 된 삶에서

이탈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를 매우 긴장하게 하는 말씀이 이어지죠.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배교한 사람은 다시 회개하여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회심하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맛봤다가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은 다시 기회를 받을 수 없는 것인지 우리는 질문이 듭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씀하시면서도 유독 한가지 경우에 대해서 만큼은 죄사함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이죠.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것은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회심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된 삶을 살겠다는 주인을 바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내 삶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고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죄 사함을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히브리서

말씀 또한 강력한 성령의 일하심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경우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함이 1도 없는 완전한 거부의 악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명백하게 구원의 탈락에 대한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성령의 동행을 받던 사람의 타락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장로교 신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예정론’으로 설명하기에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예정론이고

분명 그런 말씀들이 성경에 있는데, 어떻게 탈락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우리는 고민해보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구절들을 소개해볼까요?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의 구원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한번

받은 구원이 결코 취소되거나 탈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가 탈락했다고 볼 수 있을 만한 예화는 많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대표적이죠.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기적을 체험하고 홍해를 건너며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매일 먹었던 자들입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사마리아의 시몬은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빌립과 함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일과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다는 베드로의 선언을 받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그는 이교도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 12명에 뽑혔고, 거기서도 중책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역 동안 함께 하며, 놀라운 기적을 봤습니다. 따스한 가르침도 받았고, 또 제자로서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사탄에게 팔아버렸고, 파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처음부터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봐도 신앙인이요, 회심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여정 중도에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탈락 가능성은 우리에게는 매우 실제적 측면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정론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정론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하여 설명하려고 하면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가르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네 가지 밭이 있는데, 돌밭에도 싹이 났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났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박해 앞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돌밭이 처음부터 돌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돌밭은 처음부터 좋은 밭과는 구별된 존재로 설명됩니다. 문제는 처음 싹이 나는 단계에서는 구별이 어렵다는 것이죠. 하나님 편에서는 돌밭과 좋은 밭이 처음부터 구별되어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께는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돌밭은 선택받지 못한 자로 볼 수 있고, 좋은 밭은 처음부터 선택받은 것이라고 예정론의 관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처럼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으나 사람 편에서는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는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에서는 예정론을 대입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이것은 전제에 따라서 될 수도 있고 안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인지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구분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심한 모든 사람을 좋은 밭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이 신뢰를 잃어버린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장성함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돌밭의 씨앗처럼 이 여정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조차도 무엇이라 말합니까?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야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승리지만, 우리가 1루-2루-3루-홈으로 들어오는 여정 가운데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발걸음을 멈추고 팀을 이탈해버리면 구원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했다면 그리고 이 길에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며 나아간다면... 끝까지 성령을 붙들고 신뢰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이루어가고 있으며,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진리를 붙들고 승리로 함께 나아갑시다. 그 승리의 세레모니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4. 구원을 이루는 순종과 기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시작과 완성이 있습니다. (창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조 일곱째 날의 안식은 ‘끝내다, 멈추다, 완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목표를 이루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전까지 창조 6일에 대한 묘사는 항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마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마무리 되지 않습니다. 참된 안식은 무엇을 추가로 해야 하는 날이 아니라 완성이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식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하시는 것이죠.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현재형 동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누리지 못한 것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모습은 ‘불신앙과 불순종’이 아니라, 참된 믿음과 순종입니다. 유럽은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또한 어쩌면 물리적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적이죠. 내가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성령을 내 삶의 주인이요, 인도자로 믿으며 나아가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선택권도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라는 새장에 가두어두시지 않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진리를 선명하게 깨닫고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우리의 태도가 제발 믿어달라고 하소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좋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줄 뿐, 끝내 믿지 않겠다면 그것은 그들의 손해입니다. 복음은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전할 뿐, 믿어달라고 매달릴 문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고 싶어서, 깨어진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긍휼한 마음으로 인해, 또한 잃어버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도 느끼기에 그 마음으로 찾고 전하고 초청하고 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에는 그것을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 반 / 하나님 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주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에게 공동체가 참 소중한 것입니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주인됨을 따르지 못할 때, 내면에서 성령님도 우리를 도우시지만, 옆에서 붙잡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큰 역할을 합니다. 혼자 있으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 또한 그런 마음으로 편지하며 권하지요. (히 4:1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구원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후 우리가 힘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라면, 힘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순종의 삶으로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구원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실제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을 배우는 것 또한 예수님을 닮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예수님에 대한 말씀으로 돌아가봅시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설교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공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결론의 삶을 살았습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간으로 동일한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순종’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순종을 배웠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성장했다는 것에 놀랍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부터 완성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혜도 자라셨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끝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 죽음의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순종하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삶에 주어진 목표, 즉 온전함이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었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벽하여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날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며 깨어짐을

회복하여 가는 과정이 온전함이라고 믿습니다. 그 안에 치유와 회복,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의 어려움은 분명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을 막습니다. 시험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고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소멸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승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 이미와 아직 사이를 ‘순종’으로 걸어 나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무기,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마침 금요기도회 주제도 ‘기도’이죠.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함으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순종을 위해서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저는 그것이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내용과 가장 맞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이라면, 그 기도는 주님께서 가장 들어주고 싶은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뤄지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3~6장을 설교하기로 마음먹은 후, 어떻게 이것을 여러분에게 전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설교 원고 반 정도를 썼다가 그것은 다음 설교로 보내고, 다시 ‘구원’이라는 관점을 통해 정리해보았습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구원의 여정. 그 안에서 구원의 확신적 요소와 탈락의 요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이제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나눴습니다. 내 삶이 순종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의 초보적 단계는 내 삶의 어떠한 부분을 바꾸고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대부분 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 아이와 같기 때문에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죠. 그러나 성장해나가며 반드시 우리의 기도는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길을 내시고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 그 안에서 나도 나의 구원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기 위하여, 순종으로 걸어가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죠. 그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비전 안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죄로 인해

멀어진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늘 길을 내시고 함께 하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떠날 수는 있지만,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의 길을 완주합시다. 주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