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사시대 작년 11월에 4번의 설교와 2번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사사기>를 다뤘습니다.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은 영적 암흑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선형 하향곡선’을 그리며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가며 타락했습니다. 사사기 안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삼손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삼손은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망한 인물이거든요. 이렇게 사사기를
끝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사사기 저자는 17~21장에 걸쳐서 특별한 ‘후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의 타락한 상황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을 수 있나 싶은 이야기들입니다. 그곳에는 무려 4차례나 반복되어 등장하는 표현이 있었죠. * 공식: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 . .”: ① 17:6 ② 18:1 ③ 19:1 ④ 21:25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발전해 나가는 구조 ① 종교적 타락(17-18장) ⇒ 사회 정치적 혼란(19-21장) ② 한 개인(레위인)의 타락(17장) ⇒ 한 지파의 타락(18장) ⇒ 민족 전체의 타락(19-21장) 종교인의 타락부터 시작해서, 강간과 살인, 민족 전체의 내전과 끔찍한 살상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납니다. 약육강식 폭력의 시대가 사사시대 후반부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이 사라져버린,
가장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 또한 이렇게 마칩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망가진 원인을 저 한 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왕이 없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뛰어난 왕이 없어서 이들이 이렇게 되었으니, 얼른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왕정 제도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무릇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 되신 그 통치가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청소년부 예배실을 외부에 세팅하면서 일부러 강대상은 같은 것을 주문 제작했습니다.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하나님 나라. 이것이 우리교회의 신학적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원래부터 우리교회는 예배의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6개월가량을 섬유지원센터 회의실에서 예배하면서도 마음을 다해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예배한다면, 그 회의실도 그 순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이며, 그곳은 하나님 나라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협 교육장에서 예배하는 청소년부이지만, 그곳에서 정말로 교사들과 아이들이 하나님이 왕 되심을 믿고 선포하며 나아간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인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함께 공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 신학을 기초하여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예전에 했던 설교 자료를 찾아보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2017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18주 동안 시리즈로 설교를 했습니다. 블로그에 설교 자료가 있지만, 아쉬운 것은 당시 저희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서 음질이 좀 안 좋아요. 중간에 여러 소음도 많이 섞여 있습니다. 2019년에도 7주간
<하나님 나라> 특강을 바이블 클래스로 진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읍에 있던 시절이라서 음질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올 하반기에 <하나님 나라>를 한번 다뤄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잘 준비하고 잘 영상으로 남겨서, 앞으로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계속 보실 수 있도록 만들 예정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 중에서 꼭 기억해야 할 요점은, 1)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 2) 어떤 장소적 개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이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내 발이 어떤 공간에 머물러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안에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입니다. 흔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육체를 입고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곳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부르심을 받고 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내 마음을 누가 통치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바뀌고, 내 나라의 왕이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어떤 물질이나 권력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입니다.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었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1년 전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으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지 않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표현하기를 ‘구원’은 천국가는 티켓을 받아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티켓을 받아둔 것이면 한번 구원받은 후, 이제는 막살아도 되겠죠.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진행 중입니다. 여러분이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 또한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사사시대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했었던 것이 이제 다 지나가 버린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데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에 만족하며, 내 삶에 하나님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으면, 실상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그 안에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계심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점점 타락해갔습니다. 그 사사시대가 350년 정도의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2. 찾으심 사사기를 읽다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신 것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하셨을까요? “내
맘 하나 알아주는 나의 사람이 이리도 없을까?” 목회를 하다가 그런 동역자 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성도이지만 목회자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나도 힘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목사입니다. 여러분들이 같이 으쌰으쌰 해주고 계심이 저는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도 그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사기 후반부에 이스라엘과 가장 잦은 충돌을 일으키는 나라가
블레셋입니다. 서쪽 해안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을 제외한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철기 문명’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청동기’ 문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과 전쟁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의 대치 국면 가운데서, 자신들에게 있는 것보다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문명뿐 아니라, 가장 큰 차이는 ‘왕’의 유무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왕’이 없다는
것에서 오히려 불안함을 느낍니다. 자신들에게 있는 왕이신 하나님을 봐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 있는 인간 왕을 부러워합니다. 사사기 후반부에는 여러 내부적 갈등이 생기며 그들은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통치체제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제도에서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도 자주 걸려 넘어지는 부분입니다. 환경이나 여러 요소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자꾸 나의 문제를 보기보다 내 밖의 것들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우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세상에 그 특별함을 드러내야 하는 제사장적 존재인데, 오히려 세상을 따라가는 존재로 살아가고, 휩쓸려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처럼 되려다 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어둠 가운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가면, 매력적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충분히 주목할만한 그런 사람들, 그런 모임이 기독교인이고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고유의 색깔과 향기를 잘 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닮아가면 우리는 우스워집니다. 사사기 끝의 이스라엘이 딱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상하게 했습니다. 말도 지지리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쉬운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또한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하나님은 그 일에 인생과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그 부르심을 따라갈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반드시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사용할지를 찾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렀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의 예는 굉장히 많죠.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사사기에서 봤던 사사들이나, 사무엘상에서 보게 될 사울 왕 아닙니까? 다만, 하나님은 그 실패까지도 사용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분이시죠. 다만 하나님은 그 사명 앞에 그 사람이 실패하지 않기를
응원하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고자 늘 애쓰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실패가 있더라도 딛고 일어나서 나아가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실패의 역사이죠. 그 암흑기 끝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내고자 하시며, 그 일을 행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너무 안 보여요. 그러다가 한 가정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지난주 설교에서 다뤘던 ‘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가던 룻과 보아스. 그들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나갈 계보를 준비시킵니다. 다윗왕의 계보이죠. 사실 보아스와 룻은 사사시대의 주류가 아니죠. 완전 아웃 사이드에 있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다. 여러분의 신실함, 여러분의 헌신, 여러분의 애씀. 사람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저는 룻과 보아스가 이스라엘의 암흑기를
바라보시며 슬퍼하시는 하나님에게 하나의 위로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 눈에 들어왔던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3. 한나 사무엘상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삼상 1:1)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삼상 1:2)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엘가나’라는 인물의 집안 이야기이죠. 그에게 아내가 둘이 있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도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입니다. 사사시대 끝자락에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기록은 아닙니다. 아마도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하기에 ‘브닌나’라는 둘째 부인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려는 인간적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나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처한 영적 한계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인 것이죠. 이스라엘의 회복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엘가나의 인간적인 해결방법은 오히려 가정에 고통을 더해줍니다. 브닌나라는 여인이 한나를 더욱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4)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는, 늘 아내 브닌나와 그가 낳은 모든 아들딸에게 제물을 각각 한 몫씩 나누어 주곤 하였다. (삼상 1:5) 그러나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다. 비록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였다. 아마도 엘가나는 브닌나보다는 한나를 더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8절에도 보면,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한나의 괴로움을 엘가나가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한나의 가장 근원적 괴로움이 무엇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불임 2) 브닌나의 괴롭힘 3) 하나님과의 관계적 문제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삼상 1:7) 이런 일이 매년 거듭되었다. 한나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자, 브닌나가 한나를 어떻게 괴롭게 했을까요?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였다고 6절이 표현을 하는데요, 이것은 문자적으로 ‘천둥소리가 나게 만들다’라는 의미입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이 그렇게 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했길래 한나가 브닌나보다 남편의 사랑을 갑절로 받으면서도 이렇게 슬픔 가운데 살아갔을까요? 5절과 6절에는 연이어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여자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 그를 버리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이 한나에게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늘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마음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엘가나는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니었죠. 어떤 이야기를 해서 늘 한나가 뒤집어지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뭐였겠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공격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어려움일 테지만, 저는 가장 근원적인 괴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문제’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한 사람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괜찮아요. 불임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괜찮죠. 그런데 한나의 고민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내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나?’ 이런 부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나의 이러한 마음을 대변하는 이야기가 뒤에도 있습니다. 한나가 너무 속상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곳에 있던 엘리 제사장에게 어떤 오해를 받습니까? 한나가 뭔가 미친 듯이 기도하는데, 기도 소리는 횡설수설한 것 같아요. 깊은 그 고민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엘리는 한나를 꾸짖습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그러자 한나가 말합니다. (삼상 1:15)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삼상 1:16)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지금 브닌나가 한나가 마치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처럼... 고대 사회의 관점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속상하게 만드는데... 제사장까지 와서
자기를 오해하니까 한나는 자신이 ‘나쁜 여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이 천하고 쓸모없는 여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녀가 가진 내면의 고민이 뭐였는지를 보여주죠. 그런데 이 장면 또한 사사시대의 영적인 어두움을 보여줍니다. 엘리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사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시 대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어른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묘사가 이렇습니다. (삼상 3: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삼상 2:22)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저지른 온갖 잘못을 상세하게 들었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삼상 3: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사사시대의 지도자이자, 영적 리더인 엘리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그는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도 기도하는 것과 술주정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민감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엘가나의 가정은 매년 실로 성소에 와서 예배하는 가정인데도 무관심하여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삼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였다. (삼상 2:17)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들은 엘리의 뒤를 이어 제사장 역할을 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회막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성적인 죄를 일삼았고,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3방향 갈고리고 제물로 사용한 고기를 끄집어냈는데, 이것은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몫 이상의 것을 취하기 위한 욕망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또한 제사를 지내기 전에 하나님보다 앞서 제물을 취합니다. 책의 초반부를
보면, 기도하는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악한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엘리에게도 자식이 있어요. 악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것이 있지만, 한나에게도 자식이 없고, 하나님에게는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한나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표현을 쓰죠. 기도는 내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가는 것이다. 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많이
말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가만히 있고 내 주변의 어떤 것, 어떤 사람, 어떤 환경을 바꾸기 위해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내 마음과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가며 평안함을 얻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도의 특징이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한나가 자신의 고통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깊은 기도로 나아갑니다.
그 안에서 그녀가 누구의 마음을 알아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삼상 1:11a)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님, 저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주님, 저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주님, 여종을 잊지 마십시오.” 사실 한나의 이 기도와 같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나를 보고 있니?” “이스라엘아, 나를 기억하고
있니?” “이스라엘아, 너희 왕을 잊지 말아라.” 한나는 아이가 없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삼상 1:11b)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에게 있어서 이 아이는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가 목적이었고 전부였다면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주셨다는 것은 한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한나는 그 아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올려드리고자 하는 믿음의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쓰시기 위해, 또 이삭을 쓰시기 위해 모리아 산에서 확인하셔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삶의 가장 소중한 이삭,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또 이삭은 당시에 10대 청소년입니다. 10대 청소년을 노년의 아브라함이 도망치거나 반항하면 제압할 힘이 있었을까요? 이삭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묵묵히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위기 때, 말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주님, 제게 이것만 주신다면....” 아마도 우리가 이 일에 대한 경험들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요? 한나의 믿음이 잠시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었는지, 하나님께 드린 진실한 고백이었는지는 이제 그녀가
진짜 아기를 가진 후 확인해 볼 수 있겠죠. (삼상 1:19)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나서,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엘가나가 아내 한나와 동침하니,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여 주셨다. (삼상 1:20) 한나가 임신을 하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주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여 주셔서 아기를 주셨고, 한나도 하나님을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후 이름을 사무엘로 짓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드립니다. 그것은 이제 부모를 떠나서 성전에서 제사장을 도와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젖을 뗀 후, 곧바로 그녀는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대로 행합니다. (삼상 1:27)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주님께서 내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삼상 1:28) 그래서 나도 이 아이를 주님께 바칩니다. 이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께 경배하였다. 저는 이 장면이 하나님과 한나가 ‘하이파이브’(high five)를 하는 장면이라고 느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시시대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셨을까요? 어쩌면 한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 없어서 하나님 또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지는 않았을까요? 대제사장까지도 세상에 물들어가고 있는 어둠의 때에 촛불과 같이 빛을 밝히는 사람들의 존재는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지난 시간 보아스와 룻은
왼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했어요. 이 가정은 미래를 위해 쓸 가정. 보아스와 룻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서 그들의 가문에서는 다윗의 혈통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시킵니다. 그리고, 또 이번에는 한나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쁘셔서 생명을 허락하여 주시며 오른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그 아이를 통해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다리가 되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주권 한나는 2장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한나의 기도’라고 알려진 이 기도의 주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입니다. 강한 자를 약하게, 부한 자를 주리게 하시지만, 반대로 가난한 자를 부하게 낮은 자를 높이시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죽이기도 하시고 여호와께서 살리기도 하심을 고백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은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솔직히 사귐의교회를 5년 전에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예배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큰 절망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내가 혼자 말도 안 되는 이상적인 교회와 비현실적인 개척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고민도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개척 목사님들이 개척 후에 지치곤 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들이 기대한 만큼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데서 오는 괴리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였습니다. 내가 꿈꾸는 교회는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그리고 내가 개척을 해나갈 방법은 너무나도 독특한... 그래서
대안학교와 같은 비주류의 독특한 교회. 그래서 누가 올지 예상도 장담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어쩌면 평생 개척교회여서 생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목회. 그것이 제가 생각했던 저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도 제풀에 지치지 않으려고... ‘슬로 처치’(Slow church)를 슬로건으로 걸고 시작했던 목회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대안교회가 아닌 시대에 필요한 모델교회로 세워가셨고, 지금은 때로는 감당하기 벅찬 ‘패스트처치’(Fast church)가
되어 처음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고민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이 교회에 갖고 계신 계획을 잘 따라가고자 하는 고민, 이 공동체에 보내신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을 텐데... 그 하나님의 뜻대로 함께 잘 회복하고 성장하여 가고 싶지만, 시대의 어려움 속에 우리에게 보내어 주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내 그릇으로, 우리의 역량을 바라보면 도저히 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참 많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쁨이 있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이 시대 가운데 바라보시고, 이 교회를 통해 뭔가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하고자 하시는지 사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5년 후 우리의 모습이 어떨지, 어느 것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제게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이 시대에 우리 교회를 발견하시고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고,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다짐일 뿐입니다. 최근
기독일보의 기사를 보니까, 서울과 경기도권에서 교회학교가 없다고 답한 교회가 43%입니다. 있다고 답한 곳 중에도 교회학교 전체(유치부~고등부)의 합한 숫자 평균이 27명이고 44%가 20명 미만입니다. 즉, 아시다시피 저희교회는 다음세대가 많고, 그것은 저희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많은 교회에 30~40대도 없습니다. 잘못된 교회가 아니라 좋은 교회더라도 때로는 10년, 20년 후에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굉장한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준비해가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뭐 강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교회 5년 동안 잘 세워왔지만, 사실 후~ 불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겸손하게 나아가고 함께 성령 안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5년간 빠르게 세워졌던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빠르게 무너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면, 강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약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제가 엘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여러분이 브닌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가져다드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오늘 말씀 앞에서 옳은 마음과 진실한 길로 나아가면,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정, 교회,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너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단다. 내가 너희와 같은
교회를 간절히 기다렸단다.” 저는 이 시대에 주님이 사용하기 위해 찾다가 우리를 발견하시고, ‘하이 파이브’ 하실 수 있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한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신 지 아십니까? (삼상 2:21) 주님께서 한나를 돌보아 주셔서,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낳았다. 어린 사무엘도 주님 앞에서 잘 자랐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약속대로 드리고 나니,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주셔서 한나로 하여금 자녀를 다섯이나 더 낳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2장의 율법에 보면 사람이 소를 도둑질하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사무엘을 받으시고, 대신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녀를 다섯이나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하고 신실하시면 하나님은 다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지만, 그분의 눈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나의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은 사무엘의 삶에도 찾아가십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그를 부를 때,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인지도 몰라서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주님이 너를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그렇게 사무엘의 삶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사무엘이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때로부터 사무엘이 장성할 때까지 하나님과 사무엘의 사귐은 깊어졌습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삼상 3: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그렇게 사무엘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으로 세워져 갔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견고하게 말입니다. 사무엘도
그러했다면 우리라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격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오늘도 한 걸음, 내일도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잡으시고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단련하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검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검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들어 쓰실 수 있을 만큼 순종으로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고 따라갈 수 있는 진실한 순종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대의 어두워짐을
느끼십니까? 저는 솔직히 영적으로 시대가 많이 어두워져 간다고 느낍니다. 점점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우리의 삶과 멀어져가고, 기준들은 무너져가며, 우리를 유혹하고 흔드는 힘은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여러분이 어둠에 물들어가는가? 아니면 촛불을 밝히는가? 이것 또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사기의 끝에 빛났던 사람들의 삶처럼,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앞에 ‘하이파이브’로 반응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