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저의 설교적 목표는 주일은 주제설교, 수요일은 강해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의 주제설교는 ‘복음과 영적 성장’에 대한 것을 주로 다룰 것인데, 성찬예배가 있는 날은 ‘교회와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우리가 매주 선언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나눠보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사명 선언문’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공동체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그 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사명선언문을 고백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우리의 사명선언문은 크게 3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일 첫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귐의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날마다 추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입니다. 사귐의교회가 꿈꾸는 첫 번째 목표라고 말할 수 있죠.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사귐입니다. 우리 교회 로고를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ith God, With Neighbor. 우리는 사귐을
원하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에 대한 배움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어느 날 예수님께 한 율법학자가 와서 묻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 구약의 율법은 613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압축하고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5~10계명은 이웃에 관한 관계입니다. 즉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놓치지 말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선후’는 있으나,
무엇은 없어요? ‘우열’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둘째도 그와 같습니다. 뭐가 같다는 것일까요? 중요도가 같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예배와 마르다의 섬김에 대해서 제가 설교할 때도 같은 표현을 씁니다. 예배와 섬김은 우열은 없습니다. 다만 선후의 순서는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예배는 반드시 섬김으로 완성됩니다. 씨앗과 열매입니다. 섬김이 없는 예배자는 씨앗이 생명력이 있는지를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 없는 섬김은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만족과 평판을 위해 섬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예배와 섬김의 선순환이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것을 정리할 수 있었던 말씀은 요한일서입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가 먼저’가 핵심이죠. 제가 이 말씀이 너무 좋아해서, 청년부 이름도 예전에 ‘He first’ 청년부라고 지었습니다. 원래는
교회 이름도 그렇게 지을까도 고민했습니다. 한자로 ‘선애교회’라고 지을까 했는데, 신선한 느낌이 없어서 ‘사귐의교회’라고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교회’가 아니라 ‘사귐의교회’이죠. 그럼, 사랑과 사귐은 무엇이 다를까요? ‘사랑’이 씨앗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 성품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사용할 때, 우리 안에는 ‘사귐’이
나타납니다. 사귐을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영어로는 ‘펠로우십’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감정’이라면 사귐은 ‘관계’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사귐이 맺어지는 것이죠.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성경은 일맥상통하죠. 여기서도 사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그 사귐이,
이제 성도 안에서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사귐’이라는 단어가 주목받은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 이 단어를 신학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그때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는 ‘사귐’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까? 신앙의 목표는 무엇일까? 제가 그 책을 통해서
정리한 것은 ‘사귐’입니다. 교회는 뭐 하는 곳입니까? 사귐을 누리는 곳입니다. 예배가 무엇이냐?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이냐?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귐의 기도>라는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너무 그 모든 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귐의 기도>는 기도에 대해서 다룬 책이잖아요. 기도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한 주문서가 되어 있는 현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께 생떼를 부리며 뭔가를 얻어내는 것, 그 비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그래서 금식기도가 간절한 기도를 넘어서 누군가에게 단식투쟁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어낼까에 꽂혀 있는 당시의 세태를 꼬집은 책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히 열심히 하면서도 “이것이 맞나?” 싶은 생각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신앙의 본질, ‘사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내 주변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귐은 반드시 이웃과의 사귐으로 연결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잘하고 있는데, 이웃과의 사귐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원하고 계시는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과만
사귐을 누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문병주라는 형님입니다. 저는 그와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교회에 있는 지선영 형제도 저와 다 군대에서 만난 사이이니, 잘 알 것입니다. 그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제가 신학생이었기에 교회에서 리더 역할을 했지만, 그는 우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형님으로서 삶의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 형님을 여전히 기억하는 것은, 그가 제 인생에서 가장 저를 부끄럽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살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소위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님들은 아시겠지만, 이제 소위 짬이 차면 하게 되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습니다. ‘군장’도 조금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페트병을 채운다든지, 조금 편하기 위해서, 혹은 내가 조금 윗사람이 되었다고
느끼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는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궂은 일을 도맡아서 했고, 그의 입에서는 불평과 불만도 없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런 그가 좋으면서도 불편했습니다. 속으로는 “저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너무 피곤할텐데...”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진심이 통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집이 어려웠음에도 공부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외고를 나왔고, 손꼽히는 명문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겸손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도 늘 배우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가 섬겼던 군인교회는 진짜 할 일이 많았습니다. 거의 매주 200인분 설거지도 해야 했고, 토요일에는 청소와 작업할 것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민간인 목사님이 담당을 하셨는데, 그분이 공수부대 원사 출신으로 가끔 옛사람이 나오시면 성격이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면서도 저희는 툭하면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3.1절을
앞두고 목사님은 국기를 만들어서 흔들자고 저희에게 톱을 주시며, 산에 가서 새끼손가락 굵기로 30센티 나무 200개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군종병 8명 정도가 올라가서 열심히 작업해서 200개를 해서 왔습니다. 가져다 보여드렸는데, 새끼손가락 굵기가 아니라 두 번째 손가락 굵기라며 화를 내시며 다시 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왔는데, 이번에도 본인의 마음에 안 드신다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더니 본인이 답답해서 톱을 들고 따라오라며 저희를 이끌고 올라갔습니다.
결국 욕을 먹어가며 작업을 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욕먹으며 작업을 하면서 저희 안에는 온갖 불만이 쌓였고, 결국 같이 모여서 목사님을 험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같이 껴서 불평하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한 번도 주도한 적이 없던 그 형님이 우리의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목사님을 따라서 옆에서 작업을 했는데, 우리는 귀찮아서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던 나무에도, 목사님은 허리를 숙여서 들어가서 그것을 잘라 오시더라. 나는 그
진심 앞에 부끄러웠어.” 그러면서 그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이 우리의 영적 아버지라고 말하고, 우리가 모두 교회를 섬긴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목사님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니.” 아마도 평소에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던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그 이야기를 듣고 저희가 “너 뭔데~”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의 이야기에 정말 저희가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그 이야기에서 돌을 들었던 사람들이 내려놓고 떠났던 것처럼... 모두가 그 앞에 할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경험했어요.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저에게 그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멋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형님 덕분에 남은 시간 동안 목사님을 더 이해하고 더 잘 돕고 섬기려 애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그 목사님께도 많이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혹시
이런 군인교회 목사님과 같은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쉽게 불평의 톱질을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바로 그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증명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흘러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진짜 있는 사람은 이웃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가까워질수록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사람을 향한 마음도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불편했던 사람이 이제는
이해가 되고, 예전에는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이제는 품어야 할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결국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며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이 흘러가는 삶. 그것이 바로 사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어떻게 변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도구는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한 사람. 세상이
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거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주님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한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함께 빛을 내는 것이 교회이고, 이러한 교회들을 통해 주님은 어둠을 빛으로, 깨어진 세상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귐의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날마다 추구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입니다. 중요한 키워드는 ‘날마다’입니다.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종종 ‘달’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달은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은 후, 그 빛을 반사해서 우리에게 보내주는 것입니다. 달 혼자서는 빛을 줄 수 없습니다. 어둠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있기에,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이 있기에 달이 그 역할을 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참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은 간장 종지만 할 때도 있죠. 그것에 낙심하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사실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 사랑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예배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이제 물으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으로 비추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누구입니까?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 힘쓰고, 사랑하기 힘든 순간마다 다시 주님께로 가십시오. 주님을 예배하면서 주님과의 사귐을 깊이 누리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으로 서로를 품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