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요배 현장 녹화가 문제가 좀 생겨서 설교만 다시 어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을 위해서 녹화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최근 메일 성경 본문이었던 요한복음 9장부터 오늘 본문까지 해서 같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복 9장에는 맹인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가 맹인 것이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죠. 그가 어 가지고 있는 약점 그의 질병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질병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 반드시 그것을 온전하게 치유하는 것만을 말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바울처럼 어떠한 연약함은 그대로 두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바꾸셔서 문제를 해결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 환경 속에 있는 우리를 바꾸셔서 우리가 그 문제를 감당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서 일하시기도 합니다. 즉 예전에
나였다면 하나님이 없던 나였다면 몇 번이고 넘어지고 포기했을 순간에도 그것을 이겨내고 감당하고 때론 뛰어넘어 살아갈 수 있는 것 그 삶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고 하시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9장의 경우에 요한복 9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맹인의 환경을 바꿔 주셨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이 일을 행하신 그 존재가 예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에 대해서 증언한 거죠. 근데 어 갑자기 분위기가 누가 이러한
잘못했어? 범죄자에 대한 증언으로 바뀝니다. 왜냐면 이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또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깁니다. 제가 봤을 때도이 정도면 예수님이 매우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은 일이 있으신 거죠. 예수님의 이 치유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만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까지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영과 육을 모두 새롭게 하는
주님의 새로운 창조 회복 그 일이 지금 한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이 이 사람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육적인 눈도 뜨고 영적인 눈도 서서히 열려가게 됩니다. 물론 아직은 그 시력이 영적 시력이 희미합니다. 그러나 점차 선명해져 가는 그 과정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반면 이 본문의 중요한 또 등장 인물들은 바리새인들 즉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육적으로 시력이 온전해서 예수님을 볼 수도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영적인 맹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하다면 그들은 무리들이에요.이 무리들이 그 맹인들 삶을 데리고 간 거죠.이 이 무리들 또한 아직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죠. 전에 맹인이었던이 사람은 이제는 눈을 떠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맹인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눈먼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영적으로 보자면 눈먼 사람들이 눈먼지도
눈 사람을 데려간 입니다. 이사야 누가복음 말씀에서도 언급되는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입니다. 주의 성이 임하셨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음을 하시려고게을 나를 보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인들이이 말씀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맹인이었던 사람이 나를 고쳐주문이 예수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증언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그것을 받아들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절대 메시아에서는
안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만나면 진리를 만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자기의 입맛대로인지 자기 중심적인지 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명백한 진리를 앞에 두고도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거부하고 있습니다. 반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가 선지자이다라고 고백하게 이르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밝히 알아가고 있습니다.이는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나 그리고 니고데모에게도 해당하는 그런 점진적인 깨달음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도 처음에 예수님 낯선 사내로받아들이다가 점차 선지자로 고백하며 조금씩 깨달아가던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즉이 맹인는 뭐라고 말하냐면 아니 내 눈을 뜨게 해줬다니까 예수님이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정작 지금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산내는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을 들어서 나를 고치겠냐? 그게 말이 되냐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할 말이 없죠.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는게 뭐예요?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 치유된 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아요.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이 유대인들은 그가 나면서부터 병자였으니까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그의 아픈 부분을 찌른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그를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가 쫓겨나 있을 때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아직 이산에는 이때까지 예수님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 치유하시마자 살아셨거든요. 예수님을 만난 그는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 요한복음 9장 38절 말씀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완전히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 9장의 이야기입니다. 눈먼자였으나 진리를 보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 진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눈먼자였던 바리새인들. 9장의 마지막절이 매우 중요해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 하나님께 돌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은혜가 있겠지만 스스로 하나님 안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강력한 경고이죠.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심각한 영적 맹인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는 아 그러가 난 못 났어. 정죄하고 불안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영적 상태를 잘 진단하지 못하면 우리는 마치 내가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은 존재인 것처럼 쭉 살아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게 우리가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한 곳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의 삶이 얼마나 불안전한 것임을 깨닫는 거예요. 자신이서 있는 삶의 자리가 무너질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세상에서 적당히 적당히 충분히 뭐 담대 보게 그냥 중간 이상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더 어쩌면 변화하기 어려운 오류에 빠지곤 하는데 그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이 관점이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10장입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주제에서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의 주제로 바뀌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10장은 목자와 양의 비유력을 풀어내죠. 자기 목자의 음성을 문직는 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어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서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가 2007년에 몽골에 두 달 정도 있었어요. 몽골에는 넓은 들판이 있고 양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근데 목자가 부르면 양들이 풀다가 그 소리 나는 곳으로 막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알고 있으니까 호기심이 발동했어요.
그 제가 양들 옆에 가서 열심히 그 목자 흉내를 내면서 불렀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눈길한 뭘 주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를 아는 것이죠. 양은 시력이 나쁜 동물입니다. 하지만 청력은 어떤 동물도 좋습니다. 양들은 음성으로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해요. 낯선 사람에게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율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너희가 나의 양이라면 내 음성을 알아듣고 나를 따랐을 것이다. 10장 14절 말씀 읽어 볼게요.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알고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예수의 양이란 얘기죠.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님은 양들 목숨도 버리시는 거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 반면에 거짓 목자, 사꾼 목자가 있습니다. 거짓 목자는 양을 위하지 않아요. 양을 착취해서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취하는게 거짓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생각하는 거예요. 양들을 위해서 나를내어 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삶 가운데 궁핍하고 어떤 한계에 가득하고 어떤 갈급함이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성욕신하셔서 우리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게
선한 목자란 거예요. 거짓 목자의 욕심과 선한 목자의 열망 어떤게 더 클까요? 선한 목자입니다. 거짓 목자의 동기는 자기의 유익에 있어요. 선한 목자는 그러나 목숨도 내놓습니다. 거짓 목자는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에요. 근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어 10장의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지금 돌보시는 우리 밖에도 또 다른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그들을 우리 안으로 인도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예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해요. 음성을 듣는데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자는 이제 선한 목자 양으로 살아갈 것이요. 음성을 들어도 따라오지 않고 듣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이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내어 주신 분이죠.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따르는 삶을 살아함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활이라는 생명을 다시 주실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영적인 얘기를 하니까 그 얘기
듣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아요? 분열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분열이 일어나요. 진리가 있는 곳에. 어, 이게 분열이라면 되게 나쁜 얘기 같잖아요. 근데 어떤 분열이면 어, 좀 분열보다 좀 더 좋은 표현은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들 안에서 누군가가이 말씀에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상태에 놓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분위가 편한 거예요. 진리를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 이렇게 나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을 들었을 때 거기에 다른 반응 듣지 못한 자들이 거기에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합니다. 보고 있는데 보지 못하고 듣고 있지만 듣지 못하는 아이러니 모든 사람에게 성경이 주어져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생명 얻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이 말씀 앞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안에서도 상반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선한 목자와 음성,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한 자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오늘이 주님께서 우리 원하신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정제하고 갈라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나는 본다. 나는 잘 듣고 있다. 말만하고 있는 착각하고 있는 영적 교만에 벗어나서 참된 빛 빛이시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하려는 진리의 초청, 사랑의 초청입니다. 사랑하는 성령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이 말씀에 비춰서 나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는 잘 듣고
있나? 나는 듣고 있는데 진짜 듣고 있나? 나는 보고 있는데 진짜 보고 있나? 혹시 나의 익숙한 신앙의 연륜이 나의 지식이 혹은 나의 고집이 예수님의 음성을 가리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의 가장 큰 위험은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멀었는데도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는 맹인처럼 스스로 길에 찰 수 없는 양처럼 주님의 은혜 없이는 당 하루도 온전히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자들에게 소망이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목자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내어 주시며 늘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거짓 목자의 소리와 소음 속에서 내 이름을 아시고 나를 푸른 추장으로 부르시는 그 선한 목자의 음성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참 빛을 보고 선한 목자의 음성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걷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