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수혜자와 증거자" / 강정규 목사

2024-05-12 · 사도행전 2~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좋은 설교는 성경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그 이야기가 우리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의 지식이 쌓이는 수준을 넘어서, 말씀으로 내 삶이 일깨워지고, 변화의 능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을 있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삶의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의 신앙이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로 마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 말죠.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은 비로서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삶에 마주하는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삶과 마주하지 않는 신앙은 한없이 가볍고 고민조차도 없습니다. 내가 신앙으로 종교생활을 할 뿐, 신앙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지 않으면, 그런 사람에게는 실패감도 없습니다. 시도가 없는데, 실패가 왜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설교를 듣고 그것을 내 삶에서 적용하고자 힘쓰며 자꾸 실패하고 있습니까? 저는 잘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실패가 없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 실패가 없는 사람은 어쩌면 설교를 내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엄밀히 말해, 실패를 통해서 깨닫고 배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웃사랑을 머리로만 동의하는 사람은 절대 그 사랑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써보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기를 버거워하는 존재인지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 사랑에 실패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내 힘이 아닌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겪어야만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기 원하셔서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 함께하고 계셨던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었지만,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며 나가니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사랑하게 됩니다. 피지컬

운동을 하다 보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까지는 금방 합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안 되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를 악물고 하는 것들이 근력을 강화하죠. 신앙은 내 힘으로 안 되는 부분에서 성령을 의지함을 통해서 그것을 돌파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도도 안 하면 실패도 없지만 성장도 없고, 실패했다고 좌절만 하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하여 성도가 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성장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비전입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인간은 태어났다고 끝이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돌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아기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고 ‘가족’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회심은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거듭남은 ‘위로부터 태어나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보호자’는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실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보호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이들은 영적으로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시죠. ‘고아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겠다. 성령님이 오셔서 너희의 보호자, 보혜사가 되어주실 것이다.’ 성령님이 모든 영적인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들에게 가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호자는 같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의 가르침 아래서, 우리는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 안에 조금 더 먼저 성숙한 ‘형과 누나’가 있을 뿐이고,

또 내가 자라면 곧 뒤이어 탄생하여 자라는 ‘동생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서로를 도우며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과 ‘교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사도행전은 ‘성령’과 ‘교회’에 대해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성령님은 내게도 있지만, 내 주변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한 분이라면, 우리 중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모이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전해진 곳에 나타나는 모습을 크게 2가지로 보여줍니다. ① 모이는 삶 (행 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행 2: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행 2:47a)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행 5:12)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하였다. (행 5:14) 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니, 남녀 신도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의 삶은 점점 모이지 않는 삶을 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귀찮고, 점점 홀로 지내는 삶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새로워진 사람들은 내가 전에는 귀찮아하던 관계들에 대해서도 받아들입니다. 함께 모여서 주님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고, 함께 모여 찬양하고 싶어지고, 함께 만나서 삶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유튜브가 있어서 바쁘고 귀찮아서 예배를 홀로 드리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주일에 우리는 모여서 예배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 뜻대로 살아가는 결단을 했다면 그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이타적인

삶 (행 2: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행 2: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행 4: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행 4: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공동체 모임을 하나님이 가르치셨다면 공동체적

삶의 태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서로 ‘진짜 가족’으로 서로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기본적인 전제는 함께 살며 공유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특이한 표현이 있죠. ‘우리 집’, ‘우리 엄마’. 어쩌면 우리는 더욱 공동의 것에 대한 인식이 강한 민족입니다. 가족 안에서 각기 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재정 능력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에게 있는 물질을

나눕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녀가 부모에게 물질을 나누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힘으로 다른 누군가를 채우는 것, 기꺼이 하는 것, 자연스럽게 하는 것, 그것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요구와 말씀을 받아들여서 혈육의 가족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누군가 현대사회 안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말씀하시는 것까지, 그리고 ‘우리가

순종할 때’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정말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한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이것은 자칫 매정해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정말

우리에게는 이런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막 10: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막 10: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정말 우리 모두가 이 말씀 안에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밖에 있던 삶에 있었던

것을 버리게 된 것이나, 하나님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백배나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서로의 가정을 오픈하여 가정에서 예배하며 살았다면, 그곳이 모두의 가정이고, 모든 성도가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이니,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도 받겠으나, 함께 서로를 지켜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하여 우리는 기꺼이 삶의 어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버리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있으나, 백배로 받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없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영적세계의 비밀은 우리의 육적세계의 모습과 사실상 유사합니다. 인간도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 ‘말’을 가르치죠.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소통합니다. 소통이 일어나야 함께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고, 아이는 사회적 인간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소통하시는데, 우리에게 ‘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들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와 소통하십니다.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지만, 진리를 벗어난 상황에서의 기도는 무속신앙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 이야기에 굉장히 중요한 전제가 있죠. 무엇입니까? 우리가 ‘들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뭐가 있어야 하나요? ‘들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었고, 하나님의 신비한 직통계시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던 때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 선교단체의 가르침을 오해한 결과이죠.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적용하는 사람이 있었냐면, 하나님이 몇 장 몇 절로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마치 우리에게 로또 번호를 하나씩 알려주듯이 말입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8장’, ‘12절’. 그리고 눈을 떠서 성경책을 빨리 찾아봅니다. 그럼, 로마서는 18장이 없어요.

꽝. 세월이 지나서 저는 성령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법을 배워갑니다. 저는 종종 성령님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경험들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떤 부분에서 깊은 고민 속에 기도하다 보면, 제게 성경의 어떤 말씀을 제게 생각나게 하시거나, 어떤 장면을 생각나게 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가 힘들 때면,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든지, 모세의 주변에 모세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그 뒤에 모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호수아가

갑자기 생각난다든지,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팔을 붙잡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든지 이런 것이죠. 제가 평소 외우는 말씀을, 필요한 순간에 생각나게 하시는 경험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단어를 하나씩 배워가며 대화를 익히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내 안에 쌓아둘수록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사귐이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예배도 하지 않고, 성경도 잘 읽지 않던 사람이 어디 기도원에 가서 불 받아서 갑자기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본다고 하는 일들에 대해, 사실상 우리는 그냥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기는 예배입니다. 내가 예배에서 들은 설교, 여러분이 읽고 묵상하면서 기억했던 내용들이 내 머릿속에서 잠깐 있다가 사라질지라도, 성령께서 필요한 순간에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사도행전 1:8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성막을 통해 경험하던 때가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 경험했던 때가 있었다면,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함께해나갑니다.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어요. ‘나 살기도 바쁜데, 내가 굳이 하나님의 일을 꼭 해야 합니까?’ 이럴 때, <풍삶초>가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삶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전과 달리 고갈되지 않고, 치유되며, 사랑으로 날 채우고 흘려보내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내 존재에 가장 맞는 삶을 살아갈 때 행복을 느낍니다.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갤럭시를 똑바로 쓰려면 삼성에게 물어보고 아이폰을 똑바로 쓰려면 애플에게 물어보듯이 인생을 똑바로 살려면 인간 만든 사람을

찾아 세상을 똑바로 살려면 세상 만든 사람을 찾아 물어보는 게 당연한 이친데 그 동안 내가 뭘 안다고... 왜 그리스도인이 더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이 우리 안에 창조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살리고, 내 스스로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느껴지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맛보지 않으면 몰라요. 그래서 맛보게 하려고

저도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약속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님을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 아침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모여들었던 때입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역사가 이렇습니다. (행 2: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행 2: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행 2: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행 2: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행 2:6)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행 2: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행 2: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가 평소에 사용하던 언어가 아니라, 각기 다른 나라 언어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경험이죠. 그러나 다른 이상한 외계어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 현상을 흔히 말하는

‘방언’이라고 말하지만, 요즘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오순절 성령강림 때 방언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들은 각국의 언어로 ‘하나님께서 하신 큰일’을 말하였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외국어로 뭔가를 말하는데, 그 내용이 진리에 대한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작정하고 행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오순절이잖아요. 거기에 다양한 나라에서 흩어져 살아가며 다른 언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이들에게 임해서 이들이 성령을 누리니, 이들이 곧 하나님 백성의 사명대로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신분 자체가 복음의 수혜자이며, 증거자입니다.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자입니다. 제가 올해 우리교회의 목표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교회’라고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성경적 언어로 지었기에, 부재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 전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 그분을 누리며 닮아가고 증거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죠. ‘복음의 수혜자이며 증거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곧 복음의 수혜자이자 증거자가 되는 삶입니다. 오순절에 이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당황한 것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오히려 제자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가 되었음을 성령 안에서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가르치거든요. “유대인 동포와 예루살렘에 방문한

모든 여러분. 여러분 중에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겨우 아침 아홉시인데 취할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이 일은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말했던 말씀에 대한 성취입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러분이 생각해보세요. 이들에게 여러 감정이 동반됩니다.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행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리스도인 안에 회심이 일어나고 그 삶에 어떤 변화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처음에 ‘놀라움, 신기함’ 또 어떤 사람들은 ‘당황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꼭 있어요. ‘조롱’ 여러분이 진짜 변화되기 시작하면, 그 삶을 보고도 이런 반응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놀라고, 신기해하고, 당황하고, 조롱하고.’

그런데 이런 모습들은 일종의 ‘관심’이라고요. 내 주변 사람이 이러면 관심이 없을 수가 없죠. 그런데 그 관심이 꼭 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만약 여러분 주변 누군가 내심 속으로는 ‘나도 너무 삶이 그런데, 교회라도 한번 가볼까?’ 그러면 정직하게 주변의 성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는 삐딱하게 말한다고요. ‘뭐, 교회는 요새 어때? 뉴스 보면 뭐 난리던데, 너도 그런데 다니는 거 아니야?’ 이게 뭐예요? 관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심을 보일 때, 복음을 전할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며 주님이 그들의 사명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낚시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에 낚아채는 것입니다. 물지도 않았는데 당겨도 안 되고, 이미 물었는데 당기지 않아도 도망갑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줍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를 해준다고요. (행

2:23)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행 2:32)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행 2:33)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 삼고 정말 그렇게 살면, 반드시 우리 삶은 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변화는 우리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우리 주변의 변화로, 더 나아가 세상의 변화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한 사람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그 수혜자가 된 후에, 그는 곧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증거자 되는 것이라고요. 저는 여기에 우리도 공교롭게 마치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청장년

120명 정도가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자녀들까지 합하면 180명 정도 예배하고 있어요. 저는 그러나 여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면, 우리가 흩어져서 그것은 수백, 수천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복음이 임한 사람, 복음이 열매 맺고 있는 삶, 그것을 지켜보는 주변의 반응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이적과 표적을 보고 두려워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적’과 ‘표적’을 신비로운 어떤 체험과 연결한다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신비로운 경험은, 우리의 힘으로 도무지 찾을 수도 없고, 우리의 힘으로 도무지 얻을 수도 없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을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내 마음이 깨어지고, 새로워지며.... 상처 가득한 내 삶에 치유가 일어나고.... 내 인생이 변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저는 가장 아름다운 이적과 표적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곳에

변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수혜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는 삶, 그 삶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놀라고, 당황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은 ‘격차’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와 격차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경외심’을 느낍니다. 저희가 지난주에 ‘사역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교회에서 출발하는데 비가 오고 있었어요.

예진 전도사님 차가 먼저 나가고, 교회 차가 뒤따라 나가고 또 그 뒤에도 차가 따라왔어요. 그런데, 교회 뒷길에서 차가 한 대 들어와서 만난 것입니다. 우리 쪽이 차가 많으니 그 차가 후진을 해야 하는데, 운전을 잘 못해요.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 천천히 기다려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차에서 예진 전도사님이 우산을 쓰고 내려서 ‘오라이~’를 해주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앞차는 초보운전자였습니다. 그런데 차 옆에 탄 사람도 아니고, 운전자가 나가서

그 사람을 도와주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제 안에 예진 전도사님에 대한 ‘경외심’이 들더라고요. 이런 거였어요. ‘나는 왜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을까, 나도 나가서 도와줄 수 있는데.’ 저는 예진 전도사님이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예진 전도사님에게 성령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네가 도와줘.’ 성령님께 집중해서 그 순간 제가 주님께 물었으면 저에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말씀하셨다고 끝이 아니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꼭 기억해주십시오.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우리가 자라가면 갈수록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보면서 종종 놀랄 거예요. ‘왜 저렇게 살까?’ 우리의 겉모습이 특별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 속사람이 변해가기에 내가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점차 변해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악할수록 그 어두움은 짙기에 그 안에서 우리는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우리의 삶을 보면서 문뜩문뜩 놀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경외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에게 하는 이야기는 한마디 한마디가 울림이 있고 그의 삶에 남겨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행전의 이 이야기가 이 시대의 우리를 통해서 적용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경외심을 갖게 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씀으로 그들의 삶을 일깨웁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2:37부터입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찔려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다. ‘형제 여러분!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선을 베풀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옵니다. 내 옆 사람의 삶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 그들의 삶의 고민이 보여요.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거나, 혹은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가 있다고요. 어쩌면 그들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고민이 있으나, 방법을 모르는 때가 있어요. 바로 그들의 고민이 베드로 앞에서 많은 유대 사람이 했던 말처럼, ‘내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삶을 고치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여러분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세례는 회심한 자에게 주는 공식적인 징표이죠. 사도행전에서 ‘회심 = 세례 = 성령’은 세트입니다. 이것 중에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에 대한 회심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여라. 돌이켜라.’ 그리고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해요. ‘베드로가 그들에게 간절히 권했다. “이 병들고 무감각한 문화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을 때에 어서 나오십시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하자면, “깨어진 세상에서 거기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 어둠 가운데 세상이 가르치는 다른 것들 쫓다가 망하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 결과 그날 약 3,000명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 교회에 합류합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성령님이 한 것이죠. 그럼 우린 뭡니까? 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냥 나는 성령님을 누리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큰일의 수혜자이자 증거자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최초의 교회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럼, 누가 교회를 탄생시킨 것입니까? 성령님이 하셨고, 성령님이 임한 사람들이 동참한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 성령님과 그분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서 ‘전도’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어요. 꼭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멋과 맛을 주변에 흘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복음으로 초청하십시오. 그것이 수혜자에서 증거자로 사는 삶입니다. 혹시 내 주변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 떠오르시는 분께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으로부터 그만큼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구해서, 우리는 주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요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예배하는 것이 소원이야.’ 그리고 한번 예배하러 왔다면 말해줘야죠. ‘너와 함께 예배하고 나니 너무 좋다.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또 그 이후에도 계속 선을 베풀고

사랑하면, 상대방이 보답하고자 반응할 때면, ‘나와 함께 예배하러 가자. 그거면 돼.’ 그리고 함께하면 너무 기뻐해 주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그 변화를 보면서 나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느끼셨을까?’ 생각하면, 내 노력과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 위로받고 채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니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꼭 교회 밖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아직 회심의 결단을 하지 못했고,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이끌어줘야 합니다. 혹시 내 남편과 아내가, 내 형제나 자녀가 그렇다면, 우선 하나님 안에 변화된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먼저 더 사랑해주십시오. 나도 하지 않는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영혼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그분과의 사귐이 깊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그 길을 나도 가야 하는가 머뭇거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먼저 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고 용기 내어 그 길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회에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나와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존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 뜻대로 살아가도 결코 망하지 않으며,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더 행복하게 살고, 더 풍성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늘 우리를 먼저 수혜자로 만들고, 우리를 증거자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바벨탑의 죄악으로 인하여 언어의 분열로 흩어졌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분 안에서 모든

언어를 초월하여 복음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성령은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 안에서 이뤄가십니다. 관계적으로도 우리는 분열합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담을 쌓고, 마음을 닫고, 나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나날이 이기적으로 되고, 또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죄로 인한 모든 것을 뒤엎고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회복은 우리 삶을 살리고, 내 삶을

넘어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너무나 많은 순간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살아갈 때, 우리는 끝내 주와 함께 거하는 그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기뻐 고백할 것입니다. (행 5: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행 5:42)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