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회심의 본" / 강정규 목사

2024-06-02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주 설교를 통해서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삶에는 ‘사탄의 열심’도, ‘성령의 열심’도 상존한다는 것도 나눴습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원수 사탄이 기뻐하는 삶에 가까웠습니까? 저는 우리가 성령과 악한 영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성경이 말하는 악한 영, 사탄은 어떤 존재입니까?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노립니다. 저의 마음도 공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과 마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영적 공격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 어쩌면 더 평온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 편을 굳이 공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 자체가 신앙의 위기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위기는 내 안이 온통 나로 가득 차서, 주님이 거하실 자리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내 안에는 주님의 일하실 공간이 있는가?

내 태도는 주님의 일하심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성경에서 가장 경계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이 곧은 백성’, ‘돌 같이 굳은 마음’입니다. 즉, 목이 곧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못할 교만함이고, 돌 같이 굳은 마음은 하나님이 두드리셔도 변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는지 아십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곁에 있었으나 자기가 이루고 싶은 무엇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가고 싶었으나 ‘연약함’ 때문에 도망쳤다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저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이 오히려 더 순수하고 바뀔 가능성이 많다고 봐요. 유다의 마음은 주님의 뜻도 다 튕겨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굳은 의지로 주님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내 안에 성령님이 일하실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순간에도 여러분이 반드시 하셔야 할 것은 주님이 일하실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안 되면 오늘 이 설교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자칫 종교적 관습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한 사람을 성경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자기 생각’이 가장 가득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똑똑한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함이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부터 로마 군대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기에, 그 공로로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폈듯, 종과 주인이라는 계층이 존재하는 로마제국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이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거든요.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했다면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그는 감옥에서 무죄가 입증되고 석방이 되는 때, 로마의 시민임을 밝힙니다.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 시민권을 썼다면, 시민권으로 무죄 판결을 만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시민권 없이도 무죄임을 입증 받았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죄한 것임이 드러난 것이죠. 그는 후에도 복음을 로마에 전파하기 위해서

상소하는 일에 자신의 권리인 시민권을 사용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이었던 그에게는 로마식 이름이 있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시민권 등록을 해야 하니까요. 그때 사용한 로마식 이름이 ‘파울로스’ 바울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자였지만, 유대인으로서도

가장 전통적인 유대인으로 살았던 그는 유대식 이름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바로 그 유대식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제는 많이 자정작용이 일어났지만, 어떤 분들은 여전히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여기에 은혜로운 이야기를 붙여서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의미로 교만했던 사울이 회심하여 겸손한 바울로 이름을 바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말

그대로 은혜를 끼치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들이죠.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사용되는 것은 그가 이방지역으로 선교를 간 후입니다. 외국에 나갔으니 그곳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래서 사울의 회심은 9장이지만, 그의 이름이 바울로 기록되는 것은 13장입니다. (행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럼, 사도행전에서 그의 첫 등장은 언제일까요? 사울은 7장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언하는 스데반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공격한 열정적인 유대교 수호자들이 있었는데, 사울이 그들 무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서 이렇게 여겼습니다. (행 8:1a)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여겼다는 이야기죠. 사울의 자기 고백을 성경에서 읽어봅시다. (행

22:3)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행 22:4)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울이 살아가던 삶의 첫 번째 방식은 자기가 믿는바, 하나님께

대한 열성 때문에, 사람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충성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저도 ‘한 열정’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디서나 열정적으로 사역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역했던 청년부에서 제 별명을 ‘샘솟는 열정’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쓰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죠. 이런 저와 같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열정’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여러분, 방향이 같아야 ‘동행’입니다. 우리는 늘 내 신앙과 마음의 방향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방향을 점검하지 않고 열정을 다하면 더 빠르게 하나님과 멀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의 습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을 자신의 방향에 대해서 점검합니다.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빌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열심히 따라가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떠오른다면 복입니다. ‘내가 이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모습을 힘써 보여주고 계십니까? 나는 이렇게 하기 싫으나,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생각은 원래 이쪽이나,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 모습이 우리 안에 확장되고 있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 또한 누군가가 보고 따라갈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울의 첫 방향, 첫 행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스데반과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막아섰고 탄압했습니다. 사울이 왜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살인을 하면서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라면, 적대자라고 내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 믿으며, 자기 행동에 대한 합리화가 너무

지나쳐 분간이 안 되는 것이죠.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사울이 진짜로 하나님을 위해 살지는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자기만족으로 했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그가 죽이고자 했던 스데반의 모습은, 자기를 적대하는 자들까지 긍휼하게 품고 기도하는 주님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전면적인 박해가 시행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봤듯이 흩어진 사람들이 사마리아 등으로 나아가서 복음이 전파되었죠. 그것은 성령께서 주도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 쫓아가서 잡아 오려는 열심을 가진 자가 사울이었습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지금 사울은 오로지 기독교인 잡으러 어느 정도를 가려고 하는 것이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은 220~240km 거리입니다. 직선거리로 보면, 이곳에서 전주나 구미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장한 ‘자기 열심’이

이렇게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탄의 열심’에 그가 가스라이팅 당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는 차가 없었으니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걸어서 5~6일 거리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탄의 열심만 있나요? 하나님의 열심, 성령님의 열심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이때 처음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그전에 조금 유한 방법으로 사울의 마음을 두드리고, 돌이키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있는 그때에도, 스데반이

사울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는 그때에도 성령은 사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온통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울의 눈에 하나님이 뵈지 않고,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그의 돌 같은 마음에 틈이 없습니다. 그럼, 이럴 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극단적인 방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가 길에서 환한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과, 성도의 박해에 대하여 예수께서 자신을 박해한 것으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사울이 예수를 박해했나요? 아니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곧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인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 그것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가 오늘도 성찬을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몸을 먹으며 우리 안에 그분이 거하시고, 우리가 언약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먹으며 그분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에 대해서 주님은 자신의 고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면 내가 준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제가 여기서 한 번 더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는 동행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사울이 주님의 빛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들은 이 현상을 같이 경험했을까요?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에 대해 사도행전은 3번(9장, 22장, 26장)을 기록하는데, 세부 내용이 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울과 동행인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도 어떤 빛도 보고 소리도 들었으나, 그 빛과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었던

사람은 사울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빛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지 못했고, 소리는 그저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시력을 잃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다메섹에 도착합니다. 만약 갑자기 이상한 경험을 하고, 시력을 잃고, 3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을 여러분의 이야기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신기한 경험과 함께 진짜 시력을 잃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셨겠습니까?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라고 별수 있나요? 기도했겠죠. 사울 뭐했을까요? 기도했습니다. (행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이 기도는 간절함이죠. 아마도 정말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처하게 되었다면,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3일 동안 사울이 보지 못합니다. 지금 뭘 먹고 마실 겨를도 없습니다. 아마도 사울도 이렇게 기도했겠죠.

‘한 번만 저를 고쳐 주신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한 방법은 아주 쎈 방법이죠. 왜냐하면, 이렇게 안 하면 깨닫지 못하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과정을 거쳐도 막상 나으면 곧 잊어버려요. 분명히 그때는 ‘이렇게만 해주시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마음을 갖는데,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 것 같은데, 우리는 막상 상황이 나아지면 어느새 다시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기 쉽다고요.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보면서 어쩌면 이때 자기가 했던 고백과 결단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죠. (고후 12:8)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고후 12: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회심 이전의 모습은 ‘자기 자랑’, ‘자기 힘’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무엇을 원하실까보다, ‘이것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거야.’ 자기 판단대로 뭔가 엄청난 일을 하며 자기 업적을 삼으려 했습니다. ‘이거

나 아니면 안 돼.’ 여러분.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먼저 말씀 앞에 서게 되죠. 그때마다 말씀을 통해 제가 먼저 참 찔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겠다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면서 몸부림치지만, 그 안에서 저의 욕망, 저의 주관, 저의 원함이 분명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그런 위험성이 있어요.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을 설교자가 얘기하면 속이 시원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신앙의

진정한 실력은 내가 듣기 싫은 주님의 말씀을 마주할 때 드러나는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 주님 말씀해주시면 너무 좋죠. 그런데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반대로 말씀하실 때, 그때가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런 고민 앞에 빠진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말씀을 보시죠. (행 9: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행 9: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행 9: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에게 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이 사울을 알아요. ‘주님, 제가 다른 것은 다 해도, 이것만은….’ 다른 것은 다 하겠죠.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할 테니. 아나니아가 가진 신앙의 민낯은 어쩌면 사울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장 하기 싫은 그것. 아나니아가 어떻게 합니까? 순종합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아나니아는 자신의 뜻과 달랐지만, 주님의 뜻이기에 가서, 주님이 그를 택하셨기에 그를 ‘형제’라고 받아들이고, 그를 회복시키고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대단한 신앙인이죠. 이런 면에서 볼 때, 저는 신앙이

나도 하고 싶고 주님도 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열심히 많이 하고 있는지보다, 나는 하기 싫지만 주님이 원하시기에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유한 개성과 특성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 안에서 정화시켜서 쓰실만한 것만 사용하세요. 사울이라는 사람의 특성, 정말 무모한 열정, 신학적 깊이. 주님은 그것을 녹이고 정화시켜서 주님의 마음과 방향을 맞추신 후, 사용하세요. 많은 사람이 사울의

회심 이야기에서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자기가 새롭게 주인으로 받아들인 예수님에 대해서 곧장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에 대해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그도 회심 이후에 진정한 사역자로 준비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진정한 동역자로 인정받기까지 회심 후부터 3년이 걸렸고, 그가 바나바와 함께 교회를

위해 일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회심 후 14년이 지나서야 그는 이방 선교를 떠납니다. [회심 후 3년 / 참고 _ 갈라디아서 1:18] (행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고향에서

10년 / 참고 _ 갈라디아서 1:21] (행 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보낸 10년이죠. 이 기록 이후 사울은 사도행전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10년이 지나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울에게 이 10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가 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신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울은 원래 학식이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전에는 자기 뜻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것조차도 잘못된 방향에 대한 열심의 기반으로 사용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방향을 바꾸셨고, 그에게 있는 재능을 이제는 주를 위한 방향으로 바꾸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불과 같이 뜨겁던 사울이 10년의 세월 동안 침착하게 다듬어지며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죠. 그리고 처음 기독교 공동체로 돌아올 때도 그를 도왔던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 사역을 나가면서 그를 동역자로 부르게 된 것이죠. 안디옥 교회의 탄생은

이렇습니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졌던 사람은 사마리아뿐 아니라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들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때 베드로에게도 역사하셔서

이방 선교의 문을 열고 계셨죠. 그러니까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헬라어를 쓰는 이방인들도 회심하여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안디옥에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서 개척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복음의 전파로 교회 공동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 목회를 위해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뛰어난 성경교사였습니다.

그도 자신의 모든 것을 공동체에 내어놓았을 만큼 삶에서도 본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안디옥 사역을 하러 갈 때, 사울을 기억하고 다소에 가서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최고의 성경교사 둘이 가서 가르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1년간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돌아오게 되고, 그들 공동체를 일컬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집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교회이지만, 오히려 구제헌금을 모아서 흉년의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후 안디옥 교회의 행보입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의 성도 리더들은 교회의 큰 부흥을 맞이한 이때, 성령의 명령에 따라서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 선교를 위해서 파송합니다. 여러분은 만약 우리교회에 바나바와 사울이 목회를 하고 있고,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데, 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우리의 마음으로는 못할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못하죠. 그래서 신앙은 내 마음 내려놓기의 싸움입니다. 내 힘을 뺄 때, 내가 약해지고, 내가 약해지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 그때가 바로 주님이 나를 가장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는 때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사도 바울.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의 삶에 침입하셨고, 그는 드디어 하나님께 굴복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 위해서 나의 자아, 나의 욕망, 나의 주인 됨이 죽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패배, 나의 죽음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깨어진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으로 우리를 옮기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그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