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 저도 이번에 이렇게 주일에 이제 설교 듣는 입장에서 예, 같이 저는 1부 2부 다 드렸으니까 두 번에 설교를 이렇게 들으면서 아, 설교자서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아, 김영 목사님이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어, 연구하다가 저 말씀의 내용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쁘고 짜릿했을까? 네. 그런 생각을 좀 같이 이제 아내하고 밤에 나눈 적이 있었는데 오늘 제가 먼저 왜 나누겠냐면 사실은 성경은 어느 본문을 보나 거기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하는 것이 다 연결돼 있거든요.
베드로전서의 말씀에서 말했던 것과 사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오늘 제가 어 또 나누고자 하는 1장의 시작에 대한 부분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진실이 그게 크게 다르지 않다. 아, 다만 이 말씀에서 그것을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이것이 진짜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동기를 줄 수 있는 거죠. 오늘 그런 말 마음에서 오늘 요한복음이 어떤 책인지이 시작의 부분을 통해서 한번 여러분들과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복음서가 몇 개죠? 어렵지 않으시죠?네 개입니다. 네. 네.네 개인데요. 네. 네. 이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였는지 네. 네. 사실은 누군가에게이 복음서가네 개인 거는 시험거리예요. 왜냐면 성경을 내가 교회에서 그냥 알려 주는 대로 보았을 때 시험이 안 들어요. 근데 내가 성경을 이제 공부해 보자라고 해서 마태복음을 열심히 읽고 마가복음 읽고 누가복음 읽고 요한복음까지 읽으면 거기 안에서 몇 가지 부분에서 걸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걸림이 생겼다면 난 성경을
잘 본 거예요. 아무리 읽어도 나에게는 질문도 없고 걸림도 없고 어떤 것도 없다 그러면 그냥 넘긴 거고 왜 걸림이 생기냐면 잘 보면은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조금 차이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조금 까칠하게 좀 이렇게 자세하게 정밀 정밀하게 보는 분들은 어 여기하고 여기하고 왜 다르지라고 하는 지점들이 몇 번이나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 성경을 처음 공부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 안에는 왜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과 여기의
내용이 달라요? 이런 내용들을 많이 질문하고 합니다. 그러니까이네 개라는 것이 누구에게 시험거리란 거예요. 근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복음성 네개라는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냐면 우리는네 명의 증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은사님께서 내 편의 복음서를 내 편의 초상화에 비유해서 설명했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초상아는 작가가 인물에 대해서 지켜보고 각자가 더 매료된 부분에 대해서 부각하여 표현하잖아요. 그
내네 개의 초상화를 봤을 때 그 인물에 대해서 헷갈리는게 아니라 사실은 더 그 인물이 아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또 누군가 이게 이런 느낌으로 다가고 저런 느낌으로 다가겠구나 하는 다각적이고 입체적이고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초상아가 하나이거나 증인이 한 명이라면 우리가 그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아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내게의 초상에 볼 때 더 입체적으로 다각적으로 그 인무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 편의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그 분의 사역에 대해서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서 폭넓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통로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네 편의 복음서는 각 저자의 이름을 땄어요. 저자 이름은 그 쉽죠. 모 뭡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어려운 지분 들어갑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12제 누굽니까? 어, 이렇게 진짜 어렵죠? 네. 12 제자 누굴까요? 몇 명이 12 제자까요? 그럼네 명 중에네 명 중에 몇 명이 12 제자예요? 세 명. 세 명. 제가
여러분 시험에 드고 있는 거죠? 네. 두 명이에요. 두 명. 예. 네. 누굽니까? 마태하고 요한이에요. 네. 마태하고 요한만 예수님 제자예요. 네.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에요. 마가는 베드로의 동역자고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의 제자격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 삶을 옆에서 실제로 목격했던 사람은 두 명인 거예요. 나머지는 예수님의 실제로 목격했던 베드로나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고 전했던 바울을 통해서 전달받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성령의 감동 아래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12명 중에 두 명이 여기 들어가 있는 건데 예수님의 제자 12명 가운데 핵심 그룹이 또 있었어요. 예수님이 12명의 사람 다 데고 다닐 때도 있지만 한 세 명 정도 데고 다닐 때가 있었거든. 그때 누구를 데고 다녔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데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예수님이 12 제자이면서 예수님이 가장 많이 데리고 다니었던 그 세 사람
중에도 들어가는 인물이었으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내 편의 복음서 저자 가운데 가장 잘 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반면 이 요한이 이 복음서의 내용을 글로 기록한 것은 내 편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나중입니다. 요한복음이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어요. 아마도 먼저 기록돼서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세 편의 복음서에 잘못된 사실이 있었다면 요한이 바로 잡았을 테지만 세편의 복음서 모두 초기 교회부터 모두가 진리이고 사실로 받아들이며 고백하는 내용들이 되었어요. 오히려
그러니까 요한은 세 편의 복음서가 공감이라 해서 비슷한 관점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을 때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기록해 봐야겠다라고 하고 쓴 것이 요한복음이에요. 제가 최근에이 주유소교에서 풀어내고 있는 방식이 제가 사기회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저도 당연히 그 사이에 성장했고 또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연륜과 임상이 쌓이면서 조금 더 그런 이야기들을 쉽게 풀어낼 수 있게 된 거죠.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때도 그는 이미
노년이었어요. 그 그는 이미 예수님이 승천 이후에 그 뒤에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셔서 교회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충분히 목격하고 본인도 고백하고 그런 공동체가 함께 세워져 있을 때이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앞서 세편의 복음에서보다 훨씬 더 신학적이에요. 신학적으로 이걸 다룰 수 있는 조금 앞에 있는 책들은 어떤 의미 조금 더 역사적인 측면이 많다면 조금 더 영적이고 좀더 신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그 정도의 연륜과 경험을 가진 상태에서 요한이
이 책을 썼어요. 그래서 앞에 있는 세권의 복음서와 요한복음이 분위기가 달라요. 그래서 이 시작이 매우 영적이며 장호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조금 더 우리가 이렇게 인간적으로 역사책같이 위인정 같이 다룰 수 있다면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죠. 한번 우리가 그 앞부분을 그래서 살펴보려고 하는 건데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절의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네. 요한복음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 저는 이 요한복음의
시작이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근데 이 보이 내용이 좀 어느 책의 시작과 좀 닮았죠? 창세기. 그렇죠? 여러분 역시 똑똑하세요. 예, 창세기랑 닮았어요. 창세기는 어떻게 시작하냐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위에 있는 거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네. 그러니까 구약의 창세기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셨고 그분이 창조를 시작하셨다라고 선언하면서이 책을 엽니다. 물론 창세기도 잘 읽어 보면 하나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성,
삼위 일체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구약의 관점에서는 그 공동체 가운데 공동체적 그 존재 가운데 예수님이라고 특정해서 그걸 인식할 수는 없었어요. 그 삼위 하나님의 연합된 존재, 신비한 존재로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제 그 존재가 예수님을 알고 있잖아요. 그 그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근데 태초에 말씀이라고 불리는 한 존재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말하고 있어요.이 말씀이라는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넣으면 바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번 그럼 이렇게 되는 거죠.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쉽잖아요. 근데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은데 예수님이라고 쓰면 오히려 뻔한데이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외에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너무 멋지게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떤 존재냐?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신
하나님 그가 예수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이게 우리는 말씀이란 것이 언어학적 뭔가 이런 우리의 어떤 개념을 설명하려니까 어떻게 말씀이 예수님인지 생각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이 얘기는 너무나 멋진 이야기가 돼요.이 어떻게 되냐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무엇으로 세상을 지으시죠? 말씀으로 지으세요.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짓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세상을 지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럼 곧 누구의 창조 사역이에요? 예수님의 창조
사역이에요. 이것을 고백하는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창조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믿게 될 때 하나님만이 창조가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생각하신 것처럼 예수님 또한 창조자라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 그가 망가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창조를 주시는 분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까지 따라오셨죠? 네. 가끔 우리는 너무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묵상해요. 인간적인 예수님 충분히 매력 있죠. 근데 요한복음은 아주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이 신적 측면을 부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에는 세메 이온이라 부르는 표적 즉 사인이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표적 이것이 예수님의 표적이다. 표적은 예수님의 신성 예수님의 특별함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들이에요. 그것을 봤을 때 그 예수 표적 사건에 보고 사람들이 아 저분이 하나님이구나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야. 이걸 강조하고 있어요.이 이야기를 시작부터 선언한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이 우리가 유대인 입장에서 우리가 죽인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일 거예요. 우리와 같은 시대에 같은 공기를 먹고 살았던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가장 믿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 또 예수님이 하신 일 믿고 우리가 그 일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가장 기출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로 말미암아 죄가
되었으니 주인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나이다. 네. 아까 창세기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어지 말씀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제가 말했잖아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창조자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이 그의 통치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예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 예수님을 우리 시대에 살았던 멋진 분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하면
제가 지난번 당신의 기독교 너무 좁아지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와 예수님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 팔레스타인에서 2,년 전에 죽은 그 청년이 나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경 뭐로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선교 대답은 그가 너를 지었잖아. 그가 너를 지었잖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원래 우리의 존재가 그에게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그에게 속해 있는 존재였는데 그래서 우리가 그와 멀어졌기 때문에 깨어진
관계이고 그래서 회복해 하는 관계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아세요. 원래 우리가 그분께 속해서 만물이 모든 것이 그를 통해서 지어졌기 때문이에요.이 1장 보면 후반부에 나다나엘이 붙죠. 예수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님 뭐라고 하세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가 나무했을 때 내가 너를 보았어. 나 원래 너 알아. 창조에서이 말씀은 또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즉 생명을 만들어내는 통로였죠.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제 이것을 생명과 연관시켜서 나아갑니다.
다음 부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네. 말씀이신 예수님인데 또한 예수님은 그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생명의 주관자 생명의 시작이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창조주이면서 모든 것의 생명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해요.이 이야기는 사람들을 위한 빛으로 지금 주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두움은 굉장히 중요해요. 아시다시피 빛과 어두움은 생명과 죽음을 연상케
하는 성경의 중요한 키워드잖아요. 예수님은 빛이고 또한 뭐예요? 생명이에요.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은 어둠이고 뭐예요? 죽음이에요. 죽음은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 어둠은 빛이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와서 죽이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순간 우리는 어둠이고 죽음이에요. 어둠이 빛이 잃어버린 상태인 것처럼 말입니다. 근데 이 어둠이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너무 간단해요. 빛과 만나면 됩니다. 빛과 연합하면 되는
거예요. 죽음을 생명과 만나면 생명이 이깁니다. 어둠과 빛이 만나면 빛이 이겨요. 요한복음 1장 5절 한번 그렇게이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빛이 어둠의 어둠이 깨지 못하더라. 빛치 예수님께서 이 깨어진 어둠의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존재 들어지만 세상이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이 어두운 건데 빛을 이들이 품고 빛으로 변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돕고 싶으세요. 그래서 이 빛도 왔지만 우리를 위해서 빛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준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내용이 이어지는 내용이에요. 읽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고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자라. 네. 우리가 알죠?이 빛에 대한 증언자가 누구예요? 네. 요한인데이 사람은 세례 요한이에요.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이라는 인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 저자인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보니까 12 지자 가운데 세례 요한은 12 지자가 아니잖아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이죠.이 세례 요한이 먼저 사역했는데 그는 증언자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번 주일에도 우리가 제사장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제사장이 뭐 하는 거냐? 제사장이 여러분 뭐 하는 거예요? 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존재예요. 그렇죠? 그래서 성경은 이 제사장의 사명도 뭐냐면 일단 기본적으로 제상도 증언자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생 알리는 존재인 거죠. 그래서 이 증언자의 사명은 세례 요한만 갖고 있는 아니라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이라 그 구절 있잖아요. 한번 읽어 볼까요? 시작.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대와 사대와 다 이러 내 주님이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회심하면 성령을 함께 동행하죠. 성령을 동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냐면 제사장적
사명이에요. 그 그게 뭐예요? 증언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 하나님이 세상에 하고 계신 일을 알려 주는 거예요. 증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난 하나님을 먼저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선 자지만 그는 그러나 요한복이 말하기를 빛이 아니라 빛의 증언자라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빛이신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그 빛을 만나서 그 빛을 받아들이게 그 빛을 믿게 그렇게 하는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라고 요한복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사명 또한 만약에 우리가 어둠에 사는게 아니라 지금 빛으로 왔다면 우리가 해야 되는 것도 뭐냐면 깨워진 세상과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연결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상에대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증언하는 거죠. 그게 제사장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1장 9절이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또 세상에 와서 악 사람에게 주시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주님과 되었을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 자기 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네. 빛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빛을 주고 주고 싶으신 거예요. 그가. 근데 이 세상에 다시 한번 창조적 개념 가는 거죠.이 모든 세상이 원래 누가 지인 거예요? 빛이신 예수님이 지었다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시작된 자기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자기 땅. 원래 나에게 속했던 잃어버리기 전에 그로 말미암은 그의 세상에 왔지만 지금 어둠의 눈이 가려진이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온 우리의 시작, 우리의 근원, 우리의 왕을 그 땅에 그분으로부터 시작된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분인지 알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알고 우리에게 만약 그가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가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분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어둠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어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늘 일하시는 분이었고 그 일하시면 가장 궁극적인 거. 그래서 예수님도 보내셨지만 사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일하셨잖아요. 우리에게 찾아와 자기의 존재를 계시하신 분이었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서 그렇게 일하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고 회복되었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그렇게
되는 사람마다 이제 어둠에서 부처나 다시 그에게 속한 그분의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말하는게 요한복음 1장 12죠. 유명한 말씀이죠. 이어서 읽겠습니다. 시작. 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가 되는 거를 주셨.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고 왔으나 모른치하고 무시하고 살아가면 거듭날 수 없어요.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 어둠을 살 뿐이에요. 그러나 이분을 알고 보고 나가 내가 직접 그 계시를 봤든 누군가의
통서 도움 받아서 내가 보게 됐든이 존재에 대해서 영접하게 되면 그를 그 믿게 되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근데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잘 정리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우리 주일에도 그런 얘기 나왔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그 두 존재를 이해하게 돕기 위한 거예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과 우리도 언제 부부 신부래
우리가 또 언제 종이래요. 언제 형제래. 언제 또 뭐이 여러 가지 그런게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 아들이 아버지를 낳고 이런 개념은 아니에요.이는 근데 뭘 말하고 싶은 편이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편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에요. 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가끔 이놈 얘기했지만 사자의 새끼는 뭡니까?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뭐예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이
표현을 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쓰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당신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표현인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 보내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 또한 그 같은 존재 안에 껴 주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거예요. 지난 주일교대로 말하면 하나님 예수님이 산 돌인데 우리도 산돌들이 되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부르셨다는 거예요. 죽은 돌과 같은 우리 인생에 오셔서
우리를 산돌로 바꿔서 그분과 같은 재질로 살아가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시대나 지금이나 가장 강력한 연합의 관계는 사람 중에서 부모와 자녀예요. 또한 자녀는 부모에게 종속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부모의 뜻을 계승하고 이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티프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아들 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존재 하나님께 속한 원래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13절을이어서
읽어 볼 텐데 한번이어서 보겠습니다. 어 밑에 있는 건 세 번역이고 위에 있는 건 개혁 계정인데 둘 다 한번 읽어 볼게요. 시작.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자들이라 그들은 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남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네 개혁 계정으로 읽으면 약간 의미가 헷갈려요. 왜냐면 개혁 계정이는 시작하니까 아 어떤 우리 바뀐 우리보다는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처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세 번에 보면 이렇게 바뀐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고 정체성이 변화된 우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거예요. 위에 설명한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거듭났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을 통해서 영접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거예요. 회심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존재로 우리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회심이잖아요. 그 우리는 이제 죽은 돌이 아닌 거고 우리 이제는
어둠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오셨고 우리 다시 그렇게 새로운 창조 그를 믿는 자에게 새 창조를 허락하신다는 거죠.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말씀이 유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더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광이로 그 지기가 충만하라. 다시 말씀의 믿와서 예수님이 누구시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사실 이거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아까는 창세기에 창조 모티브로 갖고 왔다면이 말씀은 어느 말씀을 우리에게 떠올리라고 이렇게 기록했는지 아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신다. 사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성막을 떠올리게 하는 거예요. 출애굽기의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우리에게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죠. 언약을 언약의 결과로 두 가지가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성막이었어요. 율법은 왜 필요했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영접하는 거예요.이 사람이 영접을 하게 되면 네가 이 영접했다는 것이 너에게 진실한 진짜 영접임을 네가 그런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뜻에 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럼 내가 영접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 진실함은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인데 뜻을 알려 줘야지 순종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 뜻을 너희에게 알려 줄게라고 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던 거예요. 구약에서. 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도이 언약 가운데 해 주셔야 될게 뭐냐면 그럼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에 대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돌봐 주십시오. 근데 하나님 너무 원리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그럼 내가 너희와 언약한이 조건을 이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갈게. 근데 내가 있는 나는 초월적인 존재기 때문에 내가 너희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이 땅에 속하기 위해서는 뭐 어떤 매개체가 필요해. 그래서 주신게 뭐예요? 성막인 거예요. 그 성막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가장 가운데 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거예요. 그 임재를 통해서 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경험하고 누리면서 그 성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 만나는 특권을 맛보는 것이 언약 백성의 삶이었던 거예요. 즉 성막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세계에 찾아오기 위한 통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시다피 성막이 나중에 성전이 됩니다. 근데 성막과 성전은 성경에 보면 둘 다 뭐라고 말하면 이건 모델하우스야. 진짜를 이해시켜 주기 위한 진짜를 기대하게 하기 위한 도구야.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것을 통해서 아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누리면서 그 진짜를 기대하게 되는 거예요.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요한복음 뭐냐면 바로 그렇게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그 모델하우스 기능했던 성전과 성막의 시대는
다 같고 이제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 본체 자체가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런 존재로서 나타나셨는데 그게 예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어쩌면 이 예수님 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율법과 성막의 기능이 다 성취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예전에는 하나님 뜻에 뭘 공부해야 돼요? 율법을 공부해야 돼요. 근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신 이유로는 뭘 보고 따르냐면 예수님을 보고 따르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가 말씀을 따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따르고 있으면 하나님 뜻을 따르고 있는 거. 뜻이 이 땅 가운데 온 거예요. 육신을 입고. 그리고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 동행하심을 통해서 그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며 따를 때 동시에 그분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분의 등장에 대한 이 서론에서 마지막 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읽겠습니다. 시작. 원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을 때 아버지 속에 있는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 네. 우리는 초월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래서 기껏해야지 떨기나무, 기껏 해야지 성막 이런 것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함께 계시는 거를 누릴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셨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의 복음, 우리의 생명이 되어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 시대였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시대는 어떻게 하나님을
볼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죠? 성 하나님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교회가 그분의 몸입니다. 진짜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그분의 뜻과 그분의 임재를이 시대 가운데 맛보게 하는 그런 존재로서, 그런 열매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신 거예요. 제가 그래도 늘 교회는 이 땅에 속해 있으나이 땅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서월하신 하나님의 열매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이것을 맛보면서
우리도 이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그렇게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여준 통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먼저 이 교회를 부르신 거죠.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바꿔 가시고 자신에게 속한 존재로 부르시면서 이제 이렇게 부름받은 우리가 그분을 드러내는 말씀의 열매 아 저들을 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 수 있겠다. 움직이고 살아 있는 성전으로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게 제가 묵상한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우리
말씀을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 또 어떤 분이 조금 깊을 수 있지만 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굉장히 강력해요. 어둠에서 빛으로 초대하는 분도 그 주님께 그 주님의 프로포즈 그 주님의 함께 하자는 우리 초청 앞에 자신이 하나 어둠에 있기 때문에 이 상태에 머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하고 빛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진심으로 내어들이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셔서 당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 부르시고 바꾸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 고백을 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비록 아직까지는 발을 딛고 살지만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우리 사경의 때 하늘 소망 그 가사를 까칠란 우리 김영 목사님이 딴지 걸었잖아. 왜 딴지 걸었어는지 혹시 기억하신 분 있어요? 그 소망 하늘 소망가 자체가 지금은 비로 땅을 버텨 할지라도 내고 하늘을 디디면요. 그게 반대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비록 땅을 어서 뒤디며
살지만 우린 땅에 속하여 살아가는 인생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진짜 동행하는 우리는 정체성이 하늘에 있다.이 고백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내가 지옥 지금이 한 주간도 나의 삶 가운데서이 땅에 속한 사람을 사느라 어려움도 있었지만 내 정체성 내 중심이 바뀐 정체성을 갖고 하늘에 속한 존재로서 새로운 정체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가 더 이상이 세상의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고 세상 기준 앞에서 우리가 나를 바라보거나 주변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거기서 우리가 소망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빛으로 오셔서 어둠 가운 사람을 구원할게라고 말씀하시고 빛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빛으로 바꾸셔서 빛으로 살게 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정체성 그분에 두고 나아갈 때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이 그 정체성의 고백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진짜 삶 우리가 고백하는 풍성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 이 한 주간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흔들린 부분들이 있다면 다시 말씀 앞에서 나의 삶과 기준을 정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눈과 내 귀와 입술이이 말씀의 빛 안에서 내 안에 덕지덕 붙어 있는 저 어둠의 거짓된 것들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이거 하지 않으면 안돼 이런 모든 것들을 이 말씀으로서 떨쳐낼 수 있기를이 시간 기도하며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