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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창조의 모판, 에클레시아

2026-02-08 · 요한복음 12장 23~24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올해 ‘신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신앙을 다뤄왔죠.이번 주는 성찬 예배 주간을 맞이하여, ‘공동체적인 신앙’에 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최초의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여러분,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과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만 선교팀이 이번에 ‘홈스테이’를 하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대화하죠? 휴대폰에 통역기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소통이 가능합니다. SNS만 켜도 수백, 수천 명의 친구가 있죠. 이제 국경의 장벽, 언어의 장벽이 기술력이라는 이름 아래 대부분 해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역사상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외로움은 왜 시작되었을지에 대해서 먼저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창조에서부터 우리의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하나 묻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기다림) 흔히 아담과 하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보다 앞선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공동체적인 연합’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우리가 수요기도회 때도 설명했고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부분이죠. 창조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적 협동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신비로운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공동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방식을

창조에 투영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쌍으로 만들고, 복수로 존재하며 연합하여 번성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꼭 당연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꼭 암수가 결합하여 생명을 낳는 방식이 아니어도 되고, 홀로 자녀를 낳으면 더 빨리 번성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의 충만한 기쁨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이 공동체로

존재하시며 어떤 것을 누리고 계셨는가? 성경은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사랑(Love)과 영광(Glory)입니다. (요 17:5)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 17: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영광이란 서로를 존귀하고

빛나게 만들어주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서로를 사랑으로 채워주고, 서로를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서로를 ‘추앙’한 관계였죠. 사랑하고 높여주는 관계. 하나님은 그런 공동체성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2. 첫 공동체의 깨어짐 하나 더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몇째 날 만드셨나요? (기다림) 창세기 1장 27절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것이 6일째 일어난 일입니다. 2장은 1장 이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와의 창조 이야기까지 창조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와를 지으셨을까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셨습니다. 죄로 깨어지지 않은 아담은 다른 부족함은 없었지만, 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죠. 서로 사랑하고 영광스럽게 할 때, 함께함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창조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의 뜻을 확장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의 사랑과 영광스러움을 세상으로 확대하고 확장하라는 명령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죄의 속성이 왜 ‘자기중심성’인지 깨닫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귐 가족들은 <풍삶초>를 통해서 ‘죄’의 본질이 ‘자기중심적 태도’임을 알고 계시죠. 하나님의

공동체성, 인간의 자기중심성.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사랑과 영광의 확장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기 위한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죄는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사랑과 영광스러움을 파괴합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 아담과 하와라는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공동체와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때에는 형제가 형제를 죽입니다. 우리의

창조적 본성은 공동체를 추구하고 공동체로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겨난 죄의 본성은 서로를 아프게 하고 파괴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충만함은 아예 포기하고, 상처라도 받지 않기 위해 계속 도망치고 고립되며 거리를 벌립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이전에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외로움’과 ‘괴로움’의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외로워서 어울리면 그 관계가 괴롭게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빗댄 것이죠. 마치 고슴도치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공동체인 가정조차도 얼마나 많이 아픈 상태입니까? 수많은 가족이 상처의 근원이 되어 있기도 하고,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 채 구멍 난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이가 좋은 가족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사랑과 영광스러움을 확장하기보다는 가족 중심으로만 뭉쳐 있는 상태, 가족 중심의 '갈라파고스'가

되기도 합니다. 갈라파고스라는 표현의 의미를 아시죠? 갈라파고스섬은 오랫동안 외딴섬으로 떨어져 있어서, 그 섬에서 자란 생명체들은 그 섬을 벗어나면 적응을 못 하고 다 죽는다고 합니다. 폐쇄적인 공동체를 표현하는 것이죠. 정리하면, 인간은 본래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도, 가족을 포함한 주변을 사랑하는 것도 잘되지 않아서, 깨어진 관계 안에 방치되어 있거나, 자기중심적이고 깨어진 사랑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금요일에

묵상한 요한복음 3장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한 심판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3. 새 창조의 시작 구약은 이러한 죄의 어두움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계속 일하셨지만, 반복된 죄의 모습이 더욱 짙게 나타나는 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을 읽을수록 사람의 악함은 바뀔 것 같지 않고, 어둠이 가득 찬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은 희미해져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결정적인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고, 바로 그날이 옵니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온 세상은, 신음하면서도 세상을 회복하실 존재를 기다렸습니다.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절의 표현을 주목합시다. ‘Son of God’이 아니라 ‘Sons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만약에 피조세계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하시는 ‘새 창조’는 ‘공동체적 사역’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구원받은 자들의 존재 방식은 늘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그 공동체가 세상을 바꿉니다. 저는 성경의 이 약속을 굳게 믿습니다. 망가지고 깨어진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 이 놀라운 역전.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습니다. 성경의 구약이 ‘첫 창조’의 이야기라면, 신약은 ‘새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망가진 세상을 예수님은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 빚어내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전혀 새로운

삶, 전인격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새 창조를 위해 오신 예수님. 그분의 성육신은 우리 ‘차원’ 밖에 계신 분이 우리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왜일까요? 우리 세계 안에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망가진 피조세계의 것으로는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암세포가 가득 퍼진 몸을 상상해 보십시오. 병든 세포끼리 서로 나쁜 영향을 주며 몸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안에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외부에서 들어온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 세포’입니다. 파급력이 엄청난 좋은 세포 하나가 들어와 가장 가까운 곳부터 생명력을 퍼뜨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 원리가 요한복음 1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요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예수님은 밀알이

되어 죽으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생명을 받아서 변화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새 창조는 공동체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어떤 공동체겠습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 창조의 첫 수혜자이자, 경험자이며, 증언자이고, 복음의 전달자입니다. 4. 제자공동체: 새로운 가족 첫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비전을 누구에게 주셨죠?

아담과 하와라는 ‘가족’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꿈, 그분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새 창조에서는 ‘교회’를 부르십니다. 교회를 새로운 창조의 모판이자 통로로 부르십니다. 왜일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개인도 가족도 세상도 모두 깨어지고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세상이 모두 회복해야 할 영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도구로 하나님은 교회를 준비하시며, 그 시작이 될 ‘이상한 공동체’를 시작하십니다. 구약에서 창조

이후 가족이 나온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12명의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거기에는 기존의 관계가 있던 사람과 없던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형제가 들어오기도 하고 개인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직업도 다양합니다. 비슷한 직군도 있지만, 전혀 상반된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패턴이 없이 무작위로 부르셔서 만드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쉽게 발생하는 구조입니다. 형제들이 섞여 있으면, 그 안에서 편을 먹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세베대의 두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세리 마태와 열심당 시몬은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립했을 것입니다. 거기는 MBTI로 보자면 E와 I가 섞여 있었을 것이고, P와 J가 함께 있으면서 우리가 왜 안 맞는지, 왜 하나 될 수 없는지를, 수없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은 달랐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아 중형 어선

이상을 소유하고 일하던 사람도 있고, 자영업자도 있고, 어쩌면 무직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왜 우리가 지금의 방식으로 소그룹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될 겁니다. 한 집단, 동일한 종류의 사람을 모으면 빨리 공감합니다. 쉽게 동화됩니다. 세상에서 자주 만들어지는 모임의 특징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매우 의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성경을 따라서 공동체를 만들어 갈 때, “이 사람과는 이래서 안 돼요”라는

핑계를 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의 원형 공동체가 이상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다양성만 있다면 공동체는 결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이 안에 분명한 ‘일치’가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거듭남의 개인의 경험들이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거듭나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된 새로운 기준 아래 다같이 모일 때,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도 그냥

모아놓는다고 드라마틱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하면 이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힘이 그 안에 생겨납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의 힘으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그건 목사인 저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사랑하고 추앙하며 기쁨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개개인이 모두 ‘새 창조’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넘어서 주님의 사명도 감당하는 새

창조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ABC, 회심이 시작입니다. 회심 없이 공동체는 없습니다. 공동체가 회심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회심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회심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회심을 위해서나 나의 성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나서는 성장해 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회심 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 알고, 순종할 줄 알고,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과정까지 정말 많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그 훈련의 시간을 거쳐서 변화와 성장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이들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 안에서 이들은 계속 훈련되며 변화되어 갑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지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사용됩니다. 그 시간을 동행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저는 사귐의 교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이 안에 누군가의 회심을 돕고 성장을 돕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계속 세워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나쁜 세포에서 좋은 세포로 바뀐 것이죠. 그런데 그 세포를 혼자 두면 다시 주변의 나쁜 세포의 영향을 받아서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공동체가 꼭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그저 함께 머물며 서로의 약함을 끌어안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 세우기가 예수님께 있어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제가 단적으로 알려드릴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것이 단순히

‘구원 사역’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면 그 일은 1주일도 안 걸립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사실상 온통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수를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수백 명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은 굳이 열두 명만 선택하셔서 그들을 공동체로 묶어 주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제가 공동체가 크면 더 많은 사람이 훈련되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공동체를 단순히 교육받는

모임이나 넓은 교제를 나누는 모임이 아니라, 진짜 영적 가족으로 세워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가족의 사랑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원하셨던 사랑,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주고 책임지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십 명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얕아집니다. 공동체가 커지면 우리는 다시 그 안에서 나와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커지면 사실 얕은 교제를 나누기에

더 쉽고 편합니다. 우리가 다시 에클레시아를 꿈꾸며 소그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소그룹을 안 해도 큰 공동체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겠죠. 자연스럽게 나와 맞는 사람끼리 말입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으면, 어울리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조용히 관계에서 빠질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 때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화목해 보이는 모습은 늘 있겠지만, 삶을 깊이 나누는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이 일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생겨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예수님조차도

열두 명의 사람을 구별하셔서, 서로의 삶을 맞대고 서로를 용납하며,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존재로 지어져 가기를 힘쓰셨습니다. 5. 베드로의 고백: 에클레시아의 시작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알았죠. 때가 되어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냥 동네의 ‘좋고 멋진 형이나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내가 따라다니면 나에게 도움을 줄 존재 정도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죠. 여전히 멀리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충 압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선지자, 혹은 랍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미 몇 번 설명했지만,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당시 로마의 황제에게 붙이던 가장 존귀한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붙인다? 바로 사형당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이죠. 이제 비로소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좋은 세포 옆에 있어도 나쁜 세포 눈치를 보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가, 이제는 정체를 드러낸 순간입니다. “나는 이 진리를 발견했으니, 어떤 불이익이 와도 이것이 진리임을 거부할 수는 없어.” 이런 마음에 닿은 것이죠.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이 이제 다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십니다. 이때까지는 ‘동아리’였고 ‘동호회’였습니다. 이제 회심한 이들은 ‘교회’의 초석이 됩니다. 에클레시아.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모인 새로운 공동체. 의역하면 깨어진 세상에서 구별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삼아 살아가기로 결단한 새로운 공동체. 우리 교회가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금 현존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그 교회’의 모습을 붙들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교회 중에는 망가지고 깨어진 모습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중에는 그런 교회밖에 본 적이 없는 분들도 있어요. 현실교회에 대한 상처가 많죠, 성경의 교회를 말하면 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의 꿈은 그냥 이 시대에 제법 괜찮은 교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그 교회가 성령 안에서 이 시대에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의 첫 번째 수혜자이자 증언자가 되는 공동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시는 일의 첫 번째 대상이자 앞으로 세상을 바꾸어갈 주체. 이것이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참여자 개인의 회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기억하세요. 그것으로 공동체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 차원의 훈련’도 필요합니다. 제자들도 회심의 고백 이후에도 문제가 계속됩니다. 사람을 모아놓으면 항상 경쟁하고, 서로 주도권 다툼하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명이 정말로 사랑하며 살도록 끊임없이

훈련합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훈련이죠. 예수님의 공동체는 거룩하고 특별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렇죠. 교회가 세상에서 더 성숙한 사람들이 심사받고 오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서도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가 다 일어났습니다. 서열 싸움, 자기 사람 챙기기, 편 먹기, 배신과 부인, 질투와 비교와 상처. 우리도 완벽한 사람으로 모이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알기에 모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논리 가운데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에 참여하기 위해, 그 훈련을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부족한 자들이 모여 있지만, 부족함 가운데 머물지 않고 함께 세워져 가기 위해 주님을 의지하며 모이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4년의 소그룹을 해봤잖아요. 대략 교인의 90% 정도는 소그룹을 해보셨으니 아실 것입니다. 좋은 점도 있고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불완전함은 하나님이 해나가시는 새 창조의 핵심 커리큘럼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원래부터 잘 맞고 편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내 기준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가족으로 품어내는 그 사랑의 훈련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며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계적 갈등은 공동체의 실패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랑을 배우고 훈련해 가고 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에반 올마이티>의 장면인데요. “누군가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인내를 주실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가족이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따뜻한 느낌을 주실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실까요?” 저는 그 기회로 초청하셔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본’을 보이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이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이 홀로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혼자 기도를 잘하는 사람, 혼자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 혼자 거룩한 사람. 예수님은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으세요.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신 이야기라는 것을 아십니까?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자면 수십 수백 가지가 있는 우리들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서로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사랑하기 위해 적어도 끝까지 애쓰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 몸을 주셔서 바꿔 가시는 변화된 세포들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들이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산돌들이 되어, 죽은 돌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 지금까지 없었던 하나님의 집을 이뤄가는 것이, 새 창조 사역의 핵심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래서 교회는 이제 세상이 아닌 예수님께 속한 그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일합니다. 허무에 굴복한 공허하고 깨어진 만물 안에 있지만, 그 상태에 함께 동화되어 죽은 세포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이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을 맛보고 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일하심에 우리가 그렇게 함께하며 세상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더

이상 죽은 세포가 아니라 살아있는 세포가 되었음을 믿는다면, 죽은 돌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죽은 돌의 일부가 아니라 산돌로 변화되어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믿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죠. 그래서 복음이죠. 기쁜 소식.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만 충만케 되고 끝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내 삶에 있는 부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생명을 가진 세포가 되었으니, 내 옆에 죽은 세포들을

바꾸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구나. 그것이 얼마나 값지고 존귀한 일인지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입니다. 6. 결론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믿으십니까?” 만약 그 주님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도 고백 된다면, 여러분을 에클레시아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부르십니다. 저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셨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희생으로 한 사람을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세상도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눅 6:32) 누구나 자기와 맞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가족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는 ‘갈라파고스’가 됩니다. 그 사랑으로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품고, 용납하고, 가족으로 맞아들일 복음적 삶을 훈련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사랑한다고만 하면, 세상은 누가 사랑합니까?” 아마 예수님이 들으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네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려 하느냐?” 예수님도

세상을 사랑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중에서 먼저 사랑한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그 사랑을 배운 제자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삶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새 창조를 누리고 경험하며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우리는 새로운 ‘에클레시아’를 구성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죠. 깊은 소그룹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에너지 소모가 크고, 지금 시대의 개인주의와

정반대로 가는 일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기회를 만들 뿐입니다. 참여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결단하고 들어오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쓸모없던 죽은 돌인 우리가 서로에게 부딪혀 살아있는 돌이 되고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는 위대한 새 창조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할 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할 때, 이 공동체를 진짜 가족처럼 품을 때,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의 새 창조, 그 영광스러운 공동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