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늘 방송에 대한 좀 문제가 있어서 오늘 어 설교 부분에 다시 지금 어 녹화해서 한시 어 현장에서 했던 설교가 아님을 어 그런 내용은 똑같은 것임을 양해하고 함께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존재에 관한 장엄한 선포로 시작했었죠. 아, 그분이 어떤 분으로 오셨지를 요한복음 1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음을 지난 우리 수요 예배 때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를 부르시고 그 뒤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이나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사건 등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니고데모를 만나는 장면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 마지막에는 잠깐 세례 요한에게 나오는데요. 이때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즉 그 요한복음 1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이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화된 것에 대해서 그냥 말을 많이 하잖아요. 어 당연히 육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합니다. 그와 동일시 되는 거죠. 근데 그분에게는 또한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라. 즉 성삼위 하나님 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이 삼위 일치적 사역 말씀이 실제가 돼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말씀이 현실되는 그 놀라운 일이 있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하는게 뭐냐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 어찌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즉 요한복 계속 보여 주는
것은 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 안에 있는 생명 없은 즉 깨어진 세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빛을 잃어버린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죠. 어둠은 빛이 잃어버린 거잖아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다시 빛에 속하게 되는 거예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여기 보처럼 영생이 있는 거예요. 근데 그를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진노 가운데 있다. 즉 니고데모와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에 받고 있는 것이다. 말한 것처럼 진노 가운데 있고 심판 가운데 있다고 우리의 삶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심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심판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흔히 그 죽음 이후에 가서 천과 지옥 즉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도 틀리지 않아요. 그러나 현재적인 부분에서의 구원과 현재 부분의 심판도
있습니다. 요한복이 말하는 영생의 의미 자체를 보면 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나라는 표현을 잘 안 써요.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되찾는 표현으로 영생을 쓰는데 여기서 말하 영생이 뭐냐? 영원한 생명이 아니에요. 한번 보시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즉 영생이 뭐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어 우리가 사귀는 것. 그분과 동행하는 것 이것이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지금 영생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에게 이미 영생이 시작됐다. 이게 요한복음의 포인트라는 거예요. 누군가는 같은 생 살면서 영생을 살고 있어요. 그 누군가는 그 삶을 모르고 깨어진 채 살고 있어요. 영생은 단순히 미래에 가서 죽지 않고 현상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 믿는 자에게 시작된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된 삶을
생명을 누린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깨어진 삶에게 영생이 필요한 건데 그 생명의 삶이 필요한 사람을 성경은 4장에서이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시다시피 굳이 유대 사람이 잘 가지 않는 사마리아 가겠다고 하십니다. 우린 그 이유 알죠. 예수님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는 분도 있겠지만 그것도 한번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이 이야기는 구약의 분열한 곳 시대 올라가야 돼요.
원래 이스라엘 12 지판은 가족이었죠. 형제였잖아요. 그러니까 12 지판 넓은 의미의 큰 가족 관계였습니다. 근데 이게 둘로 나눠지죠. 근데 그중에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 중에 열지파가 속해 있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남유다보다 훨씬 빨리 망하게 됩니다. 거기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다 멸망하게 된 거예요. 앗수르는 자신들이 정복한 땅을 북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나라들이 많았는데 그 민족들이 힘을 다시 모아서 반항하지 않도록 정폭한 땅의 민족들을 서로 섞어
버렸어요. 강제 이주시킨 거예요. 그래서 혼혈 민족을 만든 겁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졌고 다른 민족들도 북 이스라엘으로 이사온 거예요. 그 결과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 부르게 되는데 그 북 이스라엘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토창민들과 새로 온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섞여 살면서 결혼하게 되고 후손이 태어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혼혈된 민족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도 섞였지만
당연히 문화가 섞였고 종교적인 혼합도 가져오게 됐던 거죠. 남유다도 망했어요. 남유다는 후에 바벨론 땅에 포로 끌려갔지만 다시 그들이 돌아와서 귀 안에서 살게 됐기 때문에 혈통적으로만 보자면 그 혈통의 순수성은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돌아온 남자 출신들 즉 유대인들은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은 혼혈인이야. 저들은 불순하게 신앙이 섞여 있는 거야라고 그렇게 했단 말이에요. 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은 그 땅에서 계속해서 비록 어떤 역사의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후손으로 자신들만의 신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거예요. 오히려 그들은 유대인들이야 말로 70년 동안 저 딴 뭐나먼 곳에 갔다가 거기서 와서 갑자기 또 자기들이 전통이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 좀 우수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기회가 있었어요.이 돌아온 귀암 유대인들이 성전을 있잖아요. 스럽의 성전에. 그때 사마리아인들이 같이 성전을 짓겠다고 참여하고 싶어했는데 유대인들이 거절합니다. 이게 이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거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의 성전을 짓는 거예요. 이건 유대인들 우리가 전통이야. 대신 65년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쪽의 그리심산에 자신대 성전을 세웁니다. 그리고 거기가 사실 진짜 하나님 선택하 장소라는 그들의 신한적 정통성을 가져가게 되는 거예요. 물론 거기에 짓게 된 거는 그들도 구약에서 그들의 나름대로 이유로 그 땅이 하나님이 선착했던 장소다. 이렇게 보게 된 거죠. 그러니까 과거에 원래 형제의 관계였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이제 서로를
가죽이 아니라 남보다도 못한 엿집의 이웃으로 더 대립하고 있는 서로가 자신이 진짜로 말하고 상대방 가짜라고 말하는 이단시아는 적대 관계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요한복 4장에서 야곱의 우물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서 야곱의 우물에 앉아 계시는데 그때 여인이 물을 길들어 오잖아요. 그렇게 만나게 되는 건데이 여인이 물을 러왔던이 시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어요. 보다 전통적 해석은이 시간이 한낮 정호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낮은이 더운이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우물가의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시간대입니다. 그때 이 여인이 아무도 없겠지라고 하고 왔는데 예수님이 거기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죠. 근데 이 여자가 예수님을 보면서 아이 사람은 유대인이구나 알았단 말이에요. 여자가 의하면 못 씁니다.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 여인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서로 상종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반응하는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해요. 한번 말씀한 보겠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 좋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이없는 얘기예요. 아니 사기가 우물가에 물 길러 갔는데 어떤 남자가 됐든 플로팅도 아니고 물은 자기가 달라고 해놓고 야 네가 내가 누군지 알아봤더라면 도리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네가 청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아이 남자 이상하네라고 여기면서 이렇게 거리를 두고 PS법 한데이 어는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성격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말하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아, 생수 주겠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이 여인이이 우물의 위대함을 이야기해요. 아, 선생님이 우물이 어떤 우물인지 아세요?이 우물은 그 유명한 야곱의 우물입니다. 우수상인 선생님이
지금 내가 이 우물을 기록왔는데 생수 주겠다고 하니까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란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또 말을 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는 샘물이 되리라. 야 야곱의 우물 먹으면 계속 목마르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이야. 이상한 이야기잖아요.이 이한 이야기를 또이 여인이 받아줍니다.
제가 봤을 때는 이 여인도 그렇게 뭐 철학적이고 깊이 뭐 생각하는 사이던 거 같아요. 그냥 이렇게 받아요. 그 여자가 말했다. 선생님 그럼 금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 주세요. 어쩌면 그냥 이상한 남자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그냥 대충 받아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 그럼 그분 한번 나 좀 줘 봐요. 근데 그이 이야기가 이 다음에 좀 특이한 방향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화제를 전환해서 가서네 남편을 불러오노라. 여인이
말하죠. 나에게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해요.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내 남편이 아니니 네가 지금 바르게 말하였다. 여러분 그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이 나다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미 이 여인을 알고 계셨어요. 예수님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어요. 실제로 지금 그녀에게는 남편이라고 할 수 있던 사람이 다섯이 갔고 여섯 번째까지 여섯이나 있습니다.이
여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남편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어요.이 여인은 남자를 성적으로 탐하는 여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계속해서 나쁜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아온 연악한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후자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당시 유대 정서에서는 세 번 이상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지금 다섯 번을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자가 살고 있으니까 대단한 어쩌면 굉장히 유명한 여인이었을 수 있어요. 이것은 이 여인이 어쩌면 엄청난 상처와
배신 속에 계속 살아가고 있는데 또 상처받은 것을 알면서도 그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일종의 관계 중독에 빠져 있는 상태란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가끔 영화에 보면 뭔가 이렇게 어떤 남자에게 굉장히 학대당하고 관계에서도 배신당하고 엄청나게 상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헤어오셨는데 또 비슷한 불에 못된 남자 만나서 또 상처받고 또 확대받고 살고 있는 막 이런 모습이 그릴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것처럼 아마도 이 여인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마음이 톡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상처 투성이 주님은 지금 그 여인의 그 상태를 목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여섯 남자로도 채우지 않는 그 인생의 목말음 그 텅빈 공허함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 목마음을 향해서 내가 생수가 되어 줄게라고 하면서 그녀이 찾아가신 것입니다.이 여인과 열심의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그래서 그 많은 이야기 끝에이 여인이 이런 고백을 하게 돼요.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는 사람을 와서 보라.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람들에게
아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이미 알고 있는 놀라운 사람을 제가 만났어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우리가 기다린 그 메시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이 여인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전하니까이 놀라운 전도를 인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또 복음이 되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냐면 이렇게 끝나요. 그 동네에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치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하므로 예수께서는 이틀 동안 거기에 머무르셨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요. 우리가 그 말씀에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조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뭐 좋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무한 마음을 갖고 예수님이 나온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이 만남이 계기가 돼서 그들도 예수를 구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이 4장의 이야기예요. 근데 우리가 조금만 더 우리가 한 거 물러놔서 요한복음 좀 크게 보면 요한복 3장부터 보면 예수님이 두 사람을 만난 거거든요. 니고데모와이 사마리아 요에요. 우리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요는 동시대에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성경에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정받는 어떤 삶의 정점에서 살고 있던
가장 고상한요 남자. 한 사람은 가장 손가락집 받는 삶의 끝자락게 살고 있는 사연많은 사마리아 여자. 그래서 성경이 보여주는 건 무엇입니까? 그 두 사람의 인생이 다 목마음이 가득했다는 거예요. 니고데모는 그 목마음을 종교와 어쩌면 수준 높은 삶을 통해서 채워 가려고 했어요. 대체하려고 했어요. 뭔가 종교를 더 잘 알아가면 뭔가 내가 남들이 다 하지 못하는 그런 경건한 삶을 살면 채워진 거야. 근데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 찾아온 거잖아요. 사마리아인은 어쩌면
요즘 편을 말하면 도파민이 터지는 삶. 남자를 계속 바꿔 가면서 뭔가 그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아 나 살아 있어. 그렇게 그 인생의 공허함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워지지 않는 상태로 어쩌면 삶을 포기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상황에 있었습니다. 또이 두 사람은 한 명은 사람들이 주목할까 봐 밤에 몰래 찾아오죠. 한 명은 사람들을 마주할까 봐 낮에 몰래까 옵니다. 어쩌면 정 반대에 있는 타나 또 한편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 이 두 사람이
모두 예수님이란 분을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초청받게 된 이야기를 성경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인 어쩌면 그 사이 어디인가에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일 수 있어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도 주님이 없다면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목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 안에서 별반 다르지 않게 치열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하며 나의 몸을 채워보려고 살아가는 그 헛된 발걸음을 지속하고 있는지 몰라요. 누군가는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인에게 있었던 여섯 남편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에게도 성공, 명예, 돈, 인정 혹은 여러 취미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어도 모릅니다.데 성경에 말한 거 뭐냐면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다는 거예요. 다른 거 채워지 않는다. 그게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든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이든 둘 다 주님만이 그들에게 영원한 생수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주님께 나아가야지만 우리 목마음이 진정으로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그 사안의 여인의 동네 사람들 기억하시죠? 호귀심으로 와도 좋습니다. 혹은 진짜야? 그 가능해? 반발이심으로 와도 좋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찾아 나선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다 불어들 수 있어요. 주님이 만나고 그분을 진짜로 믿게 될 때 우리의 삶에 드디어이 어둠의 빛이 들어오고 목마음을 영원히 칠 수 있는 생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니고데모처럼 적극적으로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또 내가 그럴 수
없을 때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오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늘 그 사람을 찾아오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찾아오고 계실 거예요. 오늘 그 주님에 마주하는 그런 밤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하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