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죄의 재해석

2026-02-15 · 요한복음 8장 2~12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주는 성찬을 맞이하여 공동체 설교를 했지요. 오늘은 다시 신앙의 기초를 세워가는 설교를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에 관해서 먼저 나눴던 4편의 설교가 있습니다. 먼저 ‘신앙의 ABC’라는 제목으로 ‘회심’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신앙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Connect’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활용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관계라는 것이죠.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제로 연결되는 것, 그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나눴습니다. 세 번째 ‘하잘알’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구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은 단지 나중에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니느웨만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요나’도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설교였던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작다’라는 설교는 사실 쉬운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이전 3편의 설교가 풍삶초 수준의 설교였다면, 이 설교는 조금 종합적인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여러 개념이 등장해서, 한 번에 소화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인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내 문제 해결자 정도로 축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주적 회복을 위한 사건인데,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위로 정도로 줄여버립니다. 내 신앙의 틀이 너무 작아서 크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 4편이 설교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내가 중심이 되어, 구원을 축소하고, 하나님을 작게 만들곤 합니다. 도대체 우리 안에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 진리를 밀어내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상태를 한 단어로 부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를 우리는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에서 가장 오해가 심각한 개념 중

하나가 ‘죄’입니다. 우리교회는 조금은 그 오해들을 떠났겠지만, <풍성한 삶> 양육에서 배운 개념에 너무 갇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늘은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죄’를 다루는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전하는 자도 불편합니다. 한국교회의 설교가 너무 위로와 축복에 집중되어 있다는 자성적 목소리가 나온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이와 연관되어 가장 많이 나오는

진단이 청중들이 불편해하는 ‘죄’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대신 청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위로와 축복’을 다룬다는 진단입니다. 그런데 현장은 여전히 쉽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저희교회에 가끔 목회자가 탐방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한 목사님이 안식월을 맞아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날 설교가 ‘팬인가, 제자인가’였습니다. 요지는 우리가 예수님의 팬클럽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제자로 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예배 후 방문하신 목사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은 담대하시네요. 저는 저희교회에서 오늘 같은 설교를 못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목사님이 우리를 정죄하는 설교를 한다고 반발이 엄청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종종 들으면,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원론적인 설교에 빠져서, 매주 ‘죄’와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설교로 시작해도

다 ‘죄와 십자가’에서 끝이 납니다. 이럴 경우, 설교자는 스스로 ‘나는 복음과 본질만 이야기한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정작 ‘죄’와 ‘십자가’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현대의 언어로 풀어주지 않으면, 삶에 연결되지 않은 공허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설교자로서 초기에 저에게도 종종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부자 되세요”라는 이야기가 교회 안에서도 축복의 언어로 통용되었던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한국교회를

경험하며 자랐습니다. 그 안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질을 이야기하는 설교를 하자는 마음은 늘 있었는데, 어쩌면 20대에는 붕 떠 있는 종교적 언어를 남발하는 설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당시 저에게도 ‘죄’는 그냥 ‘죄’였습니다. “죄가 뭐야?”, “죄가 죄지, 뭐야.” 누군가 “내가 왜 죄인이야?” 이러면, “그냥 성경을 보면 너는 원래 죄인이야.” “원죄”, “원래 다 죄인.” 지금 돌아보면,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은 이야기를 제가 마음껏 하고 있었던 이유가 뭐였을까요? 저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과거 교회의 교육방식은 대체로 ‘주입식 교육’이었습니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죠. 그냥 “이것은 A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부터는 그거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저게 꼭 A 같지 않은데….”라는 발칙한 생각을 품으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상황이 제가 경험한 한국교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주입식 가르침에도 수긍이 되는

사람은 교회를 계속 다니겠지만, 마음이 어려운 사람은 결국 언젠가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한국교회가 많은 사람을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마음 속 질문이 해소되지 않지만, 다른 더 큰 이유로 교회에 남아서 다닙니다. 그런데 마음 안에서는 부딪힐 때가 있죠. 이해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 부딪힘이 괴로워서 어떤 이들은 교회에 들어올 때는 ‘뇌’의 스위치를 끄고 옵니다. “교회는 원래 이런 곳이야.” 그냥 교회에서는 마음에서 동의가

안 되어도 ‘아멘’하지만, 그 ‘아멘’이 진짜 '아멘'이 아닌 것이죠. 사실 ‘No-men’이죠. 교회에서는 ‘교회 모드’로 전환해서 있는 것이고, 교회 밖을 나서자마자 진짜 자신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죠. 그리고 세상에서는 ‘세상 모드’로 살아갑니다. 나중에는 이게 하도 습관이 돼서, 교회 주차장만 오면 바로 전자동으로 바뀝니다. 교회모드로. 예배 후 차에 타면 다시 딱 바뀌고. 환경에 맞게 진화한 새로운 인간이죠. 당연히 그런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평생 있더라도 신앙을 내 삶의 진짜 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오래 다니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그 내면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잘 관찰해봐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관습과 습관이 지속되다보니,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만 들어 오면 그냥 조건반사적으로 “저는 죄인입니다.” 하면서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 왜 죄인입니까?”라고 하면, “그냥 죄인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교회 밖을

나서자마자 진짜 자신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죠. 혹은 죄인인 이유를 찾습니다. 한 주간 내가 거짓말 한 번도 안 하고, 일터에서 불성실한 모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내가 완벽한 의인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마지못해 죄인이라고 이유를 찾아서 수긍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면 평생 죄인이죠. 내 모습이 완벽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청소년부 예배에서도, 회개하라고 하면 아이들이 말하는 내용이, “거짓말했어요.”, “수업 시간에 딴짓했어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를 이런 ‘행동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요. 교회는 올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기준 미달인지 깨닫게 하는 곳이 됩니다. 가뜩이나 세상에서도 다양한 기준들로 우리를 평가하면서, 우리가 그 기준에 미달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에서도 올 때마다 나를 기준 미달의 ‘죄인’이라고 취급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교회는 매주 나의 자존감을 깎는 곳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원하신다고 생각하세요?

성경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가 그것일까요? 이런 오해가 만연하다보니, 그 안에서 잉태한 또 다른 흐름이 있습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꼬집는 것인데, 교회의 설교 안에서 ‘죄’는 사라지고, 대신 ‘상처’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말해요. 내가 지금 이런 어려운 마음, 혹은 비뚤어진 마음을 갖게 된 원인으로 ‘상처’를 말하는 것입니다. 상처에는 나의 책임이 없습니다. 상처를

잘 다루는 것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죄와 상처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죄로 설명해야 할 부분을 상처로 설명하면, 모든 부분에서 이해받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죠. 그런데, 이것은 말 그대로 그냥 좋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를 그 죄와 상처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꾸 이렇게 피해 가는 것은 사실 ‘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학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건강한 신앙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궁금하시죠. 아니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행위’가 아닌 ‘상태’에 초점이 있습니다. 죄는 ‘무엇을 잘못했는가(Doing)’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의 것인가(Being)’의 문제입니다. ‘죄’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 안에 이미 선입견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이 ‘죄’를 말하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정죄한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 성경이 죄를 말하는 것은 사실 반대 이유입니다. 죄를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깎고 작아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구원에 속한 관계를 ‘커넥트’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하시죠. 그 개념에서 보면, 죄는 ‘언커넥트’, 즉 ‘단절’된 상태를 진단하는 언어입니다. 단절에 빠진 상태. 그것이 ‘죄’입니다.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자주 사용하는 의사와 환자 이야기로 다시

가봅시다. 의사가 내 상태를 진단합니다. “지금 뇌혈관이 많이 좁아져 있어서 이 상태로 두면 위험합니다.” 이렇게 진단했어요. 이런 의사한테 “나를 왜 정죄하냐?”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정상이겠어요? “선생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성경이 죄를 말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나의 상태를 깨닫게 하고, 더 좋은 삶의 방향을 알게 해주기 위한 방식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가진 어원이 무엇이냐면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예전에 ‘강철부대’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거기에 팀별로 사격 대결이 잘 나옵니다. 그러면 원거리의 경우 한 명이 총을 잡고 쏘는 역할을 하고, 한 명이 옆에서 실탄이 명중을 못했을 경우 어느 쪽으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관측하여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상탄!” 그러면 과녁에서 지금 오른쪽 위로 빗나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정해서 명중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진단과 정죄를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죄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사탄이 하는 것입니다. 왜요? 사탄은 죄에 그대로 묶여있는 것을 가장 원하거든요. ‘진단’의 목적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정죄’의 목적은 죄의 상태에 묶어두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반드시 다룹니다. 왜냐하면 죄의 상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그 삶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유명해졌기에 예수님이 가면, 어디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모여든 이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갑자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뒤로 한 여인이 보입니다. 이 무리들은 자기들이 끌고 온 그 여인을 사람들 앞에 세워둡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이어서 한번 성경 말씀을 통해 읽어보겠습니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요 8:6a)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미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일로 예수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는 것을 반대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로마법을 어기는 사람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로마의 법을 무시하는 선동가로 몰아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이미 관심 밖입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그냥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들이 누구라고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 하나님에 대해서 매일 말하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죄는 단순히 옳고 그른 행동을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 정의를 말하면서 자기 의를 세우는 상태.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죠? 말씀을 읽어봅시다. (요 8:6b)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요 8:7)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 8:8)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무엇을 쓰셨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 순간 ‘정죄하던 손’이 내려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율법에 따르자면,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숨겨져 있던 각 사람의 은밀한 죄를 쓰셨을 수도 있고, 혹은 이 여인과 몰래 관계를 맺고 있던 남자들의 이름을 쓰셨을 수도 있습니다. 간음했다면 상대방도 있어야 하는데, 이 여인만 지금 대중의

심판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잖아요. 어쨌든 예수님의 이 행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요 8: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이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제가 성경이 말하는 죄의 초점이 뭐라고 했죠? ‘존재적 상태’입니다. 행동은 각자의 존재적 상태에 따라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존재를 바꾸지 않고 행동만 바꾸려고 하는 것은 잘해야 행동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처벌로 행동을 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존재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상황이 오면, 얼마든지 다시 자기 본성대로 행동을 합니다. 억제는 나중에 폭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우선 보호하시죠. 이 여인의 존재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여인의 행위나, 이 여인의 상태를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정죄하였던 바리새인처럼 하지는 않으세요. 그러나 예수님도 그 여인에게 ‘변화’를 촉구합니다. ‘다시는’이라는 표현은 강력한 변화의 촉구입니다. ‘법과 규칙’ 같은 억제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는 반드시 일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일탈을 일정 부분 막아줄 수 있는

가이드를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존재가 변화되는 힘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제 잘 변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변화를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호하시는 실제적 행함을 보이신 후, 이 여인을 향한 진실한 권면으로 이 여인의 변화를 응원합니다. 이 에피소드에 이어지는 말씀까지 연결해서 봐야합니다. (요 8:1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존재의 상태에 관한 말씀이죠. ‘빛’이 예수님의 존재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제는 어둠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생명과 빛의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죄가 언커넥트, 단절입니다. 빛이 단절되면 어둠이죠. 생명이 단절되면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단절된 상태가 세상에 속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가 될 때, 그 존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빛은 그냥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금은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죄’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도록 지음 받은 우리가, 그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진단의 언어입니다. “너는 그렇게 살 수 없어.” 이것이 정죄입니다.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어. 그것을 위해 내가 왔어.” 이것이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가 “그 상태에 있어도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할 수 없죠.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위로의 말일 수 있어요. 그런데 속지 마세요. 죄의 상태에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어둠에 사람들을 묶어 두려는 사탄의 전략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결코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를 옹호하지 않아요. 성경은 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죄의 상태, 그 단절된 상태가 우리의 원래 자리가 아니니까요. 성경은 우리의 원래

모습, 우리가 갈 수 있는 실제적 변화의 모습이 빛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셨으니까요. 그것을 바꿔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나의 엇갈린 중심에 대한 것입니다. 어둠에 속한 못난 행동이 나오는 이유는 나의 존재적 상태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동 하나를 용서받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의 본질이 아닙니다. 존재를 바꾸지 않으면 행동은 계속 반복됩니다. 우리의 존재를 바꾸고, 흔들린 정체성 다시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 있어도 괜찮아.” “상처니까, 어쩔 수 없어.” 이 따스해 보이는 언어를 여러분은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거짓된 평안의 언어일 수 있습니다. “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부르시는

분, 그를 위해서 실제로 모든 것을 하신 그 하나님의 마음과 음성을 붙드셔야 합니다. 혹시 이곳 가운데도 교회에 올 때면 ‘교회 모드’로 전환하고 ‘뇌의 스위치’를 껐다가, 다시 세상에 나가면 ‘세상 모드’로 전환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참된 신앙은 예배를 통해 받은 진리의 불을 꺼지지 않게 잘 간직하고 삶으로 장작을 때어 횃불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 행동에 대해 일희일비하기 이전에, 그 행동을 하는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내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 신앙의 스위치를 날마다 켜고 잘 지켜내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를 정리하며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이번 주에 무엇을 잘못했는가?”라는 자책의 질문이 아니라, “나는 지금 빛이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생명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배가 우리의 진단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진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짜 위로가 뭔지 아세요? 내가 너무 한 주간이

힘들었고 속상한 일도 많았는데... 다시 예배하며 다시 말씀을 들으며 그것이 내가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하다가, 주님 편으로 살려고 애쓰다가 당한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 때, 나에게 오는 위로입니다.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내가 지금 가는 방향이 맞구나. 그래서 그런 거구나.” 이것이 진짜 위로입니다. 때때로 예배와 말씀 앞에서 나의 단절된 모습을 직면하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내 혈관이 좁아져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단이 우리를 수술대로 인도하고, 결국 우리를 살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정죄하여 그 자리에 묶어두려 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며, 여러분의 손을 잡고 빛의 자리로 이끌길 원하십니다. 이번 한 주, 세상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뇌의 스위치를 끄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나는 빛의 자녀다”라는 그 존재의 감각을 깨우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세워갈 때, 우리 삶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신학 위에 세워진 건강한 신앙의 힘입니다. 미얀마 단기선교팀 파송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