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입다, 삼손 그리고 소사사들" / 강정규 목사

2021-12-05 · 사사기 10-1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사사기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도전하기로 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 안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들을 조금은 친숙하게 익히기 위해 사사 이름 외우기를 연습해보겠습니다. 옷니엘 – 에훗 – 삼갈 – 드보라 – 기드온 – 돌라 – 야일 - 입다 – 입산 – 엘론 – 압돈 – 삼손 첫 시간에는 사사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두 번째 시간에는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기드온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기드온 이야기의 부록으로 9장에는 ‘아비멜렉’의 이야기도 있죠. 그 이후로는 ‘소사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라는 2절, 야일은 3절에 불과합니다. (삿 10: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삿 10: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사기 내에 작은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특히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잇사갈 지파인데, 그의 기업을 버리고 에브라임으로 이주했기 때문입니다. (삿 10: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삿

10: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삿 10: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야일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아들이 30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야일이 기드온의 부정적 모습처럼 여러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부와 권세와 지위를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지도자들까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짧게나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기드온 이후 “평온하였더라”라는 표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기점으로 영적 타락이 더욱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타락은 ‘입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이야기는 좋은 출발(10:17-28)과 나쁜 결말(11:29-40)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삿 10: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그들 마음에 두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에게 있어 우상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무엇일까 고민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4P를 나눴던 적이 있죠.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네 가지 추구를 정리한 것입니다. Pleasure(쾌락-즐거움), Prestige(명예-인정), Power(힘-자율성),

Property(재산-물질). 세상은 우리에게 이것이 있으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TV를 틀면 나오는 광고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것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에서 그 오징어 게임을 주최하게 된 사람들은 이것을 극도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삶에는 만족이 없었죠.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정부분 이것들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은 언제나 우리가 이것을 적당히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삶의 행복을 찾도록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마음을 빼앗는 일입니다. 결코 이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함께 추구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 시대의 사사기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문화들이 신선하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들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혹시 이

설교를 듣는 분들 가운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가 좁아졌음을 느끼시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결단하시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여러분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서 유일한 회개의 모습이 기록되는 것이 바로 ‘입다’ 이야기입니다. (삿 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삿 10:13)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여 주지 않을 것이니, (삿 10:14)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가서 부르짖어라. 너희가 괴로울 때에 그들에게 가서 구원하여 달라고 해라. 구원해주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입술로는 회개하고 있으나, 여전히 우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회개는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세 치의 혀에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할게요”라고 하는 말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원하고 기다리십니다. (삿 10:15)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다 하십시오.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 (삿 10:16)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을 섬기니,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으셨다. 16절이 중요하죠.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이제 드디어 이들의 입술의 고백과 이들의 태도가 일치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으셨다고 하죠. 주님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돌이킴을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그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는 바로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어쩌면 자존심 없이 늘 이스라엘의 요청 앞에 구원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왜 나는 안될까? 왜 나는 주님이 함께하시지 않을까?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 마십시오. 큰 움직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조금의 열심을 갖고 삶을 바꿔보십시오. TV나 유튜브를 볼 시간을 줄여서, 말씀을

더 열심히 듣고, 이해가 안 되면 다시 듣고... 가요를 보고 즐거워하던 시간을 조금 줄여서 찬양을 들으며 주님의 마음을 묵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시간에 대해 그 전보다 더 집중하고, 더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변화를 위한 결단을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일 하심이 경험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입다’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이 사람은 기생의 아들이었으므로, 그것은 그의 삶을 매우 괴롭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입다의 출생을 빌미로 삼아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할 권리를 뺏고 쫓아냅니다. 그는 가정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그는 ‘돕’이라는 지역에 도망하듯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는데, 그 이방 땅에서 그는 건달패들의 대장이 되게 됩니다. 성경은 그에게도 ‘큰 용사’라는 소개를 붙여주는데, 직역하면 ‘힘의 용사’라는 의미이므로, 그가 다른 이들보다 물리적 힘이 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입다는 후에 길르앗의 장관이며 머리가 되는데, 그의 입은

계속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속으면 안 됩니다. 앞서 회개에 있어서도 ‘말’에 속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무조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고백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해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핑계하며 그 뒤에 숨는 이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입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입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다면, 그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인도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만을 사용할 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입다의 서원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다가 사사가 되어 ‘암몬’이라는 적군과 싸우게 될 때의 일입니다. 그는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합니다. (삿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삿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참 성경이 미묘한데요. 만약 이 구절 이후에 이 말씀이 있었다면 해석이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절 앞 절인 29절에 이미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삿 11: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입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입다가 전쟁에 승리하게 된 원인은 그가 ‘서원 기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적군의 손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었고, 그래서 이 못난 입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입다는 패배할 수 없습니다. 승리를 이미 주님이 가져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그냥

나가지 않고, 이상한 서원을 합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이것 이것을 하면 이렇게 저렇게 해주십시오”라는 이 기도가 옳을까요? 그것은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주인에게 그렇게 제안할 수는 없죠. 오히려 반대의 경우는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셨듯이 하나님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아브라함이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살리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었고 하나님이 그 삶을 지키고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의 태도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도 아니었고, 자기 과시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말입니다. ‘서원 기도’에 대해서 우리는 신학적 고민이 필요해요. 한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구하며 서원 기도를 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될 아들을 평생 하나님께 바친다고 기도합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맺는 자기 포기와 자기 헌신의 약속입니다. 자신의 귀한 것을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진정성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원 기도하려면 가급적 자기 자신을 드리는 기도로 나아가세요. 그리고 더 가급적 특별한 마음이 없으면 서원기도는 안 하셔도 됩니다. 진짜 하나님께 간절함을 갖고 매달리는 때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 입다는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의 입지는 올라가고,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딸을 드리겠다고 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는 그냥 마주치는 첫 사람을 인신 제사로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고민해봐야 할 것은 입다의 서원의 내용입니다. 왜 인신 제사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지금 이방과 전쟁을 벌이는데, 인신 제사는 이방의 제시의식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부터 모압인들이 행했고, 후대에는 바벨론인들도 행합니다. 즉, 인신 제사 서원은 그가 얼마나 가나안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는지를...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나안과 싸우면서도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있던 인물이 입다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사사 3명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입산’, ‘엘론’, ‘압돈’에 대한 기록입니다. (삿 12:8) 그 뒤에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삿 12:9) 그에게는 아들 서른 명과 딸 서른 명이 있었는데, 딸들은 다른 집안으로 출가시키고, 며느리들도 다른 집안에서 서른 명을 데려왔다. 그는 일곱 해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삿

12:10) 입산은 죽어서 베들레헴에 묻혔다. (삿 12:11) 그 뒤에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그는 십 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삿 12:12) 스불론 사람 엘론은 죽어서 스불론 땅에 있는 아얄론에 묻혔다. (삿 12:13) 그 뒤에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삿 12:14) 그에게는 마흔 명의 아들과 서른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귀 일흔 마리를 타고 다녔다. 그는

여덟 해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삿 12: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은 죽어서 아말렉 사람의 산간지방에 있는 에브라임의 땅 비라돈에 묻혔다. 사사기는 구조가 재미있는데 소사사들이 처음에는 ‘삼갈’ 한 명, 그다음에는 ‘돌라, 야일’ 두 명, 이제는 세 명이 연달아 기록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 짧고,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신 목적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의 기록도 짧지만 부정적입니다. 이들은 자녀가

많았다는 내용이나, 이방과 결혼을 금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왕처럼 부와 권세를 누렸다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지도자들도 이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영적 어두움은 점점 깊어져 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사사 이야기, ‘삼손’입니다. 하나님이 출산하지 못하는 가정에 아기를 주십니다. 대신 이 아이는 ‘나실인’으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노아의 집에 아기가 태어납니다. (삿 13:5)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삿 13: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삿 13: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이렇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삼손’, 그 뜻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입니다. 낳을 때부터 주님이 부르셨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이 임했던 사람. 어쩌면 이 어둠의 시대에 ‘작은 태양’처럼 쓰임 받을 기회가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영이 삼손에게 임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의 연애사로 이어집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이방인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첫 기록은 딤나 출신 이방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떼를 부리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삼손은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능력은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는 사자를 만나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찢어 죽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조차 성경은 이런 표현을 동반합니다. (삿 14:6) 그 때에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세차게 내리덮쳤으므로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표현이 4회나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분명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자신을 부르시고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 옳은 대로 행했던 대표적인 사람이고, 그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대표합니다. 그는 모든 나실인의 서원을 다 어기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실 수 없으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죠. 시체를 만질 수 없지만, 나귀 턱뼈로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능력을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삼손을 사용하십니다. 삼손의 삶을 붙잡으시고 그를 통해 블레셋 사람들을 응징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쓰임 받고 있다고 해서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해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고, 뭔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어요. 한국의 찬양사역자 가운데 개인적인 일탈로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럼 그들이 쓴 찬양들이나, 그들이 인도했던 집회에서 받았던 은혜가 다 거짓인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그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은혜도 주시고, 좋은 찬양도 나오게 하시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그 도구 된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은 삼손이 변해야 하는 것이죠. 삼손의 삶에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런 사람까지도 붙잡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들 안에서라도 삼손이 깨닫고 변화되면 그러면 다행인 것이죠. 블레셋은 삼손의 등장 이후로 그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바로 여인입니다. 그전까지는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 삼손의 여인들이었으나, 이 여인만큼은 이름이 기록됩니다.

‘들릴라’ ‘들릴라’는 ‘밤’이라는 의미입니다. 삼손은 ‘태양’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밤의 승리로 끝납니다. 실제로 삼손은 두 눈이 뽑혀 어둡게 됩니다. 삼손은 여인의 유혹을 받고, 자신의 비밀을 그녀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그것은 삼손의 힘의 근원에 대한 것이었죠. 삼손이 지금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아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많이 어겼지만, 부모가 받았던 명령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기에, 그에게 주셨던 특별한

힘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죠. 들릴라는 삼손을 무릎에 뉘어 잠들게 한 후,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들릴라에 대해서 삼손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삿 16: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그러나 그녀는 삼손의 진정한 사랑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삼손은 거짓된 사랑을 좇다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보다는 ‘돈’을 사랑했고, 그녀는 삼손의 약점을 제공하는 대신 돈을 받고 사라집니다. 그럼

우리는 삼손이 정말 머리카락이 길어서 힘이 있었던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우리 교회 남자들 중에는 세훈 집사님이 가장 힘이 셀 것입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삿 16: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약속이 깨어지며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신 것입니다. 삼손에게 초인적인 힘을 준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삼손은 눈이 뽑힌 채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갑니다. 그는 이미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상태였죠. 결국 육체의 눈까지 멀게 된 것입니다. 삼손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삼손을 붙잡았다는 소식에 블레셋은 축제 분위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었던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자축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옥에서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이는 삼손을 조롱하고 고통을 주려는 것이죠. 삼손은 자신을 인도하는 소년에게 신전의 버팀기둥을 만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신전에는 3,000명의 남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삼손은 그 기둥 앞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삿 16:28)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삼손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스라엘의 원수 된 블레셋을 처단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대로 다시 그에게 힘을 주신 것입니다. 성전의 버팀기둥이 무너지면서 신전 안에 있던 모두가 죽게 됩니다. (삿 16:30) 그리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니, 그 신전이 무너져 내려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 이 삼손의 마지막 기록은 2가지 부분에서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첫째, 사사기의 문맥을 볼 때 삼손의 이 마지막 외침은 긍정적입니다. 눈은 멀었고 지금껏 막 살았지만, 마지막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선 입다의 서원과 비교할 때 더욱 구별됩니다. 입다는 자신을 드리지 않았지만, 삼손은 자신을 희생하며 나아갑니다. 둘째, 이 마지막 순간에 삼손과 함께 죽은

사람은, 삼손이 살아서 평생 싸우며 죽였던 사람보다 많았습니다. 즉, 삼손의 삶은 하나님께 처음부터 쓰임을 받았지만, 그가 자기 뜻대로 살았으므로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한순간에 죽인 사람이 더 많았다는 표현을 통해, 그의 삶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삼손까지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사사기의 모든 사사를 조금씩이나마 살펴보며 사사기의 첫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사사기 17-21장까지는 사사시대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기록들인데,

그곳에 무려 4차례나 등장하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우리가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봤던 삼손은 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람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삼손의 모습은 당시의 이스라엘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삼손과 이스라엘. 둘 모두 부르심을 입으며 시작됩니다. 여호와 앞에서 다른 사람/민족과 구별됩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합니다. 영적/육적으로

간음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주님의 교회의 일부요, 성도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신약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믿습니다. 구별하여

거룩한 무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삼손이요,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입니다. 성경이 삼손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은 왜 그럴까요? 그들의 삶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길을 가도록 초청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왕 되어 살아가다 함께 망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왕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망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옳은 길을 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삼손과 달리, 입다와 달리, 하나님께 물으며 그 뜻을 따르며 살아가기를 힘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직 삶의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정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우리는 이 시간에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시겠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삶으로 가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은 묻고 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여호와 하나님이 왕 되시고 제가 그분을 따르는 길을 가겠습니다. 우리 함께 그 길을 선택하여 나아갑시다. 우리의 삶을 사사시대와 같이 내버려 두지 말고, 혹시 조금 엇나가 있다면 이제라도

바르게 세워갑시다. 주님이 도울 것이고, 우리가 함께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그 결단을 주님은 기다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