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도전하기로 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 안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들을 조금은 친숙하게 익히기 위해 사사 이름 외우기를 연습해보겠습니다. 옷니엘 – 에훗 – 삼갈 – 드보라 – 기드온 – 돌라 – 야일 - 입다 – 입산 – 엘론 – 압돈 – 삼손 첫 시간에는 사사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2주 전에는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기드온’에 대한 5가지
포인트입니다. I. 서론(2개) A. 1:1-2:5 B. 2:6-3:5 II. 본론(3:6-16:31): 사사들의 이야기 A. 옷니엘 B. 에훗 C. 드보라 X. 기드온 C'. 아비멜렉 B'. 입다 A'. 삼손 III. 결론(2개) A. 17-18장(레위인과 단지파) B. 19-21장(레위인과 베냐민 지파) 사사기의 구조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사사들의 이야기에서 기드온이 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 앞에는 긍정적인 사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드온 이후로는 전혀 지도자답지 못한 사사들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기드온은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사사들의 문제와 별개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일한 무엇이 존재한다고 했냐면 ‘악순환 사이클’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으며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6번의 악순환 : 악행 – 진노 – 부르짖음 – 구원 – 평화 사사기 6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삿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디안’이라는 족속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미디안은 요단강 동편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으로 나오죠. 그러니 그전까지는 우호적이었으나,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미디안은 다른 유목민족인 아말렉 족속과 동방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파종할 때 맞춰서 씨앗을 심어 놓으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땅의 소산물을 망쳐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산물이 없게 되면 곧 가축도 죽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집니다. 진노를 당하였으니, 이제 이스라엘의 태도가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부르짖음입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예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을 안 하면 제일 좋죠. 그런 일이 줄어드는 것이 저는 영적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자식 키워보면 알겠지만, 다 사춘기가 있잖아요. 영적으로도 사춘기도 한 번씩 겪더라고요. 그래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녀가 사춘기를 보내며 마음 아프게 해도 그래도 염치없지만, 부모에게 기대는 것. 사실 부모님들은 다 그것을 원하시죠. 사고를 쳐도 그래도 부모와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염치없이 어려움이 오니 하나님을 찾지만, 염치없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삿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하나님이 이번에는 사사를 보내기 전에 선지자를 보내서 깨닫게 하십니다. (삿 6:8)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예언자를 보내어 말씀하셨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였고,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삿 6:9) 내가 너희를 이집트 사람과 또 너희를 억압하는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내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쫓아내었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삿 6:10) 그러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가 아모리 사람의 땅에서 살고 있으나, 아모리 사람의 신들은 섬기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였으나,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을 섬긴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요약하는 표현이 ‘불신앙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어요. 지금의 고난은 바로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임을 주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첫 번째 포인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고난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난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욥기를 가르칠 때면 이 말씀을 꼭 드려요. 고난의 이유가 내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러나 또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고난의 원인이 내 잘못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병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에 대해서 논할 때 예수님은 그 질병이 부모나 그의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또 야고보서 등에는 병에 걸리면 회개할 것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즉 이것은 딱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다른 이의 고난 앞에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칫 폭력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사기를 읽으며
악순환을 볼 때, 우리 또한 우리의 죄로 고난을 당하게 될 수 있음에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개개인이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해석하려 하기보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필요하다면 말해줄 수도 있지만,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가고,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해줄 수 있죠. 제가 이번 주에 몸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런데 만약 옆에서
“그러니까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하고....” 이러면, 제가 어떻게 반응했겠어요. 위로가 됩니까? 위로가 안 됩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어요. 저도 반대 입장에서 잘 못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려고 할 때가 있죠. 자꾸 묻지도 않는데 가르치려는 직업병입니다. 그런데 위로와 격려가 앞서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적어도 당사자인 저는 고난을 당할 때, 혹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깨닫게 하시려는 무엇이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깨닫게 하셨어요. 여러분이 꼭 선지자가 되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고, 이러한 깨달음은 예배 속에서, 또 각자가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이 한 주를 보내며 많은 것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혹시 어떤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부분이 있는지를 살피고,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모습들을 점검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가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는 위로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에도 꼭 부정적인 경우가 아닐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려고 미디안의 압제에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고 싶기에 돌아오라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번에 사용하고자 하는 인물은 ‘기드온’입니다.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하나님은 기드온은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앞에 기드온의 모습은 이 표현과 너무 안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11절이 설명하는 기드온의 모습은 포도주 틀을 이용해서 밀을 타작하는 장면입니다. 보통 타작은 마을 공동체가 함께 했으며, 알곡 껍데기나 티 등이 공중에 날릴 수 있도록 탁 트인 마당이나 넓은 들판에서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몰래 하고 있는
것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는 소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서 ‘큰 용사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주목할 만합니다. (삿 6:13)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기드온의 이야기는 기드온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당대 많은 이스라엘인들의 보편적 생각이 이랬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하나님 부재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사사기는
우리에게 이 모든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나타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먼저 돌아선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정해놓고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생각을 일상 안에서 너무나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기대와 기준이 정해놓은 하나님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의 모습 안에 들어와 있나요?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서 그렇게 못하지만, 하나님은 완벽하시므로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완벽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왜 그 완벽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의 행동의 틀을 자기가 정해놓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이 완벽하다면 내 틀을
벗어나서 행동해도 결국 그분의 일하심이 더 옳다는 믿음으로 신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늘 말씀드리지만, 결국 신앙은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서 살피지 않고, 말씀의 검을 다른 사람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놓고 따지기 시작하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의 검이 교만한 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교정해 나갈 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삿 6:14) 그러자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가 쓰임받는 것이 우리의 잘남 때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사람을 쓰는 방법은 세상과 다릅니다. 기대하지 않는 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기드온이 태도를 바꿉니다. (삿 6:15)
기드온이 주님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자신은 그 집안에서조차 가장 작다고 말합니다. 가문의 약함이란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의미하고, 가장 어린 사람은 ‘막내’를 의미하는데, 당시에 이것은 어리고 보잘것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잘 살펴보면
기드온의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읽어보면, 그의 아버지의 집에는 열 명 이상의 종들과 수소나 염소 등 가축이 있었고, 많은 돈을 들여 제작해야 하는 우상들과 제단들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기드온과 형제들은 미디안 왕들의 눈에 다 왕의 아들들처럼 보였습니다. 즉 그의 집안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이상의 부와 권세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즉 기드온은 객관적인 기준보다도 자신을 낮춰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겸양지심’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세 번째 포인트가 있습니다. 제가 종종 성경이 말하는 ‘교만’과 ‘겸손’에 대해서 설명해 드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굉장히 중요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낮춰서 보는 것을 ‘겸양지덕’, 혹은 ‘겸양지심’이라고 부릅니다.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거짓말을 섞습니다. 그것이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처럼 비치는 유교적 문화가 그렇습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도 “차린 게 없네요”라고 말하는 문화가 그렇습니다. 진짜 겸손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표현만 하는 문화입니다. 교회에서도 사역을 권유받을 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겸양지덕’을 발휘합니다. “제가 그릇이 안 돼서, 못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방법’을 찾는 법입니다.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핑계’부터 찾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쓰시겠다는 상황을 마주할 때, 늘 피하기보다는 감당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해나가면서도 가장 많이 하는 표현이 있다면, 어떤 상황상황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합니다. 그럼 길이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기준이 이렇습니다. 내가 이 기준보다 나를 높게 보면 ‘교만’이죠. 내가 이 기준보다 나를 낮춰서 보면 이건 뭘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겸양지심과 유사한 교만입니다. “모세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부족함을 진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가기 싫은 것입니다. 겸손한 척을 하며 거절하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진짜 겸손은 어디에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처럼, 나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 주님.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저는 부족한 것이 맞지만, 주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기드온이
겸양지덕을 발휘해서 발을 빼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삿 6: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기드온이 특기를 발휘합니다. 그것은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삿 6:17) 기드온이 또 주님께 아뢰었다. "참으로 나를 좋게 보아 주신다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사람들
중에서도 성향상 ‘객관적 증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증된 ‘데이터’가 중요한 사람이 있어요. 저도 약간 그런 성향이긴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것에 대해서는 즉흥적인 면이 많은데, 목회에 있어서는 특히 신중한 편입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려는 습성이 큽니다. 다른 교회에서 해보고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잘 안 따라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 하는 양육을 처음 소개받고도 몇 번을 검증하고, 제가 먼저 경험해보고도, 그리고도
교회에 와서 임상실험을 해보는 중에 있어요. 하다가 안 맞으면 언제든 스톱(stop)할 마음으로 신중하게 해보고 있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자 도마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이 봐야지 믿겠다고 하죠. 아마 기드온과 비슷한 스타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6장에서 기드온이 요구한 표징은 무엇이냐면, 자신이 예물을 가지고 다시 와서 예배할 때까지 그 자리에 계셔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제물을 불로써 직접 받으시는 기적을 기드온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기드온은 ‘순종’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럼 우리도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것이 오늘 설교의 네 번째 포인트입니다. 우선 기드온의 이 첫 번째 기적 경험 이후 행보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버립니다. 그 덕분에 기드온의 이름이 ‘여룹바알’이라 불리게 됩니다. 바알과 다투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과의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여기서 다시 표징을 구합니다. 바로 그 유명한 양털 시험입니다. (삿 6: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삿 6: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한국교회 안에는 기드온의 이 양털 시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사기 문맥은 부정적입니다. 첫 번째 그를 부르시는 장면에서의 모습은 아직 기드온 안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 모세를 설득하셨던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또 기적을 구하자, 이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인간적인 계산에 치우쳐 머뭇거리고 두려워한 바락과 같은 정도로 기드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을 갖고 나아갔으면 모세처럼 쓰임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실제로 양털 시험 이야기가 시작되는 36절을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삿 6: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이 행동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 양털 시험 장면에서 하나님을 ‘야웨’라는 하나님의 고유의 이름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신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 ‘엘로힘’을 사용합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저자는 기드온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이러한 믿음 없는 모습과 주저함을 이해하시고 그의 표징 요구를 다 받아주시는 것은 그를 통해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의지와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저는 도마의 성향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은 또 도마에게는 도마에 맞게, 기드온에게는 기드온에게 맞게 역사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 사건에서 마지막 이 이야기도 우리는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경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살아서 예수님을 보고 믿을 수 있으면 그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그분을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지만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이 감히 경험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성경을 갖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가장 큰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포인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00 용사 이야기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8:10에 보면 135,000명입니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에서도 군대를 모집합니다. 32,000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1/4에 못 미치는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좀 다르셨습니다. (삿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32,000명으로 미디안의 135,000명을 무찌르면 오히려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구원의 공로를 자신들에게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로 돌려보냅니다. 기준은 ‘두려워 떠는 자’입니다. 전쟁 앞에 두려움이 가득한 자는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22,000명이 돌아갑니다. 그러면 몇 명이 남았습니까? 1만 명이 남았습니다. 2/3 이상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기드온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이 아닙니다. 이제 물가로 가라고 하십니다.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라고 말씀하시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300명’, 직접 엎드려 물을 마시는 자는 ‘9,700명’입니다.
여러분, 왜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를 선택했을까요? 다양한 해석을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적어서’입니다. 만약 엎드린 자가 300명이었으면 엎드린 자를 데리고 쓰셨을 거예요.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소수의 사람을 택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의 승리도 목적이지만, 이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깨닫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보다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되길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이 전쟁은 여리고성 전투와 더불어 가장 이길 수 없는 방법으로 승리한 전쟁이 됩니다. 300명의 군대는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항아리 안에는 횃불이 들어있습니다. (삿 7:20) 세 부대가 모두 나팔을 불며 단지를 깨고,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팔을 들고 불면서 "주님의 칼이다!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외쳤다. (삿 7:21) 그리고 그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서서 적진을 포위하니, 적군은 모두 아우성치며 달아났다. (삿 7: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주님께서 모든 적들이 저희들끼리 칼로 치게 하셨다. 적군은 도망하여, 스레라의 벳싯다와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선까지 후퇴하였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가르친 전쟁은 인간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300명이
동시에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돌진하자, 적군은 혼란에 빠지고, 같은 편끼리 싸우다가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135,000명 중에 12만 명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기드온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놓칠 수 없습니다. 그의 군대의 구호는 이것이었는데요. (삿 7: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드온은
이 전쟁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 바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은근슬쩍 하기 시작합니다. 18절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기드온은 두려움과 소심함에서 믿고 의지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과 자기교만으로 엇나가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드온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여러분은 사사기 6-7장에 나오는 기드온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것을 배우셨습니까? 사사기는 늘 그러하듯,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연약한 사람이 분명했어요. 그런데 그도 하나님이 택하고 사용하고자 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일에 점점 실패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그를 사용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기드온의 모습은 여러 모습에서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드온보다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의 이야기에는 한가지
숨겨진 역설이 있는데요. 기드온이 처음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그때,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 단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샬롬’ (삿 6:24) 기드온은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사사시대는 샬롬이 없는 시간이죠. 그러나 그 영적 암흑기에도 이 땅의 샬롬은 오직 여호와 앞에서 가능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서 있을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있을 때, 그때 찾아오는
것이 샬롬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샬롬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환경도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샬롬은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 안에 샬롬이 임하고, 더 나아가 여러분의 삶이 예배가 될 때, 그 삶에도 여호와 샬롬이 찬송 되고 고백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