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실된 행동을 지속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계속 불성실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 마음은 진실된 예배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의 바른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참다운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불가능합니다.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바드’와 ‘샤하’는 ‘섬기다’, ‘부복하다’라는 뜻이고,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라트류오’는 ‘경배하다’, ‘받들어 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모두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당시의 종들은 노예입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어 주인의 발에 입맞춤으로 경배합니다. 아니면 아예 땅바닥에 엎드립니다. 그들이 주인에게 경배드리는 순간 그들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도 인격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만 보입니다. 주인의 모습과 주인의 인격만 드러납니다. 어디에서든 주인만 드러내고, 무엇을 하든 주인의 인격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마음의 표시가 주인에게 무릎을 꿇어 그 발에 입 맞추는 경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배 역시 이처럼, 경배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영어로는 예배를 ‘워십’이라 합니다. 워십은 ‘가치’란 의미의 ‘워스’(worth)와 ‘신분’을 뜻하는 ‘십’(ship)의 합성어입니다. 즉 워십은 최상의 존경과 존귀를,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릴 때 인간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드러나시게 됨은,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가 갖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림으로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 해답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구약의 제사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이 그 모든 방법을 지정하셨던 것이죠. 지금 우리가 그것을 모양으로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정신은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1) 번제 번제는 구약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입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물을 조금도 남김없이 온전히 불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인’, 온전한 ‘자기 의탁’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예배의 영원한 모본입니다. 예배가 곧 하나님에 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의탁’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레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번제를 드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반드시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흠 없는 예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기 전에 아주 세밀하고도 정성스럽게 확인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 단계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예배는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 드리는 예배는 ‘흠 없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준비 방식은 제가 신학생 시절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이분은 금요일 오후 교회의 일과가 끝나고 귀가하면, 그때부터 주일 아침 교회로 출발할 때까지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교회는 금요 밤 예배가 없는 것 같아요. 금요일 저녁부터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서재에서
나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 시간을 오직 설교 준비와 기도로 채운다고 해요. 그 정도로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주일예배 시간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어떤 예식의 주례도 맡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이것을 이해하기에 이 교회의 교인들은 특별한 일이 있어도 토요일에는 전화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신학생 때도 그렇고, 다시 설교를 준비하면서 책을 보면서도 그렇고, 이재철 목사님의 모습에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향도 그렇고, 또 작은교회의 목회자로서 저의 상황도 그렇고, 이재철 목사님과 같은 삶은 불가하고 또 완벽하게 따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는 집에 서재가 없고요. 그리고 교회 목양실에 있어도 교인들이 있는 시간에는 설교 준비에 집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설교 준비는 아무도 없는 밤 시간에 합니다. 그래도 제게도 어지간하면 지키는 루틴이 있습니다. 저는 보통 매주 3개의 예배를 준비해야 하지요. 우선 월~화는 주일에 대한 정리 및 필요한
공부를 합니다.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날이죠. 수요일은 수요예배를 준비하고, 수요예배 후부터 새벽까지는 금요기도회 준비를 합니다. 그래야만 목요일에 주일 설교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혹시 목요일에 심방 등이 있을 수도 있기에 가급적 금요기도회는 밤을 새더라도 수~목 밤사이에 끝내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주일 설교를 붙들고 씨름하지요. 가끔 너무 몰두하면 날이 밝는 것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래야 금요일에 찬양 콘티도 넘길 수 있기에 사투를 벌입니다. 이러면
금요일 오후에는 금요설교를 한 번 더 퇴고할 수 있고, 토요일에는 주일 설교를 퇴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확한 설교 원고가 안 나오면 토요일에 밤이 새더라도 다 쓰고 들어갑니다. 올 전반기에는 월요일마다 에스라 공개강좌를 들으러 갔어요. 그러면 정말 쉬는 시간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배워야 여러분에게 선한 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모르는 과목은 지금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여기에 심방이나, 교회 행사, 상담, 행정, 양육 등은 수시로 있는 병행되는
일정입니다. 나름대로는 제게 주어진 삶 속에서 목회자로서 전심을 다해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또한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예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치열하게 준비하고 예배에 단에 올라오지만, 또 성도님들 가운데서는 저보다 더 피곤한 모습으로 환상 가운데 주님 만나려 애쓰는 분들이 있으세요. 저는 인간적으로 예배 시간에 피곤함에 졸음과 싸우는 분들에 대해서 이해합니다. 한 주간의 삶이 오죽 고달팠으면. 그런데
그 안에도 미묘하게 다른 차이가 있어요. 제가 정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묻지는 않지만... 저는 여러분이 토요일 밤을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다가 잠을 많이 못 자서 예배 시간에 와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좋은 컨디션으로 주일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 부분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에 대해서는 한 번쯤 돌아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토요일부터 다음날 예배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섬기기 위해 기도하며 잠을 청하는 사람과....
‘토요일까지는 내 시간이다’ 생각하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밤늦게까지 놀거나, 혹은 유튜브 보면서 졸린 눈 비벼가며 싸우다가, 간신히 아침에 일어나서 예배에 와서 앉아있는 사람과... 그들의 예배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격차가 한번 두번은 차이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이 태도가 습관이 됩니다. 이것이 몇 달이 되면 두 사람의 영적 반응이 달라져요. 앞에 서보신 분들은 알 겁니다. 여러분의 영적 건강함의 척도는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는 태도, 눈빛만 봐도
인간인 저도 알 수 있습니다. 새신자반의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예배는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래야 흠 없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그대가 그대의 집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둘째, 번제는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려야만 했다. (레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예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배는 인간 보기에 좋게, 인간의 기쁨을 위하여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이, 예배드리는 나의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려야 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기본입니다. 어쩌다가 불가피하게 늦는 경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죠. 그런데 보통 교회 안에서 예배에 늦는 것은 늘 늦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늦습니다. 그럼 정말 우리가 주일학교 때 했던 수준으로 질문해야 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대통령이 불러도 늦게 갈 겁니까? 제가 그래도 일터에서 매니저 역할을 5년 정도 했다보니까 직원 면접을 꽤 많이 봤거든요. 그래도 30명 이상은 지금껏 면접을 봤던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믿고 거르는 기준은 면접 약속 시간에 도착 못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상황은 확인합니다.
늦을만한 불가피한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이 일에 대한 갈급함이 없구나’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여러분이 만약 사장이라면, 매일 회사에 지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는 회사를 위해 직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 말할 때 그것이 진실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예배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런 부분에서 내 삶을 점검해야겠죠. 다행히 저희 교회에는 지금껏 그런 무례한 사람은 없었는데,
개척교회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다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제 주변에서도 다 한 번씩 겪은 경우입니다. 특히 교회가 작으면 일단 무시하는 것이죠. 벌써 태도가 “내가 이 교회 다녀줄게.”라는 태도로 교회를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 다녀줄게.” 그 뒤에는 뭐겠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여러분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드려지고 있을까요? 혹시 예배드려주시러 오십니까? 저와 친한 한 목사님이 저와 비슷한 시기에 개척했다가 이제 교회를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도 그 교회 상황이 재정적 문제는 없을 만한 것 같아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코로나라서 초신자들은 이래저래 안 나오게 되었고, 교회에 매주 오는 멤버들이 자기 부모님, 처가 부모님인데... 다들 가족이다보니 꾸준하고 잘 섬겨주신데요. 그런데 이분들 안에 이 교회를 오는 목적이 예배를 드리러 온다기보다는 ‘도움을 주러’ 오는 마음이 있다보니까... 이 상황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다 생각이 들어서 마무리를 하고 부모님들은 모두 다른 교회로
가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하나님이 마음 주시면 차라리 아내와 다른 지역에서 다시 개척하겠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제 마음에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번제는 제사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레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안수란 문자 그대로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안수’는 히브리어 (%m;äs' ‘싸막’ )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학자들마다 안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 * 안수의 의미 ① 죄의 전가(transference) ② 대체(substitution) ③ 소유권(ownership) ④ 동일시(identification)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또 나누기도 해요. 한 손으로 내리누르는 동작은 동일시의 의미가 가장 커 보인다고 보고, 레 16장에 보면 두 손으로 올리는데, 그것은 전가의 의미가 더 커 보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의 전가든 동일시든, 중요한 의미는 안수를 통해서 제사자와 제물 사이의 동일시가 일어나서, 제물이 죽는 것은 제사자가 죽는 것으로 효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죽음이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간주되어, 죄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죄인인 나는 속량 당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철저한 ‘회개’의 요소가 있습니다. 나의 예배 전까지의 모습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회개할 것을 회개하며, 십자가의 은혜로 그런 나를 받아주시는 그 은혜의 감격을 안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예배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은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의인이라서 자격이 있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받아 주셨기에, 그분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예배의 이 본질을 망각하게 합니다. 넷째, 번제의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잡아야 합니다. * 레위기 1장에 나타난 번제의 순서 (수송아지 기준) 예배자 :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속죄 의식) 제사장 : 소의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예배자 : 소의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낸다. 제사장 : 제단에 불을 지피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는다. 제사장 : 예배자가 토막 낸
번제물의 머리와 기름 있는 부위를 불 위에 올려둔다. 예배자 : 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다. 제사장 : 제물의 모든 부분들을 제단에서 불태운다. 우리는 막연하게 제사(예배)를 드릴 때, 제물만 가져가면 제사장들이 알아서 다 해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를 분해하고 썰어주듯이... 내가 제물만 준비하면 된다는 심각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제사의 내용을 보면 예배자가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것은 다 하고, 제사장은 옆에서 지켜보며 그것을
제단에 올리는 일만 합니다. 만약에 제사장들이 저 일을 다 했으면 그들은 말만 제사장이지 백정이었을 것입니다. 즉, 제사에 있어서 예배자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제물의 목을 칠 때 튀어 오르는 피를 뒤집어쓰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때의 피비린내와, 내장과 다리를 씻을 때의 역겨운 악취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의 제사는 살아 있는 제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자신의 목을 치는
심정으로 제물의 목을 치는 것이죠. 하나님께 자신의 안팎을 온전히 바치는 마음으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씻습니다. 자신의 다리를 이제부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리라 다짐하면서 제물의 네 다리를 씻습니다. 그와 같이 제물을 잡으면서 사실은, 제사드리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비록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의 옷은 피투성이요, 제물의 비린내와 역겨움이 진동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제물과 함께
죽어 버린 자신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자리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우리는 예배에 나와서, 목회자와 같은 사람들이 인도해가는 예배에 참여만 하는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날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러나 나의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은 그 예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배는 목사의 설교와 예배팀의 찬양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목을 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놓는 시간입니다. 그날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안과 밖을 온전히 내어놓아야 합니다. 자신을 각 떠서 그 말씀 앞에 드려야 합니다. 완전한 항복, 완전한 자기부인이어야 합니다. 그처럼 내 안에 자리가 생길 때,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역사하고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일주일 동안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예배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배만 잘 따라오셔도 그 말씀을 한 주간 잘 묵상하며 살아가도 그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항상 예배 안에 방황하는 눈동자들이 있습니다. 초점을 잃은 눈빛들도 가끔 봅니다. 목사로서 다른 무엇보다 걱정됩니다. 진심이에요. 그것이 길어지면 심히 걱정됩니다. 제 경험상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해요.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니라, 죽어버린 종교예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나눈 것들. 1) 흠 없는 제물을 바치기 위한 준비와 같이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하는가? 2)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3) 나의 죽음과 나의 회개가 동반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4) 여러분에 의해서 드려지는 여러분의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고 있는가? 오늘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하십니까?
오늘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예배를 바르게 세우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바로 세워질 때, 여러분의 신앙은 그 안에서 자라갈 것이며,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는 만큼, 여러분의 삶도 주님 닮은 모습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 충만케 될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