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8과 / 예배란 (2) / 강정규 목사

2021-12-03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혹시 예전에 선교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선교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도 선교도 끝이 있지만, 예배에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어도,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은 주님을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모델이 있지만, 신약 교회의 예배는 모델이 없습니다. 설교의 모델, 기도의

모델이 성경에 존재하지만, 예배는 모델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배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대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릅니다. 예배의 본질은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시절 교수님은 이것을 ‘포도주와 잔’에 비유하셨습니다. 잔의 모양은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포도주이죠. 그것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제가 예배와 관련하여 몇 가지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용어이죠. 저는 ‘대예배’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예배실’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당 공간의 크기를 실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배 자체를 대예배, 중예배, 소예배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준비찬양’이라는 표현도 우리가 예배를 바르게 이해하면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시간입니다. 찬양이 시작되면 예배가 시작된 것이고, 그것에 ‘준비’라는 단어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언어가 바뀌는

것은 중요합니다. 언어가 바뀌어야 개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번제의 순서를 통해서 나눴던 것처럼 예배의 주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연극’에 비유하곤 합니다. 연극에는 배우가 있고 관객이 있죠. 예배에서 배우는 누구입니까? 앞에 서 있는 저나 예배팀이 배우이고 여러분이 관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관객이고, 여기서 배우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죠. 예배팀의

역할은 그럼 무엇입니까? ‘프롬프터’라고 들어보셨나요? 연극을 공연할 때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 따위를 일러 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예배팀은 그렇게 여러분의 예배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자이어야 합니다. 신약에서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이것이죠.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메시지) 하나님은 순전한 존재 그 자체,

곧 영이시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영과 자신의 참된 마음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 오늘도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온전한 예배를 이 시간이 끝날 때까지 올려드리길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구약의 ‘번제’를 통해서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정리했습니다. 계속해서 구약의 제사를 통해 예배를 배워가도록 하겠습니다. * 소제 소제는 ‘곡물’로 드렸던 제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예배가 회막이나 성전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예배는 예배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고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그 헌신과 봉사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레 2: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제는 곡물로 예물을 삼되, 반드시 ‘고운 가루’로 갈아야 했습니다. 조그마한 덩어리가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세한 분말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그렇게 곡물을 갈도록 하셨을까요? 어쩌면 예배자가 그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갈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위에 ‘고운 기름’과 ‘유향’을 더해야 했습니다. 보통 기름이 아닌 고운 기름, 그리고 유향은 모두 소중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유향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의 예배를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 예배는 우리의 뜻과 생각을 말씀의 절구통에 넣어 빻고 가는 시간입니다. 조금이라도 내 것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세한 분말이 될 때까지 완전히 해체한 다음 그 ‘고운 가루’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새로이 빚으셔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자체가 헌신이요, 충성입니다. 은혜로운 예배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교우들의 헌신과 봉사의 결과입니다. 예배팀, 방송팀, 교육부 교사, 안내위원, 차량위원 등 때로는 보이지 않는 많은 교우들의 헌신으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예배는 그 자체가 헌신이요 봉사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헌신도 없이 단지 예배에만 참석하겠다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오만이요 불충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표현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헌신은 마치 자전거의 페달과 같다. 아무리 좋은 자전거라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힘들어도 페달을 밟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헌신은 자전거의 페달과도 같다. 헌신이라는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신앙의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주일 아침 일찍부터 헌신하는 사람의 예배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예배당을 찾는 사람의 예배가 동일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타인을 위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자기의 유익으로 돌아온다.” 여러분, 헌신은 ‘고운 기름’과 ‘유향’으로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모두 고귀하고 값비싼 것들입니다. 쓰다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은 허울 좋은 생색내기나 동정일 뿐입니다. 헌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은 귀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기 때문에,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여러분이 귀한 시간을 쪼개어 헌신하는 훈련을 당장 해보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참된 헌신은 여러분이 관 속에 눕는 날까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루가 24시간인 것은,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유향은 기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헌신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의 그릇 속에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열매가 덕스럽습니다. 인간의 열정만으로 행하는 헌신은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레 2: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레 2: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하나님께 소제로 바치는 예물 속에는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될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누룩과 꿀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성경에서 누룩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죄’와 관련된 단어로 사용됩니다. 누룩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실제보다 부풀리는 것입니다. 꿀은 죄의 유혹이나, 쾌락, 그럴듯하게 맛을 포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누룩과 꿀이 가진 의미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소금이죠. 그럼 왜 소금일까요? 새신자반에서는 소금에 담긴 ‘희생’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없어져 버림으로써, 있는 것은 오히려 보존케 하는 힘이 있죠. 그 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소금 언약’을 근거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하 13:5)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소금으로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다윗이 다스릴 나라로 영원히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소금의 특성이 변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바닷물에도 염분이 바닷물이 썩지 않도록 하죠. 그러므로 변치 않는 약속인

‘언약’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헌신과 봉사 속에 누룩을 넣어 자기 공적을 과장하거나, 꿀로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홍보일 뿐,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소금이어야 합니다. 자신을 다 바쳐 헌신하되 드러내 보이기보다, 감추어지고 주님이 빛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름이 지워지는 곳이라야 주님의 이름이 드높아지게 됩니다. 큰 교회일수록 그 안에 있는 좋은 물건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소제의 원칙을 기억하며 고민이 필요합니다. 새신자반에도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적혀있는데요. 저희 교회도 고민했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죠. 하나는 무직분 교회, 다른 하나는 무기명 헌금입니다. 무직분 교회는 공감대가 거의 이뤄졌고, 무기명 헌금은 몇 가지 사유로 보류를 했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헌금 봉투의 다양화는 제한하되, 기명헌금을 유지하게 된 이유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연말정산의 어려움입니다. 둘째, 결국 이 고민은 교회를 투명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오히려 기명이 헌금관리를 투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헌금에 대한 신앙적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질에 대한 주도권이 바뀌는 것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라고 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므로, 헌금의

크기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지만, 헌금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때로는 교육하고 가르쳐야 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가끔 어떤 교회는 헌금을 담임목사에게 직접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심방 등을 가고 드리는 헌금을 목회자가 개인을 위해 쓰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에게 헌금을 가져오지도 마시고, 정말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예배 때 드리시면 됩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심방 때 드리는 헌금을 저는

한 번도 저를 위해 쓴 적이 없고 그대로 냅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심방헌금도 예배 시간에 내시면 오히려 번거롭지 않습니다. 또 저도 헌금과 최대한 멀리 서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영향받고 싶지 않고, 여러분 또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장단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선택했다고 반대가 줄 수 있는 장점을 놓쳐서는 안 되죠. 기명헌금을 한다고 그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평가해서는 안되고, 무기명 헌금을 한다고 헌금에 대한 나의

마음이 소홀해 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을 하든 결국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합니다. 즉, 어떤 시스템을 취하든 결국 물질에 대한 것은 자신의 영적 결단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 후 가장 많은 헌금을 하게 되었던 것이 작년에 교회 이전과 관련된 헌금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 교회는 그 헌금만큼은 무기명으로 진행하기 위해 작정을 할 때도 4자리 숫자로 하고, 헌금도 그 숫자로

올려드렸습니다. 그중에는 헌금을 많이 하신 분도 있고, 적게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오히려 믿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알지 못할 헌금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껏 드렸다는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약시대부터 예배 안에는 동물부터 때로는 형편에 따라 비둘기나 곡식까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림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사람 앞에서가 아니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 속죄제 속죄제는 삶 가운데서 죄를 인식할 때마다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는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 등 누구든 예외 없이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레 4:27)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레 4:28)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레 4:29)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레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레 4:31)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제사를 드리는 방식은 번제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제사의 특징은 죄를 깨닫는 즉시 제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제삿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즉시 드려야 합니다. 제사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은 왕으로서의 체면과 체통이 있지요. 그런데 유부녀인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의 남편마저 은밀하게 살해해 버린 다윗 왕의 잘못은 나단 선지자가 공박합니다. 은밀한 곡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말입니다. 신하들 앞에서 왕이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자신의 체통을 짓밟았다며 나단 선지자를 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자신의 범죄를 회개합니다. 자신이 행한 모든 짓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됨을 그제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 즉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실패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이어야 하고, 예배를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작년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모여서 함께 최고의 예배를, 흩어져서 삶으로 거룩한 흔적을”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직업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속죄제입니다. 죄짓는 직업을 갖고서는 예배의 생활화도, 생활의 예배화도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내 주위에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직업을 버린 분들이 많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분들에게 신앙상 더 좋은 직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예배의 주체는 여러분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주님이 받고 계십니다. 찬양은 준비가 아니라, 전심의 고백이 되도록 부르십시오. 혹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도, 여러분의 예배는 실패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의 존재와 영과 참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그 예배가 가장 좋은 예배입니다. 특별히 소제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예배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분들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헌신한다고 돈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그런데 그래서 우리의 헌신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순결하고 고귀하게 주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패달이 멈추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 때면, 기억하십시오. 일어서서 주께 나아가면 됩니다. 주님은 주께 나아오는 길을 언제나 열어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늘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 있고 두손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나오고 두손들고 항복하며 나온 자. 그를 품으시고 변화시키고 회복시켜 세상 앞에 당당하게 승리의 만세를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인줄 믿습니다. 오늘도 예배 안에 승리합시다. 예배로 회복합시다. 예배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