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8과 / 예배란 (3) / 강정규 목사

2021-12-10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예배에 대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라는 어원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분임을 고백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다루면서 특별히 구약의 제사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떠해야 할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번제’입니다. 번제는 우선 ‘흠 없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흠 없는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듯 예배는 예배자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주일에 와서 2시간을 앉아 있다가 가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약속을 앞두면 그것을 앞두고 전날부터 준비하죠. 가급적 잠도 일찍 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최고의 컨디션으로 몸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대한 마음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토요일부터 다음날 예배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섬기기 위해 기도하며 잠을 청하는 사람과.... ‘토요일까지는 내 시간이다’ 생각하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밤늦게까지 놀거나, 간신히 아침에 일어나서 예배에 와서 앉아 있는 사람과... 그들의 예배가 같을 수 없습니다. 또한 번제는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는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나의 힐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예배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는 제물에 ‘안수’합니다. 제물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서 드려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나를 드리며 내 죄를 속죄하는 ‘회개’를 동반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예배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자격이 있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주셨기에, 그 은혜의 감격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예배의 이 본질을 망각하게 합니다. 끝으로 번제의 방식을 살펴보면 예배는 보다

능동적으로 드려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참여하는 것으로 내가 할 바를 다했다는 것은 예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앞에서 예배를 이끄는 예배팀보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나의 예배를 위한 능동적인 예배자가 되기 위해 힘쓰십시오. 예배는 목사의 설교와 예배팀의 찬양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목을 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놓는 시간입니다. 그날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안과 밖을 온전히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배가 여러분 안에 회복되면, 그 예배는 반드시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살펴본 제사는 ‘소제’입니다. 소제는 곡물로 드렸던 제사입니다. 소제는 곡물로 드리지만, 이 곡물도 그냥 아무 준비 없이 드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도 정성이 들어갑니다. 어쩌면 그 준비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내 생각과 내 뜻을 비어내는 시간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올바른 예배자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헌신이 동반합니다. 그래서 이재철 목사님은 헌신을 ‘자전거 페달’에 비유했습니다. 헌신이라는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신앙의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 있는 예배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소제를 드릴 때, ‘누룩’과 ‘꿀’은 넣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풀리거나 포장된 마음과 헌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금처럼 자신을 녹여 주변을 지켜주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예배자와 예배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예배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꾼이었습니다.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소산대로 농사꾼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목자인 아벨은 양의 새끼로 제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채소보다 고기를 좋아하셔서, 제물을 편식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을 잘 보면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창 4:4b)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a)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은 예배의 모양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예배를 통해서 예배자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배는 예배자의 진실한 마음과 최선의 예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여도 잘못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최고의 예배여도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고 있어도 안 되는 법이죠. 세 번째 살펴본 것은 ‘속죄제’였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으면 깨달을 때마다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배는 삶과도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순간만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이어야

하고, 예배를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번째 제사는 ‘속건제’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매우 유사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모두 ‘의무제’입니다. 오히려 번제 소제 등은 자원제입니다. 드리고 싶을 때 드리는 것입니다. 반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배상의 유무’입니다. 속죄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 드린다면, 속건제는 돌이킬 수 있는 유형의

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위한 제사입니다. 죄에 구분이 있다는 것이죠. 돌이킬 수 있는 죄와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죠. 우리아의 생명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속죄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10만원의 사기를 쳤다면, 그리고 그것을 보상할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속건제에 해당합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고, 동시에 당사자를 찾아가 자신이 피해 입힌 것을 보상하고 그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이죠. (레 5: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레 5: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물건에 대한 범죄든 사람의 재산에 대한 범죄든, 속건제 역시 그 죄를 깨닫는 날에 즉각 드려야 합니다. 속건제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범죄한 물건에 5분의 1을 더하여 보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물건일 경우에는 5분의 1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보내야 하고, 사람의 재산일 경우에도 역시 5분의 1을 더하여 당사자에게 보상해야 합니다. 일종의 합의금과 같죠. 삭개오를

기억하시죠.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삶의 대전환을 고백합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에 대하여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는 회개를 입술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자신의 회개를 실제적인 삶의 변화로 실천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를 동시에 하겠다는 완전한 속건제적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 이 속건제는 삶에 여러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전도연 배우에게 칸의 여왕이라는 상을

안겼던 <밀양>이라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물론 그 영화는 기독교의 신앙에 대한 비판성을 담고 있기에 아픕니다. 그런데 저는 필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는 사별 후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과 이사 오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없는 형편을 들키기 싫어서 허세를 좀 부리게 되죠. 그런데 그 허세에 아들이 다니던 학원 원장은 신애가 진짜 돈이 많은 줄 알고 아들을 납치하게 되고, 신애는 실제 돈이 없어서 납치범의 요구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아들은 죽게 됩니다. 원장은 범인으로 잡히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됩니다. 신애는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었으니 자포자기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한 교인의 전도로 교회를 나가게 되고, 거기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되죠. 그러다가 신애는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한 구절에 마음이 머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신애는 굳은 마음을 먹고 범인을 만나러

교도소로 면회하러 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그 범인을 용서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면회를 가서 만난 범인은 신애의 생각과 달리 너무 평온한 모습으로 신애를 맞이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님, 저도 이곳에서 주님을 믿고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애는 정작 그 범인으로부터 어떠한 사과도 받지 않고, 용서도 못 해서 힘든 세월을 보냈는데... 정작 그 범인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다 고했고 용서를 받아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신애의 방황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벌레 이야기는 기독교의 값싼 회개에 대해서 꼬집는 것이 중심주제입니다. 즉 기독교의 회개가 너무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 아닌가. 즉, 하나님께 회개한 것으로 자유를 얻어 살아가면서, 정작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피해자의 아픔은 돌보지 않는 그 이중성을 꼬집지요. 저는 <벌레 이야기>와 <밀양>의

고발에 대해서, 기독교의 목사로서 그것은 우리 교회가 성도들에게 잘못 가르쳐온 것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여왔던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등한시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속건제는 바로 그러지 않아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속건제를 적용해본다면, 우리는 이웃과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를 구하고,

이웃에게도 진실한 용서와 필요한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더 나아가 이런 예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보상하려고 해도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형편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오래전 성경공부 시간에 속건제에 대해 설명한 다음 날,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성도님이 상담을 청해 왔다고 합니다. 이분은 예전에 살던 동네 사람들에게 사업 자금을 빌린 뒤 사업이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몰래 도망치듯 그 동네를 떠나서 지금까지 잘 숨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배우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아 상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에게는 빚을 갚을 능력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빚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일평생 걸려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형편인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빚을 갚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갚지 못하는 것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속건의무를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인해 인간 간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갚을 돈이 없어도 그냥 채권자들을 찾아가십시오. 현재의 형편을 다 털어놓으시고, 몰래 도망쳤던 것을 깊이 사죄하십시오. 비록 빚을 갚지는 못하지만, 그분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것이 바로 속건제입니다.” “좀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그 사람 중에는 난폭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그런 식으로 찾아갔다가는 필경 몰매를 맞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빈손으로 찾아간다는 것은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이 없을 때도 속건의무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람들에게 몰매나 맞도록 내버려 두시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때,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위함입니다. 두려워 말고 그분들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심정으로 사죄하면 그분들도 이해해 줄 겁니다. 혹 누군가 뺨이라도

때리면 두말 말고 맞으십시오. 시간이 걸려도 오히려 그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될 겁니다.” 며칠 후 다시 이 목사님을 찾아온 그 성도님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녀왔습니다. 욕하는 사람 하나 없었고요, 빚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며 모두 격려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저는 이 이야기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끊어내고

살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회개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막 살아도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구태여 당사자를 찾아가 사죄하게 하시는가? 구차한 사죄의 과정 없이 당사자와의 관계를 그냥 회복시켜 주시면 더 좋지 않은가? 빈손으로 사람을 찾아가 자신이 저지른 금전적인 잘못에 대해 사과한다는 것은 정말 피를 말리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경험해 보지 아니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경험해 본 사람은 다시는 금전적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피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금전적인 잘못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주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 속건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일한 범죄를 쉽게 반복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속건의무를 명령하시는 것은 인간을 골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빌레몬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인의 돈을 훔친 오네시모로 하여금 빈손으로라도 주인을 찾아 속건의무를 다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원래 빌레몬이란 사람의 노예였는데, 주인의 돈을 훔쳤음을 같은 감방에 있던 바울에게 고백한 것이죠. 얼마나 용기 있는 고백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출옥하는 즉시 주인을 찾아가 사죄할 것을 명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노예가 도망치는

것만도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일인데, 주인의 돈까지 훔쳐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주인을 찾아가 직접 사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피가 마르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오네시모는 필요하기만 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범죄를 얼마든지 저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오네시모가 훔친 금액을 자신이 변상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입니다. 이는 바울이 정말 오네시모를 사랑하였고, 인간에게 속건제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해야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까? 그의 가까운 친족에게라도 하십시오. 혹시 그마저도 없어서 속건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아십니까?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친족을 찾는 노력 끝에도 할 수 없는 경우, 하나님께 해야 한다면

신약에서는 그 방법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러분이 혹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며 기뻐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이 범한 잘못으로 인해 누군가 고통당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속건제를 드릴 수 있도록 결단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밀양에서 신애가 신앙에서 멀어진 후, 어떤 기독교 집회에 가서

몰래 트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입니다.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 왜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너희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할까요?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 밀양이라는 영화를 접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세상이 보기에 잘못되었는가? 예수님이 그러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용서를 말하지만 진정한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세상 앞에 나타나고 보여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써 따랐을 때도 시련도 오고 고난도 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삶과 전혀 다른 이상한 기독교적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놓고, 내가 핍박받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 대해서 마땅히 행해야 할 상식도 행하지 않으면서, 좋은 신앙인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 교회가 with God, with Neighbor를 외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더 좋은 사귐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타협할 수 없지요.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을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주를 위해서 더욱 힘써 행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이타적이어야 하고, 그들보다 더 삶을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에 대해서 나누면서 ‘속건제의 신앙’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진짜 예배는 어쩌면 이 예배가 끝난 다음부터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도하셔야겠지요?

하나님의 힘을 구해야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그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 앞에 감당할 수 없는 내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그분께서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힘쓰는 여러분에게 반드시 함께 하시며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구하며 함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