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역사서라고 불리는 책이 5권인데, 예수님의 삶에 대해 다룬 책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역사서라는 이름처럼 그 책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4권인데 반해, 예수님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서는 한 권뿐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 외의 신약성경은 ‘서신서’라고 불리는 편지들인데, 그 편지들의 배경은 예수님의 사역 시대가 아니라 그 이후의 시대이니, 모든 서신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 또한
사도행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여러모로 사랑받는 책입니다. 우선, 제가 참 좋아하는 책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잖아요. 사도행전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는 삶을 경험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어진 시대를 감당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부분에서 큰 도전을 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가 탄생하는 것도 사도행전이죠. 제가 ‘첫 번째 편자’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어떤 대장장이가 여행을 가면서 조수를 불러다 자신이 만든 편자를 주고서 똑같은 모양으로 100개를 만들어 놓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조수가 편자 100개를 만들었는데 주인이 처음 준 모형과 모두 다른 모양인 것이죠.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수가 주인의 편자 모형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약간 달랐지만, 꽤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것은 바로 전에 자신이 만든 것을 모형으로 삼아 만들었습니다. 그다음은 또 새로운 것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다 보니, 결국 주인이 준 모형과 모두 점점 더 다른 모양의 편자를 만들게 되어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편자가 초대교회이기에 우리는 그 교회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설교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여기에 최초의 교회, 최초의 제자, 최초의 이방 선교가 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도 참고할 수 있지만, 가장 본질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최초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께 복음을 듣고 배웠던 사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 첫 번째 제자들의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유대교의 오랜 틀을 깨고 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모두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기대를 갖고 사도행전 첫 설교를 엽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주는 능력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1. 두 번째 책 얼마 전에 ‘범죄도시 4’가 개봉해서
저도 성민 형제랑 보고 왔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인간관계와 구도를 이해하려면, 전편의 내용을 알아야 하죠. 사도행전 또한 2편짜리 연속된 기록물의 후반부입니다. (행 1:1) 데오빌로님, 나는 첫 번째 책에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을 다루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그러면 먼저 쓴 첫 번째 책이 있다는 것이죠. 서론을 보면 짝을 맞출 수 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눅 1: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눅 1: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눅 1: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눅 1: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사실상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권을 통합해서 ‘누가행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1-4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사도행전 전체의 서론인 셈입니다. 누가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의 삶을 목격하고 복음을 증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누리고 깨닫게 된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애는 한계가 있잖아요. 당시에는
수명도 짧았고, 박해 등으로 그보다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그것을 기억하며 나누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었는데, 그 첫 번째 목격자들이 이제 세상을 많이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지속적으로 전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어떤 사람이었냐? 의사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대충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사 서술
목적에 부합한 자료들을 선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정리하여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가장 역사적 성격이 잘 나타나는 기록물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중간중간 당대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눅 1:5) 유대왕 헤롯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눅 2: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눅 3: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행 11:28)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일어나,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그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들었다. 누가의 이런 성향 덕분에 우리는
이 일을 당시의 정치적 연대기와 연결 지어 이해할 수 있는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변천사는 제 블로그에 가면 다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에 그렇게까지 부담스럽지 않지만, 저희의 초창기에는 전체 예배 인원이 10명도 안 되던 때도 있었고, 공간도 지금보다 훨씬 작은 곳에서 예배를 드렸죠. 그때는 간판을 보고 교회를 오는 사람도 없었고, 설령 겉에서 보고 교회라고 인지해도, 딱 봐도 너무 작아 보이니까 선뜻 방문하여 예배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냐? 블로그를 보고 고민하다가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왜냐하면 블로그를 보면, 우리 공동체가 어떤 마음으로 시작되었는지, 그 이야기들이 있으니까요. 글이 가진 힘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주하지 않아도, 글을 통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성경은 단순한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런 마음을 주신 것도, 또 집필하는 과정에 함께하신 분도, 그것을 교회의 정경으로 보존하신
분도 우리는 성령님이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시작을 보면 모두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죠. 아마도 궁금증을 갖는 부분이 있을 텐데요. ‘데오빌로’입니다. 도대체 ‘데오빌로’는 누구이기에 누가가 이 책을 ‘데오빌로’를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지입니다.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우선 ‘데오빌로’의 이름 뜻이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혹은 당시 고귀한 인물이나, 자신의 후견인에게
책을 헌정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실제 어떤 사람에게 이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경우 데오빌로가 실제 이름일 수도 있고, 혹은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누군가의 예명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다양합니다. 어쨌든 그가 대표 수신자이지만, 그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누가행전의 내용은 데오빌로(개인 혹은 모든 그리스도인)를 포함한 보편적인 사람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두 번째 책이므로, 누가복음의 끝부분에서 연결됨이 당연하겠죠.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가기도 하시고, 열한 제자에게 찾아가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약 말씀을 배경으로 일어난 일을 설명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메시지로 끝이 납니다.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2. 복음 리터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주를 따르던 길에서 주저앉거나,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말씀으로 회복하십니다. 제자 대부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도망치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진 참된 의미를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르시는 것이 주님이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스승이 세상의 권세 앞에 처참하고 힘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도망하여 숨어버렸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런 법입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들었으나, 그것을 진리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기보다 두려워했습니다. 십자가도
하나님 나라 이야기도, 들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이 믿음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지만, 그것 자체를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 진리를 정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통해 십자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진리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언제 깨닫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실 때 다시 변화가 일어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며 확신하게 됩니다. 이해 → 믿고 받아들임(회심) → 확신 저도 복음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들었겠죠. 그리고 놀랍게도 저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다짐했습니다. 가르침을 이해한 것이죠. 그러나 그 다짐은 그냥 다짐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내 삶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진심을 다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확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따르며 가르침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왔을 때는 예수를 버립니다. 그들에게 진짜 변화는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신앙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 도망쳤던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에 헌신합니다. 진짜 변한 것이죠. 누구나 이 과정을 겪습니다. 저는
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험하고 하나님 안에 속한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데도, 내 삶을 내어드리면서도 기뻐하고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은 세상이 알 수 없는 뭔가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것입니다. 모르죠. 진짜 그냥 미친 건지. 아니면 자기의 삶에서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빛을 진짜 보았는지. 그러나 회심은 우리 안에 분명한
삶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하루하루 보면 모르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한 말씀이 이것이죠.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어쩌면 이 발견은 ‘우연한 발견’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은혜’이죠. 내가 능력이 좋아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만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 가치를 발견한 후 깨달았다면, 기뻐하며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그래서 김형국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한 대가지불은 ‘헌신’이 아니라 ‘상식’입니다. 만약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저 고난과 고통일 뿐이고, ‘힘들지만 억지로’ 그 길을 따르고 있을 뿐 기쁨이 없다면, 오히려 조금 멈춰서 고민해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듣고 좋아서 선택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를 단순히 고난으로 초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길에 고난이 동반될 수 있지만, 기쁨이 훨씬 크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ex: 결혼, 출산).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도 예수님이 없는 삶은 참된 기쁨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가시밭길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기쁨으로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안에서 조금 독특한
색깔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내 안에서 나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깨달아 진리가 선명해져야 합니다. 복음이 선명하게 내 안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함께하심을 통해 우리는 확신하며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부활 이후, 그리고 승천 이후 말씀하신 것을 종합해보면 딱 말씀과 성령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제자들의 참된 회심을 위해 ‘복음을 다시 가르치는 것’부터
하십니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밭의 비유이죠. 어쩌면 그들은 ‘돌짝 밭’이나 ‘가시덤불’의 상태였습니다. 누구나 신앙은 ‘길가’에서 시작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제대로 새겨듣지도 못합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몸은 앉아 있고, 눈을 저를 보지만, 말씀은 내 안에 하나도 심어지지 않고, 온갖 잡생각이 가득하다면, 길가이죠.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히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그 단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말씀을 우선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한 스스로의 결단과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돌짝 밭’은 말씀은 잘 들어요. 말씀을 듣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삶까지 가져갈 만큼 말씀을 내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면 말씀은 싹 잊어버리고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말씀은 듣지만, 말씀대로 사는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에서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적용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상태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가시덤불’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는 삶도 조금 경험합니다. 그래서 싹이 난 것처럼 영적 변화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온갖 욕심이 찾아올 때, 그것에 가로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다가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여러 문제를 말씀과 신앙으로 해석하고 다루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두려움에 가득 차서 떠나버린 열한 제자나, 자기 뜻대로 예수님이 하시지 않자, 예수님을 버린 가룟 유다는 어쩌면 가시덤불의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이전 단계이거나요. 저는 많은 신자들이 이 상태에서 한 단계를 더 나가지 못해서 하나님이 진짜 우리에게 주고 싶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성공을 위한 초석이 되곤
합니다. 그 실패를 딛고 넘어서면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좌절하고 주저앉은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선명하게 가르치시며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었는지 깨닫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것은 이벤트를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로마제국 여기저기 다니시며, 하늘을 날아다니시면서 “내가 너희가 못 박은 예수다”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회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경험에만 의존하는 신앙은 일상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믿음’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믿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믿음은 그 진리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내게 ‘강한 믿음’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내 삶으로 화답하며 수용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 복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내게 교회가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누구하고나 주님이 주신 말씀을 나눌 수 있잖아요. 이곳에서 저와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유익은 ‘복음’을 듣고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제 삶에서 시간을 쓰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너무나 소중한 일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다른 분들도 어쩌면 저보다 더 잘할 수 있죠. 모여서 노는 것도 너무나 중요해요. 원래 놀면서 신앙은 깊어지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제가 없더라도 잘 놀 수 있으면,
제가 거기에 애써 시간을 쓰지는 않습니다. 일단 성도님들이 대신할 수 있는 역할은 저에게 차순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복음을 알고 싶어서 저에게 요청한다면 저는 가장 먼저 거기에 시간을 쓸 것입니다. 실제로 제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이렇게 설교를 통해 복음을 나누기 위해 힘쓰는 일과, 일대일 양육을 통해 복음을 나누는 일, 그리고 복음을 나누기 위해 힘쓰는 여러 모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와 복음에 대해서 나누고 싶다고 하면, 저는 어떻게든
시간을 낼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반드시 내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약속입니다. 꼭 제가 아니어도 좋아요.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에는 저뿐만 아니라 참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의 복음 진보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수많은 양육자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쏟는 것을 보면 정말 큰 감사를 느낍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지 않습니까? 교회학교 교사들의 수고가 사실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나도 우리 애 가르치려면
스트레스 받는데, 다른 사람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쓰고, 또 여러분들이 예배 잘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을 돌봐주고. 저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부모님들이 이 사랑받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이를 돌보는 교회 교사들에게 5월에 커피라도 한잔씩 꼭 대접하십시오. 적어도 우리가 그 사랑의 수고를 기억해줘야죠. 그리고 지난주에도 숙제로 이야기했지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라면 모여서 그 특권을 누리십시오.
부부 안에서 나누십시오. 자녀들과 나누십시오. 교인들과 나누십시오. 그것만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삶의 이야기도 풍성히 나누십시오. 그러나 복음도 함께 나누십시오. 그것이 복됩니다. 3. 보혜사 성령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구약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했고, 신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 약속을 지켜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메시아에 대한 헬라어 표현이니, 예수 메시아라고 성경의 저자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죠. 인간으로서 성자 예수께서 하셔야 하는 구원의 사명은 복음서를 통해서 모두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부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약속하고 가르치십니다. 알아야 누리기 때문입니다. 알지 못하는 영을 누리는 것은 ‘신내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옛날부터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함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양심도 그런 개념이죠. 동물이 양심에 찔려서 ‘신이 날 벌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합니까? 그냥 본능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동물입니다. 강아지들도 주인 눈치나 보지,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은 안 한다고요. 우리의 신앙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지몽매한 예배나 기다림이 아니라, 너무나 선명하게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사실에 대한 인격적 반응입니다. 성령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 안에는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엄청납니다. 일단 가장 흔한 오해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보다는 나에게 임하는 어떤 ‘능력’, 혹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특별한 경험’, ‘은사’ 이런 것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령을
받는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럼, 질문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가 원하지 않는데 오실 수 있나요? 아니요. 원하지 않는데 오면, 그것은 무단침입죄입니다.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언약 관계’입니다. 언약이 확 와닿지 않으면 계약관계입니다. 부부도 계약관계입니다. 함께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기로 계약하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 권한을 함부로 부여할 수 없고, 서로의
관계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구약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를 약속합니다. 그 계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 세상 밖에 계셔야 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오셔서, 지속적으로 동행하게 되신 것입니다. ‘신의 현현’을 구약 이스라엘은 보며 살아갔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누리도록 하여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서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와 복음을 세상 안에 나타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데 있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 공동체가 그 수혜자이자 증거자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막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해서 살아가면서 천막이 아닌 건물로 바뀝니다. 그것이 ‘성전’이죠. 건물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물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머무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뿐이죠. 또한 건물 성전은 진짜 성전에 대한 준비였습니다. 모델 하우스 같은 것이죠. 진짜가 오면 그림자였던 건물 성전은 이제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진짜가 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신약에서는 진짜 성전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요. 하나님이 건물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셔서
자기와 소통하게 하셨다면, 이제는 사람의 몸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죠. 기존 건물 성전 중심의 언약 관계가 예수님에 의한 새로운 언약 관계로 바뀌기 때문에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을 ‘새 언약의 백성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우리가 오늘 주님이 가르치신 성찬을 행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어지고, 그 언약 백성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누리는 방식도 구약과 달라집니다. 옛 언약에서는 성전으로 사람이 나아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누렸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사람 안으로 하나님이 영으로
찾아가 거하시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새 언약에서 성전은 건물이 아닌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고전 6: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성전을 그들 안에 두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움직이는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분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로 가르치시고, 실패할 때는 찾아와서 다시 복음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렇게 우리가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보혜사. 우리를 돕는 분.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을 받는 것은 내게 어떤 아이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어떤 특기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격입니다.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마치 사람이 사람에게 속삭이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가
들었던 복음이 생각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인격적인 성령은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데 무단침입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진심으로 결단합니다.” 회심의 고백을 하고, 이제 내가 주인 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받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가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성령 받으라’라는 이야기는 사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믿어 회심하십시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바로 그 회심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혹시 나는 지금 예배하고 있으나, 내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는 마음이 드시는 분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누구보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게 하고 싶은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잃어버린 자녀를 애타게 찾으며, 그 자녀가 다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저는 그런 분들이 이 안에 계신다면, 사도행전을 함께 나누며, 복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그런 분들에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행 2: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이 소중한 예배를 통해 나누었으니, 삶에서 말씀을 기억하며, 회심이 필요한 자들은 한 걸음 더 주께로, 이미 회심한 자들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