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설교의 본문은 <에스더>입니다. 에스더는 그래도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교회를 다니면서 특별히 주일학교 시절에 한 번쯤 만나봤을 내용입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이름이죠. 특별히 여성의 이름입니다. 에스더서와 룻기가 여성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 된 경우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땅에서 살아가는 이방 여성 이야기를, 에스더는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도 특징적입니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저자가 정확하지 않은 책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서는 저자도 정확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와 함께 정경으로 채택되는 데 있어서 많은 논의가 있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유일하게 ‘부림절’이라는 유대인 명절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책이고,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섭리적으로는 강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구약의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우선 에스더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로 언약한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을 대체할 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더 좋아보이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돌이나 나무와 같은 어떤 종교적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의지하는 대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공과 성취, 돈과 물질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도 그렇죠. 깨어진 세상이 주는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통해서 나 자신을 채우려 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집착이 되기도 하죠. 어느새 자녀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부부, 연인, 친구를 포함한 수많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나를 중심에 두는 삶은 결국 하나님을 배제한 자아숭배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도 그들에게서 자신을 숨기십니다. 그러자 약육강식의 세상 가운데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탐욕적인 정복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결국 앗수르 시대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시대에는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아예 자신들의 본거지로 끌고 가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남유다 왕국 대부분의 백성은 머나먼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영원할 것 같았던 바벨론도 또 다른 강대국의 출현 속에 쇠퇴하게 됩니다. 바로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바벨론을 함락시키고 난 후, 바벨론에 끌려와 있던 포로민들을 본토로 돌려보냅니다. 유대 백성들도 이때부터
세 번에 걸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죠. 가장 먼저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했던 1차 귀환민 입니다. 이들은 BC 538년에 귀환을 했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라 6:15) 성전 건축이 끝난 것은 다리우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이다. 이때가 BC 516~515년 정도로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때로부터 70년 만에 그 땅에 다시 유대인이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잠시 벌하셨지만, 그래도 70년이라는 제한된 기간의 징계를 끝내고 다시 돌아와 하나님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연대를 보지 않으면 포로 귀환이 빠르게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1차 포로 귀환이 BC 538년이라면, 2차 포로 귀환은 그로부터 80년 후인 BC 458년에 일어납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일이죠. 에스더 이야기는 바로 이 80년 사이에 페르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더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더 1:2)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히브리어 성경의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어로는 ‘크샤아르샤’이고, 그리스어로는 ‘크세르크세스’로 부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를 통치했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 시대의 통치자로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배경인 ‘수산 궁’은 실제로 크세르크세스가 자주 머물던 왕궁 중
하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왕을 사실 성경 외에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영화 300’에서 침략자로 나오며 스파르타와 ‘테르모필레 전투’를 벌인 왕이 크세르크세스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여성 문제로 유명한 왕이었으며, 왕비들을 자주 교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궁중은 음모와 암살, 후궁들 사이의 질투가 난무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전반적인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는 설명입니다. 아하수에로 통치
3년, 왕이 모든 총독들과 신하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 잔치가 무려 180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페르시아와 왕비는 ‘와스디’였는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술에 잔뜩 취한 왕이 사람들이 다 있는 곳으로 왕비를 오도록 합니다. 당시에는 여성과 남성이 별도로 잔치를 했고, 남성 연회에 여성이 나오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왕이 왕비를 부른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람들 앞에서 ‘전시’하려 한 것입니다. 와스디는 왕비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거절합니다. 그런데 이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오히려 모든 사람 앞에서 민망해졌죠. 그래서 그는 왕비를 폐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신하들은 왕의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더 1:17) 왕후가 한 이 일은 이제 곧 모든 여인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 왕후에게 어전에 나오라고 하였는데도, 왕후가 나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남편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더 1:18) 페르시아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가 한 일을 알게 되면, 오늘 당장 임금님의 모든 대신에게도 같은 식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멸시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더 1:19) 그러니 임금님만 좋으시다면, 와스디 왕후가 다시는 아하수에로 임금님의 어전에 나오지 못하도록 어명을 내리시고, 그것을 페르시아와 메대의 법으로 정하여, 고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왕후의 자리는 그 여인보다 더 훌륭한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서가 반포됩니다. 그리고 이제 새 왕비를 세우기 위한 공개 오디션을 엽니다. 에스더서에는 총 4명의 인물만 알면 됩니다. 먼저 아하수에로 왕에 대해서는 설명했고, 주인공인 에스더를 알아봐야죠. 와스디 왕비가 폐위된 후, 후궁들 모집하는 관리가 세워지고, 각지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왕궁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는 당시 페르시아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력자의 욕망이 교차하던 현실을 보여줍니다. 에스더서 또한 이런 것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에스더가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왕비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복수의 후보군이 순번에 따라 한 명씩 왕 앞에 나가게 됩니다. 왕과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 왕이 다시 부르지 않으면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에스더가 왕에게 나간 이후, 왕이 모든 여자 중 에스더를 가장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승’이라는 표현은 사실 적절하지 않습니다. 경쟁방식이 아니라 왕이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왕이 에스더를 만난 후, 그녀의 매력에 빠져, 에스더를 왕후로 임명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스더와 연관 지어 알아야 할 인물이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모두 유대에서 잡혀 온 사람들이며, 둘의 관계는 사촌입니다. 즉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사촌 오빠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부모를 잃자, 에스더를 입양해서 키웁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사촌간의 입양이나 보호는 흔한 일이었고, 모르드개는 사실상 에스더의 아버지 역할을 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서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역사 속에서 아하수에로는 재위 20년째에 궁전 내부에서 시위 대장과 환관들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즉, 그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아하수에로는 정치에서 멀어지고, 사치와 향락에 빠집니다. 그 결과 점차 실권은 고관들에게 넘어갑니다. 에스더서가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그만큼 불안정성이 컸고 권력구조가 허약했습니다. 어느날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그는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를 암살 계획을 꾸미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에스더에게 전하죠. 에스더는 왕에게 모르드개가 알려주었다고 말하여,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살린 공을 세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에스더서를 읽으며 알아야 할 4번째 인물은 ‘하만’입니다. 그는 ‘아각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아각은 아말렉 족속의 왕
이름입니다. 즉, 하만은 아말렉 출신의 이민자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과는 원수지간입니다. 반면 모르드개는 베냐민 지파이고 사울 왕의 후손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각의 후손인 하만과 사울의 후손인 모르드개 사이는, 사울과 아각의 싸움이 다시 이어진 셈입니다. 우선 실권자는 하만입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권 문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은 하만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만의 우상화에 대한 신앙 원칙도 작용했을 것이고, 혹은 아말렉 출신인 하만에게 무릎꿇기 싫어서, 혹은 하만이 보인 자기 신격화와 권력 남용에 대한 반발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만 또한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한 사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 싸움을 자신과 유대인의 싸움으로 생각하고,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진멸할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더 3:8)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의 여러 지방에 널리 흩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삽니다. 그들의 법은 다른 어떤 백성들의 법과도 다릅니다. 더욱이, 그들은 임금님의 법도 지키지 않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들을 그냥 두시는 것은 유익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3:9a) 임금님께서만 좋으시다면, 그들을 모두 없애도록, 조서를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만은 유대인을
명시하진 않았지만, 왕에게 제국 안의 ‘위험 세력’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올려 조서를 받아냅니다. 제비를 뽑아 정한 날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해도 좋다는 명령은 곧 제국 전체에 반포됩니다. 이는 유대인 전체를 진멸하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제비 뽑은 날이 아달월 13일, 12월 13일입니다. (더 4:3) 왕이 내린 명령과 조서가 전달된 지방마다, 유다 사람들은 온통 탄식하고, 금식하며, 슬프게 울부짖었다. 모두들 굵은 베 옷을 걸치고서 재 위에
누웠다. 이 상황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권면합니다. “에스더야, 지금이 바로 너의 때다. 네가 왕궁에 있는 것이 어쩌면 이 일을 위함이 아닌가?” 에스더는 처음에 이 일 앞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왕 앞에 허락 없이 나아가면 죽는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와스디 왕비의 사례가 있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에스더가 먼저 나선다면, 이것은 에스더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심부름을 온 사람을 통해 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신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모르드개의 ‘믿음’과 ‘강직함’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말은 어찌 보면 참 비정하게
들립니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을 딸에게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위험한 일이라면 “너는 나서지 마라”고 말릴 것입니다. “꼭 네가 해야 하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오히려 위축된 에스더를 사실상 꾸짖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던 안중근 의사가 의거 이후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할 때,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어라. 나라를 위해 딴마음을 먹지 말고 죽어라.” 사랑하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소명을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이 모르드개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은 구원받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것이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이 무섭다고
하여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한국에서 80~90년대에는 ‘교회 다닌다’라는 것이 긍정적인 인상을 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로 관계를 망칠 수 있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것이 오히려 불리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며, 진짜 그리스도인다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의 믿음의 고백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은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도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의 이 말이 에스더에게 전달되었고 에스더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에게 유명한 그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 4: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자신을 위한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는 모르드개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흔들릴 때, 방황할 때, 혹은 신앙의 길을 이탈할 때, 나에게 꾸짖어주고, 나를 바꾸기
위해 진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이야기가 불편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음을 이 말씀 안에서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르드개도 대단했고, 그 말을 듣고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하는 에스더도 대단한 것이죠. 또한 에스더가 나가지만, 공동체가 함께 금식하며 그녀의 믿음을 지지했습니다. 금식한 지
3일째 되는 날, 에스더는 왕께 나아갑니다. 왕이 궁정 뜰에 있는 에스더를 보고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웬일이오, 에스더 왕후, 무슨 소청이라도 있소? 당신에게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약간 아하수에로가 허세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말합니다. “우선 오늘 임금님을 위한 잔치를 하고 싶은데, 하만과 함께 오시면 좋겠습니다.” 왕이 수락하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잔치가 즐거웠던 왕은 에스더에게 재차 묻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간청이 무엇이오?” 이에 에스더는 “저의 간청은 내일 한 번 더 잔치에서 두 분이 참여해 주시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왕과 함께하는 특별한 손님이 되어 이틀 연속 왕비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하만은 마음이 아주 흐뭇했습니다. 그렇게 대궐 문을 지나는데, 문을 지키고 있는 모르드개가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만은 집에 오자 자기 친구들과 아내를 불러놓고 그날 잔치에서의 자랑과, 모르드개에 대한 분노를
쏟아놓았습니다. (더 5: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그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신하를 불러 자신의 통치에 대한 궁중 실록을 읽도록 명령합니다. 그 실록에는 왕을 죽이려고 했던 음모를 모르드개가 알고 고발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일을 고발한 모르드개에게 나라에서는 어떤 상을 내렸는가?” 이에 왕의 신하는 나라에서는 그에게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고 답을 합니다. 마침 그때 궁에는 하만이 ‘사형대 설치’에 대한 왕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입궁해 있었습니다. 왕은 하만을 부릅니다. 왕은 “존귀하게 할 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습니다. 자신일 거라 착각한 하만은 화려한 예우를 제안하고, 왕은 그 모든 예우를 모르드개에게 시행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만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가장
경멸하고 싫어하는 모르드개에게 자신이 가장 받고 싶었던 왕에 버금가는 예를 갖추어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또 그를 말에 태워 높이게 됩니다. 하만의 마음은 모멸감에 부글부글 한 상황이 되었죠. 그리고 그는 곧바로 에스더가 주최하는 왕비의 두 번째 잔치에 급히 참여하게 됩니다. 왕은 두 번째 잔치에 참여해서 묻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청이 무엇이냐? 말해보시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에스더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유대인이며, 하만의 계략에 의해서 반포된 조서가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한 것임을 알립니다. 즉, 자신과 모든 유대인이 죽음의 위기에 빠졌음을 알립니다. 왕은 그제야 에스더가 유대인이며, 하만이 죽이려 한 민족이 바로 왕후의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하만은 왕과 왕후 앞에서 사색이 되었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은 자리를 일어나 안뜰로 나갔습니다. 하만은 왕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려고 마음먹은 것을 알았기에, 그 자리에 남은
에스더 왕후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여성은 주로 낮은 침상 같은 좌석에 앉아 있었고, 하만은 왕후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었죠. 그 순간 다시 자리로 돌아온 왕은 그 모습에 대해 하만이 왕비를 범하려 한다고 생각하며 분노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달려와 하만을 체포합니다. 왕을 모시는 신하 하나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한 사형대가 있음을 왕에게 고합니다. 왕은 바로 그곳에 하만을 매달도록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만은 자신이 만든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법률은 왕의 이름으로 반포된 조서는 효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새로운 조서를 반포합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날에 유대인이 자신을 정당하게 방어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미 이 사건을 통해 왕비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며, 하만은 처형을 당했기에,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 8:17) 지방마다 성읍마다, 왕이 내린 명령과 조서가 전달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곳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날을 축제의 날로 삼았다. 그 땅에 사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유다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유대인 학살의 날, 그리고 이제 유대인이 자신을 정당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된 날. ‘부르’라는 제비를 뽑아 날을 정했기에, 이날을 유대인들은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구원의 날이죠. (더 9:32) 부림절에 관한 규정은,
에스더의 명령으로 이렇게 확정되고, 그것은 글로 기록되었다. 여기까지가 에스더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설교를 마무리하며,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르드개가 보였던 ‘강직함’을 기억합시다. 물론 이것이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위협이나 혹은 유혹의 순간마다 타협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먼저 자기 마음을 지키고, 또 그가
에스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모습과 관계 때문입니다. 혼자라면 우리는 더 약하고 넘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약속하고,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줄 때 우리의 신앙은 조금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둘째, 에스더가 보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는 그에게 있는 자리와 환경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안위와 자신의 성공에 빠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안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에스더는 다 가진 자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더라도 자신이 해야 하는 것에 헌신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입니다. 에스더서가 주는 가장 큰 신학적 묘미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에는 ‘하나님’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연히 와스디 왕비가 왕의 청을 거절합니다. 당시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로 인해,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우연히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이 됩니다. 왕후가 되는 것은 에스더의 의지가 아니라 발탁되어 끌려온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되는 과정에서도 특별히 더 뛰어난 준비나 노력의 묘사는 없었습니다. 모르드개는 평소처럼 왕궁 문 앞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왕의 내시들이 왕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장면을
듣게 됩니다. 왕은 모르드개의 제보로 목숨을 건지지만, 이 당시에는 정확한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부르’라는 제비를 뽑았을 때, 우연히 12월 13일이 나옵니다. 이때가 1월이었기에 11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이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이에 대해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할 계획을 세운 그날 밤, 왕은 우연히 잠이 오지 않아서 궁중 실록을 읽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때 모르드개가 자신을 구했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이 하만의 몰락과 모르드개의 존귀함을 역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하만의 만행이 발각되자, 하만은 에스더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애걸하게 되고, 왕은 그 장면을 보고 오해해 하만을 즉각 처형하게 됩니다. 에스더서는 이렇듯, 하나님이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어떤 이야기보다 강력하게 일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그 결과 부림절이라는 명절을 통해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연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 일상에서는 마치 없는
듯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열심. 이것이 에스더서가 고백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말하지 않으셔도 사실 말씀하고 계신 분입니다. 많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비추어주고 계시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오늘의 순간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