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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요

2025-05-04 · 시편 119편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랜만에 시편 설교를 전하면서, 시편의 중요한 특성을 먼저 잠깐 짚어보려 합니다. 시편은 말 그대로 ‘시 모음집’입니다. 이 시편 전체는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 5권으로 나누어집니다. (1권: 1–41편, 2권: 42–72편, 3권: 73–89편, 4권: 90–106편, 5권: 107–150편) 많은 학자들이 이 구성을 모세오경과 연결해 보고, 또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 여정을 비추는 이야기 구조로 이해합니다. 그중 오늘 우리가 보는 시편 119편은

제5권에 속해 있습니다. 이 마지막 권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다시 신앙을 회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말씀의 회복’이었지요.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일어난 부흥 운동은 바로 이 말씀 회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무너질 때,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결국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만의 고백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신앙에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 특별히 오늘 설교 제목을 ‘달아요’로 정했는데요. 시편 119편에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3절) 오늘은 이 말씀의 ‘단맛’을 우리가 다시 느끼고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19편은 무려 176절로 이뤄져 있지만, 이 안에는 정확한 규칙이 있습니다. 알파벳 22개 순서로 알파벳

하나마다 8절씩 묶어서 176절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가’로 시작하는 8개의 절이 끝나면 ‘나’로 시작하는 8개의 절이 나오는 식으로 배열된 것입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이유는 우선 ‘암송’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완전함과 질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오늘 시편 119편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말씀의 유익’을 7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삶의 방향과 기준을 준다. (시 119: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헬라어 ‘카논’은 ‘기준, 표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캐논(canon)’이 나왔죠. 성경을 캐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경이 신앙과 삶의 최종 권위와 기준이 된다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시대와 문화의 틀’ 안에서 쓰였습니다. 성경 해석의 기초에 해당하는 문구가 ‘Not to us, but for us’입니다. 우리에게

쓴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이죠. 우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쓴 것이니, 그 맥락 안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여 우리를 향한 메시지로 읽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해석의 오류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곧바로 문자적으로 지금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려다 보면 오류가 생기죠.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여자는 예배할 때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당시 고린도 지역의 문화적 배경 때문입니다.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이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거든요. 오늘날은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이런 부분에서는 행위보다는 원리,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함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려는 마음을 기준 삼아,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해석이 가능한 범위와 기준이 존재합니다. 사실 저도 맨 처음에는 이런 것을 몰랐어요. 그냥 말씀은 내가 은혜 되는 대로 해석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을 들어도 제가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말씀은 늘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게 되니까요. 저도 좋은 스승님들과 책을 만나며 비로소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신학대학원 시절에는 제가 ‘조교’를 했는데,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시험 채점입니다. 성경 관련 수업을 채점하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과 원리를 잘 이해하고 답을 쓰는 사람도 있으나, 말도 안 되는 것을 믿음으로 써놓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치 예전에 저처럼 말입니다. 또 누군가는 거기에다가

전혀 시험과 상관없는 개인의 신앙고백과 간증을 써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롭지만 다 ‘0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을 나에게 맞추려다 보면 실수합니다. 성경은 나를 기분 좋게 하고, 나를 긍정해 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나를 부정합니다. 나를 종종 수술합니다. 물론 내가 말씀을 붙들고 잘살고 있다면, 오히려 세상 가운데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을 때, 말씀은 그 길이 맞다고 ‘격려’해 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진리가 주는 위로이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비전에 대해 기도하기를 두려워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저한테 뭘 하라고 할까 봐 무서워요.”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일단 하나님도 시킬만한 사람한테 시키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성장의 때를 잘 아십니다. 신뢰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나한테 바꾸라고 말씀 안 하신다면 더 불안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세상, 누구 말이 맞는지조차 모르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은 기준이자 방향이 됩니다. 말씀이 어둠의 시대에 진짜 빛입니다. 2. 고난 속에서 깨달음과 유익을 준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신앙인들이 많이 고민하는 것이 ‘고난’에 대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답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워요. 고난을 겪는 이에게 위로 없이 설명만 하면 도리어 상처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는 우선 위로가 필요하고,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는 고난의 의미를 말씀으로 배우는 것이 유익합니다. 시편 119편도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이 다 겪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이 말씀이 기분은 안 좋아요.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니요. 그런데 우리는 또 동시에 경험을 통해 압니다.

고난 없이 성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교회도 아기가 계속 태어나고 있는데, 아마 아기를 얻은 기쁨이 곧 돌보는 과정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겠죠. “아기 키우는 것이 보통이 아니구나.” 누구나 아빠 엄마를 처음 하지만, 자녀를 키우다가 진짜 어른이 됩니다. 부부로 살아가면서 서로를 성장시킵니다. 왜요? 바꿔 말하면 서로에게 고난을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서로를 성장시킵니다. 함께함의 기쁨은 함께함의 어려움을 통과하며 만들어지니까요. 이렇듯

고난이 기본적으로 우리를 연단하고 성장시키지만, 특별히 신앙인에게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곤 합니다. 내 고난을 도와줄 사람이 많이 있으면 좋지만, 어찌 보면 사람을 통해 다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많죠. 오히려 사람을 통해 다 해결한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덜 오게 됩니다. 67절은 고난을 통해서 잘못된 길, 그릇된 행함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몸이 아프면, 식습관도 바꾸고, 생활 습관도 바꿉니다. 힘들어도 바꿉니다. 왜요? 고난 때문이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바뀌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인은 계속 바뀌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방향을 잡으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지나며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119:50) 주님의 말씀이 나를 살려 주었으니,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난과 스트레스, 우울과 불면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무너지는 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다시 일으킵니다. 3. 죄로부터의 보호막이 된다.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청년이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길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세상은 우리를 오히려 헷갈리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지지하는 의견만 듣고 살려면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찾아서,

내 뜻을 전문가의 뜻으로 포장해서 살아가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시대를 초월합니다.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죄의 열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동이잖아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누구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행동이 나오려면 우선 마음 안에서 어떤 작용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여기서 참으면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죠. 그래서 이것만 잘 조절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짓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내면에 분노, 화, 우울, 절망 등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괴롭혀요. 우리는 그것도 다루어야 하죠. 그러나 그것은 죄의 줄기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뿌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결단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묻고 행동한다면 죄를 이길 힘이 생깁니다. 우리 교회의 10-10-10 훈련도 그 연습입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바꾸는 열쇠입니다. 저도 개인 기도를 하면, 그냥 하나님 앞에 잠시 머물러 있어요. 하나님께 뭘 요구하기보다 그냥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 많은지 몰라요. 그래도 그 앞에 머물러 저의 자리를 다시 찾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으로 나를 바꾸려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4.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시 119:14) 주님의 교훈을 따르는 이 기쁨은, 큰 재산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큽니다. (시 119:77)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이니, 주님의 긍휼을 나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새 힘을 얻어 살 것입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를 하면서 한 번씩 던지는 질문이죠. 진정한 행복의 요소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4P로 불리는 것들도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즐거움, 인기,

성공, 돈. 모두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부분을 채우는 참된 만족을 주는가? 저것들을 누리면 참된 행복을 얻는가? 그렇게 물었을 때, 우리는 종종 고민에 빠집니다. 시편 기자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큰 재산을 가지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욱 큰 기쁨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두 가지가 시인에게 있어서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시인은 말씀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새 힘’을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넘어선 곳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 주님의 법,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는 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두 낮과 밤이 있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대략 교회 안에는 30% 정도는 영적으로 상태가 안 좋다고 합니다. 영적으로도 감기처럼 왔다가 지나가는 것들도 있고, 깊은 침체가 올 수도 있습니다. 감기 같은 것이야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이겨내지만, 깊은 영적 침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외적인 처방과 도움도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의 몸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회복되어야 하잖아요. 저는 ‘말씀’은 바로 그런 내면에 새 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다운이 와요. 그러면 저를 위한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저에게 힘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외적인 돌봄이죠. 그런데 근원적인 것은 저는 예배하려고 힘써요. 말씀을 붙들려고 힘씁니다. 그것이 주는 힘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쁨, 참된 즐거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바로 그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통로입니다. 말씀은 영혼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5. 지혜와 분별력을 준다. (시 119:96)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도, 모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은 완전합니다. (시 119:98) 주님의 계명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므로, 그 계명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내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해주십니다. (시 119:100) 내가 주님의 법도를 따르므로, 노인들보다도

더 슬기로워졌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싸우지 마라.”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후대에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며 만들어진 격언 같은 말입니다. 심국지가 보여주는 상황을 보는 안목, 전략적 판단, 지략이 탁월하니, 함부로 대적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뜻이죠. 저는 삼국지도 참 좋아합니다만,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지혜가 큽니다. 또한 여기에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완전한 것도 모두 한계가 있음을 배우기도 합니다. 전도서가 이를 말해주고 있죠. 공자는 삶에서 터득해 가는 지혜의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립] 서른이 되면 삶의 기반을 세우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된다. [불혹] 마흔이 되면 세상일에 쉽게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지천명] 쉰이 되면 자기 뜻만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 하늘의 뜻과 같은 더 큰

질서를 깨닫는다. [이순] 예순이 되면 어떤 이야기도 마음에 걸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과 포용력이 생긴다. [종심] 일흔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그것이 올바른 길과 맞아떨어지는 경지에 이른다. 이렇게 살아가기를 꿈꾸고, 나이만큼 성숙해 가는 모습도 있지만, 과연 일흔이 되면 뭘 해도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저는 평생에 걸쳐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던 사람이, 말씀과 함께 늙어간다면 그

말씀의 향기가 나는 사람에 대하여 저러한 존경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독보적인 인물 중 하나가 ‘손양원 목사님’이죠. 공산당이 자기 두 아들을 살해했을 때, 그 원수를 양자로 삼아 용서와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죠. 그런데 저는 그분의 그 모습이 한순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일찍이 ‘애양원’이라는 나병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여 살았습니다. 즉, 그분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살아낼까, 고민하며 살았기에,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의 극치가 나온 것이죠. 세상의 지혜는 오히려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원수를 갚으라고 이야기하죠.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온갖 합리성으로 접근하는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는 한순간에 녹여버리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6.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유지시킨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97) 내가 주님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것만을 깊이 생각합니다 만약 103절의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단 한 번도 저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한번 소망해 보십시오. 제가 주일에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좋은 것은, 제가 이 사역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말씀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보통 처음에 젊은 시절에는 ‘찬양’에 꽂힙니다. 그때는 찬양 시간만 즐겁고 말씀 시간은 괴롭기도 합니다. 신학교에서도 20대 초반에는 모두가 찬양 사역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찬양은 좋지만, 사실 그때 찬양만 좋아했던 것은 말씀과 친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제대로 알아가면서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알아가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저 또한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더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기에 힘썼고, 또 그것을 잘 전하기 위해서 고민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것은 당연하죠. 그러므로 때때로 제힘으로 할 수 없는 열심을 내어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제가 설교자가 된 이후 다짐한 것은 말씀 공부를 쉬지 않고, 말씀을 전할 기회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온종일 그것만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교회’이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모임은 어떤 모습으로 시작했을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말씀을 나누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였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말씀’에 대한 언급입니다. 각 교회의 리더인 사도들을 중심으로 모여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들은 대부분 다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이었어요. 초대교회 그러면, 오늘날 우리교회의 팸처럼

모인 것입니다. 특별히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말씀에 대해서 서로 나눔을 갖는 방식이었습니다. 말씀과의 사귐이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사귐이 있을 때, 그곳이 진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고 나눌 수 있는 모임이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어려울 수도 있고, 기다림이 필요할 수도 있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모임은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나눔 가운데 깊어져 가야 오래 갑니다. 그 나눔이 잘 안되면, 약화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가 가장 오래 동행하는 관계가 되는 법입니다.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있음을 서로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 주십시오. 7. 영원하고 확실한 소망이 된다. (시 119:89)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하늘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 119:160)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은 모두 영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영원하다’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에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를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기준점도 없고, 무엇이 옳다고 말하기 어려운 자기중심의 시대입니다. 정보는 넘치지만, 무엇이 옳은지 알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혼란과 불확실성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세대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삶은 너무 바쁘고 고단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살아내기 바쁜 세상입니다. 자율과 자유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은 방황하고 불안한 세대입니다. 이 시대 안에서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시간 따라 변하는 가치관이 가득한 시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앞으로 더 빠르게 변할 것입니다. 트렌드도 바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마 24:35)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면,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도 일시적 유행이나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독교 신앙에

오랫동안 고백되어 오던 것이 나의 진리로 고백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말씀이 정말 가장 흔들리지 않는 나의 기초가 될 때, 내가 그 위에서 가장 안전함을 고백합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진짜 최선을 다해 살아본다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입니다. 그것을 누리며 살아갈 때, 우리는 성경의 약속이 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성경의 모든 약속에 대해 신뢰하게 됩니다. 말씀의 영원성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세워줍니다.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자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말씀이 약속하는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편 119편을 통해 말씀의 유익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유익을 일곱 가지로 정리했었지요. 말씀은 삶의 방향이 되고,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가 되며,

죄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보호막이 되고, 참된 기쁨과 만족을 주며, 지혜와 분별력을 주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영원하고 확실한 소망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 사람의 관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혹은 말씀보다도 내가 앞서 있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감정이

기준이 되고, 세상의 소리가 진리인 것처럼 들리고, 내 안에 있는 욕망이 ‘옳은 선택’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잡아줄 수 있는 것도,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세상 가운데서 주를 따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앞에 기꺼이 패배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짜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보여주는 삶을 진짜로 갈망하십시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이 꼭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달고, 그 말씀이 나를 살리는 힘이 됩니다.” “말씀은 영원하며, 나는 그 말씀 안에서 소망을 품고 삽니다.” 요약하면 “달아요.” 말씀과 함께 사는 삶. 말씀이 이끄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 사귐의 교회와 모든 성도님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