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자료는 <신약의 파노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한번 도표를 봅시다. (*도표) 우선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명령을 성취해 가는 과정입니다. 사도행전 1:8이 바로 그 명령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지역을 크게 3개로 나눠보면
1) 예루살렘, 2) 온 유대와 사마리아, 3) 땅끝입니다. 예루살렘은 ‘도시’ 이름이고, 유대와 사마리아는 그보다 큰 광역 개념으로 마치 경기도와 같은 지명입니다. 그리고 땅끝은 이 당시에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하는 로마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성령이 임한 사람들이 그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취되어
갑니다. 이러한 복음의 확산 과정에 따라서 사도행전을 삼등분하게 됩니다. 1~7장, 8~12장, 13~28장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 과정마다 중요하게 사용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 사역은 ‘베드로’가 중심이 됩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역은 ‘빌립’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바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구분이 중요했던 것은 각 지역의 단계보다도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던 구약과 달리,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이 사도행전의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옆 동네에 사는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키워드로 보면, 교회가 확립되고, 옆으로 확산되고, 땅끝까지 확장되는 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1:8의 명령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후, 그것이 단계별로
성취되는 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자들 자신입니다. 제자들 안에 있는 일종의 선입견이 가득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그것이 성취되는 일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명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선 너희 힘으로 하지 말고 기다려라.’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이제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을 보내주시거든요. 그러나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조종당해서 안 하던 일을 갑자기 하게 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그분께 순종함을 통해서 늘 하나님의 일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령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성령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반대자가
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일하심과 사람의 순종이 어떻게 시너지를 내고, 또 때로는 부딪히고, 그런 상황에서 성령 하나님은 또 어떻게 길을 내시는지 이런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을 하시거든요.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달리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입성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였기에 실패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가나안으로 보내겠다는 뜻이 포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대를 통해서라도 기어이 그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시나요? 아니요. 그들을 회복시키고, 또 새로운 제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그럼 사귐의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우리가 연약하여 순종하고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꺾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더 시간이 걸려서라도 우리를 통해서 하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아니라 다른 교회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원래 하고 싶으셨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고 믿어요. 다만 제가 실패할 수 있고, 우리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어떻게 좇을까, 어떻게 우리가 담아낼까 치열하게 구하고, 치열하게 담아내려고 애쓸 뿐입니다. 하나님은 뜻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보호자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힘도 주실 것입니다. 사실상 그분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에 우리가 꼽사리를 끼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 : 레고 놀이) 다만 우리 개인과 교회의 위험성은 언제나 성령님의 뜻과 바람보다, 우리 개개인의 뜻과 바람이 앞설 때입니다. 사도행전에 교회가 처음 나오지만, 교회에 대한 약속은 마태복음에 나와요. 최초의 ‘교회’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 등장합니다. (마 16: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성도의 교회도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교회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성도들이 원하는 교회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또 그분의 거룩한 영인 성령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늘 우리의 질문이고 목표이고 애씀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과정도 그렇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이 모든 일은 시작되는데, 이 120명도 어떤 사람들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고,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며 일하시는 성령행전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각 사람이 성령의 임재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자, 정말 많은 사람이 그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을 통해 교회가 탄생해 버린
것이죠. 복음과 회심이 살아있는 공동체, 그것이 진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다른 것에도 힘을 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행사 잘하는 것도 아니고, 교제 잘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이 늘 이 안에서 공유되고 나눠지고 회심이 일어나고 복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모여 있고, 우리가 아무리 뛰어나게 사역하고, 아무리 친밀하게 동역해도 우리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교회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주인 됨 안에서, 복음 안에 새롭게 된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될까요? 아닙니다. 그럼, 반대로 사람을 통하지 않고 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성령님의 뜻을 좇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워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저의 관심도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다른 것은 조금 못해도, 다른 것은 조금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저는 이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원합니다. 저는 그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카톡의 문구를 바꿨어요.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복음을 전수받고, 회심을 하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일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죠. 그런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을 뒤흔듭니다. 사도행전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이 사람들.’ (행 17: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어떤 시대에나 그 시대의 통념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로마 사회는 노예제로 운영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러한 시대의 문화와 삶의 방식과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질 수 있지만, 복음에 아무나 다 응답하고, 아무나 다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당시 시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사람도 급이 다 나뉘어서
주인과 노예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교회에는 ‘기쁨’이 있을까요? 아니요. 대부분 사람들에게 우선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들으면 우선 깜짝 놀라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라는 반응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민’도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을 바꾸는 문제 앞에서 아무런 고민도 없고, 아무런 탄식도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듣기는 들어도 내 삶에 적용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진지하게 복음을 마주하면, 전에 없던 고민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헌신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됩니까? 우리 안에 가장 필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과 나의 모습에 대해서 자각하며, 진리를 발견할
때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 진리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거짓된 진리만 보고 있을 때는 어떤 것을 받아들여도 늘 채워지지 않았는데, 진리는 우리가 전혀 포장하지 않아도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때로는 좀 우리가 부족하게 전해도 진리가 힘을 발휘해서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변호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잘 포장해서 팔아야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그 진리를 진리로 잘 전하고 잘 설명하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리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스스로 진리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다시 한번 당부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다 신앙인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노예제도를 지키려는 사람도 다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었으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삶의 부분은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편하고 좋으니까요. 진짜 질문했다면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바꿀 마음이 없고, 바꾸라고 할까봐 무서운 것이죠. 매번 이야기하지만, 순종하려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불순종하려는 사람은 ‘핑계’를 찾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내 뜻에 대해서는 모두가 방법을 찾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핑계’를 찾습니다. ‘이래서 안 돼.’, ‘이 사람 때문에 안 돼.’ 노예제도가 당연했던 시대에도, 누군가는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우리에게도 늘 질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 뜻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모험’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나의 기반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야 할 때도 있고, 나에게 있는 직업과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으며, 내게 있는 소유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나의 조국을 버리고 다른 민족에 합류하기도 했었던 것이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모험이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한 그 순간에 결코 우리는 혼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성령님을 바라보신다면, 그분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참으로 위로하십니다. 저는 그냥 여러분에게 이것이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내 마음이 참 슬프고, 속상하고, 화가 나고, 여러 가지 상황과 감정과 환경에 소용돌이처럼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을 늘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아요. 가룟 유다의 마음에 뭘 건드리면 시험에 드는지 알고 있고요. 베드로의 마음에서도 무엇을
건드려야 제자의 삶을 포기할지 잘 알아요.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초대교회의 충만함 가운데서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마음을 공격해서, 교회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게 만든다고요. 그래서 사도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를 내도록 만듭니다. ‘사도들이 유대 출신 사람들만 챙겨~ 너는 비유대 출신이라서 교회가 너는 안 돌봐주잖아~’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에 힘을 다하여 애쓰고 있는데도, 그 안에서 마음의 틈을 찾아내서 사람을 충동질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사탄이라고요. 저와
여러분에게 공격이 없을 것 같으십니까? 여러분은 제 마음이 얼마나 많은 사탄의 공격 앞에 서게 되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 옆에 계세요. 사탄만 내 옆에 있으면 저는 솔직히 KO입니다. 이미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옆에 계셔서 그분도 저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고요. 저는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이 별로 부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 성령님이 함께하심을 진짜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넓은 길을 버리고, 좁지만 진리의 길, 남들이 가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가치를 알기에 복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재미있는 이유는, 성경은 동화나 신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성경을 사람이 쓴 기록이 아니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공동체를 완벽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문학작품들은 어떤 존재를 신격화할 때, 초월적인 묘사나 무흠한 모습으로 그리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들의
못난 모습이나,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여러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합니다. 부정적인 요소를 삭제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저는 진리가 가진 진정성의 힘을 느낍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선배 개개인과 그들의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극복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이후의 명실상부한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였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는 시점에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치부가 공개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도록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베드로의 못난 모습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런 베드로가 성령님 안에서 어떤 존재로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주죠.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는 정말 멋진 사람이 되었음에도, 그 이후에도 어떤 부분에서 여전히 연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연약함이 없는 사람이 없고, 우리는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가시며, 그 안에서 우리 또한 성장시키십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실족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뽑으신 제자, 친히 양육하신 제자 가운데서도 이탈자가 나오고 배신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오늘날 누군가를 양육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그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목양한다고 해도 언제나 그 일이 성공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하지만 믿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세워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있던 시절부터 훗날에 가나안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안에 나타날 모습 가운데 이것이 있을 것이다.’ (신 15: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소망을 담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하늘의 뜻이 그들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으니, 그들은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 나라에 내어주십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의 회초리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로마제국 안에 있던 아무런 힘이 없는 이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 4: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행 4: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내가 내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물질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가기 마련입니다. 지갑의 방향이 내 마음의 방향이고, 마음이 없는 곳에 물질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헌금으로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헌금을 가르쳐야 하고, 헌금 생활을 잘하는 것이 대체로 신앙의 성장과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지만, 진실한 나의 고백, 나의 최선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저희교회도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가 작게라도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갈까 고민하면서 ‘지정헌금’과 ‘희년헌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정헌금은 각 성도가 물질을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제 많이 정착되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주에 누군가로부터 ‘지정헌금’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가 필요한 곳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를 통해서 재정을 받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응답이겠죠.
그러나 저는 받고 난 후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종착지가 아니라 정류장으로 쓰실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지난주에 받은 지정헌금은 저를 위한 격려와 위로로 마음을 잘 받았고, 그 봉투 그대로 저의 마음까지 보태서 다른 목회자분에게 드렸습니다. 저를 향한 한 분의 사랑이 저와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흘러갔으니 두 배가 된 셈이죠. 저희교회에는 희년 사역으로 ‘바나바 기금’이라는 제도를 운영합니다. 소액 긴급대출
프로그램입니다. 우리 교인이라면 위기의 순간에 100만원까지 무이자로 빌릴 수 있도록 돕는 제도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 가족들의 최후 보루로 있고 싶은 것이죠. 초대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돌봤던 것처럼, 작게라도 이 시대에 필요한 방식 안에서 고민하며, 작게라도 시작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2주 전에는 교회 밖의 어떤 청년으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이 내용을 본 것 같아요. 그 청년은 저하고 일면식도 없는 분입니다.
멀리 지방에 있기에 쉽게 만날 수도 없습니다. 메일로 사정을 듣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사실 확인도 하고, 우리 운영위원회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외부인이기에 위험부담도 있지만, 그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 우리가 한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의 필요는 100만원인데, 외부인이기에 이 기금으로 다 하기는 어려워서, 교회의 기금으로 반, 저의 목회비에서 반을 보태어 그 청년을 도왔습니다. 깨어진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속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만나서 처음 의도와 달리 기한 내에 갚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비추는 교회가 되고자 애쓰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도 ‘이건 그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야. 이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판단하기보다, 성령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따른다면 저는 이 시대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 믿습니다. 동일한 성령, 동일한 은혜, 동일한 명령. 어느 시대에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사용되는 통로이자,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방해자입니다.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 사도와 성도들의 포지션도 딱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따르면,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 후에,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요 안 가요? 안 갑니다. 왜 안 갑니까?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거든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싫거든요. 초대교회를 경험하고 누리는 유익은 맛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곧 자신들의 뜻이 앞서자, 성령의 일하심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를 늘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내 안에도 선교가 필요하고, 내 가정에도 선교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예루살렘에도 필요했어요. 그러나 거기에 머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돌아와야 할 탕자,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당장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사마리아 땅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내 마음이 원하지 않으니, 그곳으로 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복음의 수혜자와 증거자가 되자는 지난 설교를 통해, 여러분 마음 가운데 품은 사람들, 생각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주신 생각이라고 믿어요. 그런데 곧바로 사탄도 활동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언제나 모든 일에서 그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한계. 이 상황에서 성령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렸듯,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주도하고 계신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기억하세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사마리아 전도는 사람이
원해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당시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함 가운데 부흥했으나, 앞서 언급한 구제 관련 이슈가 터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복음의 다음 챕터를 준비하십니다. 교회 내부의 문제를 통해서 ‘헬라파 출신의 일곱 지도자’를 준비시키셨죠. 그들이 세워진 이유는 ‘구제’를 담당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스데반 박해와 함께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스데반을 미워하는 적대자들의 마음들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행 8: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행 8:4)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하나님이 적대자들을 통해서 스데반을 죽이셨냐?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건 분명 적대자들의 죄악된 행동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폭력이죠.
그러나 그 사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신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어떤 계획으로 사용될지 모릅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사건은 더 큰 박해로 이어지고, 그 박해를 통해 흩어진 사람들에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펼쳐집니다. 그들은 어쩌면 ‘설마’하는 마음으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에게 ‘유대인’ 외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달랐지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바꿉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저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정말 엄청난 영적 고수라고 느끼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사마리아 땅으로 가라고 할 때 일단 가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까 일단 전합니다. 그랬더니 자신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성령의 일하심을 봅니다.
자기 뜻을 꺾고 받아들입니다. 뒤에서 보시겠지만, 그다음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가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님 이후의 최고의 ‘권위’를 주셨다고요. 교회의 인간관계는 수평적인 형제자매의 관계이지만, 교회의 영적 권위는 분명하게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왜 그런 권위를 부여하셨는지가 사도행전에서 나타나요.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이 일을 하셔야 하는데, 그러면 누구부터 하나님이 바꾸셔야 하는가? 베드로이죠. 베드로가 경험했으니까 이 일이 후에 사도행전 15장에서 초대교회 지도자 전체 회의로 이어지고, 거기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죠.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와 베드로의 이방인 고넬료 전도에 보면 모두 사도행전이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행 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행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행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행 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사도행전의 모든 역사는 성령께서 주도하시고, 성도가 그 일에 순종함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더 나아가 이방세계로 전파됩니다. 누가 주도합니까? 성령님입니다. 누가 그 일에 참여합니까?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복음 전파에 참여합니다. 그럼,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은 누가 주도한 사건이겠습니까? 성령님입니다. 누가 그 일에 참여합니까?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목숨 걸고 이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이 당시에 한국이 이런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가 되리라고 알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누군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여러분을 향해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었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고 계십니다. 우리를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서 진리로 세워가십니다. 그렇게 세워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 시대에도 해나가실 것입니다. 쉬운 일은 결코 없고, 우리가 가는 길도 우리의 연약함과 사탄의 방해와 깨어진 세상의 저항 앞에 수없이 가로막히고 수많은 좌절의 순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모든 길에 성령님은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의 삶과 이 시대에도 성령님은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다른 시대이지만, 같은 성령님께서 주도하고 있습니다. 전도가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안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신화에 불과하며, 이 과학주의 시대에 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신이 실제로 계셔도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신앙과 불순종은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아도 부인하는 것이 사람들의 악함이며, 하나님이 주인 되는 꼴을 못 보고 내가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틀어쥐는 것이 사람의 악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조금 일하시면, 그것이 나의 업적과 능력인 것처럼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에서 조금의 어려움만 만나도, 신은 무능하고 나를 버렸다며 원망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비진리를 일깨우며, 참된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는 통로임에도…. 오히려 세상의 비진리가 교회 안에 힘을 발휘하며, 세상과 교회가 구분이 안 되고, 교회가 세상만도 못하기도 합니다. 신자와 비신자가 삶의 방식에 아무런 차이도 없고, 추구하는 것조차 똑같은 그런 모습들이 만연합니다. 성령님이 정말 이 시대에는 주무시고 계십니까? 성령님이 이 시대에는 안 통하는 그런 분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뜻은 주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영은 함께하시지만, 그분 앞에서라면 정말로 나의
생각과 고집과 기준을 내어놓고 복종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교회와 성도는 맛을 잃은 소금같이 그저 겉으로 존재만 할 때가 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을 때,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고, 그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 세상이 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붙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상과 다르기에, 그들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기에 세상이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과 다른 삶의 태도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공동체. 지금
이 시대에 누가 그리스도인 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지금도 성령행전이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펼쳐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