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자기중심성" / 강정규 목사

2024-05-2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신학을 공부하며 성경을 연구하는 것에 빠지게 되었고, 성경을 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성경전문대학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있음에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곳에 가게 된 것은 그만큼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곳 선배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성경을 배우러 이 학교에 왔는데, 사실상 교회론을 배워서 나가게 되더라.’ 실제로 지금 돌아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학문적인 성취도 있고 지식도 습득했지만,

그곳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도 배우고 정리하게 되었고, 또한 목사가 어떤 존재인지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이야기는 ‘40세 목사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30세였는데, 한국교회는 30대 초반이면 목사가 될 수 있지만, 당신들이 지금 목사라고 불린다고 해서 스스로 목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단순히 성경교사가 아니라, 목양자가 되려면 적어도 마흔은 되어야 삶을 이해하고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당시

저에게 그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위로였어요. 나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으니, 조금 서툴고 실수하더라도 스스로를 조금 기다려주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마흔이 되기까지 인생도 경험하고, 결혼해서도 15년 정도 시간이 지났고, 아버지가 된 지도 그 정도 되고, 또 목회하며 이런저런 경험도 쌓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목양하다 보니, 그때 저의 스승님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성경교사가 되기에도 내공이 필요하지만, 특별히

목양적 설교는 삶에 대한 이해가 생길수록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절실히 느끼는 것을 쉽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현재 모습에는 이유와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사고방식, 삶의 태도, 어떤 습관을 갖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 즉 현재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만 집중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 이 사람은 저런 사람. 그것이 마치 이 사람에게 결정된 모습인 것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현상을 받아들인 것에만 집중했고, 그러다 보니 다양성은 받아들였으나, 변화의 가능성은 크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현상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이해하다 보니, 결국 모든 사람의 삶에는 어떤 ‘과정’이 있어서 깨어지기도 하고, 어떤 ‘과정’이 있으면 회복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목양적으로 저에게 굉장히 필요했던 깨달음이었는데, 왜냐면 현상에만 집중하면,

만약 그 현상이 지금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모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모난 부분’이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이 사람은 깨어짐이 있었던 사람, 회복이 필요한 사람, 회복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기대하게 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이후로 사람들의 ‘가능성’에 조금 더 소망을 갖고, 그것을 위해 나를 헌신해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사도 그렇습니다. 현상에 집중하고 본질을 놓치면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됩니다. 우리가 모두 갖는 질문,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마찬가지로 현상보다는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설교로 다룬 주제는 ‘깨어진 세상’이었죠. 깨어진 세상은 ‘현상’입니다. 깨어진 세상 속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도 상처투성이고, 고갈되어 있고, 날이 서 있습니다. 이것은 다 현상이에요. 현상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상을 이해한다고 현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한 걸음 더 본질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올해 저희 교회가 결혼이 풍년입니다. 8월에도 2쌍이 결혼을 하고, 10월에도 결혼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 진이 빠질 만큼 준비를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어요,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것이 결혼이죠. 그런데 전 인류를 사랑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한국인을 모두 사랑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딱 한 명, 내가 좋아서 선택한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우리는 쉽지 않음을 곧 느끼게 됩니다. 결혼 후 많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체념한 상태로 살아가곤 합니다. 때로는 원수처럼 싸우기도 하고,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 결혼했는데도 외롭다 느끼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참고 참다가 황혼에 이혼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또 이런 깨어짐은 가정의 불화를 보고 자란 자녀들에게, 결혼에 대한 소망을 앗아가는 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내가 선택한 그 단 한 사람 사랑하기도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이 사람 사랑하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요. 여러 분석과 진단과 해석이 있겠으나,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면, 인간의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생명을 다해 사랑하겠다는 부부도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차이를 보이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것 또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태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선하게 살고 싶은 욕구나, 양심, 내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려는 노력 등도 있어서, 보통 때에는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고, 양보도 하고, 선행도 베풉니다. 그러나 내 명예가 걸리게 되거나, 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가 가진 본성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내 이익이 침해되거나, 더 큰 이익을 얻고 싶은 순간이나, 나의 명예나 자존심과 관련된 부분에서 숨겨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죄의 특성은 죄와 죄가 만나면 죄책감은 사라지고 용기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신자도 거룩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자신의 세속적인 모습을 쉽게 인지하고 자기를 살피지만, 주변에 세속적인 사람들이 많으면 죄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도 겉모습만 교회일 뿐 안에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득세하면, 곧 그곳도 세속적인 곳, 교회이나 교회가 아닌 곳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성도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인데, 이것도 만나서 한 목적을 위해 발휘되면 더욱

거칠게 나타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자기중심성이 당연한 것이고, 똑똑한 것이고,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깨어진 교회를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당이 생기면, 예전의 선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지는 것을 저도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저는 가끔 교회가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찌 보면 정말 성령의 능력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리해보면, 인류가 교육, 과학, 경제, 제도 등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어도 늘 더 큰 위험 요소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약육강식의 세상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근원이 자기중심성임은 풍삶초에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자기중심성의 반대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삶, 즉 하나님이 주인됨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성은 내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가는 나 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죠. 모두가 자기가 중요하고 자기의 이익을 앞세우면, 서로 충돌하면서 ‘세상의 원리상 힘이 강한 사람’이 위로 가고 누군가는 아래로 갑니다. 그렇게 되면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죠. 피라미드화 됩니다.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또 그 안에서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위에도 싸움 밑에도 싸움합니다. 점점 더 이기적인 모습이 일반화 되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약자는 결국 밀리고 밀려서 그저 강자의 자비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힘의 논리에 의한 역사는 다분히 많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설명되듯이, 돈이 힘이 되어 버린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는 어떤가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상징합니다. 살인도 강간도 성공한 권력이라면 용인되고 죄를 묻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러다 보니,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강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온갖 애를 쓰는 이유는 경쟁사회 속에서 약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력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는 한국의 입시 지옥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 경쟁 사회에서 승리하면 행복한가? 100명이 있으면 그중에 1명이 잠시 행복할 뿐입니다. 그 1명도 계속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과 또 그 세계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피라미드 게임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서울대에 갔다고 행복한가요? 예를 들어서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갔으면,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과, 이제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의 타이틀을 위해서 또 경쟁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죠. 삶이 계속된 경쟁이고, 경쟁에서 살아남을수록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즉, 이러한 세상의 원리가 사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각자가 자기 삶에 자족하고, 자신에게 있는 힘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모두가 더불어 함께

평등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더라도 서로가 그 약속에 끝까지 헌신할지 신뢰할 수 없으므로, 한 명이라도 거기서 벗어나면 곧바로 모두 이기적인 삶으로 돌아가 버리게 됩니다. 평생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한 사람에 대한 결단도 자기중심성 앞에서 무너지는데,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 속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마음속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지켜주기를,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와 나누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것이 옳다고

본능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우리 기대대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강자가 소위 갑질을 하면 함께 분노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나의 문제면 자신의 갑질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정리하면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계를 힘들어하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강자가 되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혐오감이 쌓이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약자의 하나님? 이런 깨어진

세상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을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남편이 없는 과부, 어머니가 없는 고아, 외지에서 온 나그네는 가장 약자를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시죠. (출 22:22)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출 22:23)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출 22:24) 나는 분노를

터뜨려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며, 너희 자식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부나 고아를 괴롭혀서 그들이 부르짖으면, ‘내가 너희들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겠다, 너의 자녀들도 고아로 만들겠다’라고 위협에 가까운 선언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강한 자로서 존재하시기에,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을 심판하시어 하나님의 공의를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유경쟁

시대에 강자가 되는 것도 노력의 결과이다. 약자들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노력한 결과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닌가?’ 마이클 샌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미국의 경우 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에게 돌아갔고, 하위 50%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 미국인은 하위 50%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불평등을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기회가 평등하면 재능과 노력에 따라 누구나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가 대물림 되고,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생의 2/3는 소득 상위 20% 가정 출신입니다. 장학금과 기타 지원책이 후하게 존재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생

가운데 소득 하위 20% 가정 출신자는 3%대에 불과합니다. 아이비리그 대학에는 소득 상위 1% 출신의 학생이 소득 하위 50% 이하 출신 학생들의 총합보다 많습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재능이 있으면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은 사실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애초에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만약 능력대로 성공이 가능한 환경이 완전히 이뤄지더라도 이것이 공정하다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능력주의 사회는 그 시장이 인정하는 재능에만 어마어마한 보상을

주기 때문이죠. 즉 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과 비인기종목에 재능 있는 사람 간의 보상 격차는 도덕적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어느 재능이 뛰어난가는 도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재능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똑같이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결국 시장이 정하게 됩니다. 소위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운이 좋아야 합니다. 그로 인한 결과가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은 여러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패자 또한 자신의 패배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를 오만으로, 패자를 굴욕과 분노로 몰아갑니다. 결국 ‘이러한 도덕 감정은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신앙 서적이 아닌, 사회학자의 책에 나오는 진단입니다. ‘나는 나의 능력만으로 성공했으니 이 정도 명예와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 저 능력주의 윤리 자체를

바꾸는 일이 현대 사회에는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저것을 ‘공정’이라고, 당연한 결과와 열매이니 그 결과를 그저 누리면 된다는 것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 속에서 사회는 계속 분열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회학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 세상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전>의 저자인 김형국 목사님도 한국의 기준에서 SKY 출신의 엘리트이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일생

대부분을 비교적 강자의 위치에서 살아왔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그렇고,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 그렇다. 철이 들고 나서, 내가 성취했다고 생각한 많은 부분이 나의 노력보다는 타고난 조건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수많은 젊은이가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사람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강자와 약자가 되는 것은 후천적

노력보다는 선천적 조건들, 타고난 여건들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약자로서의 삶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가진 불안한 세상의 구조가 그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의 구조 속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주고자 하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성실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정직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정이 선했다고 결과에 대해서 자유한 것은 아닙니다. 성실과 노력으로 부자만큼 돈을 벌 수는 있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것을 나에게 주어진 보상이나, 공정경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나의 열매로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 사람의 편에 계시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이것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남에게 나눠주고 선을 베풀어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실 자기중심성이 가득한 내 영혼에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주인이라면, 그분의 뜻에 맞게 내게 주어진 것이 사용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정의로운 일 하심에 내 삶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우리가 맞이하는 좋은 열매는 ‘보상’이 아닌, ‘책임감’과 ‘순종의 기회’라고 여깁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당연한 세상의 원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을 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처한 위치는 가장 약한 족속, 주변에 비하여 너무나 약하여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수없이 주변 강대국과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위협받습니다. 이집트에 의해서 더 낮은 단계의 인간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태어나는 아기들이 몰살당하여, 다음 세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편에 하나님이 서서,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바로와 그 통치 권력들에 대해 응징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의 특징인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상에 균열을 내십니다. 어쩌면 우리도 피라미드 세상의 끝없는 경쟁 구조를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왜 인류는 이 삶을 원만한 타협과 집단 지성을 발휘해서 해결하지 못할까요?

완전한 합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의 어두움을 알아도 바꿀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한 집단이 그 안에 속한 모두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함께 이타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저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 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이 땅에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수 있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하나님의 주인

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맞춰 살아갈 때입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부정적 측면이 사라진 공동체의 모습이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교회만 하나님 나라로 만드셨나요? 아닙니다.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회복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자 하셨지만,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죄성은 우리에게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주인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화병에 꽂혀 있는 화초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가 끊기면 잠시만 살아있을 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고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대상이 내 안에서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고 그것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라졌으니 ‘유사 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돈’을 두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 주인 되어 마음껏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삶의

진정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절대적 가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우리는 비인간적인 결정을 하게 됩니다. 국가적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사고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어도,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이니 보상금으로 처리하면 될 뿐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가족이 죽임을 당했다면, 보상금을 받았으니 사고 원인은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의가 행해지기보다는

내가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해진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도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됩니다.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길’은 있는가? 주님은 길과 진리 생명. 가끔 이런 성경의 메타포는 정말 좋은 설명인 것 같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참된 길이 있습니다. 깨어진 세상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믿어 위로받고 위안을 누리기 원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시선에서 하나님을

찾다보면 오히려 너무 작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신경안정제가 되시는 수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미나 작은 생물의 필요에 무감각하듯, 사실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존재이시므로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이해가 그분의 존재성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우리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찾아와 손 내미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좋다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무지를 보고 있음에도, 가슴 아파하십니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 무지한 삶에 갇혀서 휩쓸려 살아가지 말라고, 다른 길이 있다고 외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습니까? 누군가는 우리는 그저 열심히, 성실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와 개개인이 정말 가야 하는 길을 바르게 가고 있다고 믿으시나요? 이렇게 쭉 살아가도 충분히 괜찮으며,

우리의 세상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을 만큼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길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나침반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좌표, 내가 서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점검해봐야 합니다. 우리도 자칫 세상의 논리와 거센 조류에 휩쓸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배우는 이야기는 그저 교회 안의 이야기로 가두어둔 채, 여전히 내 삶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편하게 여기며,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이 말씀의 청진기를 여러분의 삶과 태도에 대해서 대시고 진단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나에 대해서 정직하게 점검하고 직면해보십시오. 말씀을 말씀으로만 듣고, 삶은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이원론적 신앙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에서는 대장부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약하디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앞에서 우리가 믿는 성경의 이야기는 기껏해야 동화나 신화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의 자기중심성을 보고 계신다면 아파하셔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으로서 내 안에 계시도록 강력하게 결단하며,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 회복의 중요한 마중물입니다. 주님이 나의 구원과 평안을 위해 필요하기 그냥 와서 머무시기를 바라는 마음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 내 삶의 전권을 모두 내어드리니, 주님 내 삶을 통해 주님의 일을 해주십시오. 주님이 이끄시는 삶에 대한 나의 불안, 나의 불신앙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