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깊은예배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대해 강해하며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조금 큰 맥락에서 보면, 요한복음 13~17장까지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고별설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부친은 목회를 30년을 하셨는데, 아쉽게도 ‘고별설교’를 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가족들에게 ‘유언의 말씀’도 남기지 못하시고 조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셨지요. 개인적인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고별설교를
한다는 것은 떠나는 자에게도 의미 있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다면 고별설교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주고 싶으셨을까요? 요한복음 전체가 21장인데, 이중 무려 다섯 장에 걸쳐 나오는 고별설교의 메시지는 크게 3덩어리입니다. 우선 13~15장은 “이렇게 살아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는 메시지가 모두 이 부분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 줍니다. 정체성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는 16장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이 길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집니다. 마지막으로 17장은 “이렇게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하시는 중보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매우 실제적인 이야기,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험될 2가지 현실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첫 번째 가르침 : 박해 기독교는 환상을 살아가는 공중에 떠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현실을 살아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가르침에서 희망적인 말만 하지 않으십니다. 16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요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또는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할 때,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실족’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믿음에서 탈선하거나 최악의 경우 유다처럼 배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6장에서 이런 마음을 표현하셨어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를 위해 필요한 이야기,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축복입니다. 만약에 우리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축복의 풍요로움을 많이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은 그렇지 않죠.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바뀐 것이지, 우리 주변은 여전히 깨어짐이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 거치는 돌이 되고 맙니다. (벧전 2:7)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벧전 2:8)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걸림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걸림돌을 싫어하고 없애고 싶어 하는 것이죠. 요한복음 15장에서 참된 제자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연결된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속한 존재로서 그분의 삶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박해’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놀랍게도 ‘회심한 사람들’의 실존적 증거로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요 16: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요 16:4a)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것을 직면하게 될 때, 이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왜 나한테 박해를 주세요?”가 아니라, “주님을 향했던 박해가 나에게도 오고 있는 것을 보니, 제가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 맞군요.”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해가 달리 보일 것입니다. 박해가 위로까지 되기는 힘들어도, 박해를 하나님의 형벌이나 나를 방치한 결과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박해는 종교적이고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박해는 무엇일까요? 직장에서 정직을 지키려다 겪는 손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게 자녀를 양육하며 겪는 소외감, 혹은 사람들의 은근한 조롱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더 따르고자 할 때 경험하는 세상의 어두운 모습들. 말씀대로 살아가느라 부딪히게 되는 모든 것이 해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음의 선택 때문에 불편함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방향이 맞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박해와 어려움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박해를 잘 해석하셔야 합니다. 또 사탄은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거짓말을 할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내가 걷는 방향에 대해 점검과 확신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 : 성령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박해 가운데 가만히 방치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에 주시는 실제적인 도움,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 ㉢'변호해 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 제가 오늘은 일부러 각주를 빼지 않았습니다. 보혜사는 ‘변호해 주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공간에서 일하셨습니다. 제자들과 3년의 정해진 시간을 동행하셨고, 특정 지역에서 일하셨지요. 그러나 성령님은 영원히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떠나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제자들이 세워졌지만, 아직 제자들은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어도, 그 이상은 아직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성령께 이제 제자들을, 그리고 성도들을 맡기기로 하십니다. (요 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후반부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싶지만 완전하게 이해가 안 되는 것 때문에 제법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더 신학을 공부하면서부터는 하나님과 저의 차원이 다르기에, 제가 그분의 존재 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한다고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어머니가 젖을 주는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누리며 살아가지만, 그 존재 방식을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존재 방식을 모르지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완벽한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골 1: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원래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속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앞서 박해와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바로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 우리가 박해를 받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변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놀라운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거룩한 사귐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성도 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깊숙하게 찾아와 함께하십니다. 우리 안에 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고전
3: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실행하시고, 성령께서 지키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으면 구원받은 것이지, 왜 와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일까요?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 사이의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구원의 시작과 완성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왜요? 우리에게는 박해로 인한 위기, 배교의 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박해를 이길 수 있다면 굳이 우리를 도우시러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가 회심하면 내가 전보다 강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말할지 몰라도, 우리 스스로가 강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깨어진 세상에서의 삶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유명한 사도바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우리의 정체성은 이제 주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그래서 박해는 우리를 찾아오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시죠.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성경의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으니까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상태로 세상에 나가면 다시 깨지고 넘어지고
도망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악함으로는 언제든 배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회심했다고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주님을 놓치면 우리는 백전백패합니다. 그러므로 박해와 성령님은 함께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구원에 속한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박해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동시에 성령님의 함께하심도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자는 우리가 겪는 박해도 없지만 성령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는 자, 암흑의 권세 있는 자는 감히 맛볼 수 없는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신비이며, 가장 큰 위로이며, 가장 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최고의 상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처음과 끝이 임마누엘로 묶여 있습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께서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한다는 것입니까? 이제는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고 그의 친구이거나 그의 동료인 성령께서 대타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고,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별설교를 나누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령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시는 것이 불안과 근심이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더 영원한 동행을 소망하는 확신과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연약한 제자들은 배신하고 떠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요 16:32)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 16: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이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도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과 함께 계시므로, 그는 이 사명을 완수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것을 말해주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이 모든 일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신도, 실패도. 하지만 동시에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따르게 될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연약함과 패배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은 영으로 다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강하게 하시며, 주님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짜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길을 완주할 수 있고, 다시 죄에 속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하시니, 우리는 이제 담대해도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하는 자,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교를 매듭짓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신학생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도사가 되면 강해지고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어려움만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면 이제 진짜 강해질 줄 알았습니다. 어느덧
목사가 된 지도 10년이 되었고, 담임목회도 이제 제법 경험이 쌓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점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강해져서 박해를 받아도 무던하고, 고난이 나를 두려워 피해 가고 이런 날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제 직감합니다. 도리어 목회를 제가 열심히 성실히 주님의 마음에 맞게 잘하면 잘할수록 어려움과 박해는 더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것은 확신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습니까? 주님의 길을 따르며 박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박해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이고,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저의 목회 여정이 그러하듯,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일상과 가정, 직장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정직하게, 말씀대로 살려 할수록 어려움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과 가장 강력하게 동행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두려워 도망쳤지만, 우리는 결코 부재하지 않는 성령님과 함께하고 있으니, 우리가 제자보다 더욱 박해를 이기기에 충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면, 주님이 당한 고난을 만나지만, 주님이 누린 영광도 만납니다. 거룩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신자의 영광입니다. 우리 오늘 이 예배 안에서 그 영광을 고백하며 그 영광으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