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저는 신앙의 기초라는 시리즈를 다루며 ‘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죄의 재해석’이라는 설교를 통해, 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죄는 단순히 ‘무엇을 잘못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이 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상태입니다. 제가 사격
이야기를 했었죠. 한 명이 총을 쏘면, 옆에서 관측수가 ‘우상탄’ 이렇게 외쳐서, 과녁에 잘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정죄하여 그 어긋난 상태에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어긋난 상태에서 벗어나 원래 하나님이 주고 싶으셨던 삶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과 끊어진 죄의 상태로 계속 살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언어가 ‘심판’입니다. 죄와 심판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면, 오늘은 심판을 조금 더 쉬운 언어로 접근해 봅시다.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단어를 삶의 언어로 이해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오늘 우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심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우리 옆에 앉은 분들과 한번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옆 사람과 대화를 하시는 것이 너무 어색하시면 혼자 잠시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 2분만 드리겠습니다. 혹시
짧은 대화 속에서 '지옥'이나 '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마 대부분 죽고 나서 받는 형벌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지옥’에 가는 것을 떠올린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 그것이 지옥을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지옥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한번 차근차근 살펴봅시다. 우선 성경에서 처음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을 봐야겠지요. 창세기 3장입니다. 이곳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처음
‘죄’를 지은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을 잘 이해하는 것이 ‘죄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분노하셔야 할 행동이었는가? 아니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고작 인간이 잠깐 욕심을 내어 열매 하나 먹었다고 관계를 끝내야 할 정도였나? 이런 마음이 드시는 분들 있지 않으세요? 옆에 그런 분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정상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해도 됩니다. 그래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해보지요. 1) 주권에 대한 무시 이들이 탐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선악’의 질서와 기준을 따르느냐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 삶에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결정하겠다’는 창조 질서에 대한 독립 선언이자 쿠데타였습니다. 과일을 훔친 장발장과 같은 단순 절도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질서를 뒤엎으려는
반역죄였던 것입니다. (창 3: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사람이 원했던 것은 맛있는 열매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위’였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열매를 보니 그것이 더욱 탐났던 것입니다. 2) 관계에 대한 배신 어떤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가장 쉽게 이해한다면 저는 ‘결혼반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크게 다툰 뒤 결혼반지를 빼서 던져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배우자가 상처받고 분노하는 것은 결혼반지가 담고 있는 ‘우리의 약속, 우리의 관계’ 자체를 깨뜨리겠다는 의사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충격이죠. 선악과도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무시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본질적 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성경의 표현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렘 2: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린 것은 ‘무시’의 태도이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샘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들고 살았다는 것이니, 관계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진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때 그것이 죄이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더 따르고 있을 때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죄를
회개한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하는 부분은 이 2가지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작 사탄의 말 따위를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놓아버린 것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도 세상의 숱한 거짓말을 붙드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이런 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세상은
눈에 드러나는 명백한 행위를 ‘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는 여기에 있는 분들 가운데 ‘죄인’이라고 할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행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주권’과 ‘관계’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깨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세상을 공의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리법칙이라는 질서를 거스르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망토를 두르고 “나는 슈퍼맨이다” 진짜로 믿으며 지붕에서 뛰어내린다면, 그 믿음과 별개로 그 슈퍼맨은 물리 질서를 벗어난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그의 믿음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관계법칙도 있습니다. 부부라는 관계를 주시면서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부부관계에 주어진 창조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슬러,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그 외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면, 부부의 관계는 깨어지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신 관계적 행복은 깨어지는 것이죠. 이것은 다른 한 사람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부여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그에 상응하는 신학적이고 관계적인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질서를 벗어났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창 2: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창 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님은 죄의 대가를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망’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고, 모든 행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말씀 기억하시죠?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죽음이 일어났나요? 안 일어났나요? 이 죽음이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본다면,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심판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합니다.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서로를 탓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서로의 관계가 모두 깨어집니다. 이미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창세기 1~2장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꿈꿀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숨을 필요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거리감이 없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예배에 늦거나 설교 시간에 심하게 조셨던 분들은 예배 후 저를 피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봐도 자신이 요즘 너무 신앙생활을 잘하고 오늘 말씀도 잘 듣고 그러면 눈이 초롱초롱해서 저를 반겨 맞이하고 그러거든요. 이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과 전에 없던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죄 이전의 삶은 하나님과 친밀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누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걷는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존재가 충만한 상태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옷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죠. 존재 자체가 온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 연약함이 세상에서는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결과로 돌아온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더욱 위축되고 숨기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있던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콤플렉스가 없었습니다. 비교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만함과 온전함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무언가를 채워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충만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삶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명령에서도 나타나고,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게 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이름을 주시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에 대한 ‘주권’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통해 다른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이는 세상을 다스리고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만 하신 후 손을 떼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시면 그 고백들이 있습니다. (시 104:10-14)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마태복음에도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죠. 그런데 아담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이런 지위와 책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2:5)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사람이 가장 나중에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창조되기까지는 모든 생태계가 작동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돌볼 주체로 세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과 '함께' 가꾸고 다스리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고, 다스릴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스리는 사명을 가진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회복된 존재로서 이 삶을 다시 붙들고 여기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로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가는 존재였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이 3가지 부분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온 심판의 현재적 모습입니다. 첫째,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존재가 붕괴되었습니다. 수치심에 빠지게 되며 어떤 성취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방어의 심리로 남 탓을 하며 서로를 공격하고 상처 내는 악한 모습이 시작된 것입니다. 셋째, 왜곡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노동을 단순히 먹고 살아가는 수단으로 여기며, 성공과 생존만을 위한 도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돌보기보다는 이용하려 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나타내기보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삶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삶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삶을 알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습니다. 관계는 지쳐가고 세상은 힘겨운 곳이 되며,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지속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 또한 ‘이미와
아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심판의 현재적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죄로 망가졌고, 우리의 삶도 죄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정확한 진단이 정확한 회복의 길을 찾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나의 세트와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인식에서 구원이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심판 역시 죽어서 단순히 지옥에 가는 문제입니다. 이런 인식으로 보면, 아무리 지금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지금
나에게는 구원도 심판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이 왜 이런지’ 해석할 수 없죠. 성경의 이야기는 모두 추상적인 교리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내 삶을 해석해 주지 못하는 진리는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심판 가운데 놓여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들의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내 삶을 바라보시고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며, 그 삶을 바꾸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신했던 그 순간,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창 3: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창 3: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 3: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황급히 자신의 연약함을 가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도망하듯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찾아오십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에덴동산에 있으며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게 되면, 그들은 죄악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비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십니다. 이는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죄의 영원함에 대한 보호조치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내보내시면서도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며, 지금 그들이 처한 연약함을 가려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시며 죄의 심판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소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이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열려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나의 육체적 연약함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은,
그것을 잘 다루어 내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처한 죄의 결과, 우리에게 찾아온 심판의 현재적 모습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하기 위해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돌아가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하나님도 피하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가져온 심판입니다. 지금
내 삶의 무너짐과 공허함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묻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정죄가 아닙니다. 돌아오라는 초청입니다.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진실한 결단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제 삶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지금,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