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다해 / 주 이름 찬양 / 공감하시네 / 밤이나 낮이나 2개의 영상은 동일합니다. 소리 크기는 위의 유튜브 영상이 좀 더 크게 나옵니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 1: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사 1: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사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사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사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사 1: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지난 금요일에 참석하신
분들과 <성경 해석, 묵상법>을 특강으로 다뤘습니다. 조금은 원론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그 안에서 우리가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요소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석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석의란 성경을 나에게 적용하려고 하기에 앞서 성경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무슨 소리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적용하자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A라면, A라는 것을 석의를 통해 확인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적용해야지 성경의 뜻을 왜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석의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성경의 첫 번째 독자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진리의 말씀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떠한 상황에서 주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들의 그 상황과 그들에게 이 메시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할 때, 오늘 나도 그 진리를 올바르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가르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합니다. 이를 위해서, 저도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시간임에도 단순히 말씀을 제가 해석한대로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도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성경의 배경이 되는 역사들과 지리와 문학적 구조까지도 전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 나눴던 베드로전서와 같이 한주만 다뤄야 되는 짧은 말씀은 좀 더 메시지에 집중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오늘부터 다룰 이사야는 성경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긴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7-8월은 계속해서 이사야의 말씀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첫 시간은 이사야서를 소개하며 전반적인 이해의 폭을 넓히는 시간을 갖고, 이사야서 1장의 말씀으로 짧은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사야라는 저자에 대해서 먼저 소개해야겠죠. 이사야와 친밀해져야 우리가 이사야서를
읽을 때 더욱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성경의 구분으로 ‘예언서/선지서’입니다. 즉, 그 말은 이사야가 예언자(선지자)로서 사역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이러한 예언자들의 글이 17개의 책으로 나뉘어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서는 다시 둘로 구분할 수 있죠. 대예언서, 소예언서입니다. 대예언서와 소예언서의 구분은 ‘분량’입니다. 대예언서가 5권이고 소예언서가 12권인데, 대예언서에 속한 예레미야 한권의 분량이 소예언서 12권을 합한 것보다 많습니다.
예레미야가 52장이고 이사야는 66장입니다. 장수는 이사야서가 더 많지만, 실제적 분량은 예레미야가 더 긴 것도 특징입니다. 대예언서의 저자들이 소예언서의 저자보다 더 월등하거나 둘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역자이죠. 다만 대예언서가 분량이 많다는 것은 그들이 더 많은 예언들을 감당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한글식 이름으로 ‘이사야’, 히브리 이름으로 ‘여사야후’는 ‘여호와가 도움이시다’ 혹은 ‘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환경이 달랐습니다. 아모스처럼 목자이며 뽕나무를 재배했던 사람도 갑자기 부르셔서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기도 하죠. 그에 반해, 이사야는 전통적인 신앙 있는 집안 출신 예언자입니다. 또한 그의 아내도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두 아들에게도 하나님은 조금 독특한 이름을 붙여주셨죠. 첫째는 스알야숩, 둘째는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신속히-악탈물-재빨리-노획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좀 풀어보자면 구원과 심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 그리고 아내, 두 아들까지. 이 가정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그런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예언은 왕궁에서도 필요하고 백성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비교적 엘리트적인 느낌이 강한 이사야를 하나님이 쓰신 곳은 왕궁의 예언자로서입니다. 이가사야 가용한 언어와
표현과 비유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치에 관해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고, 주변 나라들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도 몇 개 정해놓고 보기도 합니다. 그것도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화를 들 때에도 필요하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냥 재미있고 좋아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의도적으로 찾아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바로 뉴스와 정치관련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건과 현상과 풍토를 이해하고 올바른 가치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청년들,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길 원합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 칼 바르트”. 저자와 관련되어 중요한 문제 하나를 더 말씀드리자면,
이사야서는 66장으로 이뤄지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구분점이 존재합니다. 1-39장까지와 40-66장까지가 나눠지죠. 후반부의 말씀도 보통은 40-55장까지, 56-66장까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즉, 이사야서를 2개 내지 3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1-39장과 그 이후의 말씀이 각기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39장까지는 주전 8세기의 내용을 다뤘다면, 40장부터는 주전 6세기의 내용으로 그 역사적 배경이 바뀐 것입니다.
약 200년에 걸친 예언의 말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이사야는 1-39장 시대에 살았지만, 200년 뒤의 일들을 마치 생생하게 겪고 있는 것처럼 예언했다고 보는 것이고, 조금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이사야가 1명에 의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라 2~3명의 이사야가 있다는 의견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저작설의 문제를 따지지는 않더라도, 1-39장에 이어서 40장 이후도 이사야의 저작이라면 약 100년 후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한 것으로 보면 되겠고, 혹 제2의 저자를 인정하더라도 이것은 그 뒤에서 말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부분은 너무 큰 고민을 하기보다 말씀 자체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사야서는 그래서 보통 1-66장까지 한 번에 다뤄지기보다 시대별로 나눠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7-8월까지 다룰 내용은 1-39장의 내용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도 나눌 것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어떠했는가?
구약의 파노라마를 잘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이사야라고 하면 ‘예박가스이예요’에 해당하는 인물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분열왕국 시대에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이사야는 북이스라엘/남유다로 나눠진 시대에 남유다의 왕궁에서 주로 활동했던 예언자라고 정리할 수 있겠죠. 매일성경의 본문이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다시금 우리의 초점을 분영왕국 시대로 모아야 합니다. 사울-다윗-솔로몬이 다스렸던 12지파가 속했던 나라가 ‘통일왕국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때에 남과 북으로 나눠지게 되고, 이렇게 두 나라로 존재했던 시절을 ‘분열왕국’이라고 말합니다. 북왕국은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12지파 가운데 10지파가 북왕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남왕국은 2개의 지파로만 구성되었는데, 유다지파의 영향력이 컸기에 남왕국은 유다라는 호칭을 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사야서의 1:1은 그 배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유다의 왕인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 즉 4명의 왕을 거치는 동안 아모스(선지자 아모스 아님)의 아들인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이죠. 유다는 나라의 이름이고 예루살렘은 수도의 이름입니다. 즉,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속한 남왕국의 왕과 백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사야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오랫동안 최강대국은 ‘앗수르(아시리아)’였습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남쪽으로 내려가 애굽(이집트)을 정복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앗수르가 애굽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아람(시리아), 이스라엘, 유다와 같은 나라들이 있었죠. 앗수르 입장에서는 이들이 상당히 걸리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팔레스타인의 이 국가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같은 대상이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람은 시리아를 의미하고, 아람의 수도는 다메섹(다마스쿠스)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대표되는 지파 이름인 에브라임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수도인 사마리아라고 부르기도 하죠. 마찬가지로 남유다 왕국은 다윗 가문이나 혹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통칭되기도 합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앗수르가 완전히 잡고 있다가, 앗수르 제국 안에서 어떠한 시기 동안은 리더십의 문제와 내부의 문제로 인해서 외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힘의
공백기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유다의 왕이 웃시야였고, 이사야가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 앗수르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 시기에 나름의 힘을 키우고 나라가 부강해집니다. 제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좋아합니다. 이 게임이 서로 전투를 하는 게임이거든요. 상대방이 나를 쳐들어올 수 있기에 항상 정찰을 하고, 그리고 대비를 해야 합니다. 방어무기도 만들고 병력도 구성하고 이러다보면 발전을 못해요. 그런데 상대방이 지금 나를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면 여기 저기 기지도 더 건설하고 발전도 마음껏 시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방어하는데 쏟을 것을 발전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이죠. 바로 앗수르의 약화는 늘 앗수르에게 짓눌려 있고 눈치를 보던 국가들의 발전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약 50년 동안 주변 국가의 위협 없이 힘을 마음껏 키웠는데, 가장 강력한 국가인 앗수르에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면서 다시 앗수르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왕이 ‘디글랏빌레셀’입니다.
열왕기하와 역대상하에 보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앗수르는 다시 주변 국가들을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앗수르는 주변 나라를 침공하면 우선 조공을 받기 시작합니다. 즉 속국의 개념이 되는 것이죠. 자기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군사 지원도 받습니다. 그러다가 이 나라가 반역을 하면 수위를 높입니다. 왕조와 리더십을 모두 교체하는 것이죠. 그래도 통치를 잘 따르지 않고 반역하면 혼혈정책을 펼쳐서 민족성을 말살시킵니다. 앗수르가 점점 주변나라를 침공하면서 내려오니까
시리아는 주변 나라와 연합하여 앗수르를 대항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시리아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 등이 연합합니다. 당연히 남유다에게도 동참하라고 합니다. 이때가 바로 웃시야와 요담 시대를 거쳐 ‘아하스’가 왕인 때였습니다. 아하스는 그런데 앗수르가 너무 두려워서 그 연합에 참여하기를 주저합니다. 유다가 반 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므로, 시리아-이스라엘이 유다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왕하 16:5) 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왕 아하스는 두려워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것이죠. 유다왕 아하스는 이사야의 조언을 거절하고 그들의 도움을 앗수르에게서 찾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에게 금은보화를 보내고, 유다 왕은 앗수르 왕을 향해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자진하여 봉신국가가 됩니다. 유다를 지키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유다 왕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힘에 의지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거부합니다. 앗수르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반 앗수르에 가담한 나라를 공격합니다. 동맹의 대표였던 시리아는 주전 732년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이스라엘도 거의 초토화가 됩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도움으로 시리아-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을 주군으로 섬기는 국가가 되고 맙니다. 북이스라엘은 간신히 왕조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앗수르에서 디글랏 빌레셀에 이어 그의 아들 살만에셀로 왕이 바뀌자 다시 반기를 듭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앗수르는 다시 반역한 북이스라엘을 징벌하였고, 결국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북이스라엘 주민들을 주변 민족들과 혼혈로 만들어버립니다. 주변 나라가 다 망했으므로 유다만 남게 되었는데, 유다의 북쪽은 강력한 국가인 앗수르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또 하나의 맹주인 애굽이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다는 아하스의 뒤를 이어 히스기야가 왕이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스기야는 바로 이사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입니다. 히스기야 시대를 맞이하며 유다도 점차 앗수르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힘씁니다. 앗수르의 왕권도 연이어 바뀌어 사르곤 2세에 이어서 산헤립이 왕에 오르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시기까지 눈치를 보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앗수르에게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을 중심으로 반앗수르 연합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번에도 반앗수르 동맹국을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바벨론도 정벌하고, 모든 반란 세력을 정벌하고, 이제 예루살렘을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서 46개 성읍이 모두 점령당하고 예루살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존폐를 건 가장 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사야서 1-39장은 계속된 이러한 주변 국가들과의 정치적 군사적 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의 결정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므로, 이사야는 왕에게 예언을 전하는 왕궁선지자로서 그 사명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역사서가 아니기에 예언의 모음집과 같은 형태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역사의 순서대로 이사야서가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잘 염두하고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1장은 그러므로 가장 앞에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히스기야가 왕인 시절 46개 성읍이 다 점령당하고 예루살렘만 덩그러니 남았던 그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시점에 역사를 보면 앗수르의 산헤립은
예루살렘만 함락시키면 되는 이 때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갑니다. 이 상황에서 1장의 예언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 1:4)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사 1:5)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사 1:6)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난 곳과 매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사 1:7) 너희의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의 성읍들이 송두리째 불에 탔으며, 너희의 농토에서 난 것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약탈해 갔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땅을 박살냈을 때처럼 황폐해지고 말았구나. (사 1:8) 도성 시온이 외롭게 남아 있는 것이 포도원의 초막과 같으며,
참외밭의 원두막과 같고, 포위된 성읍과 같구나. (사 1:9)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위기를 직면한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30회 나오는 표현인데, 그 중 25번이 이사야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금 앗수르에 의해서 나라의 대부분이 폐허가 된 상황을 두고, 하나님의 매를 맞은 것이라고 선지자는 표현합니다. 오직 도성 시온, 즉 예루살렘만이 외롭게 남았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선지자는 산헤립이 공습을 멈추고 돌아간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합니다. (사 1:10)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말하면, 그곳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동성애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심판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풍성한 제물이 있는 그런 예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11절입니다. (사 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들의 예배는 잘못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가져오는 제물이 지겹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많은 제물을 가져가면 되겠지? 주님은 우리의 제물을 보고 기뻐하시겠지?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우리가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헌금에 담긴 것이 나의 과시이고,
나의 만족이고, 나의 투자 혹은 내 부끄러운 삶에 대한 변명이라면... 그래서 그 헌금 속에 내 예배의 마음과 고백이 담겨있지 못하다면 억만금으로라도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 1: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사 1: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들은 제사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러 뜰만 밟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사 1: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사 1: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여러 행사와 절기도 싫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 지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하여도 듣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하더라도 듣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듣지 않습니까?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당한 어려움이 무엇 때문인지를 진단해야 합니다. 왕이 정치적
판단을 잘못하고, 주변에 나쁜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어려움이 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예배가 공허하고 헛된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머물 자리가 없으니 주님이 함께 하지 못하고, 그의 보호와 위로와 평안도 이들의 삶에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내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기도가 부족해서일까? 하나님이 주무시나?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기도하는 우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피가 무엇일까?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 1:16)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악한 행실. 악한 삶을 살면서 주일이 되면 와서 드리는 예배, 기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도했어. 나는 예배드렸어. 헌금도 했어. 나는 주일 성수했어.”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만족하고 죄 짓고 다시 돌아와서 예배로 내 죄악 된 삶에 대한 스스로의 부끄러운 마음을 위로하고 다시
나아가 죄 짓고. 이런 신앙인들이 가득한 대한민국이라면, 이곳에 주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함이 있겠습니까? 나 하나 정도는 괜찮아. 어쩌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얘도 예배하고, 나도 예배하고, 여기저기 제물을 드리고...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겠지.” 한국교회에 성도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기 봐도 십자가, 저기 봐도 십자가. 주일이면 여기저기 바쁘게 교회 차들이 오가고. 교회에 오면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 하나 정도가 어떻게 예배하던지, 내 밖에서의 삶이 어떻든지, 그게 뭐 대수일까?” 오늘 못 드린 예배, 다음에 드리면 되고, 또 여차저차해서 바쁘면 이따가 온라인으로 드리면 되고. 내 예배는 주님이 어떤 마음으로 받고 계실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내 예배는 나의 만족입니까? 주님의 만족입니까?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디까지입니까? 나의 예배시간 입니까? 예배 이후의 내 삶의 시간입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연약함이 있고,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해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든 내 연약함을 방패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악함임을 기억하십시오. 내 연약함은 주님이 이미 알고 연약함 가운데 주를 향해 나아가려는 내 마음 또한 주님이 아시지만, 내 악함은 주님 앞에서 반드시 책망 받을 게으름과 변명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읽은 자료집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는 악한 행실을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윤리적 갱신을
끌어내지 못하는 기도와 예배는 그분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불과할 뿐이다. 악에서 떠나 선행과 정의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슨 얘기입니까? 내 예배가 내 삶을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로 만족하고 예배하고 있는 나로 만족하고 있으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는 내가 성전 뜰을 밟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분이 내게 오실 때, 내 삶은 그분이 보이시는 방향으로 바뀌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살아남은 예루살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이곳에 있던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 1: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사 1:19)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아직 내 삶은 기회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이대로 흘러가자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예배드리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분이 내게 말씀하실 때, 내가 순종하면... 내가 삶으로 순종하면... 내 삶에는 그분의 흔적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린
후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만난 주님이 내 안에서 행하실 때 내가 기꺼이 순종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순종함의 마음이 있는 자들이 이 교회 안에 가득하고 이 세상에 가득할 때, 그곳은 가장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순종. 참된 순종.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때, 그 얼마나 기쁨이 됩니까?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하죠.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순종.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마음이고, 가장 귀한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받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기쁨의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순종보다 나은 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순종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부분,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부분,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 내게 요구하시는 부분들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귐의예배 주일 2부예배에 예성교단 총무 목사님께서 사모님과
깜짝 방문을 하셨네요. 전혀 얘기된 부분이 없는데, 양주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했네요. 뒤에 조용히 앉아 계신 것을, 다행히 알아볼 수 있어서 예배의 축도만 부탁을 드렸습니다. 예배 후, 제가 예배당 뒤로 가기도 전에 먼저 인사하고 훅 가버리셔서 그 시크함이 참 좋았습니다. 친분도 없는 후배 목사가 목회하는 곳에 조용히 오셔서 격려해주고 가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