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영상은 같습니다. 소리 크기는 위의 유튜브 영상이 더 크게 나옵니다. 성경에는 책 제목을 붙이는 법칙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예로 들면, 대부분은 저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저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서신만큼은 받는 사람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고린도전서라고 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반서신들은 다시 저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라고 하면 베드로가 쓴 2개의 서신 중 전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은 베드로전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는 딱 한 번의 주일설교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베드로전서가 가진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인용할 것입니다. 오늘 이 한편의 설교만 잘 새겨 들으신다면, 적어도 여러분이 베드로전서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의 시작이죠. 이 글을 쓰는 저자 베드로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쓴 것은 분명한데, 단 어디서 이 편지를 썼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다만 5:13이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바벨론에 있는 교회와 함께 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 안에서 ‘바벨론’은 로마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구약에 있었던 나라가 바벨론이지만,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로마를 직접 지칭하여 말하기가 쉽지 않기에, 바벨론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로마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곳에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 여러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여 3000명, 5000명이 회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생겨나며 큰 부흥이 일어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사도행전의 이 부흥의 현장에는 흩어져 각지에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던 것이죠. 거기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되었겠죠.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을 들고 말입니다. 9절과 10절에 보면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목록이 나오는데, 상당수가
베드로전서의 지역명과 일치합니다. 즉, 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 안에 복음을 깨닫게 되고, 다시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가 그곳에 복음의 씨앗을 심게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순회선교사로 살던 베드로의 사역 대상에 그들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도행전의 역사와 상당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사도행전이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시작되는 것을 말했다면, 베드로전서는 이제 그렇게 시작된 교회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과 고난들 안에서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말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이들의 상황에는 실제로 ‘고난’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의 처음과 나중 부분에는 여러 시험으로 근심하는 수신자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벧전 1: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안에는 ‘고난’이라는 단어가 동사(파스코)로 열두
번, 명사(파테마)로 네 번 사용되는데, 이는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많은 용례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살던 시대에 신앙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핍박과 고난이 얼마나 거센 것이었는지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상황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방과 모욕,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경제적 위협과 신체적인 위협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마치 불에 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또 고난 얘기야?”라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행복하려고 교회를 다니는데 왜 이리 교회에서는 ‘고난’에 대한 이야기만 듣게 될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솔직한 제 심정이기도 합니다. 자꾸 고난에 대한 설교만 해도 괜찮은 걸까? 그러다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가장 가치 있는 삶이었죠. 그분의 삶은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 있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의 삶에서 ‘고난’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의 삶에서 고난으로 대표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영광으로 대표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담긴 ‘고난’에 집중하면서 우리에게 그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요한복음은 십자가에 담긴 ‘영광’에 집중하며 그의 십자가 길은 사실 왕으로 등극하는 영광의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영광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여러분이 영광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을 밝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영광처럼 시작되지만 그 끝은 심판으로 종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 어쩌면 세상에서는 고난을 마주하게 되지만, 우리는 이 길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서 영광의 길을 걸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고난으로서
영광의 길을 걸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들이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너무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 고난을 장차 올 영광을 위해 기꺼이 기쁨으로 고난 또한 감내하며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고난’과 ‘영광’이 하나의 짝처럼 연결되는 구절이 많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말씀은 이것이겠죠.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성경에 ‘고난’과 ‘영광’이 함께 등장한 구절을 검색하면 정확하게 10개가 나오는데, 그 중에 5개가 베드로전서에 있음을 확인하며 놀라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깨닫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영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잠깐의 고난 때문에 영광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안타까운 선택을 할까봐 거듭 권면하며 말하고 있는 그러한 책이 베드로전서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달라지는 것은 내 환경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일 들어도 믿기 힘든 이야기가 <지선아 사랑해>를 쓴 이지선 씨의 고백이었습니다. 명문대에 재학 중이었던 예쁜 여대성은, 교통사고로 전신의 55%에 3도 중화상을 입게 됩니다. 너무 심한 화상에 살 가망이 없다며 의료진도 치료를 포기한 상황에서, 7개월간 3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과 재활치료를
이겨냅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합니다. 예전의 얼굴과 많이 달라졌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8개의 손가락을 한마디씩 절단하고 장애 3급 진단을 받았죠. 자신이 겪었던 그 일들에 대해서 쓴 책이 <지선아 사랑해>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죠. 다시 그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녀는 말합니다. 결코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여대생으로 계속 살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삶의
비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지만 그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을 여러 간증집회에서 고백하곤 합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고백. 그 책이 처음 나온 20003, 제 나이 스무살 쯤 그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 “에이~ 거짓말” 속으로 정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게 그 시절 제 신앙의 깊이로 나온 반응이었어요. 이제 20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제 삶에 함께 하셨던 주님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그 고백은
진짜겠구나. 자신에게 찾아온 사건과 환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과 함께 찾아오신 주님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그분을 더욱 깊이 만났기에... 그런 사건 없이 만날 수 없는 주님을 만났기에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난 것 없고, 평탄한 삶을 꿈꾸고, 그래야 아름다운 것이라 여길 때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완전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었죠.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못 자국, 창 자국이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흔적이요,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분은 아예 믿지 않거나 살짝 믿으면 그냥 그런 분일지도 몰라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포기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거부하거나 그냥 아는 수준에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진심으로 경험하면 다릅니다. 이분을 믿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면 저의 삶이 경험한 예수님은 제가 결코 떠날 수 없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온다고 한들 제가 예수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걸요. 저는 부디 이곳에 앉아있는 여러분이 저와 같은 고백을 가졌기를 바랍니다. 아직 내 안에 그만한 고백이 없다면, 제 말을 한번만 믿고 들어주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그만한 고백을 남길 분이니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충분히 그렇게 믿고 삶을
드려도 될 그러한 분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는 반드시 둘 중에 한 가지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믿는 자들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과 다른 정체성과 신분을 고백하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고난을 당합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벧전 2:7b-8a)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살아가려는 신자를 모욕하고 비방하며 핍박합니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여러분, 세상이 기독교인을 미워하는 이 감정을 아십니까? 같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다르게 살겠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우리를 향해 찾아오는 것은 비방과 핍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그 선택과 그 걸음을 주님이 기뻐하시며 보호하십니다. (벧전 1: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도 걸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예배하는 자로 부르시고, 여러분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여러분의 삶 가운데 동행하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벧전
1: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벧전 1:9)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동시에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아. 너희에게 있는 고난은 당연하다. 그 상황에서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세상의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의 삶을 계속 굳게 살아라.”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 체계 안에서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벧전 2:10)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십시오. (벧전 2: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선한 삶을 살 되, 이 선함이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벧전 3:13)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벧전 3: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벧전 3:15)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벧전 3:16)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 3: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베드로 사도가 그의 사역 말년에 쓴 편지입니다. 자신이 평생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을 마음 담아서 전하고 있는 편지이죠. 특별히 로마 제국 아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왕으로
역사를 통치하시는 그 예수께서도 받으셨던 고난이니, 그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할 말을 전하라고 우리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신자란 무엇인가? 세상이 알 수 없는 소망을 품었기에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선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남들이 절망이다
말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 스며들어 내 삶을 지탱하고 바꾸고 새로운 것을 경험케 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이다’ 말하는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절망케 하는 악한 영을 말씀의 권세로 무찌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자로 삽시다. 신자로 살다가 신자로 죽읍시다. 우리가 붙잡은 예수를 잠깐의 고난으로 놓치 말고, 끝까지 그 손 붙잡고 승리합시다. 신자로 살기로 다짐하는 여러분의 삶에,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이께서 성실한 책임감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이 삶을 살다가 죽으면, 그분 안에서 기쁘게 만납시다. 신자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