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이사야 6장 / 그루터기와 거룩한 씨 / 강정규 목사

2020-07-19 · 이사야 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주께서 높은 보좌에 / 시선 /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 시작됐네 2개의 영상은 동일합니다. 소리 크기는 위의 유튜브 영상이 좀 더 크게 나옵니다.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 6: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 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목사의 아내는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아내는 담임목사를 선택할 권한이 없어요. 평생 담임목사는 정해졌습니다. 또한, 목사에게 사모는 제일 가까운 성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아내를 통해 제가 가르치는 것들이 얼마나 잘 이해가 되었는지 묻곤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배우는 이사야가 조금 낯설죠.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써서 배경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죠. 제 아내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와 시드기야라는 이름입니다. “여보, 히스기야가 두 눈이 뽑혔다고 했나?” 예전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공부했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기 때문이죠. “아니, 그건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이야기야.” 잠시 후에 또 “그 왕 이름이 히드기야?” “아니,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인데,

바벨론이 두 눈을 뽑고 포로로 끌고 갔고... 이사야에 나오는 건 히스기야 왕인데, 이 왕은 앗수르 때문에 고생을 했지.” 그 이후로도 제 아내는 한참을 히스기야, 시드기야, 히드기야 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고생을 많이 했죠. 제가 정말 자주 헷갈렸던 것이 ‘여로보암, 르호보암’이었어요. 누가 남유다 왕이고 누가 북이스라엘 왕인지가 그렇게 헷갈리는 것입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장로님은 처음에 교회 나왔을 때 여호수아가

여호와랑 아들인지, 형제인지 헷갈렸다고 합니다. 다 그러면서 배워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그냥 무식하게 외워서 머릿속에 하나 넣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암기하는 것이죠. 이 암기의 위력이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저는 중학교 때 외운 원소주기율표가 아직도 누르면 바로 튀어 나와요. 얼마 전에 보니 우리 남자 집사님들은 군번이 바로 튀어 나오더라고요. 이사야서를 배우면서 여러분이 적어도 이것 하나 정도는 외우면 좋겠는데요. “웃-요-아-히”입니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가 활동했던 남유다의 왕들의 목록입니다.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 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였던 1장의 내용은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모든 땅이 앗수르에 의해서 침공 당했던 상황이 배경이었고, 금요일에 특강과 함께 나눴던 이사야 7장의 내용은 아하스 왕 때,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의 상황이 배경이었던 것이죠. 이렇듯

이사야서는 역사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머리에 간직하고 주어지는 말씀의 배경을 삼아 메시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이사야는 웃시야 때부터 활동을 했고 요담 시대에도 활동을 했지만, 사실상 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의 배경은 대부분이 아하스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에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이후에 므낫세 왕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약 40년간 예언자로서 활약했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말씀은 이사야 6장입니다. 흔히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한 도구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왕이 세워지기 전에 사사를 두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국가,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이셨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생기면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를 바라보며 ‘우리도

왕을 주십시오’ 요청했죠.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셨지만,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십니다. 다만, 사사가 담당하던 역할 중에 정치적 지도자의 역할이 왕에게 부여됩니다. 거기에 세습이라는 면이 추가됩니다. 왕은 이제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왕조의 질서 안에서 계승됩니다. 동시에, 사사를 역사적 상황에 맞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사용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필요한 때에

선지자를 택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게끔 하십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제사장 제도나 왕정 제도는 모두 세습되는 것이었기에, 그로 인해 발생되는 부패와 타락을 막을 장치로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부르신 것이죠. 이러한 부르심의 장면을 ‘소명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독특한 점은 이 소명 장면이 6장에 가서야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소명은 1장에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1-5장까지 심판-소망에 대한 메시지가

주어지다가 6장에 가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것이 이사야서의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1-6장을 이사야서 전체의 ‘서론’으로 보기를 권합니다. 1-5장은 죄가 번성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반역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그들의 종교적 불의, 사회적 불의, 우상숭배 등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1-3장까지 그러한 문제들을 고발하다가 4장에서 ‘그러나 소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 4:2)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땅의 열매가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요? 내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갑니다. 사춘기의 반항과 같이 자꾸 삐뚤어지고 엇나갑니다. 몇 번을 타이르지만 말로는 더 이상 되지를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부모는 자녀에게 회초리를 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회초리는 당연히

자녀를 처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이끌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 회초리는 자녀의 입장에서는 매우 아프지만, 어쩌면 동시에 내 부모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이런 요소가 강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끝입니다. 포기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죄의 길을 가는 나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돌아오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구원으로 가고자 돌이킨다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충만한 것입니다. 어쩌면 변화의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변화의 주도권은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5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고발하고 그들에게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 심판은 ‘소망’을 가져다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사건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한번 보시죠. (사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아까 불렀던 찬양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 때 이 일이 있었음을 나타내려는 목적보다는, 여호와의 왕권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체험한 이 환상은 온 땅에 미치는 여호와의 왕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하던 왕이 죽던 그 해에, 하늘 보좌에서 온 땅을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사야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왕궁에 왕이 부재한 정치적

혼란기이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여호와 하나님의 높으심을 찬양하는 표현이죠. 그의 왕권은 어떤 존재도, 어떤 사건도 흔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차고 있다’고 말합니다. 옷자락은 왕이 있는 겉옷의 끝자락 장식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겉옷 끝자락만으로도 성전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높이 들린 보좌와,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은 ‘높고 넓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사 6:2)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 하나님의 주변에는 ‘스랍’들이 있습니다. 스랍은 천상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죠. 아까 찬양에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천사’라고 한 것이죠. 성경에는 천사도 있고, ‘그룹’도 있고, ‘스랍’도 있습니다. ‘그룹’은 예루살렘의 지성소에

있는 존재이고, ‘스랍’은 살아계신 하나님 주변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자세가 특별합니다. 이들은 여섯 날개, 즉 세 쌍의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두 쌍의 날개는 얼굴과 발을 가리고, 오직 한 쌍의 날개로만 날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가까이서 모시는 존재가 스랍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에 생명을 잃지 않으려면 날개로 온몸을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스랍은 모두 천상적인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요, 스랍은 피조물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절대적인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첫 반응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밝히는 빛과 같은 존재이고, 그 거룩한 권능의 빛 앞에서 우리는 더욱 우리의 죄성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성경의 사람들은 “내가 이제 죽게 되었구나” 말하죠. 스랍들도 자신들의 존재를 가린 채 여호와 옆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자주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높으심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와의 존재적 간격의 차이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높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낮아져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신비입니다. (사 6:3)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사 6:4)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보다 밝히 아는 스랍들은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거룩 삼창은 여호와의 거룩함을 최상급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을 스랍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연기가 가득한 모습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신현’ 사건에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모세가 백성들을 데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죠. 그때에도 인간은 최대한 성결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힘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가까이 가면 죽을 수 있음을 모세는 경고합니다. (출 19:18) 그 때에 시내 산에는, 주님께서 불 가운데서 그 곳으로 내려오셨으므로 온통 연기가 자욱했는데,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모세는 십계명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죠. (출 20:18)

온 백성이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섰다. (출 20:19)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에 대한 죽음의 공포를 갖고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모세가 어떤 역할을 한 것이죠?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신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사야의 이 체험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동시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민족과 국가로 만드셨던 하나님이, 이사야 때에도 동일하게 그들을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신약 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까?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고 찬양하는 우리는 주님의 큰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것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가치 없게, 성의 없게 여기죠. 저는 이런 부분에서는 정말 우리 신앙의 윗세대를 존경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때론 너무 경직된 부분이 있긴 했죠. 제 친구 목사 중에도 아버지가 목사님인 그런 친구가 있는데, 결혼을 하고 첫 주일에 자기가 충격을 받았데요. 왜냐하면 교회를 가야하는데, 양복이

안 다려져있고 구두가 안 닦여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답니다. 지금 정서로는 돌 맞을 소리죠? 왜냐하면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주일 아침이면 아버지와 아들의 양복과 구두를 항상 다려서 최고의 모습으로 예배하러 가도록 평생을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처음에 충격을 받았데요. 곧 적응했답니다. 헌금을 다리미로 다리고, 은행가서 깨끗한 돈으로 바꿔서 낸다고 그 가치가 올라가겠습니까? 만원은 구겨지나 펴지나 만원이죠.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 그것이 동일한 만원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에서 우리는 배우고 도전받아야 할 것이 분명 많습니다. “주는 나의 친구~!” 좋은 찬양이죠. 주님이 나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고백이죠.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그 전에 이 분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고 고백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 높으신 분이 나의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것이 은혜인 것이죠. 그런 것 없이 하나님을 오로지 친구처럼만 대하는 것은 올바른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죠. 이사야도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하고 나서

첫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사 6:5)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의 예언자적 사명과 관련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표현되었지만 입술로 대표되는 자신의 모든 육체가 부정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입술이 부정한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의 부정한 문제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 6:6)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죄를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스랍이 다가와 그의 죄를 사해줍니다.

그의 죄 사함은, 그가 고백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악 또한 하나님 안에서 정결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사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였지만, 주님이 그를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또한 하나님 안에서 구원으로 나아가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사야의 배경은 ‘하늘’입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 수차례 언급한 것처럼 ‘하늘’은

공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신학자들이 ‘하늘어전회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그 회의 안에 들어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어전회의가 몇 번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는 ‘욥기’입니다. 거기서 천상적인 존재들의 회의가 등장하죠. 이사야서에서도 하늘어전회의가 열렸고 그곳으로 이사야가 가게 되었는데, 이사야가 듣게 된 회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사 6:8)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이사야는 자신의 죄가 정결케 되는 은혜를 경험한 후, 보낼 자를 찾는 물음 앞에 당당히 헌신합니다. 사명자는 은혜 안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죠. 제가 저희 교회 안에서 늘 강조하는 것 아닙니까? 내게 주신 은혜의 감격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순서입니다. 마리아도 필요하고 마르다도 필요합니다만,

마리아의 은혜가 먼저 경험되고 마르다의 헌신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자, 문제는 이사야가 받게 된 사명이 통상적인 사명을 뒤집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사 6:9)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사 6: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우리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죠. 백성들이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하는 일 또한 하나님의 의지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자, 이사야의 사명은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1-5장에서

이스라엘이 심판이 필요한 상태임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심판이 필요한 마지막 결정타로 하나님은 이사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가서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면, 그들은 이사야와 이사야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선량한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악하도록 조정하셔서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이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래의 거절까지 포함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이사야가 이제 나가서 전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고하게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내리신 이 심판 결정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그분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분이 미래를 그렇게 조정하시므로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내 미래를

선택합니다만,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선택을 알고 계십니다. 선악과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에 있었고, 그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은 그 때, 주님은 인간을 구원할 미래의 모든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연약함은 적어도 하나님께는 갑작스러운 변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A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갑작스레 B를 선택하여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망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B를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다시 새로운 길을 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읽고 우리가 잘못된 ‘숙명론’에 빠지면 안 됩니다. 숙명론은 그리스도인에게 진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날마다 선택합니다. 다만 내 잘못된 선택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이 내 삶을 붙잡고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실패의 그 다음 대안이 내게는 없지만,

주님 안에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 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사야는 묻습니다. (사 6:11) 그 때에 내가 여쭈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사 6:12)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사 6:13a)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 반응을 아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게 될 심판까지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첫 부분에서 나눈 것처럼,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나라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는

완악함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끝에서라도 자신들이 저지를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돌아온다면, 이사야에게 행하셨던 죄 사함의 은혜가 이스라엘에게도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장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사 6:13b)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루터기와 같은 소망의 세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서

그곳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다시 돋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이 다시 예전처럼 복음으로 활활 타오르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미래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현재는 전보다 교회가 문을 닫고, 신자는 줄고 있으며, 신앙을 지키기에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대가 아니라, 이 시대안의 거룩한 씨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나라가 초토화 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수난을 겪는 이스라엘을 봅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안에서도 거룩한 씨들이 놀라운 일들을 해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있었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고, 에스더 같은 사람들이 그루터기 같은 역할을 해내고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할 한 교회를 이끌고 있는 목사로서,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시대를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도 말고 핑계하지도 맙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둠에서는 빛을 내는 촛불이 되고, 황무지에서 피어나는 거룩한 씨가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이 교회의 목표가 되고,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사야서는 심판을 이야기하는 아픈 책입니다만, 언제나 소망이 있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온 땅을 덮는 권능을 가지신 이가, 오늘도 우리의 예배를 기다리시고,

내 순종을 기다리시고, 나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맙시다. 내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망가졌더라도 좌절하지 맙시다. 우리 신앙은 그 때 써먹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 발걸음이 여호와를 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소망 가운데 있는 줄 믿습니다. 그루터기와 거룩한 씨. 온 세상이 주님을 외면한다고 해도 주님이 찾으실 수 있는 그

마지막 대안. 주님이 바라보는 그것. 이곳에 모인 우리가 부디 주님의 그 대안과 자존심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