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네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주에는 4주년 예배로 요한복음 시리즈를 벗어났었죠.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모드로 돌아올 겸, 지금까지의 요한복음의 흐름을 한번 잡고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신다면,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서론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는데,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시작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가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지만, 사실 서론부터 기록목적에 충실하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왜 알려줍니까?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그분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도록,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요한복음은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명한 학자인 <리처드 보컴>의 연구에 의하면, 요한복음 1장은 496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21장도 496개의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서론과 결론의 단어 수를 맞춘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죠? 성경이 굉장히 치밀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럼 왜 496개의 단어일까? 그것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기록목적을 잘 살펴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이 아들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독생자’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종류,
같은 존재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독생자인데, 헬라어 ‘모노게네스’라고 씁니다. 이 모노게네스가 갖고 있는 숫자가 496입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제가 마태복음의 족보를 설명하면서 가르쳤던 것이죠. 거기서는 일부러 14대를 맞췄는데, 그것은 4.6.4로 이루어진 다윗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이런 예는 성경 뿐 아니라 당시의 역사자료에도 등장합니다. -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네로 카이사르를 풀면 666이다) -“나는 그 이름이 545인 그 여인을 사랑한다.” (폼페이 도시에 남아있는 기록) 즉, 요한복음의 서론과 결론의 음절을 496으로 맞춘 것은 요한복음 전체가 말하고 싶은 것,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어차피 우리의 삶과는 너무 멀리 동떨어져 있으니,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놀랄만한 것은 아니겠죠. 그러나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예수님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잖아요. 직접 보았거나, 혹은 그 밑의 세대를 사는 사람들이기에, 로마제국의 사형수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흉악범이나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은 가장 중요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처음부터 기록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사람들을
통해 전파되는 형식으로 1장이 기록됩니다. 이어지는 2장부터 12장까지는 소위 ‘표적의 책’이 기록됩니다. 표적 또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라고 했어요. 즉, 모든 초점이 같아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러한 통일성을 갖고 있어요. 이 부분에는 7가지 표적이 기록됩니다. ① 2장 –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 ② 4장 –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③ 5장 – 베데스다 38년
병자 치유 ④ 6장 – 오병이어 ⑤ 6장 – 물 위를 걸으심 ⑥ 9장 – 맹인 치유 ⑦ 11장 – 나사로 소생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표적을 행하시면,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는 오해를 합니다. 반응이 나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이미 1장에서 기록된 반응입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독생자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교’, ‘유대인’은 잘못된 신앙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주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은 다른 개념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런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따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12절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이고, ‘그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 유대교 신앙으로는 안 됩니다. 대표적으로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죠. 그는 유대인이었으나, 그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인 것이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취라는 것을 여러 방면에서 보여줍니다. 우리가 두 번째 설교에서 다뤘던 4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유대교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결론은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유대교의 잔치였던 결혼식을 배경으로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입니다. 파장하는 잔치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새로운 포도주를 허락하시죠. 그전에 제공했던 포도주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포도주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잔치가 예수님에 의해서 열렸다는 것이죠. 두 번째 사건은 성전 청결 사건입니다. 유대교 신앙의 절정이 건물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의 도래를
말씀하시고, 건물 성전 시대의 종말을 말씀하시죠. 세 번째 사건은 니고데모입니다. 유대교의 랍비. 유대교 신앙으로 똘똘 무장한 그 사람.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영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밤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의 삶이었고, 그 갈급함은 예수님을 만나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으며 새롭게 됩니다. 네 번째 사건은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 그 장소는 야곱의 우물입니다. 야곱은 유대교와 사마리아 신앙에서 모두 시작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성스러운 야곱의 우물이라도
곧 다시 갈증이 나는 유한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수 되신 예수님을 소유한 자들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은 영원한 생수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더불어 예수님은 누구신가?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가?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장부터 이어지는 4개의 이야기는 유대교의 절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 설교에서 다룬 것이 ‘안식일’입니다. 베데스다 연못.
유대인들에게 유명한 치유의 장소.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안식을 주는 회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생명의 토양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리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아느냐?”, “제발 좀 알아봐라.” 어쩌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이런 것입니다. 이어서 유월절에는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를 발견해야 하는데, 또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해결사, 기적 자판기 취급을 하면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왕 맞죠.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은 자신들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줄 그런 대상으로서의
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런 왕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진정한 왕이 되는 것이 요한복음의 신학입니다. 어쨌든 여러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 오해합니다. 표적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고, 삶으로 드러내어도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반이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과연 유대인들만의 모습일까요? 저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안에도 이런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윌버 리스(Wilbur Rees)가 쓴 '3달러어치의 하나님'이라는 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잘못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만. 수면을 방해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뜻한 우유 한 잔 만큼이면 됩니다. 내 죄책감을 조금 누그러뜨릴 만큼이면.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흑인을 사랑하도록 만들 정도라면, 혹은 이민자들과 사탕무를 주으러 다니게 할 정도라면 곤란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만.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나는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을 원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 머물러 온기를 즐기며 지내기를 원합니다. 나는 영원의 500그램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 들고 싶습니다. 그 이상을 사야 한다면, 무르고 돈을 되돌려 받겠습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제발. 그중 일부는 궂은날을 위해 숨겨두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만. 이렇게 제발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살 수는 없을까요? 제발. 신앙은 갖고 싶어요.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하는
것 같고. 교양적이기도 하고, 왠지 여기 있으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 하고 싶은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내 삶을 정의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예수님이 있는 것은 좋은데, 내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기는 싫은 것이죠.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은 싫은 것입니다. 내 삶은 철저하게 내 것이고, 부수적으로 하나님이 좀 필요한 그런 신앙. 램프의 지니처럼 내가 필요하면 그때만 좀 나타나서 도와주고,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내 삶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신앙. 그런데 결국 기독교의 신앙은 내 삶이 하나님께 속한 삶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치 씨앗이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다고 성경이 말하죠. 요한복음에서도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그러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죠. 문제는 그 과정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가룟 유다의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신앙은 계속해서 3달러의 신앙에 머물지도 몰라요. 3달러 정도의 사랑은 할 수 있어요. 3달러 정도의 헌신은 할 수 있어요. “내가 정한 기준 이상으로 나를 흔들지는 마세요.” 이런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들었으나 진짜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의 군중 가운데 하나로 머무는 것뿐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 때에도 있고, 지금도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내 일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거듭나야 합니다. 지금의 모습에서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새로워져야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너희에게 왔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몫은 무엇인가?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다짐하는 진실된 고백 위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믿고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니고데모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민하는 신앙’으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그의 두 번째 모습은 ‘시름하는 동조자’입니다. 아직 전면적으로 따르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신앙으로 살기 위해 시름하과 있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세 번째 모습은 세상 앞에 전면적으로 나서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제가 풍삶초를 해보고 있습니다. 더러는 “저는 아직 답을 찾고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시름하는 동조자”와 같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제 그를 따르는 것이 자랑스럽고 기쁨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존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만 드리면 됩니다. 진실된 우리의 마음. 요한복음 7장은 절기 이야기 시리즈의 3탄으로 초막절 이야기입니다. 초막절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7장의 시작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삶에도 실제 가족이 있었죠. 마리아와 요셉 뿐 아니라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오해는 당시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역을 말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7장에서는 이왕 선지자와 같이 활동할 것이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명절에 예루살렘에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있는 곳, 출세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7: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때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한 때이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숙제를 완수하는 것이 그분이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그때가 오기 전(1-12장)과 그때가 온 후(13-21장)로 나뉩니다. 아직은 그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동생들에게 말한 ‘너희의 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재 그들이 머문 삶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르기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그러한 동생들의
삶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과 그들이 구별되지 않고 같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세상이 보기에 예수는 불편한 존재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편에 가깝다면 예수님이 먼 것이고,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편에 가깝다면 유대 지도자들이 그만큼 하나님께서 먼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3달러 신앙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잃지 않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여러분을 불편해합니다. 사탄도 여러분을 더 공격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 않을 때는 받지 않던 미움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세상에 속해있던 나의 옛사람과 등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안에도 오해와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막 3:21)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막 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모든 복음서가 공히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조차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말리려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사역 자체는 인정했으나, 여타 다른 사람처럼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의 지위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육신의 가족이었으나, 아직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영적 가족이 되지는 못했던 때였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형제, 자매라고 서로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을 우리 삶에 허락된 육신의 가족 안에서 누리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어쩌면 예수님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죠. 적어도 요한복음 7장의 모습은 서로의 시선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때와
동생들의 때가 달랐고, 그들의 삶의 목표와 방향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훗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제자가 됩니다. 그들이 쓴 성경이 신약의 야고보서와 유다서입니다. 육신의 가족일뿐더러 영적으로도 진정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얻는 것 가운데 너무나 중요한 것이 영적 가족들이라고 믿습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을 보면,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것과 얻는 것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죠. 형제, 자매, 어머니, 자식, 전토, 모두 백 배를 받습니다. 죽어서가 아니라 현세에 받습니다. 왜 100배일까요?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삶을 살 때는 어머니가 한 명이었지만,
거듭난 삶을 살게 되며 우리는 복음 안에서 수많은 영적 가족을 얻기 때문입니다. 다만 박해를 겸하여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받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백배로 받는 것 가운데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볼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우리에게 아버지가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영적 가족이 늘어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에 코로나 상황을 교회가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확진되었던 사람들과 연락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자신이 얼마나 좋은 공동체에 속해있는지를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내 삶이 멈췄습니다. 계획이 틀어지고, 또 관련된 사람들이 많아서 몇 번씩 검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과 질병의 고통보다 오히려 위로와 격려와 사랑이 더 컸다고 말합니다. 저는 요즘에 우리 교인들을 통해서 오히려
‘사랑’을 배웁니다. 예전에는 제가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고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제가 사랑을 배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가 코로나를 겪으며 느끼는 것은, 단순히 이 사건을 ‘잘 이겨내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 더 어려운 위기들이 찾아와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위로와 소망이 우리에게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 반드시 그러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교계의 여러 지표는 코로나 상황을 지나면서
기독교인이 줄어들고 있다는 지표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이 시대에 정말 교회가 소중하고 공동체가 아름다움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고독해지고, 더 힘겨워진 시대. 예수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희생과 포기와 고난도 있겠으나, 그 이상의 것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을 저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한 가족으로 오늘도 예배함이 복이라 믿습니다. 동생들은 드러내자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에 조용하고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유대의 초막절 행사는 출애굽 때 조상들이 광야에서 지낸 것을 기억하기 위해, 8일간 임시 거처로 초막을 지어 생활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이 돌보신 것을 기념하며 광야체험 비슷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초막절 기간 마지막쯤에는 2가지 행사를 진행합니다. 하나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와서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의 그 목마름 가운데 하나님이 물을 주셨던 것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또 하나는 제등행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맞춰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결국은 초막절 이야기에서도 보여주는 것은 절기로 존재하고 예식으로 치러지는 그 모든 것들은 참된 의미를 기억하고 누리기 위함이죠. 그러나 이 절기에는 이제 모양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건의 모양’은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 참된 능력은 없어요. 좀 더 쉬운 표현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종교적 지식은 교만일 뿐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요한복음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 때마다 나타나는 여러 반응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 앞에서 반응하는 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우아하게 햇빛 잘 드는 곳에서 성경 읽고 커피 마시며 묵상하는 그런 사진과 같은 장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SNS 소개 글이나 배경에 멋진 말씀이 적혀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그것도
일종의 자기고백일 수 있기에 좋은 의미입니다. 드러내는 것도 용기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더욱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이 있죠. 정말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걷고 있는가? 정말로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세상과 구별되어 영원한 생수이신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초막절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생수가 배에서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로부터 그 생명력이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빛의 속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기독교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초막절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교묘하게 구성된 상황입니다.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던 현장에서 여인을 잡아 왔어요. 그럼 왜 남자는 없습니까? 진짜 율법대로라면 남녀 모두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율법을 정말 잘 지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죠. 예수님이 거슬리니까요. 자신들이 세워놓은 종교적 기득권, 사회적 기득권을 자꾸 흔들어대니까요.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a)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만약 예수님이 이 여인을 보호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한 자가 되는 것이죠. 반대로 만약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하면 로마법을 어긴 사람으로
몰아붙이려는 것입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유대인에게 사형의 권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아포리아’(난제)인 것이죠. 그럼 이 사건을 기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넘어 뜨리고자 여인을 도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물을 수 있죠.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의 행동을 받아들이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죠. 예수님은 이 난제를 두고 그들과 논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세상과 논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시선을 바꿉니다. (요 8:7b)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여인 혹은 예수님을 향해서 가혹하게 들이댄 그들의 시선을 바꾸어 각자를 돌아보게 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것을 기준 삼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향해 시선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신앙생활을 왜 하십니까? 그것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의 검이 향하는 것은 나의 죄성이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구절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바라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돌아갔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쩌면 저 얘기를 듣고도 돌을 던질 만큼 양심의 가책조차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만큼 어두움이
더욱 짙어졌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그만큼 빛도 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말로 세상과 구별된 생수가 흐르는 삶이라면, 우리의 삶이 정말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삶이라면... 오늘도 우리의 신앙은 세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생수를 보여주고, 누군가에게 빛을 비춰주는 그러한 삶으로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적이고, 나의 변화는 곧 누군가에게 흘러갑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지금의 자리는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방향을 틀지를 고민하는 사람부터,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한 방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가족.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되짚으며 살펴보았던 것처럼,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도록 합니다.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 보기 때문에 오해합니다. 왜곡합니다.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들어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던 신앙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어버려 힘을 잃었고, 절기들도 예식과 형식으로만 남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찾아왔다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떠나버리는 사람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생명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을 긍휼히 여기셔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셨지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는 길을 걷고 계십니까? 신앙은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일부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전부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도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말씀을 듣고
늘 생각하고 결정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해서 결정하십시오. 그 결론이 내 삶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면,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그분을 따르기를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미 그 길을 따르고 있다고 믿는 분들에게도 질문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 정말 반응하고 계십니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마음과 다른 마음을 내게 요구하실 때,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변화는 내 의지와 무관한 변화가 아닙니다. 말씀을 따르기로 매일매일 다짐하는 내 의지를 기쁨으로 받으시고 일하시는 결과입니다. 그것이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며 하시는 일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Christian’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Christ in a man.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거하는 것. 내 종교 소개란에 ‘기독교’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머문 자리에,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남겨진 자리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 행동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