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10과 /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1) - 부부, 남편 / 강정규 목사

2022-02-1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나의 존재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큰 가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가족의 의미이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얻고, 또한 교회에 속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자녀입니다. 현세에 100배를 얻는다는 말이 그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조차 못 할 사랑을 교회에서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삶에는 각자에게 허락된 육신이 거하는 실제적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교회’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면, 믿음의 가정은 모두 작은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그 가정교회의 교역자이고 자녀들은 교인입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삶이 예배요, 주고받는 대화가 찬양이며 기도입니다.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교회는 그래도 사람들이 가장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곳입니다. 가정 또한 교회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그러한 노력의 출발점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가정생활을 하며, 그런 마음으로 함께 세워가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주제가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이다보니, 부부, 남편, 아내, 부모, 자녀 등의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이 주제를 진행함에 있어서 때로는 각자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신으로 삶을 살아가거나, 자녀가 없는 삶을 사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 모든 일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또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신념 또한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설교를 대하실 때, 조금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왜 가정을 허락하셨고 무엇을 바라보고 계신지 말씀 앞에 마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정전문가도 아니고, 상담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책의 취지도 그렇고, 정리해서 전하는 저도 그렇고,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1. 부부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지만, 결혼식이 앎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즉, 상대를 다 알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검증이 끝났기에 비로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상대의 실상을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그전까지 상대에 대해

본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입니다. 그 허상은 각 사람의 바람이나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고, 상대가 꾸며낸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그렇게 자신을 감추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은 상대에 대해 품고 있는 허상을 먼저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의 실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새신자반 제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면, 형상을 따라 지은 것은 ‘남자’와 ‘여자’입니다. 둘 모두라는 것이죠.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입니까? 하나님은 남자입니까? 그래서 어떤 이단은 어머니 하나님도 계신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남성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가장’과

같이 가정을 이끄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장’은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일 수도 있죠.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역할을 아버지가 하고, 성경의 독자들도 그러한 문화권에 살아가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존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니까, 하나님은 남성성을 갖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오해인 것이죠.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나 여자만의 형상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동시에 지니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즉, 부부가 된다는 것은 각자가 배우자를 통해 자신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 나아가며,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동시에 지니신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의 신비로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막 10: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세상에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라고 말하죠. 수많은 남녀 중에서 우리는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배우자와 부부로서의 길을 걷도록 하신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가길 원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 그대가 배우자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고통 없이는 그대의 모난 마음이 갈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배우자를 도구 삼아 그대의 모난 마음을 찢고 가심으로, 그대의 삶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고 계신다. 생각해 보라. 그대의 배우자로 인해 그대의 마음이 그토록 찢어지지 않았던들, 어찌 그대가

지금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겠는가? 과연 그대가 기도하려 했겠으며 말씀을 붙잡으려 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배우자와 부부 되었음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증거다.” 저는 이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재철 목사님의 말씀을 빌어서 설명을 드리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멀리에 있는 설교자나, 이재철 목사님처럼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무겁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 시대의 가정이 수없이 깨어지고 아프고 힘겨운 일이 가득함을 저는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도 올해가 결혼 14년 차입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저 또한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한 사람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저 또한 이 말씀 앞에 그렇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재철 목사님은 결혼 후에도 굉장히

늦게 하나님께 돌아와서 목회의 길을 가신 분이고, 젊은 시절에는 사업을 하며 사모님 속을 많이 썩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그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나누는 자기 고백과 같을 것입니다. “그대의 배우자로 인해 더이상 고통스러워만 하지 말라.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그대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 회복시켜 가는 기회로 삼아라. 그대가 정녕 변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의 배우자를 책임져 주심을 믿어라.” 부부가 함께 세워져가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훈계함으로 상대방을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잔소리는 잔소리일 뿐이죠. 그것으로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낳은 ‘자기 자식’도 말로써 바로 세울 수 없거늘, 우리가 어찌 이미 성인 된 ‘남의 자식’을 말로써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의 배우자를 주셨음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스스로를 믿음으로 바르게 가꾸어

갈 때, 여러분의 삶을 통로로 삼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배우자를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각자의 배우자들과 한 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배우자와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든지, 운명이라고 믿든지, 내 선택이라고 믿든지.... 내 삶을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각자의 배우자와 부부가 되었음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2. 남편 먼저 남편들에게 드리는

메시지입니다.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결혼한 여자의 70%가 남편과 이혼하기를 원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있고, 60%는 다시 태어날 경우 현재의 남편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아내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아내가 나로 인해 죽음을 생각했던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남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진정으로 바르게 서서 자신을 성찰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남편인지 스스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여자를 짝으로 주실 때, 남자를 위한 ‘인형’이나 ‘종’의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돕는 배필’로 남자에게 여자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는 여자의 도움 없이는

그 인생이 결코 완성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남자 홀로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남자에게 돕는 배필을 따로 지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로마의 카이사르에게 아내는 원로원에 나가지 말라고 말했을 때, 카이사르는 아내의 말을 ‘암탉 우는 소리’ 쯤으로 하찮게 여기고 나갔다가 바로 그날, 그가 그토록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무참하게 난도질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비록 로마의 정치에 관하여는 문외한이지만, 그러나 남편인 자신을 본능적으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아내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내의 말 한마디가, 자신이 믿는 수많은 사람들의 백마디보다도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카이사르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죠.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려는 날 아침입니다.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잘못된 선고를 하지 마소서.” 그러나 민중의 위세에 눌린 빌라도는 아내의 말을 묵살하고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빌라도 역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아내에게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사도신경’ 고백을 통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발을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여러분은 각자의 아내의 도움이 있음에 여러분의 인생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아내의 도움을 겸손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아내의 내조를 밥을 해주거나 집안을 돌보는 것 등의 기능적 행위로 이해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기능적인 측면은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아내의 도움은 그렇게 손발로 줄 수 있는 도움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은데요. 아내는 타고난 ‘본능’으로, 여러분만을 향한 ‘마음’으로, 마름이 없는 ‘사랑’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 안에 거하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여러분을 돕습니다. 그래서 그 도움은 아내 외의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아내와 대화를 많이 나누십시오. 혹시 아내가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일지라도, 아내의 말속에 여러분을 위한 결정적인 조언들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위한 ‘돕는 배필’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아내를 명실공히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동행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의 삶이 경험하는 많은 것들을 아내도 함께 경험하며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마침 이 설교를 준비하는 기간이 저희 가정에게는 코로나로 인한 ‘별거’ 기간이었습니다. 아내와 딸이 코로나에 확진이 되면서 저는 같이 남아 자가격리를 할지, 아니면 거주지 분리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같이 자가격리를 하게 되면, 예배를 집에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목회는 저와 우리 가정의 문제가

아닌 사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최선을 위해 제가 목양실에서 일주일 넘게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참 많이 느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평소에도 일주일에 6일은 거의 목양실에서 지내다가 식사 시간이나 잠자러만 집에 갔었습니다. 사실 물리적 시간으로 따져보면 그전에도 하루에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평소와 다른 가족의 소중함, 아내의 소중함이 많이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혼자

있으면 편하지 않은가? 만약 묻는다면, 편한 부분도 있죠. 편하지만 외롭고, 시간이 많지만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원래 가정일을 잘 못 해요. 어쩌다가 거주지 분리를 하기 전, 집에서 제가 부대찌개를 끓였었는데, 몇 년 만에 요리를 했던 것 같아요. 가끔 심방하면, 요리를 잘하시는 남편분들이 있으시던데 참 멋지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저는 잘 안 합니다. 원래 안 하다 보면 못해집니다. 뭘 시켜 먹기에도 혼자 있으니까 애매하고, 그래서 혼자

대충 식사 준비해서 먹고, 또 괜히 생긴 설거지들을 하고,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며 매일 청소기 돌리고 할 때마다... 늘 함께하던 아내의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그 일을 누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는 것보다는 (왜냐면 AI 로봇이 있어서 그런 것 다 해줘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공유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참 따스하고 행복한 일임을 많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담도 그랬겠지요. 에덴에서 아담이 부족함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하나님은 채워주고 싶으셨어요. (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갈빗대 아래에는 심장과 허파가 있죠. 갈빗대 없이는 생명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가장 중요한 뼈입니다. 그처럼

생명을 보호하는 중요한 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칩니다. (창 2:23a)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표현은 ‘내 생명 중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함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더욱 큰 사랑으로 내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보다 자기 자신만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 줄 아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남자가 결혼을 허락받고자 할 때, 여자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따님을 주십시오.” 그리고 남자의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서 남편의

삶에 함께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좀 더 극단적으로 자신의 성까지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남자가 반드시 주겠다고 그토록 굳게 약속했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위해, 아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남자들이 결혼 때 하는 약속만큼 대체로 잘 못합니다. 사랑의 약속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죠. 삶이 척박하고 바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은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는 다른 무언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운동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사업일 수도 있고, 취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내일이라도 중병에 걸려 영영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처지가 된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이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까?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여러분이 그토록 좋아하던 친구들은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찾아오는 것은 부고장을 받았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사업도, 여러분의 취미도 더이상 여러분의 벗이 되어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여러분을 버리고 떠나도, 끝까지 여러분 곁을 지키고 있을 오직 한 사람, 그것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다 지나갑니다. 들의 풀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 관 속에 눕는 날, 여러분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도 여러분의 아내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 여러분이 못다 이룬 뜻을 자식들의 삶 속에 심어 줄 사람도 여러분의 아내뿐입니다. “그대는

지금부터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대가 아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아내는 그대의 사랑에 자신의 생명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대의 아내는, 오직 그대의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대를 따라나선, 그대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편 동지 여러분.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그럼 우리가 아내 사랑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한 귀한 고민과 질문을 갖게 되셨다면 답을 드리겠습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따라 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삶의 비밀이요, 행복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