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에고 에이미" / 강정규 목사

2022-02-13 · 요한복음 8-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요한복음의 큰 그림 안에서 정리해보자면, 1장은 서론이고, 2~12장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의 모습입니다. 일종의 빌드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13장 이후가 바로 그때가 온 이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2~12장 부분을 지금 보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 쌍의 이야기 묶음이 나옵니다. 먼저 2~4장까지는 네 가지 유대 제도에 대한 것이고, 5~10장까지는 네 가지 유대 절기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초점이 있다면 유대교 신앙의 한계,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성취로 임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제도나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의 완성이신 예수님이 그 모든 의미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죠. 지난주 설교는 절기 이야기의 세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초막절’ 사건이었습니다. 초막절의 행사인 물의 예식, 빛의 예식에 빗대어 예수님은 진정한 생수, 진정한 빛이 되시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초막절 이야기 중간에 나타나는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사건’은 죄와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여주며, 기독교 신앙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죠.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살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읽어가며 매우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죠.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죠. 원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살았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생명 또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위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분의 나라, 창조의 진리를 가르치시며 하나님 안에 영생을 얻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새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의 의미가 그것이죠. ‘아노텐’이라는 단어는 ‘다시’라는 말도 되지만,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로부터 온 생명 안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했던 대지에 뿌리 뽑힌 나무를 다시 세워 살리는 것 등은 모두 이것을 의미하는 일이죠. 그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입니다. 단순히 영원한 불로장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잇대어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표적 사건이 중요하게 기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표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위 세상의 진리(실체)를 아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물리적 세계의 현상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일종의 사인(sign)이 표적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하여 그들의 눈이 바라보던 모습이 변하였던 것처럼(수치),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의 눈이 영적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졌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표적을 본 사람들에게는 엇갈린 반응이 나타납니다. 대부분 오해를 합니다. 이 세상의 시각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진리에 역행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진리로 이끌어 주시려고 스스로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가르쳐주십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기적을 보여주시니까,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합니까? 예수님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로 오해하고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 풍토도 비슷한 측면이 많이 있어요. 기적 중심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핵심이 아닌데 말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표적을 일으키신 후, 오해하는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치시려고 ‘긴 설교’를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표적의 책은 거의 ‘표적 + 오해 + 설교’의 구조로 전개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설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오해하지 않도록 직접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I am saying’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의 표적 사건이 7개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I am saying’ 메시지도 7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도 요한복음에는 7번 나옵니다. 성경의 완전수인 7을 이용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설교에 등장하는 ‘I am saying’ 메시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나는 ~ 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헬라어 ‘에고 에이미’를 통해 예수님이 자기 계시를 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 말씀과의 연관성 때문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만약 그들이 나를 보낸 이의 이름을 묻거든 뭐라고 말하리이까? 그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분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입니다. ‘I AM WHO I AM’. 바로 이 표현을 헬라어 문자로 번역하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예수님은 초막절 빛의 예식에 빗대어 “나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후,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논쟁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빛이 있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통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지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빛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 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그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엇나가 있는지 그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 8:28)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대놓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다니엘서에서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라고 표현하시죠.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땅바닥에서 위로 들어 올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위의 진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높이시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죽음’과 ‘영광’이라는 키워드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내가 곧 나’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에고 에이미’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땅 위에서 들려 올려지면 사람들은 그가 곧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스스로 있는 자(에고 에이미)’라는 분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해봅시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요? 그를 통해 잃어버린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사랑을 보여줘요.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본질을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속한 셈족의 문화에서 ‘보냄을 받은 이’는 ‘보낸 이’와 같습니다. 유대 미쉬나 법에도 그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이를 대표하고 그의 권한을 대행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을 고향으로 보내는데, 그 종은 아브라함의 전권 대사로서 아브라함과 같은 자가 되어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 독생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나타내는 분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 대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맞춰 일하시고, 하나님의 사명에 맞추어 살아가십니다.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죠.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만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구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입니다. 또한 구약부터 예수님은 예언되고, 그 성취로서 오신 것이죠. 그래서 성경 전체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이유는 구약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제사장적 사명을 다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가짜 진리 안에 얽매여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 권력, 쾌락, 심지어 모세의 율법이나 종교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어 사람들이 참된 진리를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붙잡고 있는 거짓된 진리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자유란 우리를 둘러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간단한 문장이지만, 사실 가장 심오한 말씀이기도 하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저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상당한 반박을 할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너희는 맨날 이것 하면 안 되고, 저것 하면 안 되는데... 내가 더 자유롭지 않으냐?”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유하다고 진짜로 믿는데요. 그 자유란, 죄악 된 세상이 주는 여러 한계와 결핍, 정죄, 결과에 대한 압박, 피라미드 구조가 주는 절망을 이겨내는 주님의 능력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인의 특권’임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9장의 사건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8장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다뤘습니다. 그리고 9장에 들어서면 맹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연결입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인데, 성경의 기록이 ‘맹인’임으로 설교에서는 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함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맹인은 선천적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치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에 대한 소문이 많았음에도 이 사람은 소문을 듣지 못한 사회적 고립 속에 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익히 여러번 나눠왔던 죄와 질병 사이의 물음이 이 장면에서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안에는 질병은 곧 죄로 인함이라는 생각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가 죽음과 고난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로 인한 심판을 직접적으로 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누군가의 죄가 나의 피해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연대성 속에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음주 운전자의 잘못과 죄로 멀쩡한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배금주의자가 철근을 부족하게 넣고 건물을 지어 사고로 사람들이 죽기도 합니다. 잘못된 경제 제도나 정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기도

하고, 독재자의 탄압 아래 고통받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연결될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즉, 누군가가 받고 있는 피해에 대하여 그 원인을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의 죄로 인함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어떤 죄를 지어서 고난을 받고 있다면 그에게 회개를 권고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고난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 맹인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주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사람의 맹인 됨은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질병을 기적을 경험하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이 맹인은 매우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보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자연의 빛이 있었으나, 이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하기에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영적으로도

그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나, 이 사람의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그의 육신의 눈이 고침을 받게 되어 그는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영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이 치유의 기적을 근거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 갑니다. 그의 질병이 진리를 깨닫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가 맹인이고 구걸하던 자였으나 치유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요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처음 그가 고백하는 예수에 대한 인식은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입니다. 안식일에 치유가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다시 누가 그를 치유하였는지를 묻습니다. (요 9: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맹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맹인이 예수님에 대하여 ‘선지자’라고 인식한 것은 그가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죠. 실제로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예언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바라보는 것은 선지자 그 이상입니다. (사

29: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 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구약 이사야서에 나타난 예언들인데요. 그날, 그때,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일들에는 여러 치유와 회복, 자유케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의 사건이 맹인이 보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날은 메시아의 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 가운데 누가복음 나사렛 회당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읽으신 후,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메시아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이 예언되었다면,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 그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그 현장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육적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구약 말씀에 가장 정통한 집단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성경 말씀이 현실이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놓은 선입견이 강하면 진리를 마주했을 때도 반응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를 아주 신실한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마지막 예언의 말씀 가운데 가장 마지막 구절이 이것입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날, 즉 메시아가 오시는 날이 이를 때에, 그 징표로 ‘엘리야’를 보내서 먼저 알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구약 가장 마지막 예언서 가장 마지막 절입니다. 그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400년 동안 유대인들은 계속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온다고 특정된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도 그가 하시는 일이 나올 뿐, 그의 모습은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우선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기다립니다. 엘리야는 이미 구약에 있었던 인물이기에 그나마 알아볼 수 있을만한 특징적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엘리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뭔가 번뜩이는 특출난 사람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메시아?” 아니면 “엘리야?”

이러는 것이죠. 예수님께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의 모습이 정확하게 엘리야를 닮아 있는 것을 우리는 말씀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열왕기하 말씀에 보면, 이 모습이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다만, 엘리야는 털이 많았는데 요한은 털이 많지 않았기에 대신해서 낙타털 옷을 입었어요. 그러므로 영락없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요한이 와서 전한 메시지는 ‘회개’입니다.

말라기의 말씀처럼 돌이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즉, 세례요한이 메시아를 준비시키는 엘리야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세례요한 또한 유대인으로 당대를 살던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자신에게도 동시대의 사람이 갖고 있던 선입견이 있었어요. (눅 7: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보니까,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을 토대로 메시아는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기대가 컸고, 왕좌에 오르시어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말씀대로 왕으로 오신 것이 많지요. 다만 그가 오르신 곳은 어디냐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진정한 왕이 오르실 곳이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조차도. 그래서 그가 어느날 제자를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눅 7: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눅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러분, 내가 누구인 것을 말로 하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스스로 예수라고 하는 사람만 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심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보는 기적들이

대부분 다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이것이 그냥 기적이라고 여기면 놀랄만한 기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적입니다. 이 사건의 놀라움보다 그 뒤에 숨겨진 이 사건이 보여주는 진리에 다가설 때 우리는 더욱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신 사건이 숨어서 고친 것이 아니잖아요. 또한 맹인이 가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를 고백하는 자들을 박해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진리에 반응하려면 내가 가진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야 해요. (요 9: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요 9: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유대인들은 맹인이 보게 된 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보아도 믿으려 하지 않기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를 부릅니다. (요 9: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 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출교를 시켰습니다. 출교를 당하게 되면

유대 사회에서 완전하게 고립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어요. 그래서 부모들은 그저 치유된 사람이 자신들의 아들인 것과 선천적 맹인인 것만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다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서 묻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추궁합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이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요. (요 9:27)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요 9: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말하였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요 9:29)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요 9:30)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요

9:32)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요 9:33)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유대인의 무리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합니다. 출교를 의미하죠.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은 것이죠. 바로 그것이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가 내쫓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부릅니다. (요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가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는 표현이 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후에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이제는 자신의 ‘주’라고 믿음의 대상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의 육신의 눈이 떠지는 사건을 통해서 그의 영적인 깨달음의 눈이 밝아져 마침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가 거했던 세상의 무리들로부터는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로소 이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나아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진짜 맹인인가? 세상의 관점으로는 눈이 보지 못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맹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서 보여주는 진짜 맹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입니다. 오히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그가 나아가게 됩니다. 영생으로 그는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으므로 빛 가운데 있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은 맹인이 되어서, 참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이 진짜 맹인이 되어 어두움 가운데 머물게 된 것입니다. 맹인은 눈을 뜨고, 빛을 본다는 자들은 맹인이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역설입니다. 저는 결코 이것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래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도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내 생각으로 쌓아놓은 견고한 틀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오늘도 말씀 앞에 새로워지길 날마다 힘써야 합니다. 빛이 없어서 우리가 못보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도 그런 자리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아무리 잘 아는 분야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며 고집한다면 그에게 제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도 진리를 무시하는 맹인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말씀이 현실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진리였습니다. ‘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그분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전하고 계십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그분의 삶을 바라보면, 그분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경을 묵상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빛이 우리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영적인 나의 눈을 뜨고 그 빛과 함께 나에게 다가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지 못하겠거든 그분의 은혜가 흐른 곳을 바라보십시오. 있는 그대로 맹인에게 일어난

일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그의 안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특징은, 그들의 삶이 변한다는 것이었고, 그들의 변화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는 통로요 증거가 됩니다. 저는 이것이 복음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 잘하는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은 복음을 그대로 전하여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복음에 닿을 수 있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그저 이 말씀을 먼저 아는 우리가 이 말씀에 합당한 삶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감으로,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이유. 죄의 포로가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영적 맹인과 같은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보게 하시고, 세상에

억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의 날들 안으로 초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사랑 앞에 서 있으니, 영적인 눈을 뜨고 그 사랑과 진리 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양식 삼아 빛을 증거하는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