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부터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부부’와 ‘남편’에 대한 소주제를 다뤘습니다. 오늘 세 번째 다룰 주제는 예상하셨다시피 ‘아내’로부터 시작합니다. 3. 아내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내에 대해 성경이 처음으로 말해주는 내용은 ‘돕는 배필’이라는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잖아요. 즉,
아내의 역할이 남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고, 그 영향은 곧 아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돌아옵니다.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도, 하와의 마음이 움직이니 아담도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내가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으며 결코 돕는
배필의 역할을 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와는 그 일에 실패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망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남편은 파멸했고, 그것은 곧 그녀 자신의 파멸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으로 남편과 함께 넘어지는 일은 반복됩니다.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나이 들어서까지 아이가 없던 아브라함 부부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라는 노년까지 자식이 없는 남편을 돕는다며 자신의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그 이후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의 후예들은, 다시 말해 아랍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오늘도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남편을 잘못 도운 까닭입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가장 악한 존재는 다름 아닌 아합 왕의 아내였던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 욕망으로 남편을 잘못 도운 대표적인 여인입니다. 아합 왕이 탐을 내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왕의 그런 욕망을 말리기는커녕, 자신이 나서서 포도원 주인을
살해해 버립니다. 결국 아합 왕은 이세벨의 그릇된 도움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패역한 왕으로 전락했고, 죽은 뒤에는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더욱이 이세벨 자신은 신하에게 살해를 당하고, 개들이 그녀의 시체를 아예 뜯어먹어 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남편을 그릇 도운 결과 둘 다 패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잠 14: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 권력자입니다. 가장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이나 군대로 가정을 바르게 세울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남자의 손에 달렸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한 가정의 흥망성쇠는 전적으로 여자에게 달려 있음을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여자의 바른 도움 없이는 결코 가정이 바로 설 수 없음을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죠. 솔로몬의 삶은 어떠했나요?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면 그는 수많은 부인을 두었습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이웃 나라의 공주도 있었고, 절세미인도 있었고, 지성이 출중한 여인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가정을 바로 세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어둠의 세월을 거쳐서야 비로소, 오직 지혜로운 여자만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지혜로운 여자는 무엇일까요? 저는 어머니께서 청년 시절에 이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요. 유명한 말씀이죠.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여자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만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까? 그 여자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남편을 바르게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참된 칭찬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는 존경하는 아내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로 남편을 사랑한다면, 정녕 남편을 바르게 돕는 ‘돕는
배필’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분의 지혜로, 먼저 여러분을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리 안에 먼저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서 있다면, 여러분의 남편은 한평생 청렴하고 의로울 수 있으며, 언제나 옳은 길을 걷는 진리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 선 아내는 선악과를 따먹는 하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마리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내에게 주신
사명, ‘돕는 배필’. 아내가 ‘돕는 배필’인 까닭에 아내의 인생은 남편을 도울 수 있고, 남편의 인생은 그런 아내의 도움 없이는 홀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아내 역시 남편을 도움으로 남편의 인생 속에서 남편의 인생과 더불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내의 능력이 남편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나 수입이 남편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아내로서 맛볼 수 있는 인생의
참된 완성은 남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감 속에 거두어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여자를 처음 본 아담의 말은 이것이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아담은 그녀를 ‘여자’라 부릅니다. 아담은 여자를 보는 즉시 ‘여자’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에덴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먼저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름은 아무나 짓지 못합니다.
공교롭게 저도 이름 짓는 것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성도의 이름에 대해서도 여러번 해봤습니다. 대상의 속성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이름을 지을 수 있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도 부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여자를 ‘이샤’라고 지었는데, 히브리어 ‘이샤’의 의미는 ‘여자’인 동시에 ‘아내’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여자를 ‘이샤’리고 부른 것은 ‘아내’라고 불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담은 ‘여자’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임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지난 설교 초반부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는 독신주의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뜻을 위해 독신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결혼을 꿈꾸거나, 결혼하여 아내의 이름을 얻은 분들이라면 ‘아내’의 자리를 지키는 일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능력 있는 여정의 사회 참여를 요구합니다. 할 수 있다면 과감하게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서, 여러분의 모든 재능을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위해서도 마음껏 발휘하십시오. 쌓을 수 있는 업적을 힘껏 쌓으십시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아내의 자리를 넘어서지 마십시오. 아내의 자리를 지혜롭게 지키면서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아내에 대한 권면도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제 주변에서는 언제나 논쟁이 있었던 구절입니다. 논쟁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복종하는 것이 더 어려운가,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운가?’ 여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니 당신이 나에게 더 잘해야 해”라고 적용하면 그것이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접근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더 우선하는 마음보다,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어떻게 먼저 상대방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돕고, 사랑하고, 섬길까. 이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아마도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터전이 되리라 믿습니다. 꼭 그렇게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4.
부모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인류 최대의 난제이지만...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성경을 근거로 닭이 먼저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빗대어 질문해 본다면, 먼저 창조된 것은 부모입니다. 부모 없이 자식이 있을 수는 없죠.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가 있기 이전에,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이 먼저 있었던 것이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 자식의 효도로 되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분 가운데 부모가 계신다면, 자식의 효도를 먼저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늘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부모의 진실한 사랑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식의 자발적인 효도를 부릅니다. 자식을 여러분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자녀에게 참된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한국은 유교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다보니, 부모가 권위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소유로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속에 담긴 것은 이기심일 뿐이고, 부모의 이기심은 언제나 자식을 병들게 합니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른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식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번제란 우리가 예배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배웠듯이 제물의 안과 밖을 송두리째 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그렇게 바치라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제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자기 자식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자기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식을 바르게 키우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확실한 예화가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여러분에게 그의 자녀를 몇 년 동안 맡겼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대통령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키우겠습니까? 여러분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아이를 음악가로 만들려 하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만약 무엇을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대통령의 뜻을 먼저 물을 것입니다. 나중에 대통령으로부터 원망받지
않으려 항상 스스로 주의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죠. 여러분에게 맡겨진 여러분의 자녀들은 대통령의 자녀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녀를 맡은 기간이 얼마가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기간 동안, 여러분은 무엇을 결정하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꾸지람 받을 일이라면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 자신을 보여 주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를 맡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언제나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여러분을 통해 자녀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정의여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날마다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참사랑입니다.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말씀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 어려서, 혹은 부모의 권위에 눌려서 표현은 못 하지만, 마음속으로 격노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지요. 여러분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가 아니라, 여러분의 욕망을 좇아 여러분 마음에만 드는 여러분의 자녀로만 키우려고 할 때, 그래서 일방적으로 여러분의 생각만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려 할 때, 여러분의 자녀는 격노하고, 하나님도 격노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있는 분노는 처음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부모가 연약해지면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누적된 격노는 무례를 낳고, 무례는 도덕교육으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녀를 주님의 교양과 훈계, 곧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러분. 우리의 훈계로 바른 양육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우리의 훈계는 우리 이기심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자녀를 위하여 해야 할 것은 결코 자녀의 전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아 있을 사람은 그대가 아닌 그대 자녀임이 분명하므로, 그대가 자녀의 전 인생을 책임지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그대는, 자녀의 인생 중 한 부분을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 기간 중 그대가 해야 할 것은 자식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바른 눈’과, 바른 길을 걸으려는 ‘바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의 사명이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그대에게 그대의 세계가 있듯이,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세계가 따로 있다. 이것이 그대가 말씀과 함께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자녀에게 ‘바른 눈’을 열어주고 ‘바른 마음’을 일구어 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은 여러분이 전해주는 말씀의 의미와 가치를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그것을 습득하게 도와주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궤적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궤적은 여러분 자녀를 말씀에 연결시켜 주는 고리가 되어, 여러분의 자녀로 하여금 반드시 그리스도의 눈과 마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삶이 진리를 좇아가는 족적을 남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자녀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 부모를 둔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가고 그분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쉐마’라고 부르는 말씀이
있죠.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가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칠 뿐 아니라, 말씀의 궤적을 먼저 남기는 사람이 되게끔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손으로 무엇을 행할 때에도, 머리로 무엇을 결정할 때에도, 문을 열고 나갈 때에도...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가기를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자녀들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은 다 스쳐 지나갈지 몰라도, 우리가 남긴 삶의 족적은 자식들의 삶 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으로 마칩니다. 하나님은 결혼하는 남자에게 부모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아들도 딸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여건 등이 허락되지 않는데도 무조건 분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결혼을 위해 혼숫감은 열심히 준비하면서도, 그보다 더 중요한 자식을 떠나보내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식의 결혼은 진정으로 자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한 자식의 삶에 개입하려 하면 하나님의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결혼한 자식을 마음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자식의 삶 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모였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결혼 후, 단 한 번도 개입한 일이 없습니다. 그 빈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삭을 붙드셨고, 그 결과 이삭 역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식을 만듭니다. 믿음의 부모가 믿음의 자식을 가꿉니다. 자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다가, 떠나보내야 할 때는 자식의 독립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자식을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떠나보낼
때, 여러분의 자식은 자발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막 10: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a)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얼마 전 청년들이 시시콜콜한 대화 중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코에 피어싱해도 되나요?” 저는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이 거짓이 아니려면, 항상 제 자녀의 문제로 가져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만약 내 딸이 성인이 되어 진지하게 피어싱을 해보고 싶다면, 한번 해보라고 할 것 같은데.” 제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그렇게 말한 이유는 제가 목사로서 그것이 제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성인이 된 자녀의 선택권을 함부로 빼앗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모로서 제가 평생토록 나누고 싶은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코를 뚫는 문제나, 혹은 그 어떤 문제라도, 부모로서
결국 제가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귀 뚫린 종의 이야기와 같은 결론입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자원함 가운데 주인을 평생 따르기로 작정하면 그 증거로 귀를 뚫는 구약 성경 속 이야기처럼, 자녀의 삶이 내가 그러하듯 하나님께 붙들려 나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할 뿐입니다. 그저 저는 그 과정 가운데 힘 닿는 데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께 걸어 가주고, 바람을 좀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을 뿐입니다. 지난주부터
살펴본 것처럼, 어떤 남편이 될 것인가. 어떤 아내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언제나 초점은 그 답이 나로부터 나오는 삶이 아니라, 주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만 헛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종국에는 헛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분을 따르는 여러분의 삶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흐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그렇게
그분을 담아서 흘려보내는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