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생명을 주는 사랑" / 강정규 목사

2022-02-20 · 요한복음 10-1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요한복음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은 논쟁을 가져왔습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출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맹인의 부모는 그러한 위협 앞에서 예수에 대하여 얼버무렸지만, 치유받은 맹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당당하게 고백하며 출교당하게 됩니다. 유대 회당과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당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해를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성경시대에도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더 극심한 박해도 경험하게 됩니다. 로마에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박해와 핍박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모일 수 없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향했던 곳은 지하 묘지로 활용되던 ‘카타콤’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긴 박해 동안 그곳에서 숨어서 예배하며 지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시신은 카타콤 안의 미로와 같은 통로들의 벽에 구멍을 뚫어 안치했습니다. 박해의

기간이 무려 250년입니다. 지상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던져줍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로마 근처에만 60개의 카타콤이 있었고, 그중에 가장 큰 카타콤을 발굴한 결과 발견된 시신만 10만구입니다. 어쩌면 로마제국은 이제 기독교인들도 다 사라지고, 기독교 신앙도 사라지고, 복음의 진리도 다 소멸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세상에는 이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도 없고, 뜨거운 찬양도 없으며,

말씀도 울려 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하로 들어간 기독교 신앙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이르는 기독교의 역사만 하더라도 2000년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사람, 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 또 그 위로 쭉 올라가다 보면 바로 그들 중에는 카타콤에서 살아갔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위로 올라가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2000년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내어주며 섬겼습니다. 삶을 헌신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이렇게 예배하고 있는 것은 거저 주어지지 않은 사랑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난받을 바에야 그럼 그냥 신앙을 버리면 되는 것인데... 맞습니다. 우리는 박해받지 않을 해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박해가 있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예수를 욕하거나 그의 초상화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이들이 미련하게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끝난 이야기나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전 세계 나라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 중인 곳이 많습니다. 한국선교연구원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전 세계 인구 중 기독교 인구는 약 25억 5천만 명인데, 이 중에 박해받는 기독교인은 약 3억 6천만 명으로

7명 중 1명에 해당합니다. 박해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고, 두 번째는 북한입니다. 중국은 17위에 해당하는데, 실제로 저와 친분이 있는 중국 선교사님들도 기독교 박해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2021년 5월 법안을 만들어 “조국을 사랑하고 공산당 지도자와 사회주의 시스템을 지지할 것”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중국 내에서 중국 국민들에게 포교행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올해 3월부터는 온라인 종교활동을

전면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격, 파괴, 폐쇄, 몰수 등 조치를 받은 기독교 건물이 3,000개에 달한다고 통계가 보고 되었을 정도입니다. 순교는 어떤가요? 지금은 없을까요? 전세계 기독교인 중 신앙을 이유로 살해당한 숫자는 올해만 5,898명입니다. 나이지리아에서 특히 많은 사망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미얀마에도, 신앙을 이유로 폭력이나 공격을 받아 숨어 지내는 기독교 이재민 수가 2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신앙을 이유로 강제로 모국에서 추방된 미얀마의 기독교 난민 숫자만 25,038명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위협은 여전히 가장 큰 공포이고, 죄악된 세상 아래 그러한 실제적 위협으로 신앙을 막아서려는 공격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은 참으로 안전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갖고 있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 고민하는 신앙생활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감당해야 할 반대와 부딪힘이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기독교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기독교인은 스스로 연약하고 무능하여 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 혹은 비과학적이고 주술적인 종교심을 품은 이상한 사람들로 싸잡아 비난받기도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연애할 때 기독교인은 무조건 걸러야 한다는 이야기들도 참 많습니다. 참 듣기 싫고, 이해하기 힘든 공격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는 성경을 보면 늘 그래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이

참 신기한 것은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닥칠 것이라고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 물건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이나 장점을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아요.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안 믿는 것이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과 동일하게 살면 미움받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속하면 미움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말씀도 볼까요? (요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죄를 품은 인류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에 창세기 4장부터 그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은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죄악 된 세상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이 현실이 참담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말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박해받지 않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계가 끝나는 날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죄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의 실존의 문제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리를 읽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풍삶초를 진행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부터 법이 없는 세상이 되어서,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리라 생각합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선하다고 믿기보다,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3:16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사랑을 배워서, 우리도 그 사랑을 나누고 전하며 살아가며, 그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라는 하나님의 자기소개 용법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은 두 번이나 이러한 고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인 우리를 ‘양’에 비유하여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양을 찾아오는 두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강도’입니다. 목자는 양을 부릅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에 따라갑니다. 실제로 저는 2007년에 몽골에서 3개월 정도 선교를 위해 머문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몽골은 드넓은 초원에서 목축업을 하는 나라입니다. 어디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목자와 양의 모습입니다. 양들이 흩어져서 풀을 뜯다가도 목자가 부르면 다 목자를 따라나섭니다. 호기심이 많은 저는 그 근처에서 한번 양들을 불러봤습니다. 그대로 무시를

당했습니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너무 깊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양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과 생명으로 드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길이 되신다는 표현이 ‘양의 문’이라는 표현입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지만, 도둑은 생명을 빼앗아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목자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삯꾼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하나님께 올바로 연결시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존재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로써 양 떼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목자인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통치 아래 살게 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가져다주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반면 삯꾼도 있습니다. 삯꾼은 양을 이용하는 목자입니다. 특별히 안타깝지만,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잘못된 리더들에게 적용하여 해석되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맡겨진 양의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누리기 위해 존재하는가? 바로 이것이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입니다. 성전 청결 사건이 일어날 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제사를 이용하여 유익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그것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셨지만, 그 표현 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신 것은 아님을

나타냅니다. 제사장의 존재 이유는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란,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입니다. 그들도 인도하기를 원하시기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드러내어 말씀하시지만, 이 진리를 깨닫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나뉘었습니다.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알려달라고 하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치유받은 맹인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이상하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상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말씀하셨고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그 삶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성경에 참 많습니다.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진리를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것을 보아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믿음을 갖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능력으로 주님을 찾아야 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 하나님을 우리의 지혜로 찾아서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지혜로 줄을 세워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세상의 부로 믿음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용기로 또한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저는 그조차 우리의 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이 있으시겠지만... 저는 20대 청년 시절에 비전을 물으면 늘 ‘순교’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마음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기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생명’ 밖에 없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서 그것이라도 내어드리고자 하는 마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처음 만났던 선교 훈련 때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순교’라는 것을 삶의 목표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내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할 때도,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내 비전은 이러한데 괜찮겠느냐? 지금도 그 마음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주 작은 사건이 제 삶의 목표를 조금은 바꿔주었습니다. 예배 중 한 분의 기도였습니다. “주님, 때로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기도를 듣고 곰곰이 묵상해보았습니다. 순교는 당연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를 주셔야 가능하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잠깐 그 순간 주님을 향한 마음이 가득 차면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잠깐의 결단이 아닌 평생의 씨름입니다. 만약 주님을 위한 삶을 내 결단과 내 의지로 완성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는 그것을 해낼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감정으로 그것이 가능했다면 베드로는 반드시 예수님을 지켜드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그럼 무엇으로 가능한가? 우리를 채워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와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뜬 맹인이 그 감격 가운데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칠 환난을 알고 있음에도 주님을 따르는 고백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내 삶을 채우시는 부인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가 나를 감쌀 때...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힘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해요. 우리는 이 힘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그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 영생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오셨고, 지금 우리는 그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동행이 그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영생이 시작된 것이고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작과 완성의 과정.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중요하죠. <청년아 때가 찼다>라는 책으로 설교했을 때, 나눴던 이야기가 있었지요.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는데, 한 청년이 담대하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교수님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교수님은 씩 웃으며, “에베소서 2:8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8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18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시제이죠.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서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때로는 손들고 고백하게 하죠.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서는 ‘구원을 받는’, 영어로 보면 ‘to us being saved’라고 하여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받았다고 했던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조금 사라진 것일까요?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죽음이 임박해서

기록한 디모데후서에는 ‘구원하시리니’라는 미래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요, 받고 있다는 것인가요, 받으리라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신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로 인해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 가십니다. 내 힘으로 내 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는 주님 안에서 거하며, 그 주님이 내 삶에 행하시는 일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한 것처럼, 믿음의 길에서 시험과 고난을 우리는 만납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이기고, 고난이 찾아오며 견디며, 그 믿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세요.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 그분인데, 우리를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잃어버리지 않게 지키는 것이 주님의 사랑임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는 멸망하지 않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예정론적 설명입니다. 물론 양의 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 들어온 것처럼, 우리가 언제든 주님의 품을 떠날 자유의지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 안에 거하기를 끝까지 추구하면, 내 의지와 내 힘보다 능하고 크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정론은 목자인 예수께서 양들인 우리에게 끝까지 지키신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스스로 예정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예정되었음으로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스스로 깨닫기 전부터 우리에게 미리 오셔서 역사하신 성령에 힘입어 우리의 영적 눈이 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식하게 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을 확신하고, 종말의 구원 완성 때까지 그리스도가 자신을 지킬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구원을 주신 분도 주님이요,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요, 그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한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말로써 가르치신 것이 10장이라면, 바로 그분의 그러한 모습이 삶으로 실천되는 것이 11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양을 위해 목숨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10장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여겨 돌로 치려고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므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바로 이때 있었던 일이 ‘나사로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요단강 건너편 지역에 있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와서 전합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입니다. 바로 얼마 전 그곳에서 예수님은 돌에 맞을 뻔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집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므로 도마는 예수님이 끝내 나사로에게 가시겠다고 하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무덤에 있는지 나흘이 되었던

때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일하심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때에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런 질문투성이입니다. 설교 초반부에 다뤘던 기독교 박해를 다룰 때도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늘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 이해하고 따라가면 좋겠으나, 때로는 작은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나설 때, 그 길에서 우리는 나보다 늘 옳으신 주님을 경험하게 되곤 합니다. 나사로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첫째,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이 되는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유대 땅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자기의 양을 돌보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물가 여인을 찾아서 사마리아 땅으로 가셨고,

나사로를 위해 죽음의 위협이 있는 유대 땅으로 가셨으며, 무엇보다도 죄 가운데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때가 우리가 생각하는 때와 달랐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요 11:15)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된 시간을 통해 나사로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나사로의 시체에서는 이미 썩은 내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을 보여주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마치 창조 때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생명을 주셨던 것과 같이 그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왔던 제자들과 그곳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표적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있던 무리 가운데

어떤 자가 바리새인들에게 이 일을 고하면서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십자가의 사명에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은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셋째, 나사로 사건을 통해 요한복음의 모든 가르침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보여줍니다.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 사건으로

사용되고, 이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자기 고백도 등장합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은 인간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게 된 결과로 ‘죽음’을 말씀하셨고, 로마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이 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은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순교적 죽음도 그렇습니다. 그 죽음이 숭고하긴 하지만, 모든 인간이 모두 경험하는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죽음을 피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비참한 죽음인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러나

영생이 그로부터 흘러나와 모두에게 전하여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음이 생명을 가져온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의 승리. 그것은 곧 죄로 인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힘이 그분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이 생명을 가져오는 분임을 결론적으로 보여주는 표적의 절정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을 주님은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를 뮤지컬로 잠시 보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10장과

11장을 살펴봤습니다. 10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양에 비유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주님은 양의 문이 되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와 양의 특징이 무엇인지 기억하시죠?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늘도 주일에 이렇게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위해 늘 일하시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잘 아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나의 목자가 되시는 그분을 따라, 그분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11장의 사건은 인생이 겪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요한복음의 치유 이야기는 점차 고조됩니다. 처음에는 열병이었고, 그 후에는 38년 된 병자였으며, 그 후에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 이야기, 그리고 끝내 죽은 자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삶은 때로는 그러한 다양한 고난과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영생을 누립니다. 사실 11장에서

제자들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오해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아서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능력이 있어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을 만큼 미약하고, 우리의 능력은 그분을 따를 수 없을 만큼 연약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덮습니다. 주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주님이 끊임없이 나를 붙드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사마리아에 있어도 가실 것이고, 여러분이 유대에 있어도 주님은 찾아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내 삶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이제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