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10과 /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3) - 자녀, 형제 / 강정규 목사

2022-02-2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 대한 세 번째 설교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2주 동안 ‘부부, 남편, 아내, 부모’에 대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오늘 살펴볼 다섯 번째 소주제는 ‘자녀’입니다. 5. 자녀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십계명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는 천사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라 동일하게

피조물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러하기에 부모에게도 인간적인 면모와 허물이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심하여, 아직까지도 그 흔적과 자국이 뚜렷이 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에도 부모를 떠올릴 때, 좋은 기억보다는 잊고 싶은 기억이 많은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자들에게 부모를 존경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를 존경하라면 존경하지 못할 자녀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라면, 자녀의 작은 그릇으로는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공경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웃의 노인을 사랑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여러분보다 긴 인생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공경할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이 이러하기에, 혹은 저러하기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자녀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질 수 없는 멍에를 우리에게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계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 공경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도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1-4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명령이라면, 5-10계명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가르치고 싶은 첫 번째 명령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것을 가장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첫째, 자녀에게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창 27: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 27:38)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야곱’이 부당한 방법으로 형 ‘에서’에게 가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지요. 그것을 뒤늦게 안 큰아들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자기에게도 축복해 줄 것을 간청하며 통곡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축복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울면서 애원할까요? 그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대리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눴습니다. 그것이 성경적

관점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부모는 부모로서의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이 땅에서 자녀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경이란 인간에게 주신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공경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의

눈에 이해할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한함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뒷걸음질 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부모공경의 의무를 명시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서든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어 가는 것입니다. 둘째, 여러분의 생명이 부모를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 부분입니다. 이 족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낳고’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낳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부모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새로운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이러한 인간의 족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주님과 함께하는 진리의 삶에 감격하며 감사드리고 있다면, 그 또한 여러분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 또한 여러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부모를 통하여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부모가 여러분을 위해 생명의 통로가 되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혹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원하지 않았는데

왜 태어나게 했느냐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지금 당장 하늘에서 무서운 벼락이 거듭하여 떨어질 경우, 황급히 숨을 곳을 찾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설령 부모의 삶 속에 존경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생명을 전해준 것이 여러분의 부모이기에 우리는 그런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셋째, 여러분의 생명이 부모에 의해 양육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애굽의 바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살리죠. 바로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아이의 목숨을 건집니다. 또한 애굽 공주의 양아들이 된 모세의 유모가 되어 다시 자기 품에 품고 그 아이를 양육합니다. 그 아이가 커서 자기 백성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됩니다. 모세는 절대로 자기 혼자 모세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목숨을 건 사랑과 헌신 속에서 모세로 양육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홀로서기까지 부모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있어야 했는지는,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워보며 이미 깨달았거나 혹은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서도, 이튿날 하루 종일 아이에게 매여 있어야 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을 양육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윗세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척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양육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의 삶의 어떤 부분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를 공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생명에 대한 모독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런 부모의 사랑을 피부로 경험하고 느끼며 깨닫게 되었을 때쯤에는 부모는 이미 떠났거나, 혹은 함께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지내고 있는 때가 많지요. 그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넷째, 공경은 이해와 사랑을 낳기 때문입니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기에서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한 고백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과부가 됩니다. 묘하게도 그녀의 어머니와 동서 역시 과부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흉년으로 더이상 살기 어려운 모압 지방을 떠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향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젊은 과부가 된 두 며느리는 각자의 친정으로 가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합니다. 큰 며느리는 어머니의 권유대로 떠났으나, 작은 며느리인

룻은 시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섭니다. 자식도 없이 남편이 죽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시어머니와의 인연도 끊어진 셈입니다. 함께 산 기간도 짧았습니다. 또한 두 사람은 같은 민족도 아닙니다. 룻은 모압인이고, 나오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두 민족의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룻에게는 나오미가 다시 유대 땅으로 가는 길에 동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룻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섭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시어머니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함께 사는 동안,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이해와 사랑이 한없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가 새로운 남편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일을 주도합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보인 마음 앞에 시어머니 나오미 또한 누구보다 룻의 행복을 빌어주고 응원하는 것이죠. 아시겠지만 룻이 보아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빚어진 것이 다윗의 혈통이요,

그것은 곧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룻의 ‘부모공경’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처럼 공경은 반드시 이해와 사랑을 낳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시간의 차이, 문화의 차이, 생각의 차이, 관습의 차이 등이 생깁니다. 우리나라처럼 수십 년간 엄청난 변화를 거쳐온 경우에는 그 세대 간의 간극이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시간도 어느새 흐릅니다.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공경심은 이해를 잉태합니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부모의 나이가 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이해는 마침내 사랑을 낳습니다. 부모를 향한 뒤늦은 존경과 사랑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던 자식이 부모가 죽고 난 다음에야 부모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부모를 잃고서야 비로소 부모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도 사랑도 인정의 터전 위에서 세워집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도 세대가 모두 다르겠으나, 여러분은 이제부터

부모를 공경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마도 노년에 가장 그리워할 사람은 부모일 것입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지금이라도 부모 공경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가

먼 훗날 부모인 여러분을 어떻게 대할는지 알고 싶다면, 여러분이 부모를 대하는 지금 그 모습을 살피면 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되돌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입으로만 효도하면 자식들도 그러할 것이고, 여러분이 돈으로만 효도하면 자식들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와 사랑을 낳는 공경심으로 부모를 대하면, 여러분 역시 여러분의 자녀로부터 공경을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내가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저런 면만은 절대로

닮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를 종종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닮지 않으려는 그 모습과 동일한 모습이 자신에게서 발견되어 깜짝 놀라는 일들도 많을 것입니다. 시집살이를 고되게 한 며느리가 나중에 며느리를 이해하는 좋은 시어머니가 될 것 같지만,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많지요. 미움은 반드시 마음속에 쓴 뿌리를 내리고, 쓴 뿌리는 증오했던 부정적 열매들을 고스란히 되돌려 줍니다. 미움은 역으로 미움의 대상을 닮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 어떤

쓴 뿌리도 우리의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하는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법칙인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 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우리의 생명을 자녀 앞에서 더 높이는 길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 형제 마지막 주제입니다. 일평생 함께 살아갈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를 도우며 함께하는 그 아름다움은 인생에 있어서 큰 힘이죠. 반면에 가장 추한 것 역시 형제지간의 싸움입니다. 부모의 재산을 놓고 형제가 싸우는 것은 재벌 집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송사는 비일비재합니다. 세상에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는 형제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이것은 형제는 정말 아름다운 사이일 수 있지만, 반대로 남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형제가 말씀 안에 바로 서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 되게 하셨으므로, 형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진정 아름다운 형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되, ‘서로 먼저’ 하는 것이 아름다운 형제가 되는 비결입니다. 서로 해야 하지만, 말씀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은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특징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형제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남은 장남이기 때문에 먼저 섬기고, 돈이 많은 형제는 부유하기 때문에 먼저 섬기고, 지식이 많은 형제는 유식하기 때문에 먼저 섬기고, 지위가 높은 형제는 높기 때문에 먼저 섬기고, 무엇보다 신앙이 깊은

형제는 주님 사랑 알기 때문에 먼저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형제의 문제로 가장 시끄러웠던 집안은 야곱의 집안이죠. 무려 열두 명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요셉이 있었던 것이죠. 그에게는 열 명의 형들이 있었습니다. 형들과 요셉의 사이가 나빴지요. 그 결과 형들이 동생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 버리게 됩니다. 원래는 죽이려고 하다가, 팔아넘겼죠. 그들은 이미 형제가 아닌 상황입니다. 정말 남남보다도 못한 사이이죠. 그런데 애굽의 노예로 팔린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대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즉, 요셉의 형제들 중에 요셉이 가장 높고 힘이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이제는 복수에 나설만한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온 형들을 ‘먼저’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섬겼습니다. 형제 중 피해자였지만, 훗날 가장 높고 힘 있는 요셉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한 ‘먼저 사랑’이 형제들 간의 화합을 일구어내게 됩니다. 이처럼 형제가

서로 먼저 사랑할 때, 형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형제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사실 이 말씀 앞에 부끄럽습니다. 저희 집에는 그다지 큰 불화나 갈등은 없었는데, 가장 큰 갈등이 바로 저와 누님 사이의 갈등이었어요. 그래서 사춘기쯤부터 해서 다툼이 많았습니다. 성향 자체가 달랐는데, 저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많았음에도 유독 누님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았어요. 결혼하면 좀 나아지겠지 싶었지만, 사실 결혼하고 난

이후에도 갈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끝까지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개척을 앞두고 누님이 계시는 미국에 가서 3주 정도의 시간을 온통 누님과 둘이서 보내게 되면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둘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 각자가 인생의 여러 어려움을 겪어나가다 보니, 그전보다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누님의 마음과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보지 않으려고 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 삶이 겪었던 어려움과 애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종종 다투면서도 누님은 항상 말했었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선교사가 될 마음이 있었는데, 그래도 피붙이라고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의 선교비를 저에게 약속해서, 그때는 “말이라도 감사하네” 여겼었는데... 멀리 미국에서 지금도 교회로 선교비를 잊지 않고 보내고 있습니다. 개척하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래도 자주 못 보지만 형제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조카를 챙기는 일도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하나 뿐인 형제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감사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자녀를 둘 낳아서 기르다 보니, 두 자녀가 함께 행복하게 노는 모습이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저희 집 아이들도 다투고 그러면 혼을 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형제 사랑의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믿음 안에 있으면 더욱 격려해주고, 믿음이 없는 형제가 있다면 기도하며 품어 보십시오. 형제로 묶어 주신 것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웃 사랑을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서 하려면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은 우리의 삶에 깊이 관계된 사람들로부터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 대한 6가지 소주제를 모두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이제 다 지나간 일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 앞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누가 반응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입니다. 부부 안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그리고 형제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각 가정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삶으로 드러날 때, 각 가정의 회복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가장 큰 실천이요, 역사의 현장이 아닐까요. 새신자반도 마무리합니다. 새신자반. 즉, 이 배움은 신앙의

마무리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기 위한 길잡이와 같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8주의 시간.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가 새긴 이 말씀이 땅에 떨어졌는가, 아니면 새겨졌는가, 이것은 이제 우리의 삶에 순종의 열매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며 확인하실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마지막 글귀로 마무리합니다. “주님! 이 책을 닫는 이분의 발걸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새로운 삶을 향한 첫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